민회빈 강씨

 


1. 개요
2. 생애
2.1. 일화
2.2. 남편의 죽음
2.3. 억울한 죽음
3. 사후
4. 평가
5. 창작물에서
6. 여담


1. 개요



愍懷嬪 姜氏/姜嬪
1611년 ~ 1646년
조선 소현세자의 부인이다. 조선의 어느 세자빈보다도 불쌍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보통 민회빈보다 강빈(姜嬪)으로 불린다. 이는 그녀가 폐위된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신원 복권이 되어 시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대에 '강빈'이라 불렸는데, 신원이 되어 시호를 받은 뒤에도 이게 통칭으로 굳어졌다. 폐세자빈 중에서 '성+빈'으로 된 명칭이 쓰인 사람 중 이 명칭이 대한민국에서도 통칭으로 쓰이는 건 민회빈 뿐인데, 남편은 폐세자가 아닌데 본인은 폐세자빈이 된데다, 과부가 된 세자빈이었는데 봉호를 받기 전에 폐위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남편은 폐세자가 아닌데 폐세자빈이 된 폐세자빈은 민회빈 외에 3명이 더 있지만, 이들은 모두 세종 때 이전으로 세자빈이 되자마자 봉호를 받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선 봉호(奉號)로 불린다.
묘소는 '영회원(英懷園)'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광명시 내에 위치해 있다.

2. 생애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의 딸이다. 본관은 금천(衿川).[1] 1627년, 인조인열왕후 한씨는 강석기의 딸을 최종 세자빈으로 간택하여 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사실 강씨는 본래 세자빈이 되지 못했을수도 있었다. 그녀가 간택되기 2년 전, 소현세자파평 윤씨 가문의 딸과 혼인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 규수는 이괄의 난에 가담한 윤인발과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대간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결국 파혼하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혼례가 무산된 지 2년 만에 다시 간택을 거쳐 뽑힌 여인이 강빈이다.
이런 야사가 있다. 본래 세자빈 간택 때 인조인열왕후는 평소 총명하기로 소문난 권씨 규수를 마음 속으로 이미 세자빈으로 내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자빈 간택 일정이 시작되자, 권씨는 식사에는 숟가락과 젓가락 대신 손으로 게걸스럽게 먹고, 제대로 씻지도 않아 악취를 풍기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과 대화하는 등 실성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할 수 없이 인열왕후의 반대에도 차선책으로 민회빈 강씨를 세자빈으로 간택한다. 그 후 몇년 뒤 인조가 문득 권씨의 소식이 궁금해져 권씨의 행방을 조사해보니, "권씨는 어느 이름없는 선비와 결혼하였으며 품위있는 행동과 현명한 내조로 남편과 금슬 좋게 살아 주변에 부러움을 받으며 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보고에 인조는 무릎을 탁치며 "아~, 내가 그 아이의 꾐에 넘어갔다"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즉, 권씨는 일부러 실성한 척을 하며 세자빈에 떨어진 것.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권씨 규수는 공공연하게 내정된 세자빈이었지만, 당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살벌한 분위기 탓에 일부러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후 병자호란의 패배와 정축하성으로 인한 삼전도의 굴욕으로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자 동행하여 청나라 심양까지 가게 되었다.

2.1. 일화


보통의 세자빈이었다면 궁 안에서 가만히 앉아서 지냈겠지만, 강빈은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그중 대표적인 일화로 1640년, 소현세자가 29세가 되던 해에 청나라숭덕제(청 태종 홍타이지)가 소현세자 일행의 생활비가 부담된다 하여 소현세자에게 20만평 가량의 허허벌판 땅을 거의 반 강제로 주면서 농사지어서 먹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 세자의 수행원(익위사)들은 이를 세자를 고국으로 영영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수작이 아닌가 우려했으나 현실적으로 거부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농사 지을 인력이 문제였다. 소현세자가 이를 홍타이지에게 묻자, 홍타이지는 "조선에서 사람을 데려오든 뭘 하든 알아서 충당하라"고 했다. 그때 강빈은 우연히 심양 시내에서 노예 시장에 끌려온 조선인들이 팔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현세자를 설득하여 그들을 돈주고 구해낸 뒤, 심양 근교에 농장을 세우고 그들을 그 농장에서 일하게끔 했다.
농장 경영은 거의 전적으로 강빈이 주관했던 걸로 보여지며, 농장에서 얻은 이득으로 소현세자는 청나라 고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잦은 선물 요구를 만족시키고 나름대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는 밑천이 되었다. ''' 하지만 오랑캐와 친하게 지냈던 것이...'''
소현세자와의 금슬이 상당히 좋았던 듯 하다. 소현세자 16세, 강빈 17세에 혼인하여 각각 18세, 19세 되던 해 첫 아이를 낳았는데 어려서 죽은 군주(群主)[2] 둘을 포함해 총 8남매를 낳는다.[3] 이중 묵던[4]의 볼모 생활 때 태어난 아이만 5명이나 된다. 볼모 생활 9년 중 초반 2년 가량은 시어머니 인열왕후의 3년상 중이었고, 두 사람 모두 현지에서 스트레스성 질환을 상당히 자주 앓은 점을 생각하면 흠좀무.[5] 어쩌면 힘든 볼모 생활 속에서 서로만을 의지하면서 살다보니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들 중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막내 경안군 이석견과 경녕군주밖에 없으니 참 자식 복도 없는 여인.[6][7] 여하간 볼모 생활 중에도 세자관에 아이 울음소리가 끊어지는 날이 없었지만 경완군 석린이 조선으로 보내져 조선에서 자란 점을 생각하면, 현지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조선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8][9]

2.2. 남편의 죽음


그러나 소현세자와 영구 귀국한 뒤 그녀는 본격적으로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다. 정묘호란&병자호란&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 등으로 인조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소현세자가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치 권력의 중심에 서버렸기 때문이었다.
인조 vs 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 vs 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 사림이나 조정 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 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 게 세자 광해군이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집권 여당이 광해군 과잉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자연히 선조는 왕 노릇 계속하기 위해[10] 광해군을 견제할 필요성이 생겼고 그래서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濁小北)을 이용했다.

인조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파천했지만 잡히진 않은 선조와 달리, (인조는) 한 나라의 군주가 외적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개망신을 당했으니 권위가 바닥을 쳤다. 선조를 위협한 건 그래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내부의 정치 권력이었는데, 인조는 조선을 침략해 짓밟은 거대한 외세가 세자를 영향력 아래 두고 압박해오고 있었다. 이 경우 인조 자신의 왕권도 왕권이지만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청에게서 집권 정당성으로 얻어 즉위하는 조선 왕의 출현을 경계해야 했다. 당장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보낸 답변부터가 ''''수틀리면 너 끌어 내리고 아들보고 왕 하라고 하겠음.''''이란 말을 분명히 적고 있었다. 청 태종은 어떠한 의미로 말을 했든 간에, 조선 역사에서 타의로 왕위를 물려주고 좋게 끝난 역사가 없었던 인조 입장에서는 매우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
인조 개인적인 입장 뿐 아니라 조선 입장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그다지 반가운 건 아니었는데, 청으로부터 집권 정당성을 얻어 왕이 즉위하는 일이 거듭된다면 결국 고려 말과 마찬가지로 나라가 통째로 예속되는 루트로 흐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은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라는 데에서 집권 정당성을 얻었기에, 원이 약해지기 전까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원 간섭기 고려가 타국 역사학계에선 원나라의 일부로 간주되는 이유는 '''왕조 국가에서 왕이 원의 의중에 따라 갈아치워지고 원에게서 집권 정당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명의 책봉이 사후 승인으로 조선 왕들의 즉위에 실질적인 영향력이 없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인조가 청에 의해 물러나고 소현세자가 즉위하는 일 자체가 소현세자가 왕 노릇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청나라의 힘으로 즉위해 청에게서 집권 정당성을 얻는 조선 왕'''이 출현했음을 뜻하며 이는 그의 가계를 따라 이어질 것이니 청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 것은 자명했다. 이 경우 청 황실과의 통혼이 이뤄져 청의 피가 흐르는 조선 왕이 탄생해 완전히 종속될 위험까지 있었다. 물론 우리는 실제 역사에서 청이 이렇게 왕위 계승까지 노골적으로 견제하지는 않았음을 알고 있지만 당대의 인조 입장에서는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위협이었다.
결국 소현세자는 귀국 이후 인조로부터 노골적인 박대를 받다가 귀국 2달 만에 독살인지 의료사고인지 알 수 없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지금도 소현세자의 죽음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일단 확실한 팩트로만 나열하자면 왕의 주치의(이형익)가 세자에게 침을 놓다가 사고를 당해 죽은 것이다. 뒷날 인조도 그의 침을 맞고 사망하는 걸 보면 능력없는 한의사가 병약한 세자와 만나 발생한 의료사고가 유력한데 어쨌든 소현세자를 지워버리는데 성공한 인조는 소현세자 가계를 아예 대통(大統)에서 배제할 결심으로 강빈과 세자의 아들들까지도 제거하기로 작정하였다.

2.3. 억울한 죽음


소현세자 사후 궁내에서 소용 조씨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이는 소용 조씨의 자작극이었으나, 인조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것을 강빈을 제거하는 도구로 활용하여[11] 강빈의 궁녀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강빈은 후궁 별당에 감금했다. 그러나 인조의 의도와 달리 세자빈의 궁녀들은 이때 고문사까지 당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데도 강씨가 저주를 했다는 거짓 자백하지 않았고 물증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 1646년 1월에는 인조가 먹는 수라의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왕의 독살 미수는 당연히 동·서양, 그리고 시대를 막론하고 '''역모급 사건'''인데, 이때 인조의 대처가 상당히 이상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신하들에게 알리거나 의금부나 형조에서 조사하여야 정상이나, 정작 인조는 이렇게 하지 않고 1월 3일에 궁궐 내에서 내시를 통해 자체적으로 조사를 벌인다. 이것만으로도 정상이 아닌데, 조사 과정에서 수라를 만드는 왕의 궁녀들을 조사하지 않고 세자빈 강씨의 궁녀들을 더 많이 잡아 고문까지 하며 조사하기 시작한것이다.[12] 그래서 신하들이 이 사실을 알고 공식 조사를 하자고 요청했지만, 인조는 오히려 이를 거부하였다. 게다가 신하들의 계속된 요청에 1월 11일에서야 뜻을 꺾고 의금부에 명령하여 공식 조사를 시작한것이다.[13] 이쯤 되면 처음부터 강씨를 노리고 한 조사라고 볼 수밖에 없었고, 의금부가 한달 동안 조사했지만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세자빈의 궁녀를 포함한 용의자들도 고문을 당해도 끝까지 자백하지 않아서 고문사하는 일이 벌어진다. 특히 '''열명 중 일곱명이 고문사했을 정도'''.
이렇게 무리해가며 조사를 했는데도 증거가 안 나오자 인조는 아예 죄를 만들어 누명을 씌우기로 작정을 하고 활동에 나선다. 음력 2월 3일에 인조는 비망기를 통해서 조사를 하던 신하들을 압박한다. 이에 같은 날 신하들이 조사가 지지부진한 것을 사죄하며 동시에 용의자들을 고문해도 나오는 게 없다고 항변을 했다. 그러자 인조는 아예 강빈을 직접 언급해가며 누명을 씌우는데, 인조는 "강빈은 심양에 있을 때 왕위를 도모하면서 홍금적의(용포)를 만들고 내전(內殿)의 칭호(왕과 왕비 칭호)를 마음대로 사용했고[14] 작년 가을에는 성내는 일이 많았으며 요즘은 문안을 안 한다.[15] 이것으로 봤을 때 최근의 저주 사건과 지금의 독살 시도 모두 강빈이 저지른 일이다. 그러니 강빈을 사형시키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대 법률이나 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눈으로 봐도 상황이 앞뒤가 전혀 맞지 않고 인조의 주장에 근거가 하나도 없다. 신하들도 이 황당한 주장에 전부 어이가 없어서, 이시백이 인조가 언급한 홍금적의 주장은 그냥 비단을 사들인 것이지 역모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고, 김류이경석 같은 신하들도 이시백의 말에 수긍했다. 무엇보다 설령 이게 다 사실이더라도 '''화 좀 내고 문안 인사 좀 안 온게 어떻게 저주와 독살의 근거가 되는 지는 아무도 수긍하지 못했다'''. 아니 그것보다도 별당에 감금된 강빈이 저주는 그렇다 쳐도 독살 시도는 어떻게 할 수 있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왕명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신하들은 옛 성현들처럼 자비롭게 처리하자는 나름대로의 타협안을 내놓았지만, 인조는 이조차 거부한다. 다음날에도 김류 등 신하들이 당태종과 태자 승건의 사례를 들어가며 강빈을 살려줄 것을 청했지만, 인조는 "태종은 성인이 아니고 강빈은 내 자식이 아닌데, 이렇게 말하니 이상하지 않은가?"라며 신하들의 간청을 또다시 거부한다.
게다가 강씨에 대한 인조의 분노가 제대로 표출되는 일화가 있다. 인조가 위의 신하들의 간청을 거부한 후에 신하들이 "강빈은 전하의 자식이 아니지만 전하의 자식인 소현과 배필이었으니 전하의 자식이 맞지 않습니까?"라고까지 하며 극구 반대를 하자, 이를 불쾌하게 여긴 인조가 우승지 정치화에게 '아니 이 자식들이, 내가 강빈 이야기 꺼내지 말라 그랬는데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나를 모욕하고 있는데 이거 불충 아니냐? 얘들 조져야 하는 거 아니냐?'라며 분노를 표출했다. 이에 정치화가 "어제 올라온 신하들의 보고서를 보니 그들의 주장에 억지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왕을 모욕한다는 건 동의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인조는 그 말에 화를 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ㅡ 1646년(인조 24년) 2월 9일기사

참고로 조선의 임금도 사람이므로 살면서 욕설을 했지만, 공문서인 실록에서는 사관이 어느 정도 걸러서 표기했다. 보통 '차마 듣지 못할 하교', '주상께서 대노하며'라고 둘러대는 형태. 욕의 수준이 '더벅머리 선비놈'과 같이 나름 적절하다 느껴질 경우에는 그대로 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록에서 대놓고 임금이 '''개새끼'''라고 욕을 한 건 실록 전체를 통틀어 인조가 유일하다. 어쩌면 사관이 걸러서 표기한 것조차 저 정도이고, 실제로는 더 심한 욕이었을 수도 있다.
인조실록에서는 '대개 이 때에 강빈이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조 소원(趙昭媛)이 더욱 참소를 자행하였다. 상이 궁중의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겼으므로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형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상이 이와 같이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다 조씨(趙氏)가 모함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하였다.'라고 쓰고 있다.[16][17]그 정도로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티가 난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소용 조씨의 횡포는 바로 인조 본인이 그녀에게 힘을 실어준 결과였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정도면 단순한 모함이 아니라 그냥 애초부터 인조가 작정하고 강빈을 죽일 이유를 만들기 위해 일을 꾸몄다고 봐야할 것이다. 아마 당시 신하들도 다들 알긴 알았을 것이다. 상대방이 왕이니까 대놓고 까진 못하고 이렇게 실은 거고. 애초에 대놓고 깔 수 있었다면 더욱 적극적으로 처벌을 반대했을 거다. 게다가 왕권 국가에서 (진실이든 거짓이든) 왕을 함부로 비난하면 반역자로 몰릴 판이고...
결국 신하들의 반대는 소용없었고 인조에 의해 1646년 3월 15일, 36살의 강빈은 조씨 저주 사건과 인조 독살 음모를 저질렀다는 죄목 및 강빈이 일전에 대전으로 와서 큰 소리로 "자신을 못 살게 구는 이유가 무엇이냐"[18]고 외친 죄목 등으로 세자빈 자리에서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난 뒤 사사되었다.
여담인데 나중에 인조민회빈 강씨를 후원에 감금한 뒤 "전복에 독을 넣어 시아비를 죽이려고 든 죄"[19]라며 강씨를 죽이려고 할 때 신하들이 극구 말리는데 인조가 들고 나온 것이 성종폐비 윤씨에 대한 처분이었다. "'''성종 때에 연산의 어미가 폐출되고 딱히 도리에 어긋나는 행실을 한 것도 없었지만 그 당시의 신하들은 후환을 걱정해서 죽이라고 청했다. 나라 걱정하는 신하란 이래야지.''' 왜 니들은 그렇게 시아비 죽이려는 패악한 여자를 감싸고 도는 거냐? 왜, 나중에 강씨의 자식들이 연산군처럼 니들한테 해코지할까봐 겁나냐?"라면서 인조는 기어코 강씨에 대한 처분을 밀어붙였다. "'''옛 사람들 말씀에 요순을 본받으려거든 조종을 본받으라 했으니 나는 성종대왕을 본받겠다'''"면서. [20]

3. 사후


강씨는 죽은 뒤에도 고통받았다. 강씨가 죽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는 강빈의 사형을 반대했던 신하들을 까면서 강빈이 죽기 전에 "소숙[21]과 조씨가 이 애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너희는 커서 이 원수를 갚아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자녀들과 시비들에게 남겼다고 '''인조가 주장했다'''. 당연히 신하들은 정식 조사[22]를 요청했다. 만약 이 강빈 혈서라는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인조 입장에서는 강빈 사건에 대한 완벽한 전환점이 되고 문제 많던 강빈 숙청도 역모 처단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강빈 혈서의 존재를 주장한 인조는 이 조사 요청을 무시했다'''. 이후 이 말 하나 때문에 강빈의 친정어머니, 즉 인조 본인의 사부인까지 강빈과 같은 방법으로 죽였다. 그리고 1646년 5월, 신빙성이고 뭐고 '''인조가 주장하기만 했을 뿐, 인조의 강짜로 정말 존재하는지 조사조차 못한 강빈의 혈서를 근거로 강빈과 소현세자의 세 아들들까지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버린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왕권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자 청의 영향력 하에 있는 후계자를 용납할 수 없었던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가계를 완전히 정리하기로 마음먹었고, 이 혈서설은 마지막으로 남은 강씨의 아들들(이자 자기 손자들)까지 완전 처리하기 위한 자작극으로 추정한다. 아무튼 강씨의 세 아들은 모두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그 곳에서 풍토병에 걸린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2년 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23]. 결국 강씨의 아들 중에는 3남 경안군 이석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힘겹게 유배 생활을 이어나갔다.
또한 강씨의 궁녀들 중에 신생이란 궁녀가 그녀를 배신하고 살아남았는데, 1년 뒤 그녀의 지휘로 궁궐 곳곳에서 강빈의 저주 증거를 찾아내기 위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물론 당연히 증거는 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사건이 일어난 직후가 아니라 1년 뒤에야 저주의 증거라는 것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어째서 1년이 지난 후에야 증거가 나왔는지는 설명 생략.
1649년에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했으나, 효종 역시 인조처럼 강빈을 싫어하였고 이 때에도 강빈에 대한 대우는 정말로 험악했다. 강빈이 사사되기 전에 쓰인 윤방의 사장에 강빈이란 표현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본 효종은 눈이 뒤집혀서 관련자들을 죄다 처벌했다.[24] 특히 이 시기에 사대부들은 물론이고 내막을 겉으로라도 들어본 사람들은 전부 강빈은 억울하게 죽은 것이고 인조가 어거지를 부려 억지로 사형시킨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강빈 신원 요구가 끊임없이 빗발쳤다. 하지만 효종은 오히려 "이 일을 꺼내는 놈은 죄다 역적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해버렸다.

비록 여러 세대 뒤에라도 만약 역강의 일을 조정에 아뢰는 자가 있으면 역당(逆黨)으로 논하여 바로 궐정에서 추국하여 다스리도록 하라. 혹 강포한 신하나 흉악한 사람이 있어서 이 전교를 따르지 않거든 삼사(三司)의 백공(百工)들은 모두 즉시 다투어 논집하여 역당으로 논하는 것이 옳다. 이 뜻을 내외의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도록 하라.

《효종실록》, 1652년(효종 3년) 6월 3일 기사

영조에게 경종 독살설이 있었다면 효종에게는 강빈이 있었을 정도로 효종은 이에 대해 격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일례로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어떤 말이라도 다 받아들이고 벌도 내리지 않겠다는 구언의 교지가 내려졌을 때, 평소 강빈 사건에 대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말하고 다닌 황해도 감찰사 김홍욱이 강빈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강빈의 억울한 죽음에 하늘이 노해서 그렇다며 강빈을 신원하고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경안군 석견을 석방해 달라고 주장하자 완전히 이성을 잃은 효종은 약속을 깨고 김홍욱을 압송해 곤장을 때려 장살했다.[25] 나라가 힘들 때 벌을 내리지 않을테니 그 동안 못 했던 이야기를 어떤 것이라도 다 하라고 할 때가 가끔 있는데 왕들이 화를 낼 지언정 하라고 해서 했더니 상소 올린 사람을 죽인 사례는 딱 이 일 하나뿐이다.

신의 생각으로는 강(姜)의 옥사가 가장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느냐 하면, 저주의 변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을 때 일어났는데 그 당시는 궁중 상하가 화락하고 편안하였으니 강(姜)이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렇게 불측한 큰 역모를 했겠습니까. 만약 그때는 강의 짓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궁중에서의 저주가 어떤 일들이기에 아무나의 손에서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까. 신은 여기에 대해서 크게 의심을 하는 바입니다.

《효종실록》, 1654년(효종 5년) 7월 7일 기사

김홍욱이 서울로 압송되자 효종은 친국을 집행하였고, 흥분하여 김홍욱을 때려죽일 기세로 곤장을 치라고 명하는데 삼정승들도 왕이 매우 흥분한 상태이고 김홍욱이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을, 그리고 강빈 사건이 무고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형을 집행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자 효종은 분노하여 신하들을 비난하며 친국을 강행한다. 곤장을 심하게 맞아 죽어가던 김홍욱은 삼정승과 대간들이 심문할 때 '''"의견을 말한 것만으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예로부터 말하는 자를 죽여놓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었소?"'''라고 항변하며 죽었다. 나중에 이 말을 전해들은 효종의 분노는 엄청났다. 신하들과 산림(지방의 양반들)들이 반대하고 김집과 휘하 문하생들까지 김홍욱을 사면해 달라는 집단 탄원서를 올렸는데도 효종은 무시하고 김홍욱을 죽였다.

대신과 금부의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김홍욱(金弘郁)을 궐정에서 다시 국문하니, 홍욱이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당초 홍욱은 항상 강씨(姜氏)의 옥사를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하여, 평소 다른 사람을 만나면 문득 이것을 이야기했다. 또 그 의심스러운 단서를 소장을 올려 그 원통함을 풀어 주려고 한 지 오래였는데 이때에 와서 분부에 따라 진언했다가 마침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니 듣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효종실록》, 1654년(효종 5년) 7월 17일 기사

사관들도 김홍욱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효종을 깠으며, 신하들도 나중에 이 일이 심했다고 효종에게 한마디씩 했고 당사자 김홍욱의 신원은 감히 주장하지 못했지만 자식들의 관직 진출은 허용해 달라고 주장했다. 홍문관 부수찬이었던 홍우원도 효종에게 강빈의 신원회복과 석견의 석방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했고 다시 김홍욱의 무고와 신원회복, 강빈의 신원을 건의하다가 파직당하고 만다.[26]
사실 대군 시절에는 소현세자심양에서 동고동락하며 의좋게 지냈던 효종이 왕이 된 후 형수인 강빈한테 적대적인 입장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강빈에 대한 처분은 효종 자신의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종법을 어기고 차남으로 즉위한 효종 입장에서는[27] 강빈의 무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통성 부족을 자인하는 것이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효종은 강빈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와는 별개로 남겨진 강빈의 자식인 조카 경안군은 최대한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제주도에서 유배 중이던 경안군을 한양에 더 가까운 함양으로 옮기게 했다가 다시 더 가까운 교동도(강화도)로 옮겨주었고, 치료와 물자 등 비록 유배 중이지만 최대한 대우해 주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경안군은 효종의 아들 현종 때까지 살아남아 대를 이을 수 있었고, 이 가계는 효종 직계가 단절된 조선 말까지 끈덕지게 살아남아 완전히 신원되었다. 또한 청나라 도르곤이 조선의 공주를 아내로 맞고 싶다고 하였을 때도, 효종은 자기의 딸 뿐 아니라 강빈의 딸도 서둘러 혼인시켜 청나라로 가는 일이 없도록 보호했다. 강씨의 자식들에 대한 태도로 보건대, 효종이 강빈의 신원에 거의 알러지 수준의 반응을 보인 까닭은 그녀를 인간적으로 미워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효종 자신의 승계에서 나타난 비정상적 측면을 희석하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였다는 해석이 더 그럴 듯하다. 억울하게 죽은 저승의 강씨에게는 참으로 딱한 노릇이지만, 일단 불안한 과정을 거쳐서 왕으로 즉위한 효종 입장에서 선왕인 인조의 결정을 뒤집고 '사실 나 말고 저 분 남편이랑 그 아들이 왕이 되었어야 했는데 참 안타깝소'라고 공언하기 곤란하였던 것도 분명하다. 또한 이미 사망한 사람이다 보니 강빈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그 자체로는 최소한 살아 있는 신료들에게까지 정치적 불안정을 제공할 요인이 많지 않았다(신원 요구로 인해 결과적으로 달성되진 못하였지만). 그렇다 보니 세상이 강씨의 억울함을 다 알더라도 효종만큼은 강빈의 신원에 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억울하게 죽은 심온을 세종이 끝까지 신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죽은 사람을 계속 역적으로 두는 것이 통치행위의 일환일 수 있다는 사례다.
결국 억울하게 죽어 간 그녀는 효종, 현종 대에는 '역강(逆姜 : 역적 강씨)', '강적(姜賊 : 강씨 성의 도적)' 등으로까지 불리다가,[28] 효종 이래 효종계의 3대째 계승에 성공해 정통성이 많이 확충됐고 더이상 강빈의 위치가 역적인지 아닌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신원될 수 있었다.

4. 평가


상당히 강단있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평가받는데, 여러가지 일화에서 그녀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병자호란강화도로 피난을 갔다가, 소현세자와 강빈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검찰사 김경징이 자신의 식구들만 챙기고 도망치려 하자 강빈이 소리를 냅다 지르는 통에 김경징이 놀라서 세자와 세자빈에게 배를 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심양으로 끌려갔을 때 청 황실의 예법으로는 누구도 가마를 탈수 없다는 이유로 강빈의 가마를 못 들어가게 하자 과감히 가마에서 내려 말을 타기도 했다고 한다.[29]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왕비로서 그녀는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있다. 그녀의 이런 성격은 인조가 강빈을 사사할 때의 빌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강씨의 집안이 고려 구국 영웅 강감찬의 직계 후손이었기 때문에 강감찬의 묘가 1960년대에 이를 때까지 위치가 묘연해졌다.

5. 창작물에서


박씨전의 박씨 부인의 실제 모델이 민회빈 강씨라는 설이 있는데, 솔직히 근거가 희박하다. 대신 현대 사극에는 많이 등장했다.
온화하면서 따뜻하고[30] 매우 진취적이고 강인한 여성상[31]을 보여주기는 했는데... 작중에서 보여준 행각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역적 소리 들으며 사약 정도가 아닌 거열형 받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막 나가는 등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른 행동도 여럿 보여주었다.
주인공 소용 조씨와 첫 만남부터 조소용을 천출이라고 경멸하거나 조씨 소생 숭선군을 천기는 면하게 해주겠다고 조롱하는 등[32] 숭선군을 왕족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무개념 발언부터 중간부터는 세자빈의 외당숙이[33] 염려할 정도로 편집증적인 정신병 환자로 보일 정도로 상당히 과격하다.
소현세자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한밤중에 사람들을 떼로 끌어모아 궁궐로 달려가는 장면이라든가 세자빈 엄마라는 작자는 세자로 임명된 봉림대군(효종)에게 대놓고 세자 자리를 도둑질 했다고 모욕을 주는 등 역모로 능지처참 당해도 할 말 없는 행동을 보인다. 물론 드라마 자체가 고증 따위 밥 말아 먹은 막장 오브 막장 사극인 것도 이유이기도 하고...[34]
비슷한 시기를 다룬 마의에서는 소용 조씨 역으로 초회 한정 특별출연.
  • 화정 - 김희정
  • 유시연의 역사 소설 공녀, 난아에서는 주요한 조연으로 나온다. 어렸을 때부터 몸종인 주인공 난아와 친하게 지냈으나 얄궂은 운명으로 주인공은 공녀가 되어 고생하다가 강씨와 다시 만나는가 했지만 결국 역사대로 강씨와 두 아들은 죽고 살아남은 강씨의 셋째 아들인 석견을 주인공이 돌보는 결말을 맺는다.

6. 여담


동생인 강문두가 신익성의 딸과 결혼을 하는데 신익성의 부인 그러니까 강문두의 장모가 다름아닌 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 정숙옹주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정숙옹주의 오빠, 다른 오빠도 아닌 동복오빠가 정원군, 인조의 아버지이다. 즉 인조와 신익성의 딸은 고종(외)사촌이며 이미 며느리 이전에 민회빈 강씨와는 사돈간이었던 것이다. 소현세자에게 강문두는 당고모부(종고모부)인 동시에 처남인 셈이다.

[1] 진주 강씨 인헌공파라고 불리기도 한다.[2] 왕세자의 적녀. 왕세자의 서녀는 현주라 한다. 또한 왕의 적녀는 공주, 왕의 서녀는 옹주#s-1라 한다.[3] 일찍 죽은 두 군주는 지금의 민회빈이 묻힌 영회원 인근에 묻혔으나 묘소는 실전되었다. 이중 둘째 군주는 부모가 심양에 인질로 있던 그 시기에 사망했다.[4] 심양의 만주어 명칭.[5] 특히 경숙군주와 경완군 이석린은 연년생이다. 그 아래의 3남매 경녕군주, 경순군주, 경안군 이석견도 셋이 나란히 연년생이다.[6] 각각 22세, 42세까지 살았다. 살아남아 혼례를 올리고 성년에 이른 아들은 경안군뿐이며 소현세자의 후손은 모두 경안군 가계에 속한다. 그나마 민회빈 강씨에게 유일한 위안거리가 있다면 효종의 가계는 철종 이후 직계 자손이 단절된 반면,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바퀴벌레급 생존력을 가졌는지 현재까지 후손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 경안군의 경우 효종 말년에 유배에서 풀려났고, 오래 살지 못했음에도 자손을 남기긴 했다. 이후 영조 때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이인좌의 난에 휘말려 죽기도 했지만, 어쨌든 살아남아서 대를 이어 후손을 남겼다는 것.[7] 그 외에도 인조의 가계 자체가 요절로 점철돼있다. 인조의 친아들 중 숭선군이 52세로 가장 장수했고, 효종이 41세, 인평대군이 3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손자 대에서도 복평군이 52세에 사망한 것이 최장수 기록이다. 증손자 대인 숙종이 그나마 60세. 물론 당시 시대상 50대면 그럭저럭 장수한 거긴 하지만...[8] 반대로 효종의 장자 현종은 8세에 귀국할 때까지 거기서 컸다. 대통을 이을 왕손이 아닌지라 느슨했던 모양. 때문에 현종은 조선의 임금 중에 외국 땅에서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유일한 사례로 남았다.[9] 금슬이 어찌나 좋았던지 귀국 당시에도 임신중이었다. 만일, 소현세자가 일찍 하세하지 않았다면 출산이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0] 참고로 선조의 선위를 주장하며 신하들이 들었던 예가 당현종당숙종의 사례인데 선대 황제와 현 황제의 권력 다툼이 벌여져 아버지 현종이 실권을 모두 잃고 반유폐 생활을 해야 했다. 선조 이전까지 조선에 상왕이 5명 있었는데 세조는 상왕으로 달랑 하루있다가 병사했으므로 크게 의미없는 사례고 태종같은 경우에는 군사권과 외교권을 쥐고 실권을 휘두르고 맘편히 살다갔지만 나머지 태조, 정종, 단종은 모두 쿠데타, 즉 1, 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로 반강제로 물러났으며 이중 단종은 비명에 갔다. 이런 사례들을 볼 때, 선위하고 물러나라는 게 선조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까?[11] 대명률 등 조선시대 형법상 궁중 인물에 대한 저주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죄였다.[12] 당시 강씨는 위의 저주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유폐되어 있었고, 강씨의 궁녀들도 줄줄이 끌려가 심문받거나 상전인 강씨와 같이 유폐중이었는데, 왕의 수라에 독을 섞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했을지 의문이다.[13] 출처 : 승정원일기.[14] 그나마도 사관의 기록에 의하면 본인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함.[15] 여기서 인조가 가장 어이없는 헛소리를 내뱉고 자빠졌는데, '''애초에 강빈은 저주 사건에 연루되어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문안을 드릴래야 드릴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문안을 안 오는 것 따지기 전에 감금부터 풀어주고 봤어야 했다.[16] 상식적으로 수라상에서 독이 발견되면 수라를 책임지는 궁인들을 심문해서 배후를 밝히는 게 순서인데, 정작 그들은 심문도 하지 않았으며 심문을 하기 전부터 이미 강빈의 짓이라고 주장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이다. 이 때문에 사관들에게도 대차게 까인다.[17] 당시 수라상이 올려지는 과정부터가, 사옹원으로 납품된 재료로 출퇴근 인력인 남자 숙수가 조리를 하여(다만 재료 손질 정도는 궁녀가 거들기도 했다) 대전에 도착하고, 이미 음식이 식었다고 궁녀들이 퇴선간에서 다시 데워 올린다. 즉 손을 엄청나게 거쳐거쳐 올라오기 때문에 독살 시도가 있었다면 그 인력들부터 추궁해야 앞뒤가 맞다.[18]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남편 죽은 것도 서러운데 위로는 고사하고 시녀들 잡아죽이는데(+덤으로 강빈의 오빠들도 귀양에 보내졌다) 이 정도 항의도 못하냐"고 깠다.[19]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었을 때 민회빈 강씨는 후원 별당에 구금되어 있었고, 독을 넣은 것이 민회빈 강씨라고 주장한 것은 인조 외에는 없었다.[20] 민회빈 강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폐비 윤씨에 비하면 민회빈 강씨의 혐의는 실제적으로 나온 것이 없었고, 보기에 따라서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소현세자 사망 뒤에 시녀들이 강빈의 사주로 무당과 통했다, 저주를 벌였다 등의 혐의로 국문받고 유배되고 강빈의 오라비들까지 유배에 처해지는 상황에서 대전 앞에서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며 고함 지른 정도.[21] 작은 아버지. 인조는 인평대군을 말하는 듯하다고 주장.[22] 당시 강빈 사건은 철저히 인조가 독단적으로 조사했으며, 의금부 등 신하들을 통한 정식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23] 이 과정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청나라에서는 자기들이 손자 셋을 데려다 키우겠다고 했으나, 오히려 인조는 "뭐하러 그렇게 하시오? 어차피 셋 중에 둘은 이미 죽었소!"라고 구라를 쳐서 돌려보냈는데, 말이 씨가 되었는지, 첫째와 둘째는 얼마 안 가 풍토병으로 숨졌다.[24] 윤방이 인조 18년에 죽은 후 그 아들이 시호를 청하기 위해 당대 최고 문장가인 이식에게 사장을 받았는데 이런저런 사건이 터져 사장은 못올리고 이식이 죽어버렸다. 그리하여 이 때에 다시 올리려고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사장을 죽은 사람 이름으로 올릴 수 없어서 조익에게 부탁했다. 조익은 이식의 문장이 워낙 좋으니 고칠게 없다며 한두개의 구절만 빼고 그대로 옮겼는데 문제는 강빈이란 표현을 고치지 않았던 것.[25] 김홍욱의 직계 5대손이 뒷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다.[26] 홍우원은 2년 뒤에 다시 복직된다. 김홍욱은 숙종 때 신원회복이 된다.[27] 실제로 당시 조정 신료들 상당수가 인조의 후계는 소현세자의 맏아들인 원손이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28] 심지어 이 시기에 조선에 살았던 헨드릭 하멜도 '왕의 형수가 왕을 저주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라고 적었을 정도였다.[29] 심양일기에서 소현세자가 인상 깊게 여겼던 부분 중 하나가, 여성들도 말을 타고 야외 활동에 참여하는 청나라의 풍속이었다.[30] 소용 조씨의 계략으로 궁에서 쫒겨나 가마를 타고 귀향을 가던 중 거리로 나온 신하들과 백성들의 대성통곡을 듣자 가마에서 직접 내려 그들의 손을 어루만져주었다.[31] 해산한지 얼마 안되어 궁녀들과 함께 밭일을 하다가도 홍승주의 투항으로 임경업이 명나라랑 내통했음이 알려져 청 측에서 다짜고짜 세자를 잡아가 하옥시켰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밭일 하던 작업복 차림으로 말 타고 가서 따져묻는 패기에 도르곤조차 질려서 어영부영 변명으로 일관할 정도.[32] 조선에 귀환하면서 소현세자와 같이 신분에 따른 차별을 없애게 다는 약속과 모순된 행위로 아마 주인공 조소용을 단순한 악녀가 아닌 입체성을 갖은 인물로 만들고자 한 복선으로 보인다.[33] 송시열과 어깨를 나란히 한 송준길이다.[34] 하지만 세 아들에 관해서는 진한 모성애와 더불어 평소의 당찬 성격과 달리 한없이 약한 모습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