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헌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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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의 추존황후'''
'''생몰년도'''
1693년 1월 1일 ~ 1777년 3월 2일
'''시호'''
효성자선강혜돈화성휘인목경천광성헌황후
(孝聖慈宣康惠敦和誠徽仁穆敬天光聖憲皇后)
'''배우자'''
청세종 옹정제 아이신기오로 인전
'''민족'''
양황기 만주
'''신분변화'''
격격⇒측복진⇒희(熹)비⇒희귀비⇒숭경황태후
'''자녀'''
건륭제


1. 소개


옹정제의 서후(庶后)이자 건륭제의 생모. 만주 양황기[1] 사람으로, 종 4품 사품전의 벼슬에 있던 니오후루 능주(凌柱)의 딸이었다. 고조부는 어이두(額亦都)의 백부인데, 어이두는 청나라 개국공신으로서 누르하치의 최측근 부하이자 매제이자 사돈이었고 홍타이지의 장인이었으며 보정대신 어빌룬(遏必隆)의 아버지이자 강희제의 두번째 황후 효소인황후의 조부였다. 즉 효성헌황후는 효소인황후의 9촌 조카뻘이 된다. 이렇듯 만주족 최고 명문가의 후손이었으나, 부친은 관직도 높지 않고 권력이나 재력 모두 대단치 못했던 듯하다.
아버지의 관직이 높지 못했기 때문에 13세에 매우 낮은 지위로 옹왕부에 들어와 옹정제의 측복진 이씨(훗날의 제비 이씨)의 시녀로 일했다고 하며 궁녀가 아니라 처음부터 왕부의 후궁으로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그러던 중 옹정제의 병을 간호하다가 옹정제의 눈에 띄어 왕의 격격이 되고 임신, 1711년에 훙리를 낳았다. 훙리가 강희제와 옹정제에게 귀여움을 받아 총애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름대로 대우 받았다.
옹정제가 즉위했을 때 후궁으로 올라가며 희비 칭호를 받았고 1730년에는 희귀비로 봉해졌다. 효경헌황후 사후에 후궁을 통솔하다가 이후 아들 훙리가 건륭제가 된 덕에 성모황태후로 즉위했고 '''숭경황태후(崇慶皇太后)''' 봉호를 받아 거처도 자녕궁으로 옮겼다. 아버지도 일등승은공으로 올랐다. 이후 편하게 복을 누리며 살다가 1777년에 향년 84세로 생을 마감했다. 효성스러운 아들이었던 건륭제는 생모를 효성헌황후로 추존하고 옹정제의 태릉에 합장했다.
그러나 건륭제의 생모가 전씨, 혹은 진씨로 기록도 존재하며 건륭제 황자 시절에는 전씨, 황제 등극 시절에는 니오후루씨로 기록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2] 다만 사학자들은 이에 대해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상상이 빚어낸 근거없는 야사'라는 입장이다.
건륭제는 생모에게 정말 '''효성을 다했다.''' 그런 덕에 효성헌황후는 아들로부터 온갖 화려하고 값비싼 귀중품들을 셀 수 없이 선물받았다. 생일에는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답고 즐거운 잔치가 열렸는데, 그 호화로움을 수많은 사람들이 회자할 정도였다.
또한 아들 건륭제와 함께 전국의 명소를 찾아 효도여행을 수 차례 떠났는데, 후일 나이가 들어 멀리 여행하기가 힘들어지자, 건륭제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였던 강소성 소주의 거리를 청의원[3]에 특별히 재현해주었다. 그야말로 청나라에서 가장 복 많은 여인.

2. 미디어 믹스



2.1. 후궁견환전


주인공 견환 참조.

2.2. 황제의 딸


배경이 건륭제다 보니, 황태후로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으로 나온다. 태후라는 위치다 보니 건륭제도 절절매는 인물로, 거의 절대적인 위치라고 봐야 할 듯.
보통 '부처님'이라고 불리는데[4], 그에 맞게 불교 신자다. 때문에 위구르에서 건륭제후궁으로 들어 온 향비이슬람 신도라서 갈등을 빚어내기도.
그러나 정작 작중 위치는 '''"권력 강한 호구"'''. 주로 며느리인 황후와 황후의 시녀인 용 상궁의 계략에 놀아나 자미와 제비 일행을 갈궈대기 일쑤다. 1편에서는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서 나오지 않지만 2편에서는 청아와 함께 돌아오는데 황실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제비와 자미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들에게 위기를 불러오는 인물이 된다. 그나마 데리고 있는 청아가 제법 현명한데다, 주인공 일행과 친하게 지내기에 매번 태후의 불호령에서 일행을 구제해준다. 황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황제의 의사와는 관련없이 황후의 말에 휩쓸리거나 심증으로 작중에서 여러 사람을 잡을 뻔했는데 자미는 손가락을 강제로 조이는 고문을 당해서 죽을뻔하고, 향비에게는 자결을 명하여 황천길을 건널뻔한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 일행을 인정하고 잘 지내려고 한다. 작중 가장 많이 쓰는 말로는 '''빵쓰!'''[5]
그러나 3부에서는 거의 만악의 근원 포지션. 손자며느리로 제비를 받아들였지만 영 철이 안 드는 모습에 시큰둥해 한다. 그나마 자미는 인정을 했다. 그 와중에 제비가 유산을 하게 되자 슬슬 눈밖에 나게 되고 자신이 아끼는 청아가 소검과 눈이 맞자 가까워지자 두 남매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소검과 제비의 정체를 계속 캐다가 이들이 문자의 옥으로 멸문당한 가문의 자손임을 알게 되고 이를 빌미로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소검을 청아에게서 떨어트려 놓고, 오왕자에게 강제로 후비를 들이게 하는데 이 후비가 지속적으로 제비를 모함하면서 제비와 황실 식구들의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마지막에 가서 모든 사실을 안 황제가 두 남매를 용서하고 화해하자 비로소 태후도 소검과 제비를 받아들이고 소검과 함께 궁을 떠나는 청아의 행복을 빌어주게 된다.

2.3. 후궁여의전


''' 후궁여의전의 등장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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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명'''
''' 숭경황태후 뉴호록 씨 崇庆皇太后 鈕祜祿 氏 '''
'''배우'''
우군매
'''거주지'''
수강궁 → 자녕궁
'''품계'''
옹정제 희(熹)비 → 옹정제 희귀비 → 성모황태후
'''가족'''
남편 옹정제 애신각라 윤진, 자녀 건륭제 홍력[6], 단숙장공주 항착, 유숙장공주 항제
전작의 견환과는 다른 인물. 뉴호록씨라고만 나오지 이름은 안 나오는데 팬들은 편의상, 그리고 애정상 견환이라고 부르는 듯. 작가는 뉴호록씨와 견환은 같지 않다고 밝혔고 팬들도 둘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라나랍 의수의 존재를 지우고 그 공을 의수의 언니(순원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다. 원작에서 의수가 '선황의 죽은 복진인 내 언니'라고 언급하기는 하였다)에게 몰아넣어 의수의 자살에 일조하기는 했지만, 전작에서 등장한 친자식들인 6황자 홍염이나 롱월공주, 령서공주, 심복인 근석은 존재하지 않고 몽고로 시집간 단숙장공주와 장친왕이 양육하는 유숙장공주를 두고 있으며 두 딸을 위해서, 그리고 뒷방 늙은이가 되지않기 위해 후궁에 강력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다. 사실상 최종보스. 딸이 둘인 것은 장친왕의 적장녀이자 옹정제의 양녀인 화석단유공주를 둘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견환이 극 후반부에 이르러 황제를 증오하게 된 것과 달리, 여의전의 희귀비는 옹정을 사랑했던 것 같다. (소설에서는 태후가 선제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선제에 대한 그리움보다 경쟁 상대였던 오라나랍 황후를 누르고 유일한 황태후가 되는데 주력하며, 계황후로 거론되는 한귀비 오라나랍 여의와의 대담에서 선제에게 진심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속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실제 역사에서 단유공주는 몽고 과이심의 군왕 박이제길특 제묵특다이제에게 하가했고 건륭 19년에 죽었다.
겉보기에는 역사상 건륭제와 효성헌황후의 관계처럼 사이 좋은 모자로 보이지만, 사실 둘의 관계는 미묘한 편이다. 후궁견환전에서처럼 홍력은 열하 행궁의 궁녀 이금계[7]가 낳은 황자로, 옹정제[8]에 의해 뉴호록 씨의 소생이 되었기 때문. 홍력은 미천한 신분이라 황제의 생모임에도 태후가 되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고, 뉴호록 씨를 진정한 어머니로 여기지 않는다. 이렇듯 미묘한 갈등은 1권에서부터 드러나는 데, 본래 선황이 죽으면 태후는 자녕궁에 거처해야하지만 홍력이 자녕궁으로 옮기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 뉴호록 씨는 태비들이 머무는 수강궁에 살고 있었다. 나중에 여의의 설득으로 자녕궁에 옮기라는 어명이 내려오기는 했지만.
후궁의 세력이 한쪽으로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온갖 공작을 꾸미고, 후궁들 간의 갈등과 분란을 교묘하게 조장한다. 홍력이 자신을 어머니로 여기지 않고 자기 사람들을 불임으로 만드는 줄 다 알았지만 도리어 상대를 속이고 자신의 말로 이용한다. 홍력이 병에 걸렸을 때 '어냥'을 불렀는데, 랑화는 홍력이 친어머니를 찾는 줄 눈치챘지만 태후에게 황어냥을 찾는다고 둘러대었다. 하지만 태후는 제여가 알려주었기에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후궁은 사실상 홍력과 태후의 바둑판이나 다름없다. 태후가 된 후로도 암투를 벌이고 누군가를 이용해야 하는 자신이 독하다는 자각은 있으나 딸들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정당화한다.
여의를 이용하기 위해 도와주는 편이다. 여의를 냉궁에 보낸 것도 사실은 살려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여의가 냉궁에서 목숨을 위협받자 직접 냉궁으로 찾아갔는데, 선제가 살아있을 적에 냉궁으로 쫓아낸 길태빈이 태후를 죽이려다 여의가 태후를 구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여의를 신뢰하게 된 것처럼 보였으나 여전히 여의를 경계한다. 드라마에서는 유숙장공주가 과이심부에 시집 갈까 노심초사하는 상황에서도 여의의 도움은 받지 않으려 했고, 효현황후가 죽자 세 황자녀를 낳은 순귀비 소록균을 황후로 추천했다.
드라마 초반부에서는 오라나랍 황후의 질녀인 여의를 미워하여 복진 간택에서 홍력이 여의를 적복진에, 랑화를 측복진에 천거하자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격노했다. 이후 오라나랍 황후가 몰락하고 옹정제가 붕어하자 대놓고 여의를 핍박한다. 태후가 장례 중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는 랑화와 희월의 시중은 받으면서 여의가 권하는 음식은 거부하고, 그로 인해 여의가 뜨거운 그릇을 받쳐들고 있다가 손가락을 데기도 하였다. 그런데 초반부 태후의 모습은 원작 소설과 다소 다르다. 드라마 후궁견환전 후반부의 내용을 상당히 옮겨온 원작 소설과 달리, 드라마 여의전에서는 오라나랍 황후와 희귀비의 갈등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둘은 서로를 맹렬히 적대하기는 하나 그 원인이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고, 순원황후에 해당하는 옹정제의 초취 오라나랍 씨의 존재도 언급되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 옹정제의 황후는 그가 어린 시절 적복진으로 맞이하고 사이에서 대황자 홍휘를 얻은 효경헌황후 한 사람이다. 그러나 드라마 견환전에서는 옹정제의 황후가 원배 황후 오라나랍 유칙, 즉 순원황후와 계황후인 오라나랍 의수 두 사람이었던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후 죄상이 드러난 의수는 홍력이 황위를 이은 후에도 선제의 정처로서 태후에 추봉되지 못한다. 대신 의수가 황후였던 세월조차 순원황후의 치세로 기록하고, 의수의 공적을 모두 순원의 것으로 기록하는 기록말살형에 처해진다. 여의전 원작소설에서는 오라나랍 황후가 여의에게 “선제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내 모든 덕행을 선제의 복진이었던 내 언니에게 돌리고, 황후는 그녀 한 사람으로 삼는다고 한다. 나는 죽어서 이름 없는 비빈으로 매장될 거라는군.”이라고 말함으로써 견환전 드라마의 설정을 이었다. 극중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이유로 오라나랍 씨와 뉴호록 씨가 심하게 적대하며, 여의에 대한 뉴호록 씨의 미움도 소설보다 깊다. 소설에서 효경황후, 계황후, 여의(청앵) 세 사람을 구분할 줄 안다고(계황후에 대한 미움을 여의에게 전가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달리 드라마의 뉴호록 태후는 여의에게 고모의 3년상을 치르라며 잠저에서의 입궁을 막고, 처음부터 측복진으로 시집 온 명문가 출신의 여의에게 높은 직위를 내리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는 측비에 해당하는 여의에게 서비[9] 격인 귀인의 지위를 내리려고까지 한 나머지 황제와 태후의 중간에서 황후 부찰 랑화가 고생했다.
단숙장공주가 곁에 돌아온 후로는 더 이상 권력욕을 보이지도, 홍력과 대립하지도 않고 행복하게 산다. 드라마에서는 여의가 위연완의 위협으로부터 12황자 영기를 지키고자 태후에게 양육을 맡겼고, 홍력과도 (양모자이긴 하나) 모자 지간의 정을 확인하는 장면이 나왔다.

2.4. 연희공략


숭경황태후(연희공략) 참조.

[1] 원래는 하오기 양백기 출신이나, 황태후 책봉 뒤 양황기로 편입하였다. 황후와 황태후의 친족은 원칙적으로 정황기나 양황기 둘 중 하나여야하기 때문.[2] <영헌록>에 '측복진 전씨가 희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3] 지금 이화원의 전신.[4] 서태후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원래는 귀하신 주인마님 혹은 그 의미의 부처님이라는 중의적 표현으로(老佛爺) 중국 황태후에게 쓰이던 극존칭이다. 그러나 역자가 이를 그대로 부처님이라고 번역하여 이를 모르는 한국인들이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5] 무례한 것 혹은 방자한 것이라는 표현으로 주로 제비가 뻘짓해서 기분이 상할 때 날려준다.[6] 친자가 아닌 양자이며 친자식은 단숙장공주와 유숙장공주 뿐이다. 실제 역사에서 뉴호록 씨의 소생은 건륭제밖에 없지만, 여의전에서 홍력의 생모는 열하 행궁 궁녀 이금계로 설정되었다.[7] 이태빈으로 추존된 듯.[8] 후궁여의전에는 장풍의가 옹정제로 특별출연한다.[9] 빈 이상부터 자기 자식을 키울 수 있고, 한 궁의 궁주로 인정받는다. 빈 이하의 답응, 상재, 귀인은 신분이 한미하거나 갓 입궁한 후궁들이 대부분으로, 주인 있는 궁에서 더부살이하며 ‘소주’로 칭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