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이씨

 

'''여주 이씨(驪州 李氏)'''

'''관향'''
경기도 여주시
'''시조'''
이인덕(李仁德)[1]
이은백(李殷伯)[2]
이세정(李世貞)
'''집성촌'''
경기도 수원시[3]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마을, 포항시, 예천군, 고령군
경상남도 함안군
평안남도 중화군
'''인구(2015년)'''
96,481명[4]
1. 본관과 관련하여
2. 분파
2.1. 교위공파(校尉公派)
2.1.1. 서예공파(書藝公派)
2.1.2. 상서공파(尙書公派)
2.1.3. 정당공파
2.2. 문순공파(文順公派)
2.3. 경주파(慶州派)
2.3.1. 연원
2.3.2. 번성
3. 실존 인물
4. 항렬표
5. 기타


1. 본관과 관련하여


경기도 여주를 근거지로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은 여주를 본관으로 삼고있다. 그러나 3파의 본관을 각각 다르게 써오고 있는데 교위공파는 고려 때는 황려(黃驪)로 조선 때는 여흥(驪興), 여주로 사용하였으며 간혹 본관을 영의(永義)로 사용하는 지파도 있었다. 문순공파는 이규보의 후손 가운데 하음(河陰. 지금의 강화)을 본관으로 사용한 지파가 있었다. 경주파는 여강(驪江)을 본관으로 사용해 왔었다. 그러나 현재는 본관을 여주로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다[5].
여주 이씨에서 분적한 성씨로는 강화 이씨와 고령 이씨가 있는데 모두 문순공파에서 분적된 성씨이다. 강화 이씨는 문순공파 이규보의 맏아들인 판도판서를 지낸 이징이 분적조이며, 고령 이씨는 이규보의 둘째 아들인 사간을 지낸 이징이 분적조이다.
(자료수정 한국전통호칭전례연구소 이성형)

2. 분파


※ 3개의 상대종파(上大宗派)와 8개의 대종파(大宗派)[6]와 16개의 중종파(中宗派)가 있다[7] 소종파의 경우 약간의 이견이 있어 집안마다 다르게 센다.

2.1. 교위공파(校尉公派)



2.1.1. 서예공파(書藝公派)


5세 수산(秀山)을 파조로 한다. 현재 북한 지역에 거주한다.
  • 선천파(宣川派): 수산의 장남인 헌(瀗)을 파조로 한다.
  • 상원파(祥原派): 수산의 차남인 상(祥)을 파조로 한다.

2.1.2. 상서공파(尙書公派)


5세 수해(秀海)를 파조로 한다. 증손자대에서 삼형제에 의해 셋으로 나뉜다[8].
  • 경헌공파(敬憲公派): 11세 계손(繼孫)을 파조로 한다.
    • 감찰공파(監察公派): 계손의 장남인 지임(之任)을 파조로 한다.
    • 사평공파(司評公派): 계손의 차남인 지화(之和)를 파조로 한다.
    • 제천공파(提川公派): 계손의 삼남인 지시(之時)를 파조로 한다.
      • 춘주공파(春州公派): 16세 상홍(尙弘)을 파조로 한다.[9]
      • 소릉공파(少陵公派): 16세 상의(尙毅)를 파조로 한다. 상의의 증손자인 이익과 외증손 유형원등 조선 후기 남인계열의 실학자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 순창공파(淳昌公派): 16세 상관(尙寬)을 파조로 한다.
      • 호산청은공파(湖山淸隱公派): 16세 상신(尙信)을 파조로 한다. 춘천시를 세거지로 한다.
      • 판서공파(判書公派): 13세인 공림(公霖)을 파조로 한다.
  • 진주파(普州派): 8세 지(止)를 파조로 한다. 그러나 단절되었다.
  • 학사공파(學士公派): 8세 이고(李皐)를 파조로 한다. 현재 여주 이씨의 8대 대종파중 가장 많은 후손들을 이루고 있다. 이고 이후 수원시에 거주하여 수원파라고도 한다.
    • 박천공파(博川公派): 13세이자 학사공의 장손인 학(鶴)을 파조로 한다.[10] 이들 중 주손인 감역공파를 중심으로하여 세운 학교가 바로 수원공업고등학교다.여기
      • 부사직파(副司直派): 학의 장남인 승무(承武)를 파조로 한다. 승무는 자식이 없어 동생 승종의 삼남 치(緇)를 양자로 들였다. 치는 탄핵되어 물러났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백의종군하였다.
        • 감역공파(監役公派): 18세이자 박천공의 종손인 동일(東一)을 파조로 한다.
      • 황주공파: 학의 차남인 승종(承宗)을 파조로 한다.
      • 부윤공파: 학의 삼남인 승서(承緖)를 파조로 한다.
    • 사직공파(司直公派): 13세 란(鸞)을 파조로 한다. 함안군을 세거지로 한다.
      • 만묵당파: 17세이자 사직공의 장손인 경무(景茂)를 파조로 한다.
      • 삼열당파: 17세 경번(景審)을 파조로 한다.
      • 군실공파: 17세 경환(景煥)을 파조로 한다.
      • 광양공파(廣陽公派): 16세 분형(貴享)을 파조로 한다.
    • 천안공파(天安公派): 13세 응(鹰)을 파조로 한다. 그가 천안군수였기에 천안공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남원시를 세거지로 한다.
    • 설헌공파(雪憲公派): 9세 중견(仲堅)을 파조로 한다.
    • 주부공파: 11세 충(忠)을 파조로 한다.
(자료수정/한국전통호칭전례연구소이성형)

2.1.3. 정당공파


5세 수룡(秀龍)을 파조로 한다.
  • 문절공파(文節公派): 9세 행(行)을 파조로 한다. 이 파는 훈구파 가문의 일원이다.
    • 밀양파(密陽派): 12세인 증석(曾碩)을 파조로 한다.
      • 진사공파(進士公派): 16세 경승(慶承)을 파조로 한다.
      • 금시당파:(今是堂派): 15세 광진(光軫)을 파조로한다
      • 월연공파(月淵公派): 14세 태(迨)를 파조로 한다.
      • 직장공파: 13세인 사진(師鎭)을 파조로 한다.
    • 포천공파: 12세인 증약(曾若)을 파조로 한다.
      • 홍주파(洪州派): 증약의 장남인 사원을 파조로 한다. 홍성군을 세거지로 한다.[11]
      • 춘천파(春川派): 증약의 차남인 사침을 파조로 한다. 춘천시를 세거지로 한다.
      • 고창파(高敞派): 증약의 삼남인 사경을 파조로 한다. 고창군을 세거지로 한다.
    • 여천군파(驪川君派): 10세 몽가(夢哥)를 파조로 한다.
  • 북청파(北靑派): 8세 천배(天培)를 파조로 한다.
(자료수정한국전통호전례연구이성형)

2.2. 문순공파(文順公派)


  • 문순공파: 4세이자 중시조인 이규보를 파조로 한다[12].
    • 판서공파(判書公派): 이규보의 장남 함(涵)을 파조로 한다.
      • 한계공파:
      • 귀산군파:
      • 판서공파:
      • 가선공파:
    • 사간공파(司諫公派): 이규보의 차남 징(澄)을 파조로 한다.
      • 안동장군 1파:
      • 안동장군 2파:
    • 녹사공파(錄事公派): 이규보의 삼남인 제(濟)를 파조로 한다.
      • 보령공파:
      • 통정공파:
      • 학산파(學山派):
      • 개성파: 제의 삼남인 익해를 파조로 한다.

2.3. 경주파(慶州派)


흔히 이언적 가계인 양동마을 중심의 양동파와 비 이언적 가계로 나뉜다. 16지파로 분류된다.
  • 장사공파(壯士公派):
  • 사직공파(司直公派):
  • 지헌공파(止軒公派):
  • 구암공파(求庵公派):
  • 치암공파(癡庵公派):
  • 경력공파:
  • 경산파:
  • 회재파: 11세 이언적을 파조로 한다.
    • 양동파
      • 무첨당파(無忝堂派): 이언적의 장자 이응인의 장남 이의윤을 파조로 한다.
      • 양졸당파(養拙堂派): 이응인의 둘째아들 이의징을 파조로 한다.
      • 설천정파(雪川亭派): 이응인의 3남 설천정 이의활을 파조로 한다.
      • 수졸당파(守拙堂派): 이응인의 4남 수졸당 이의잠을 파조로 한다.
      • 오의정파(五宜亭派): 이응인의 다섯째 아들 이의택을 파조로 한다. 이들은 주로 오늘날 포항의 우각마을로 분가하였다.
  • 향단파(香檀派): 이언적의 동생 이언괄을 파조로 한다.
  • 봉사공파


2.3.1. 연원


시조 이세정은 고려경기도 여주 지방에서 이름을 떨친 호족이었다. 그러나 타 여주이씨 파와 달리 고려 멸망 후 그 후손들은 경상도 일대로 피신하여 터를 잡았다. 이세정의 5세인 이윤방(李允芳)은 첫째 아들 이지언과 둘째 아들 이춘언을 두었다.
이지언의 첫째 아들 이성호(李成浩)는 현감을 했는데 이성호의 딸은 경상북도 청송으로 이주했던 안동 권씨 급사공파 후손 권명리(權明利)의 아들과 혼인했다. 한편, 권명리의 딸은 당시 경주시의 토성(土姓)이었다가 상경종사해 벼슬을 한 후 역시 낙향한 경주 손씨의 후손이면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훗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진 청송 출신 월성손씨(月城孫氏) 손사성(孫士晟)과 혼인하여 차남 손소를 비롯하여 자식을 몇 명 낳았다.
둘째 아들 이광호(李光浩)는 안강 현감을 하면서 이미 양동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용양위부호군 좌령사직을 했던 이광호의 둘째아들 이상도(李尙道)의 딸에게 지금은 절손된 포항 출신 풍덕류씨인 류복하(柳復河)가 장가를 들어 양동마을에 사위로서 이사왔다. 류복하는 외동딸을 손사성의 차남 손소(孫昭, 1433~1484)에게 출가시켜 사위로 삼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재산을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손소는 처가의 상속자로서 양동마을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5남 3녀를 두었다.
한편, 이광호와 이성호 형제는 이권(李權)이라는 사촌이 있었는데, 이권의 아들 이숭례(李崇禮)가 포항시 연일읍에 눌러 앉았다. 이숭례의 아들 이수회(李壽會, 1431-1518)는 훈련원 참군을 지냈는데 경주 이씨와 혼인하면서 경주시 내동면으로 이주하였다. 이수회의 아들 이번(李蕃, 1463-1500)[13]은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수학했는데, 그 전에 바로 경주 손씨 손소의 고명딸과 혼인하여 사위가 되면서 양동마을 재입향하여 세거(世居)하기 시작하였다. 이번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첫째 아들이 바로 이언적이다.
흥미롭게도 가계도 상 이들은 서로 먼 친척이었다. 이윤방의 장남의 차남의 장남의 딸의 딸, 이윤방의 차남의 삼남의 독자의 차남의 장남이 결혼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략 이렇다.
이윤방ㅡ이지언ㅡ이광호ㅡ이상도ㅡ딸(류복하)ㅡ딸(손소)ㅡ딸
이윤방ㅡ이춘언ㅡ이 권(李權)ㅡ이숭례(李崇禮)ㅡ이수회(李壽會)ㅡ이번

2.3.2. 번성


이언적은 조선시대 최초의 철학적 사유인 태극논쟁을 벌인 성리학의 태두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設)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는 사상을 확립했으며, 이는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근간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의정부 종1품 좌찬성, 이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대사성, 한성부 판윤, 경상도 관찰사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사후 영의정으로 증직된 정치가이기도 했다. 학문적 업적으로 그는 동방5현이자 동국18현으로서 문묘에, 정치적 업적으로 명종의 배향공신이 되어 종묘에도 모셔졌다. 문묘종묘에 모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이언적 외에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 뿐이다.
바로 이 이언적이 배출됨으로써 그 후손들은 그를 중시조로 삼고, 자신의 능력 외에도 그의 이름 덕분에 명문대가(名門大家)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동시에 그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남을 기반으로 둔 남인계열인 까닭에, 인조반정 이후 서인 노론계열에 정권을 내줌으로써 당상관에 오른 이가 매우 드물게 되는 아픔을 겪었다.


3. 실존 인물


※ 시대 순으로 기재.

3.1. 고려



3.2. 조선



3.3. 현대


  • 이규효
  • 이승훈(1864)[14]
  • 이원만
  • 이기백
  • 이완구
  • 이한구
  • 이미경
  • 이원경
  • 이원준(정치인)
  • 이동찬
  • 이운재
  • 이병선
  • 이병혁
  • 이광형
  • 이성형
  • 이재원
  • 이여진

4. 항렬표


[image]
  • 문순공파 : 27세까지는 오행을 쓰다가 28세부터 천간을 사용한다.
  • 경주파 : 지파별로 항렬자가 다른데, 22세부터는 통일된 항렬자를 사용하고 26세부터 정식으로 오행을 돌아가며 쓴다.참조

5. 기타


  • 교위 공파에는 3형제가 많이 나온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족보를 찾아보면 꽤 많이 나온다. 문순공파도 적지않게 나온다. [15] 대부분의 분파조들도 3형제이다.
  • 고려시대 호구단자(戶口單子)로 학계에 널리 알려진 여주이씨의 개성부호적(開城府戶籍)이 있다. 이 문서를 참고하여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와 방송에 고려 시대의 재산 상속과 관련하여 교위공파 7세인 윤방이 나왔다[16].

[1] 생몰 연대는 미상이나 증손자의 호적으로 추정해 보컨대 대략 예종시기로 여겨진다.[2] 이규보의 증조부. 이은백 → 이화 → 이은수 → 이규보 순으로 이어진다.[3] 집안 사람들도 잘 모르지만 수원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이는 수원에 터를 잡은 이고(李皐)의 후손들이 번성했기 때문이다.[4] 여주(84,389명)+여흥(7,914명)+여강(4,178명)[5]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여주에 살고 있는 여주 이씨는 340여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6] '''대종파'''는 강조표시를 한다.[7] 소종파의 사람들은 자신의 파명 대신 중종파의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8] 첫째 진(珎)의 증손자 계손은 감찰공파의 파조, 둘째 지(止)는 진주파를 세웠으나 단절되었다. 셋째 고(皐)는 학사공파의 파조이다.[9] 상홍은 상의, 상관 상신의 형이다.[10] 학은 아래의 사직공파, 천안공파의 파조인 란과 응의 형으로 새가 들어가는 한자를 돌림으로 쓴다.[11] 정확히 말하자면 홍성-청양쪽 일대를 근거지로 하고 있다. 실제로 청양군 비봉면, 그 중 옛 홍주군 얼방면 지역인 양사리, 강정리, 용천리, 방한리에도 많이 거주하는 편. 이 집안 사람인 이완구가 충남 청양군 비봉면 출신이다.[12] 공교롭게도 본파인 문순공파와 이름이 같다.[13] 이광호의 5대 종손.[14] 단, 이승훈의 가계에 대해 아래의 이기백씨가 조사한 결과, 그의 집안은 족보에 없다고 한다.[15] 경주파도 이와 같은지는 미확인.[16] 윤방의 3남이 학사공 이고(李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