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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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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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st Model Case'''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26개 최고 모범사례 가운데 하나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위치한 600여년의 전통을 가진 양반 집성촌. 1984년 12월 24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 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에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안동시 하회마을과 함께 대한민국의 10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으로서의 양동마을에는 양동마을만 있는 것은 아니고 같은 경주시 다른 곳에 있는[6] 옥산서원[7] , 동강서원까지 함께 등재되었다. 특히나 2013년에는 유네스코가 1972년 선포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이 2012년 40주년을 맞아 세계 160여 나라에 산재한 981점의 세계유산 전체를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 세계유산의 핵심정신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장 잘 구현한 26개 사례 가운데 하나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6대 국반(國班)''' - 우리나라 6대 명문 양반가문 중 하나의 집성촌
1.1. 키워드
양동을 아주 간단하게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아래 다섯 가지 키워드를 숙지하면 된다.
1.1.1. 1. 처가입향, 씨족마을, 양반세거지
오늘날 남자와 여자가 혼인 후의 생활하는 방식을 '시집 간다'라고도 표현한다. 이는 조선시대 중후기 이래 유교적 종법 질서가 자리 잡음으로써 양반사회에서 혼인 후 여자가 남자 집에서 사는 '''시집 간다'''라는 형태가 보편화된 발로다. 그러나 그 전인 조선 전기까지는 혼인 후 남자가 여자 집에서 사는 '''장가 간다'''가 일반적인 생활 형태였다. 양동은 남자가 장가들어 사는 '''처가입향'(妻家入鄕)'''의 대표적인 사례로, 풍덕 류씨 남자가 여주 이씨 처가에 장가 들고, 시간이 지나 경주 손씨 남자가 풍덕 류씨 처가에 장가 들고, 뒤이어 또 다른 여주 이씨 남자가 경주 손씨 처가에 장가들면서 정착해 간 사례다.
그런데 조선 전기 이후부터는 유교적 종법 질서가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면서, 장자 상속을 기반으로 같은 성씨의 부계 혈연집단이 대를 이어 모여 사는 유교 문화 특유의 세거지인 '''집성촌'''이 자리한다. 이를 ''''씨족마을''''이라 한다. 이 씨족마을은 특히 생산영역(농경지)과 생활영역(거주지), 의식영역(유보지)으로 구성을 마쳤고, 그에 따라 건축물을 세워갔다. 양동은 조선 전기 이후 처가입향으로 '''맨 마지막에 들어온'''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 양성이 유교적 종법질서를 신봉하고, 또한 국가적으로 명성을 얻은 인물들을 배출하기 시작하면서 장가 '가지 않고' 시집 '오게' 하면서 집단으로 세거해왔다. 이러한 역사가 오늘날 기준으로 약 '''600년'''으로서, 양동은 조선 시대 남아 있는 씨족마을의 가장 오래된 사례이다. 또한 양동은 이러한 씨족마을 공간을 기능적, 경관적으로 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 유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양동은 씨족마을인 동시에 '''양반세거지'''로서,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 양반들을 보필할 노비들이 공존하는 형태였다. 즉 양반들의 기와집 아래 서너 호의 초가집 소위 가랍집이 딸린 형태, 혹은 기와집 안에 초가로 된 집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사회의 엄격한 신분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양반들도 초가에서 생활했다. 따라서 양동을 '민속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1.1.2. 2. 풍수지리
그러면서도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학인 풍수지리에 입각한 구성을 보여줌으로써 자연과 인공건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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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풍수지리상 길지(吉地)'''에 자리 잡고 있으며, 특히 산기슭 입지의 대표적인 사례인 '''물(勿)자 형'''을 이루면서 '''삼남지방(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4대 명당'''으로 손꼽혔다. 물자형이라 함은 정확히는,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여럿 나란히 있는 형국인 것이다.
양동의 여러 건축물들은 이런 길지 하에 터(址)와 양택(陽宅)을 고려하며 이러한 지형의 경사에 기대어 집의 자리를 잡고, 집에서 바라보이는 조망점을 풍수의 원칙에 따라 조정하여 세워졌다.
1.1.3. 3. 6대 명문 양반가문, 영남 남인 핵심의 터전
일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양동을 그냥 시골전통마을이니 민속마을 운운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양반인 여주 이씨와 경상도의 명문인 경주 손씨가 세거하는 곳이다.
특히 여주 이씨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태두이자 영남 남인의 종장이며 조선시대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 김집 등과 함께 문묘 및 종묘에 동시에 배향되어 있는 성리학자이자 재상 문원공 회재 ''이언적''을 배출하면서 국반(國班)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외가인 경주 손씨는 적개공신 양민공 손소,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손중돈을 배출하면서 명문 도반(道班)으로 행세했다.
이언적과 손중돈 등을 배출함으로써 양동은 조선 중후기 이후 영남 남인의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후손들 중에는 문과 31명 포함 과거 급제자가 총 116명에 달했고 이밖에도 수많은 학자와 충절대의 명장 및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면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1.1.4. 4. 문화재의 보고
이런 전통으로 인해 이들 양반이 남긴 건축유산은 물론이고 학술적-문화적 성과물인 고문헌과 예술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와 특징적인 무형의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잘 유지해오고 있다.
특히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기와집의 수는 전국 최다'''로 이를 포함하여 국보 1점, 보물 5점, 국가민속문화재 12점, 경상북도지정문화재 8점 등 도합 26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양동 전체가 또 하나의 국가민속문화재이다.
1.1.5. 5. 정주형 유산
양동의 또 다른 특징은, 마을과 건축물만 남아있고 사람은 다 떠난 사적지가 아니라 현재까지도 이들 양반의 후손들이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정주형 문화유산(living heritage)'''이라는 점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에 이러한 정주형 문화유산은 극히 드물고 국내에서는 유일하다. 다시 말해 민속촌 같은 꾸며놓은 관광지가 아니므로, 또한 양반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므로, 함부로 문 열고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요한다.
2. 역사
2.1. 기원전 ~ 삼국시대
학자들은 기원전 4세기, 못해도 삼국시대부터 이곳에 부족 단위의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이곳에서 청동기 시대의 석관묘가 마을에서 출토되었다는 점, 근처에서 100여 기의 돌널무덤이 발견되었고, 이웃 마을인 안계리에서도 고분군이 발견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상 안강읍 일대에는 음즙벌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으며 신라의 파사 이사금에게 정복되었다.
일설에는 신라시대에 아산장씨(牙山蔣氏)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5, 6호의 작은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 때부터 양좌촌(良佐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2. 고려 말 ~ 조선 시대
문헌상으로 이곳에 먼저 입향했다고 기록된 인물은 손소이다. 손소가 양동마을로 오게 된 이야기는 여주 이씨 문서의 경주파 문단에서 매우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손소의 고명딸과 여강 이씨 이번이 혼인하여 이번이 양동마을에 재입향하여 살기 시작했다. 이번의 아들은 바로 영남학파의 근간이 된 이언적으로, 이언적 덕분에 후손들은 명문대가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고, 그때부터 양동마을은 발전하게 되었다.
양동마을 양반들은 갑술환국 이후에도, 노론에 의해 중앙 정계에서 거의 배제되다시피 한 영남 남인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문과 급제자 29명 등 총 116명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고 이외에도 수많은 학자들과 선비들이 탄생하였다.
2.3. 일제강점기 ~ 현대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은 이 마을의 지형이 ‘물(勿)’자 모양의 길지여서 풍수지리에 입각한 우리의 전통 사상과 우리 강산의 기(氣)를 흐리게 하기 위해 1913년에 마을 정면에 양동초등학교를 세워 마을 지형을 ‘혈(血)’자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또한 일본인들은 여기서도 철길을 마을 앞으로 지나가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지만 일본은 풍수지리라는 개념 자체를 아예 몰랐으므로 그냥 풍설. 자세한 것은 일제풍수모략설 참조.
1984년 12월 24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 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에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안동시 하회마을과 함께 대한민국의 10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덤으로 인근 독락당과 옥산서원도 함께 등재. 특히나 2013년에는 유네스코가 1972년 선포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이 2012년 40주년을 맞아 세계 160여 나라에 산재한 981점의 세계유산 전체를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 세계유산의 핵심정신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장 잘 구현한 26개 사례 가운데 하나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양가의 후손들은 몇 개의 분파로 갈라져 대를 이으며 오늘까지 양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오고 있으며, 양가는 지금까지도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 관리에도 신경을 써서 지금은 후손들에 의해 마을 건물들의 방향도 남향에서 동향으로 옮겨지는 등 전통적인 형태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3.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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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에 입각해 물(勿)자 형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양동 내에서는 크게 골짜기 즉 곡(谷)에 따라 영역이 나뉘어진다.
- 분통골 : 마을 입구 쪽에서 보이는 가장 바깥 골짜기. 위 설명 기준으로 1번
- 갈구덕 : 분통골과 물봉골 사이로 들어가 더 뒤로 넘어감. 위 설명 기준으로 서백당이라고 쓰여 있는 글자 지역
- 물봉골 : 두 번째 골짜기 위 설명 기준으로 2번
- 거림 : 세 번째 골짜기 3번
- 안골 : 네 번째 골짜기 4번
이밖에
골짜기 아래 평지 기준으로 마을 입구의 마을회관에서 보면, - 하촌 또는 아릿마 : 마을회관에서 양동의 북쪽 끝단으로 이어지는 하천과 도로를 중심으로 마을회관이 속한 지역 1번 아래 평지
- 두동 : 아릿마에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도로의 오른쪽 지역. 2, 3번 아래 평지
- 장태골 : 가장 안쪽 평지 지대 4번 아래 평지
4. 주요 기록 문화재
4.1. 지정조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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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는 뒤이어서 서술할 경주 손씨 종가 소장 고문서 사이에 끼어 있던 지정조격(至正條格)이라는 원나라 시대의 법전이 발견되기도 했다. 원혜종(順帝) 지정(至正) 6년[8] 인 서기 1346년에 완성된 원의 법전으로, 손씨 종가의 고문서들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여 위탁관리하는 과정에서 당시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승준 장서각 책임연구원이 발견했다. 공개 당시에는 '''몽골 제국 최후의 법전'''이라는 타이틀로 언론에 소개되었다. 이게 대박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중국에서도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 책'''이기 때문. (이미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법전 제정에 있어서도 지정조격을 참고할만큼 한국법제사에서도 중요한 책이다.) 2010년 3월에는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 몽골 대통령을 비롯한 몽골 방문단이 이 '세기적 발견품'을 보겠다고 직접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연합뉴스 기사
4.2. 통감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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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 제 283호. 원나라 말 명나라 초기에 집필된 중국 역사서로 조선 세종 시대인 1422년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책이다. 1420년인 경자(庚子)년 세종이 주자소에서 만든 구리활자인 경자자(庚子字)로 만들어 가치가 있을 뿐더러, 무엇보다 ‘집희경지(緝熙敬止)’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는 것은 단종이 세자 시절 공부하던 자선당(資善堂)의 서적에 찍힌 도장 즉 왕의 책이라는 점에서 귀중본으로 여겨진다. 역시 경주 손씨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었으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위탁 및 기증하였고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4.2.1. 바깥고리
4.3. 국보 제283호
원(元)편으로 중국 고대 반고씨부터 고신씨까지 그리고 당나라 천복 1년(901)에서 송(宋)나라 상흥 2년(1279)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원나라 1361년에 중국에서 발간된 적이 있고, 그후 60년만에 우리나라에서 찍어냈다. 이 책의 크기는 가로 18.3㎝, 세로 29.2㎝이다.
판본은 권말에 있는 변계량의 주자발(鑄字跋)에 의하면, 세종 2년(1420) 11월에 공조참찬 이천에게 명하여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서 인쇄한 경자자본으로서 세종 4년(1422)에 간행된 것이며, 서, 목록, 서례는 계미자이다. 권말에 있는 변계량의 주자발은 『통감속편』 외에도 『세종실록』 권18, 『춘정집』 권12, 『동문선』 권103에 실려있다.
이 책은 서지학 및 고인쇄기술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4.4. 손소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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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물 제 1216호. 1476년 경 왕실의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손소(孫昭, 1433-1484)는 양동마을 경주 손씨의 입향조이며 이언적의 외조부이다. 세조 5년 1459년 문과에 급제하고 주부, 병조좌랑 등을 지내다가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당상관인 내섬시정에 특진되었으며 이후 공조참의와 안동대도호부사, 진주목사 등을 역임했고 양민공(襄敏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5. 주요 건축문화재
5.1. 분통골
5.2. 물봉골
5.3. 거림
5.4. 안골
6.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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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2시간 내에 신경주역에 도착할 수 있으며, 여기서 바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경주시 안강읍에서 포항시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도 빠져서 갈 수 있다. 위치상 경주의 다른 관광지가 많이 몰려있는 경주 시가지 쪽과는 거리가 먼 편이고 오히려 포항 시가지에서 더 가깝다.
위에 나와있는 시간표는 마을 안쪽까지 들어가는 203번 시간표이다. 배차가 그렇게 좋지는 않으므로 시간이 맞지않으면 경주 시내에서는 안강행 노선인 200, 201~208, 212, 217번 버스, 포항에서는 600번, 700번을 타고 양동마을 입구에 내려 걸어가면 된다. 정류장에서 마을초입부까지 약 10~1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마을 바로 근처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동해선 철도 양자동역이 있지만 2007년부터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있다. 안강역에서 내려서 차로 5분 가량. 택시를 타면 높은 확률로 바가지를 씌운다.
마을 주민이나 출향한 후손들 이외에는 자전거 및 차량 이용 불가이다. 그러나 앞에 주차장이 있다.
경관 또한 가장 탁월한 곳으로 꼽힌다.
7. 사건사고
2017년 포항 지진으로 고택들이 다수 피해를 입었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 411호이자 이언적 종갓집인 무첨당 별당의 마루기와가 탈락했다. 한국의 목조건축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임진왜란에도 살아남았던 경주 손씨의 대종가 서백당 담장 기와가 무너졌다. 여강 이씨의 파종가이자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 78호 수졸당은 행랑채 벽이 균열되었으며 기와가 흘러내렸다.
수졸당의 증손이자 경주사마소를 중건한 동고 이덕록의 큰집인 삼산고택은 담장 기와가 무너져내렸다. 이밖에 두곡고택의 담장 벽체가 훼손되고 사호당고택의 와구토가 탈락하는 등 양동마을 내 안골, 물봉골, 아릿마 등 거의 전 지역의 고택이 피해를 입었다.
8. 여담
경주 지역의 토종견종인 꼬리가 없는 동경이를 키우는 집들이 있는데 아무 사람 말이나 잘 듣는 견종 특성상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은근히 길고양이들이 많다. 대부분 중성화된 녀석이고, 마을 사람들에게 손을 타서 인지 관광객들을 보고 크게 도망가지 않는다. 심지어는 러시안블루도 한마리 돌아다니고 있다.
양동초등학교를 지나 본격적으로 마을이 시작되는 곳에 다다르면 '오동나무집 식당'이 있는데 간판을 특이하게 써놔서 '오나집 동무식당'으로 보인다. 은근히 양동마을의 랜드마크처럼 대우받는다.
엠넷의 예능 프로그램 유학소녀 6회에서 출연자들이 양동마을에 방문하여 문화체험을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9. 둘러보기
[1] 하회마을[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최상위 도메인이 .com으로, 관광관련정보를 얻고 싶다면 정보화마을 홈페이지 보다는 이곳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5] 정보화마을로 지정되면서 만들어진 홈페이지. 최상위 도메인이 .org이다.[6] 양동마을과 직선거리로 약 8km 정도 떨어져있다.[7] 옥산서원은 2019년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다시 등재되어 세계유산 2관왕이 되었다.[8] 고려 충목왕(忠穆王) 2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