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당동 고분군
1. 개요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 조영동 소재의 신라 고분군. 임당동 고분군과 조영동 고분군의 통합된 명칭. 사적 제516호.
임당동 고분군과 조영동 고분군의 통합된 명칭으로 임당 고분군은 사적 제300호, 조영동 고분군은 사적 제331호였었다. 정식 명칭은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이다. 하지만 통상 '''임당 고분군'''으로 불리고 있다. 2011년에 사적 제516호로 통합, 재지정되었다. 학술적으로는 인근의 신대부적지구의 고분군까지도 포함하여 지칭되기도 한다.
임당토성이 권역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3~4세기 초기 신라의 성장과정 및 읍락의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2. 조사
2.1. 임당동 고분군
임당동 고분군은 1982년에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비교적 뻣뻣한 문화재 행정 절차가 미치기 이전 도굴꾼에 의해서 임당동 고분군의 유물이 반출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임당동 고분군도 여러 기관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조사한 덕분에 여러 구역명칭으로 구분되어 불린다. 임당토성을 기준으로 남쪽이 지금의 봉토분이 남아 있는 곳으로 5~6세기대의 고총군이며, 통상 임당 5호분, 임당 7호분 이런 식으로 불린다. 반면 북쪽은 비교적 이른 4세기대의 유적으로서 구역명+몇 호분으로 불리며 예를 들면 G-5·6호라는 식으로 불린다.
유명한 고분은 아래와 같다.
- 임당 5호
- 임당 7호
- 임당 1호
- 임당 G-5·6호
2.2. 조영동 고분군
조영동 고분군은 사적 제33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에 516호로 재지정 되었다. 임당 고분군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A~E 구역으로 나뉘어 장기간에 걸쳐 조사되었으며 각 구역은 Ⅰ, Ⅱ, Ⅲ 등으로 세분된다.
2.3. 부적리 고분군(신대부적지구)
부적리 고분군은 경산시 압량면 부적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2016년에 도굴된 BVI호에 대해서 긴급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결과 6세기 경의 昌자형으로 배치된 석곽 1기와 부곽 또는 합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곽이 확인되었다. 또 적석목곽묘의 형태를 띄고 있다는 점에서 늦은 시기까지도 적석목곽묘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형태적으로 독특한 편에 해당하며 각 석곽들이 석실의 형타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는 도굴 시에 주실을 싹 털어가고 석실처럼 도굴갱에 시멘트를 발라놔서 훼손이 심한 상태였기 때문도 있다.
3. 여담
다른 사적이된 고분군들은 사실 5~6세기대의 자료들이 중심이기 때문에 원삼국시대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1] 하지만 임당 고분군은 4세기부터 6세기에 이르는 취락의 형성부터 고분군의 형성과 변화까지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유적이기 때문에 압독국과 관련된 정보를 비롯하여 신라 중고기의 지방진출 및 지배 양상에 대해서도 많은 근거로 거론되고 있다.
경산 임당동·조영동 이외에도 2017년 경산의 하양읍 도리리 일대에서도 기원전후한 시점의 대형 목관묘가 발견되었던 바 있다. 특히 소명경이 확인되었는데 소명경은 비교적 유행이 짧았던 중국의 청동거울로써 전한 후대부터 전·후한의 전환기 시점을 지나서까지도 사용되었었다. 이를 통해서 창원 다호리 1호에 이어 나타나는 경주시 '''조양동 36호'''와 같은 시점인 즉 1세기 경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압독국의 위치 및 신라 고분문화 전개 상의 과정도 한층 정세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도 봉토분이 도굴된 사례가 있다. 바로 인근에 있는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 재직 중인 정인성 교수의 제보로 언론에 공개되어 또 다시 반출위기의 유물을 되찾을 수 있었고 나아가 발굴까지 이루어졌다. 도굴되었던 고분은 임당 1호분으로 조사를 통해서 신라의 지배방식인 위세품 사여체계 속에서 신라 금공품의 착장양태에 대한 면모를 재확인하고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었던 조사였다.
4.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산임당동고분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산조영동고분군
- 고고학사전 : 조영동 고분
- 대한민국 구석구석 :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 경산 임당동 고분군
- 두산백과 :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5. 사적 제516호
서쪽으로 향한 구릉에서, 발굴 전 10여 기의 고분이 훼손된 상태로 지표에서 확인되었다. 1982년 2월 임당동 2호분이 도굴되어 순금제 귀걸이 및 장신구 ·은제허리띠 ·곱은옥 ·고리자루큰칼 등 중요한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기 직전 당국에 적발되어 임당동고분군의 중요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발굴조사가 1982년 7월부터 12월까지 실시되었으며, 모든 경비는 영남대학교 박물관이 전담하였다. 또한 이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곳의 북편 능선이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는데, 여기에서도 많은 원삼국시대의 무덤들이 조사되었다.
이 고분군은 본래 사적 제300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인접한 경산조영동고분군과 통합되어 사적 제516호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으로 재지정되었다.
제일 먼저 발굴된 고분은 제2호분이다. 이 고분의 봉토는 3분의 1이 이미 파괴된 상태였으나, 4분법으로 조사하였다. 봉토는 얇은 판석으로 된 청석을 정성스럽게 차곡차곡 둥글게 쌓았고, 바닥부분은 일부 흙으로 다지고 회를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구조는 표형분으로 2개의 무덤을 남북으로 함께 붙여 만든 것이며, 축조 순서는 남쪽에 있는 무덤이 먼저 만들어졌고 북쪽에 있는 무덤은 뒤에 붙여 만들어진 것이다. 1개의 무덤은 으뜸덧널과 딸린덧널로 구성되어 있고, 으뜸덧널의 뚜껑은 큰 화강암 편평석을 사용하였으며, 딸린덧널은 나무로 뚜껑을 하였다.
제2호분 다음에는 제5ㆍ6ㆍ7호분을 비교ㆍ조사하기 위해 차례로 발굴되었는데, 봉토축조 방법은 제2호분과 같은 방법이 사용되었으며, 봉토가 2개 또는 3개로 연결되어 있는 여러덧널식이었다. 제5ㆍ6ㆍ7호분을 모두 발굴한 결과 제5호분에서 독 1개, 제7호분에서 독 1개 등을 포함하여 모두 15개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제5ㆍ6ㆍ7호분의 주위에는 평면에 원형 또는 반원형으로 둘레돌이 돌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