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국시대
1. 개요
열국시대(列國時代)라고도 부른다.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는 김원룡이 제창한 용어로서 그의 저서 한국 고고학 개설 제3판(1986년)에 의하면 기원후 1년 ~ 300년 사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는 이 시대가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시대지만, 실제로는 국가에는 이르지 못한 단계로서 이를 '삼국시대 원초기(原初期)' 또는 '원사(原史) 단계의 삼국시대'라는 의미로 proto - 삼국 즉 원삼국시대라고 정의하였다.
원삼국시대는 만주지방에는 부여, 고구려가 한반도에는 낙랑군, 대방군, 옥저, 동예, 삼한 등의 정치체가 존재하였다. 고고학적으로는 청동기의 소멸과 철기의 도래 및 발달, 고인돌의 소멸, 와질토기가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원사(原史)라는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손으로 기록된 것은 없고, 외부 즉 중국인의 손에 기록된 단편적인 기록들이 존재한다. 원삼국시대가 도래한 이후 중원문명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게 되면서 한반도와 그 일대의 종족과 문화가 역사기록으로 남겨지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이 단편적이니만큼 문헌사료로 시대상을 복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행이게도 90년대 이후 신도시 건설이 활발해지면서 고고학 발굴이 급증하여 원삼국시대를 복원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도 굉장히 많아졌다. 덕분에 최근에는 이러한 고고학적 자료를 통하여 원삼국시대의 사회상을 복원하는 다양한 연구가 되고 있다.
또 이러한 발굴성과에 힘입어 처음 김원룡이 제시한 원삼국시대의 연대를 수정하여 현재는 원삼국시대를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3세기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2. 시대 명칭 문제와 원삼국론의 한계
김원룡의 원삼국론은 많은 지지를 받아 현재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네이버 전문 정보에 '원삼국'이라고 검색해보면 얼마나 폭넓게 사용되는지 알 것이다. 그러나 원삼국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단순한 예로 '문헌사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채택하고 있지 않다'''. 고고학계 내에서는 학자마다 다른 명칭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부산 경남 지방의 학자들은 삼한 시대라는 용어를 채택하고 있다. 그들은 김원룡이 정의한 초기 철기 시대(기원전 300년 ~ 기원후 0년)를 포괄하여 기원전 300년 ~ 기원후 300년을 삼한 시대로 정의하고 이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었다.
최성락 교수는 원삼국시대를 철기 시대로 하여 김원룡이 정의한 초기 철기 시대를 철기 시대 전기로 김원룡이 정의한 원삼국시대를 철기 시대 후기로 나누어 전통적인 삼시기 구분법에 따라 이 시기를 정의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 국정화 교과서로 논란이 된 최몽룡 교수는 이 시대를 삼국 시대 전기로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한 시대를 정의하는데 있어 학자 간의 다양한 이견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또 이러한 '원삼국시대'라는 명칭 문제가 최근까지도 학술 논문을 통해 또 학술 대회를 통해 많은 논쟁이 일었지만, 사실상 각 주장자마다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각 명칭마다 고유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다.
삼한시대론은 그 연대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한반도 북부 지역의 역사적 전개는 무시한 용어라 한반도 남부 지방밖에 포괄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철기시대론은 철기시대라는 이름에서 원삼국시대라는 시대적인 특징이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 점, 이후의 역사 시대인 삼국 시대 고려시대 등도 해당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애초 철기시대라는 용어 자체가 전통적으로 선사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이기 때문에 원사 또는 역사시대에 해당하는 원삼국시대에 이 시대 구분을 적용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삼국시대 전기론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긍정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삼한시대에서 삼국시대로의 계기성을 인정한다면 명칭 자체의 적절성 문제는 피할 수 있으나, 삼국시대 전기 다음 중기 없이 곧바로 후기로 구분하고 있어 문헌 사학계의 견해를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애초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그대로 인정하는 긍정론을 주장하는 학자는 현재로서는 사실상 없기도 할 뿐더러 주창자가 정확하게 왜 이 용어를 써야하는지도 밝히고 있지 않다.
차라리 문헌사학계의 삼국사기 수정론과 고고학계의 견해를 절충한다면 권오영 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삼국시대 조기론이 더욱 적절하다. 그러나 조기론이 아직 학계에서 논의가 오간 적이 없고, 주창자 역시 적극적으로 이것을 주장하거나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기존 논의를 종합해보았을 때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한반도 북부 지방과 남부 지방을 포괄하면서도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대를 정의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문헌사학계에서 강력한 비판 이래로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언급하였는데, 문헌사학계에서 이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3세기에 고구려가 이미 국가단계에 들어섰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즉 원삼국시대의 고구려 이외의 옥저 동예 삼한 등은 아직 국가 단계 이전의 족장사회였는데, 고구려가 정치체들과 함께 묶어 들어가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어떤 용어든 그 시대를 완전히 포괄할 수는 없다. 또 이 시기를 고구려, 백제, 신라 세 고대국가의 원초 형태 시기라는 뜻으로 원삼국시대를 새롭게 정의한다면 고구려가 포함되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헌사학계에서 원삼국시대라는 용어에 대해 거세게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안적 용어를 생성시키지는 못했다. 문헌사학계의 관련 연구를 살펴보면 이 시대에 대한 통일된 용어가 없어 삼국시대 형성기니 삼국시대 초기니 하는 등의 굉장히 애매모호하고 정제되지 못한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제 문헌사학계에서 원삼국시대 연구를 거의 하지 않아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지는 몰라도 90년대 이후 관련 용어에 대해 어떻게 써야할지에 대해 논의해보는 논문이 나온 적이 사실상 없다. 과연 문헌사학계의 과거 비판이 적절한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고고학계의 원삼국시대의 사용에도 문제가 있다. 제창자인 김원룡은 고구려부터 모두를 아우르는 용어로서 사용하길 기대했으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원삼국시대'라는 명칭은 사실상 한반도 남부 지방(주로 삼한)만 지칭할 때 사용하고, 그 이외의 고구려나 옥저 동예 등의 정치체를 정의할 때는 이 용어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4] 이는 원삼국시대의 연대를 삼한을 기준으로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앞으로는 좀 더 용어 사용을 확대하여 한반도 남부 지방뿐만 아니라 북부 지방인 고구려나 옥저 동예 그리고 낙랑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 정착되기를 바라는 듯하다.
2.1. 시대 명칭 논란 문제의 논문
해당 시대 명칭 논란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어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해당 논문을 참고하길 바란다.
문헌 사학계
李賢惠, 1993, 『原三國時代論 檢討』, 「韓國古代史論叢」 5
김정배, 1996, 『原三國時代 용어의 문제점』, 「韓國史學報」, 창간호
고고학계
李熙濬, 2004,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 再論』, 「韓國考古學報」 52
최성락, 2004,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 재론"에 대한 반론』, 「韓國考古學報」 54
최성락, 2008, 『한국 선·원사 시대구분 재론』, 「韓國考古學報」 67
위의 해당 논문을 읽으면 원삼국이라는 용어의 문제점과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외 참고할 만한 것으로는
金元龍, 2000, 『原三國時代에 대하여』, 「考古學誌」 11
이남규, 2003, 『三佛 선생님과 原三國時代 연구』, 「三佛과 한국 고고학·미술사학 -故三佛 金元龍 敎授 10週忌 追慕學術論叢-」
등이 있고, 최몽룡과 부산 경남 지역의 학자들의 시대구분에 대해선
崔夢龍, 1987, 『 韓國考古學의 시대 구분에 대한 약간의 提言』, 「崔永禧先生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申敬澈, 1995, 『三韓·三國時代의 東萊』, 「東萊區誌」
참고하면 좋다.
3. 연구 동향
원래 마한권역에서는 유적이 잘 확인되지 않아 고고학적 연구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80년대 후반 천안 청당동에서 확인된 마한의 무덤을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2000년대 중후반부터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면서 연구가 촉발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마한 권역에서 낙랑과 관련한 여러 유물이 많이 발견되면서 낙랑과의 교류라거나 낙랑 유물의 유통 생산 또는 재지화 등의 재밌는 성과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원삼국시대의 마한 관련 유적은 주로 중부 지방 즉 서울 경기 일대를 중심으로 확인되고 이 외의 지역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 데다,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2세기에 해당하는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아 마한 고고학의 암흑기라고도 불린다.
주로 3세기 중후엽 이후의 유적이 많이 확인되는데, 이때는 마한이 백제의 영역 아래로 들어갔던 때라 백제 유물과 마한 유물이 혼재되어 나타나, 이것이 마한 시대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백제의 영역화 이후에 해당하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세밀한 편년 작업을 통해 이 유구가 마한 시대의 것인지 백제의 땅이 된 이후의 유구인지 구별하는 작업과 함께 취락(마을)을 중심으로 한 해당 지역의 정치체의 성격과 같은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진, 변한은 과거부터 많은 유물 / 유적이 확인되었다. 특히 1970년대 후반 경주 조양동 유적의 발굴로 영남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토기(와질 토기)가 확인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특히 이러한 발굴 성과에 힘입어 1980년대 초의 와질 토기 논쟁의 시작은 1980년대 ~ 1990년대에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엄청난 연구 성과가 쏟아졌다.
이후 200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대구 팔달동 유적의 발굴, 경산 임당 유적 발굴 등 다양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꾸준한 연구 성과가 나오고 있다. 다만 2000년대 초반 이후 기존 학설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자료가 확인된 것은 아니라서 괄목할 만한 동향은 없는 듯하다.
동예 지역도 마한과 마찬가지로 낙랑 유물이 많이 확인되어 이와 관련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 이 지역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呂(여)자형 凸(철)자형 주거지가 많이 발굴되어 주로 집자리 중심의 연구가 대세를 이룬다.
옥저는 크로우노프카 문화와 연관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이와 관련하여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연구 성과가 많이 미비한 데다, 크로우노프카 문화 전체가 옥저라는 정치체 속에 포함시켜 볼 수 있는지도 논란이 된다. 또 옥저 자체의 연구보다 크로우노프카 문화의 토기와 주거 구조가 한반도 남부 지방과 유사하다고 확인되어 이와 관련한 연구가 많이 집중되었다. 따라서 앞으로 옥저라는 정치체가 주체가 된 고고학적 연구 성과가 많이 나올 필요가 있다.
고구려는 2000년도 이후 동북 공정과 함께 연구가 촉진되었다. 특히나 동북 공정을 즈음하여 중국에서 적석총에 대한 많은 발굴과 보고서가 발간되면서 그 동안 부족했던 고고학 자료가 많이 축적되었다. 또 중국 내에서도 자체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서 앞으로 원삼국시대의 고구려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도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4. 관련 문서
5. 둘러 보기
[1] 침미다례 멸망 년도[2] 가야 건국년도[3] 이서국 멸망년도[4]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 고구려 및 옥저, 동예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않은 점도 분명히 작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원삼국이라고 하면 마한, 진한, 변한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