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문화
1. 개요
古墳文化
과거 사람들의 장례 문화를 통해 과거 문화를 복원하고 해석하는 것.
인간 활동의 대부분은 물질의 잔적을 남긴다. 여러 인간활동 가운데 장례문화를 생각해보면 유가족들은 사망자를 무덤이라는 공간에 안치하면서 하나의 인간활동의 잔존물을 남기게 된다. 무덤이란 단순한 유형의 물질이 아니라 현세를 살아가는 유가족과의 일정한 관계가 맺어진 존재로서의 관념적 존재로 남겨지게 된다.
일련의 관념의 차원 속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적용될 수 있다. 피장자(被葬者)[2] 의 생전의 신분이 고려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소중한 물품이 같이 매납될 수 있다. 또는 불교적 영향으로 화장(火葬)을 할 수도 있으며 그에 따라서 봉분이 있는 무덤으로 할 지 아니면 납골당에 안치할 지, 수목장을 할 것인지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어디에 어떤 의미를 갖는 곳에 무덤을 쓸 것인지의 문제, 아니면 대대로 가문의 무덤을 쓰던 곳에 할 것인지의 문제 등이 어떠한 인물의 사망과 동시에 고려되어야할 요소들이다. 이미 나열한 것만으로도 고분 그 자체에 내포된 정보는 꾀나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에 비해서 계급적이고 수직적인 사회문화를 향유했던 과거로 거슬러 가면 갈수록 장례문화의 양상은 더욱 화려해진다. 고대에는 신분, 계급에 따른 차별화된 장례문화를 펼쳐나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각자의 정보를 가진 고분과 고분이 모여 형성된 고분군(古墳群)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개인과 개인의 관계 즉, 하나의 사회상의 반영하는 물질자료로 남게 되었다.
고분과 고분군의 형성에서 나아가 고분군은 더 거시적인 관계망을 형성하였다. 그 관계망은 장례문화적인 요소 속에서 남한 전도 수준의 지도 상에서 표현되어 고분문화적 제반요소들의 상사성과 상이성을 분석하고 어떤 함의를 갖는지 문헌자료와 그 연구성과를 바탕에 두고 정치적,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도출할 수 있게끔 해준다. 그러한 해석 속에서 성립한 것이 바로 역사고고학이라는 고고학의 하위 분야이다.
연구의 누적에 따라 역사고고학의 분야에서 의미가 부여된 특정한 고분 문화는 하나의 도구로써 과거를 바라보는 틀로써 기능한다. 문자자료와는 달리 고고학적인 자료들은 지속적으로 발굴에 의해서 누적되고 또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게 된다.
한국의 고대는 문자기록이 다소 부족한 반면, 고분의 시대라고 할만큼 고총[3] 부터 작은 무덤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하고 많이 만들어졌고 유존해있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한국의 고대에 해당하는 시기는 동아시아 전체가 소위 왕릉으로 대표되는 거대기념물로써 정치·사회적인 위신(威信)을 표상하던 시대였다.[4] 선사는 기록이 없으므로 인류학적인 해석인 반면 역사시대인 고대는 시대적으로 고분문화를 통한 연구가 가장 활발한 시기이다. 중세 및 근세 이후로는 다종다양한 문자기록으로 인해서 활발하지 않다.
2. 한국
2.1. 고구려
항목이 개설된 고구려의 고분문화 관련 문서들
2.1.1. 적석총
돌을 쌓아 올려만든 무덤. 돌무지무덤. 적석총의 범주에는 엄밀히 지석묘의 일부 유형이 포함될 수 있으며 백제의 초기 묘제로 추정되는 북한강, 남한강 등지의 초기 적석총도 해당한다.
- 지석묘
- 고구려의 적석총
- 백제의 초기 적석총
- 백제의 적석총
- 가야의 적석총(...)
또 흙으로 만든 봉토분은 보통 판축이나 토낭(모래주머니)로 쌓기 때문에 안식각도 그렇고 구조적으로 안정적이며 파괴되었다고 할 지라도 남은 부분에서 전체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적석총은 대부분 순수 돌로만 만들기 때문에 원형의 정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원래 무기단식 적석총인지 아니면 기단식 적석총인데 기단의 큰 돌들만 파괴된건지, 계단식 적석총인데 상면이 다 날아가서 작은 석재만 남아서 무기단식 적석총처럼 보이는 건지 알 수 없다.
특히 적석총들이 대부분 중국에 있는 것도 안타까운 문제이다. 한국의 발굴은 봉분에 대한 트렌치 조사나 기저부 및 생토층까지 확인 조사를 하는 반면 중국은 발굴 기관마다도 다소 발굴방법이 다르고 그렇게 조사를 잘 하지도 않으며 했다고 하더라도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대국적(...)인 보고서 기술(記述)을 하는 것이 특징.
이런 단점에 기인하여 고구려 적석총에 대한 기원의 문제는 대세론이 없고 그냥 여러 가설 중에 논자마다 이게 가장 맞아보인다 정도로 요약되거나 아니면 여러 설을 거론하는 정도이다.
2.1.2.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
먼저 적석총의 기원을 따지는 것은 졸본과 국내 즉 지금의 환인현과 집안시를 중심으로하는 적석총들이 중심이라는 것을 전제에 두고 한다.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옛날엔 그냥 탁자식 지석묘랑 관련 있다고 했었지만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다. 단순히 지석묘랑 연결지어버리면 그걸로 설명할 수 없는 적석총이 더 많아져버리며 닮은 것도 몇기의 적석총 뿐이다.
먼저 요동지역의 대석개묘와의 관련성이다. 대석개묘는 큰 돌로 뚜껑을 삼은 지석묘의 일종이다. 탁자식, 바둑판식의 큰 돌이 뚜껑이되고 그 밑에 매장시설이 있는 것이라고 보면된다. 하지만 요동지역은 고구려와 관련성을 짓기에는 시간차이가 너무 크고 거리도 너무 멀다.
다음으로는 중국 길림성 장백시의 '''간구자 적석총'''이다. 생긴건 많이 비슷하긴한데 다만 너무 완성된 형태로 무기단식 적석총까지 설명하지 못한다. 또 환인 집안과 거리도 좀 된다.
그 다음은 환인현 다시말해 졸본의 고지에 있는 '''망강루 고분군'''이다. 기원 전후한 시점부터 1세기까지 정도로 추정이 되고 있어 기원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적석총 형태가 요약하고 정리를 한다고해도 워낙 다종다양해서 위의 각 가설이 어떤 것에는 맞는듯하고 어떤 것에는 맞지 않는 것이 문제.
2.1.3. 고구려 적석총의 등장과 발전
여하간 기원이야 어찌되었든 '''무기단식 적석총'''에서 출발하는 건 분명해보인다. 특히 이런 점에서는 지석묘문화에서 출발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보인다. 마치 포석시설이 있는 지석묘에 뚜껑만 없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점. 하지만 적석총이 워낙에 발굴이 어렵고 층위적으로 설명이 안되며 무엇보다 돌을 그냥 후대에 들고가서 담장(...)만들때 써버리면 적석총엔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에 원래 형태가 정확하게 추론이 안된다.. 특히 무기단식 적석총은 말그대로 돌만 쌓은 형태라서 훼손도 심하고 원상이 뭔지도 정확히 모른다. 그냥 돌로 둔덕을 만든 것이라 보면 될 듯.
이렇게 돌을 쌓아서 만드는 전통에서 점차 이쁘고 높고 크게 쌓는 것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 첫번째가 바로 '''기단식 적석총'''이다. 기단식 적석총이란 위의 무기단이랑 거의 똑같은데 다만 제일 밑에 단에다가 비교적 큰 돌을 쌓아서 화단처럼 이쁘게 정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으로는 '''계장식 적석총'''이다. 기단식 적석총의 범주에 들어가지만서도 분명히 장군총처럼 잘 쌓는 과정 중에 나타난 근거가되는 형태다. 물론 큰돌로 잘쌓은 건 아니고 비교적 작고 깬돌로 약간 대충 쌓는 것이 특징이다. 담장을 연속적으로 쌓는 방법인데 크기도 작고 모서리도 분명치 않아 단수가 엄청많고 그냥 보기에는 기단식이나 무기단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히 층과 단을 구분해가면서 높게 쌓기 시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3세기 말~4세기 초반에는 계장식 적석총과 비슷한 '''계장형 계단식 적석총'''이 만들어진다. 해당하는 적석총은 만보정 242, 우산하 3283, 우산하 2110호, 임강총이 대표적이다. 특히 작게 깬돌을 사용하는데 잘 쌓느는 것이 아니라 계장식처럼 대충 쌓는 편이다. 이 시점부터 석실/광실이 채용되기 시작한다.
4세기 전반~중엽부터는 비교적 대형화된 석재로 정교하게 쌓아 완연한 '''계단식 적석총'''을 쌓기 시작한다. 적석총에 대한 구조적인 안정성이 진전되며 외관상으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형태에 해당하는 고분은 우산하 3319호, 우산하 992호, 서대총, 마선구 2100호 등이 해당한다. 석실이 채용되고 점차 고대(高大)해지며 쌓을 석재를 선택하는 것도 깔맞춤을 하는 등 외관적 요소에도 신경을 쓴 모양이다. 석재 자체의 가공도 정교해진다. 이 시점엔 '''석실봉토분'''이 주류는 아니지만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한다.
4세기 후반부터는 석실을 채용하는 적석총들이 주류를 이루고 소위 '''태왕릉형 적석총'''이 나타난다. 태왕릉형 적석총은 4세기 중반의 적석총과 비율은 유사한데, 석재의 가공이 더더욱 정교해지고 대형화된다. 석재 상면에 돌들이 잘 물리도록 밀림 방지턱을 설치하는 등 구조적 안정성이 보완된다. 태왕릉, 천추총, 우산하 540호가 해당한다.
4세기 후반 이후부터 5세기에는 '''장군총형 적석총'''들이 나타나는데, 석재를 가공한 양상은 태왕릉형과 비슷하지만[5] 석실의 수직적 위치가 변화한다. 태왕릉같은 적석총들이 석실이 봉분의 가장 위에 있었다면 장군총형 적석총들은 석실이 봉분 속에 만들어지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이로 인해서 비율도 장군총처럼 피라미드같은 비율이 된다. 특히 석재가 대형화되는 것이 더더욱 현저해진다. 기단을 작은돌로 1m 쌓는 것과 1m짜리 돌을 1개 쓰는 것 중에서 당연히 후자가 무너 질수가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늦은 시기 적석총들이 형태가 이른시기 적석총에 비해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다.
한편 4세기 후반부터는 적석총만큼 '''석실봉토분'''들도 많이 축조된다. 비율적으로는 장군총형 적석총과도 관련이 있어보인다. 5세기부터는 유행이 역전되어 중하위 레벨부터 상위 레벨까지 석실봉토분을 채용하며 적석총의 비율이 줄어들어서 5세기 중엽쯤엔 거의 봉토분만 축조된다. 장군총이 예외적인 케이스.
2.1.3.1. 백제 적석총과의 관련성
고구려의 4세기 전, 중엽의 적석총 축조양태와 백제의 고분군인 서울 석촌동 고분군의 적석총의 축조양태는 일정부분 닮아 있다.
석촌동 고분군의 적석총들은 80년대에 정비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태가 되었기 때문에 3세기 말의 계장식 적석총과 유사했었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의 계장식 적석총들은 실물의 보존 상태가 사실 완벽하다. 훼손된 그대로라서 완벽하다(...).[6] 그래서 지금 서울 석촌동의 적석총이 진짜 지금처럼 생겼는지 아니면 무너진 상태가 집안시의 고분들의 어떤 것과 닮았는지 뚜렷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석촌동 적석총들의 원 형태가 지금의 정비와 비슷하다면 4세기 초의 적석총인 우산하 3283호분과도 비슷할 수 있겠지만 클라스 차이에서 3283호분은 비교적 중형에 해당하는 고분이라는 것이 또 함정. 비율로는 우산하 540호와도 같지만 흙으로 만든 무덤이라는 점에서 다른게 또 함정.
석촌동 3호와 4호 역시 작은 지대석을 기대어 놓았는데 이러한 형태는 3세기말 4세기 초의 고분인 만보정 242호에서 나타난다.
이상의 추론들을 보더라도 대략적으로 4세기 초에서 중엽경에 석촌동의 적석총들이 해당함을 알 수 있다.
한편 2018년인 현재도 발굴조사가 한참인 석촌동 고분군 남쪽의 초기형태의 적석총들의 발굴성과가 석촌동 고분군의 성격에 대한 단초가 될 수 있다. 물론 역으로 고구려 적석총에 단초를 줄 수도 있다.
위의 내용과 상관없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의 출자와 관련된 물증으로 석촌동 고분군이 거론된다. 역사적으로 그 출자의 시점은 기원전후한 시기이지만 그 물질근거인 적석총의 완연한 형태의 성립과 석촌동 고분군의 연대는 4세기 경에 해당한다.[7]
위의 논란을 떼놓고 생각하면 석촌동 고분군 가운데서 최대형 적석총인 석촌동 3호는 4세기 중후엽의 백제의 왕들이 해당되며 근초고왕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2.1.4. 고구려 봉토석실분·벽화분의 유행
4세기 말 5세기 초부터 나타나는 장군총같은 적석총들이 사실상 적석총의 마지막 형태다. 5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석실벽화분'''들이 성행하면서 6세기를 지나면서부터는 완전히 주 묘제로 자리잡으면서 적석총의 축조는 중단된다.
4세기 말 5세기 초반부터 석실봉토분이 스멀스멀 나타나서 주 묘제로 채용된다. 특히 석실의 각 벽면을 백회를 발라 정리하고 그 위에 벽화를 그리는 것이 유행한다. 벽화의 초창기 모습이 장막(帳幕)을 형상화한 것이 많다. 벽화 채용 이전의 석실에는 장막을 걸기 위한 걸쇠가 확인되어 장막을 통한 장식이 벽화로 점차 옮겨가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5세기 이후부터는 벽화의 채용이 보편화되고 5세기 전반쯤에는 '''생활풍속도'''를 중심으로[8] , 5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불교적 영향으로 '''연화문의 도안이 채용된 생활풍속도'''[9] , 6세기가 되면 도교적 영향으로 아에 '''사신도'''를 네 벽에다 방향에 맞게 그리는 것으로 변화한다.[10]
좀 유명하다 싶은 고구려인의 모습이 담긴 벽화분들은 대체로 5세기 초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무용총, 각저총이 대표적인 사례.
벽화만큼 중요한 것은 무덤을 돌이 아닌 흙으로 만드는 봉토분이 된다는 것이다. 고구려 석실분들은 보통 석실봉토분 또는 봉토석실분 으로 부른다. 사실 신라나 백제의 일반 석실분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는 같지만 형태적인 특징이 다소 차이가 있어 관용적으로 고구려의 석실분들은 석실봉토분 또는 봉토석실분이라고 '봉토'를 명기한다.
가장 큰 차이점은 신라나 백제와는 달리 네모난 평면형태의 형태의 봉토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 적석총의 계보를 이어가는 요소로 볼 수 있고 또 석실봉토분 가운데 몇몇 고분들은 적석총처럼 기단부를 형성한 경우가 있다.[11] 석실봉토분과 적석총이 분명 공존하면서 변화하던 과정의 흔적들이다.
2.1.5. 고구려 고분문화의 종언과 발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고구려의 고분문화도 종언을 맞이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고구려의 멸망이지 고분문화의 종언은 아니다.
고구려의 석실은 독특한 천장형태로 유명하다. 궁륭형이라 불리는 아치형 천장에서 시작하여서 모서리가 있는 절천정형 천장, 집모양을 딴 맞배지붕형 천장, 고임천장, 고임천장 가운데서도 삼각고임, 평행고임이 있으며 고임천정의 형태는 이중, 삼중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의 고구려 석실들은 대부분 삼각고임과 평행고임이 이중으로 베풀어진 양상의 천장을 보이고 있다. 발해의 고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삼각고임과 평행고임을 조합한 천장으로 축조하며, 벽화의 재제 또한 고구려 멸망시점의 벽화들과 같은 주제로 그려진다. 구조적으로도 초창기의 발해 고분은 고구려 고분과 거의 같다.
발해가 고구려인들과 말갈인으로 구성되어있지만 분명 '''고구려의 별종인 말갈'''이라고 되어있는 것처럼 발해의 초기 고분문화도 고구려의 고분문화와 거의 같고 사실상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2.1.6. 고구려왕릉
위의 적석총 및 벽화분의 변천 과정에 따라 고구려의 왕릉급 무덤들도 변화한다.
2.1.7. 고구려의 하위 고분
고구려 고분문화 전개 상에서 4세기 후반 석실의 채용이 보편화되면서부터는 소규모의 적석총 및 봉토분의 축조가 두드러진다.
다만 그 명칭이 현재도 완벽히 정의되진 않았는데 보고자 측인 중국 쪽의 명칭과 개념을 존중하여 여기서는 동실묘라고 부른다.
동실묘라는 것은 구멍 동(洞)자를 써서 동굴처럼 또는 소형의 굴처럼 만들었다는, 다시말해 '작다'라는 의미가 전제된 묘제를 뜻한다. 똑같이 적석총의 형태로도 봉토분의 형태로도 존재한다. 또 묘실의 수직적 위치가 대체로 지상의 바로 위에 있으며 석실의 높이 또한 1m가 체 되지 않는 소형의 석실분들을 지칭한다.
관련 용어를 정의할 때 묘제 또는 분제의 특징을 잘 설명해야하는데 이게 워낙 많은 전제가 들어가 있어서 타당하지 않다는 함정이 있다.
여하간 이러한 동실묘들이 4세기 후엽을 전후한 시점부터 적석총의 옆에 쪼르르(...) 군집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크기가 작은 만큼 훼손도 심해서 정보를 정식 발굴없이 획득하기가 힘들다.
대국적인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 측에서 이 동실묘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본 바 있는데 전체 고분들의 비교를 통해서 고구려의 13~14개 관위와 연결시켜 동실묘들이 최 하위에 해당하는 계층의 무덤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동실묘의 구분을 따로 두진 않고 그냥 모든 석실 및 고분을 분석해 위계를 분석하는 경우가 많다.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았으므로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규모만으로 역사적 사실에 맞게 어느 관위에 해당한다고 까지 확정짓지는 않는다.
이러한 계층성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소수림왕대의 율령반포를 즈음한 일련의 정비 속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2.1.7.1. 남한지역[12] 의 고구려 석실분
여기서는 서울 석촌동 고분군 및 북한강 인근의 소위 백제 적석총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475년 장수왕의 남진 무렵부터 6세기 한강유역 쟁탈전을 즈음한 시점에 형성되는 남한의 고구려 석실분을 다룬다.[13]
의외로 한국, 다시 말해 백제와 신라의 영토로 인식되는 남한지역에도 고구려의 무덤이 축조된 바 있다. 크게 지역적으로 양분되는데 남한 서부권역과 동부권역으로 구분된다.[14]
- 서부권역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 해당한다. 고구려 고분이 확인된 유적으로는 연천 신답리 고분군, 연천 강내리 유적, 성남 창곡동 유적[15] , 성남 판교동 유적[16] , 용인 보정동 유적, 화성 청계리 유적, 충주 두정동 고분군 등이 해당한다. 연대는 대체로 5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초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에서 흔히 보이는 열상의 배치가 남한지역의 석실분들에서도 나타나며 위계상으로는 동실묘 계층 내지는 소형 석실봉토분과 동일한 형태로 축조된다. 고구려 남진 과정의 영역적 확장의 범위를 단적으로나마 보여준다. 또 연대로 추정하면 6세기 언저리까지 충청도 권역 일대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이 심했던 것으로 보게하는 근거가 된다. 아직까지는 자료의 누적이 진행되는 바 해석이 구체적이진 않지만 최소한 고구려의 남진이 일시적인 경략이 아니라 점령에 나아가 영역화하고자 했었던 의지의 피력이 바로 고분군의 형성에서 나타나는 것이 의의이다.[17] 이와 관련하여 서울 아차산 및 양주분지 등에 위치하는 여러 보루를 대형 성곽처럼 활용했으리라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방어성인 몽촌토성에서 고구려가 활용했던 흔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는 백제 한성 점령 후 몽촌토성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18] 역사적으로는 남한지역 한강일대를 남평양이라고 지칭했다는 점에서도 위의 맥락과 같은 점이다.
- 동부권역은 강원도 춘천의 신매리, 방동리, 만천리, 천전리, 홍천 역내리, 홍천 철정리, 양양 포천리 등의 고구려 석실분이 해당한다. 강원도 쪽의 연구에서는 맥국의 존재와도 관련지어보는 경향이 있다. 명확하진 않지만 서부권역처럼 보루나 성곽이 따로 확인되지 않아 고구려 남진으로 점철되는 서부 권역의 해석과는 달리 고구려 예하의 집단, 말갈(?) 내지는 그냥 고구려 영역 정도로 보는 근거가 된다. 최근에는 춘천 중도의 레고랜드 건설부지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청동기시대 유적과 함께 고구려 무덤과 금제 귀걸이가 확인되었다.
- 경북 북부인 영주 순흥 읍내리 고분군의 읍내리 벽화분이 있다. 벽화가 그려진 석실로 형태는 신라스럽지만 벽화가 그려진 점은 고구려스럽고 벽화 내의 묵서명을 보니 사람 이름은 고구려인 같지만 관등은 신라의 외위를 받고 있다고(...)되어있다. 학계에서는 고구려인이었다가 신라에 넘어온 고구려계 신라인으로 보고 있다.
- 경북 포항 냉수리 고분군 및 같은 유형의 포항시에 위치하는 일부 고분들 또한 고구려계 석실의 일부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다지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의 석실처럼 이실이 달려있는 것이 특징으로 신라 석실에서는 이러한 구조가 전혀 없다. 그렇다고 고구려 석실과 많이 닮진 않은 터라 신라 석실의 지역적인 차이일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19] 여하간 고구려의 세력권이 포항 일대 부근까지 진출했다는 것과 관련지어 보는 자료이다.
2.2. 백제
2.2.1. 백제의 중심고분군과 왕릉
백제의 경우 백제 건국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각 지역별로 마한의 문화가 매우 다양하게 잔존하고 있었다. 무덤 역시 마찬가지. 따라서 앞으로 서술할 무덤들은 엄밀히 따지면 마한의 무덤이지만 백제가 성립한 이후에도 일부지역에서는 꽤 오랫동안 잔존하고 있고 백제의 영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그리고 마한의 무덤에 대한 문서가 없기 때문에~ 백제의 고분문화에서 서술한다.
분구묘 - 지표를 평평하게 정지하고 방형으로 도랑을 판 후 그 흙을 쌓아올려 그 안에 매장시설을 안치하는 형태의 무덤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축조방식이 조금 다른 형태로 주구토광묘(주구돌린 움무덤)가 있다. 분구묘와 주구토광묘는 무덤의 입지와 분포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서 보는 입장이 있는 반면에 동일한 묘제로 보는 인식도 있다. 무덤의 기본적인 틀은 같지만 각 지역에 따라 형태, 입지에서 차이가 나타나며 부장품(껴묻거리)도 차이가 난다. 또한 마한은 각 지역에 따라 어떤 지역은 백제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무덤도 확 바뀌는 반면 어떤 지역은 백제의 문화가 유입되어도 무덤은 그대로인 지역도 있는 등 변화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2.3.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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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고고학은 신라 관련 유물[20] 유구[21] , 유적[22] 의 특징으로 인해서 신라의 유물에 의한 역연대는 특히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는 25년 또는 20년 단위로 매우 촘촘하게 나뉜다. 이러한 연구에의 장점 때문에 문헌사학과 가장 합치되는 고고학 분야이기도 하다.
이런 장점 속에서 신라고고학은 일찍이 많은 연구자들의 분석 대상이었고 이희준, 김용성, 최병현 등의 여러 연구자들의 논쟁과 토론 속에서 신라고고학의 근간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가 정리되었다.
①신라토기 양식, ②고총 고분군의 축조, ③신라식 위세품의 사여체계의 방식으로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후엽, 6세기 초의 시기에 간접지배라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 것으로 보았다.
- 신라토기의 양식이란 신라의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태의 토기 및 토기유물군을 뜻한다. 이것이 점차 영남지방 및 그 외부로 확장되어나가면서 각기 정치체 또는 집단, 경제집단의 원래 사용하던 토기를 대체해나간다. 꼭 '토기=정치, 국가'의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경주의 토기 생산 시스템의 확장 내지는 신라의 영향력의 확장과정을 의미한다.[23] 또한 토기의 변화 속에서 시간성을 내포하는 바 시간에 따라서 확장되는 범위를 알 수 있다.
- 고총의 축조는 위의 표에서처럼 신라 각 지방 각지에서 대표성을 띄면서 한 군집씩 나타난다. 고총은 통상 지름 20m 이상의 봉분을 갖는 고분을 뜻한다. 취락, 읍락의 구조를 생각할때[24] 고총은 단위 공간의 수장층, 즉 중심지를 표상하는 표지로 작용한다. 위의 토기의 시간성을 통해 보면 신라 토기라는 양식이 해당 지역에 확장되는 시점에 고총이 같이 축조되고 있다. 여담으로 20m 고총급은 많지만 40m 급의 큰 신라 고총들은 잘 없다. 경주를 제외하면 의성, 창녕 정도.
- 대릉원을 비롯한 경주의 고총 및 지방의 고총에서는 정형화된 패턴으로 신라 금공품을 착장한 양상이 무덤에서 확인된다. 물론 황남대총과 같은 왕릉급은 신라 특유의 금관을 비롯해 당연히 풀셋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그 보다 조금 작은 왕족급은 몇개 빠진 세트, 그 아래는 또 몇개 빠진 세트 등으로 구성되어 위세의 차등이 있다. 보통 왕족의 아래 등급이 준하는 세트가 지역의 고총 고분군에서 나타나며 금동관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마치 중국의 황제가 후, 공, 왕에게 일정한 아이템을 나눠주는 것처럼 신라도 지방 정치체들에게 신라식 위신재를 나눠주고 지방 수장층들은 이를 통해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서 대내외적인 정치력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와 동시에 고총 고분이 새로이 축조되는 것은 그러한 각 지방 정치체 및 집단들의 정치력이 진일보했음을 표상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의 3요소를 보면 신라는 3~4세기 경주 및 인근 지역인 울산,포항, 울진, 경산, 영천으로 영향력을 확대함과 동시에 내실을 다졌다. 이후 5세기가 되면서 금관국이 잠시 주춤한 틈을 타서 지금의 경북권역에는 간접지배를 관철시켰으며 경남 권역에도 금관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부산 복천동 고분군 축조집단에 까지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간다. 이후 5세기 후반부터는 낙동강 하류의 동쪽 및 경북 권역에는 신라 중심의 구도를 공고히 하는데에 성공한다. 이를 바탕삼아 신라는 6세기부터 제 가야의 고지를 정리하고 나아가 정복국가로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며 이윽고 한강유역에서의 삼자구도를 형성하기까지에 이른다.6세기부터 지방지배의 면모가 변화하며 이후부터는 지방관이 직접파견되기 시작하고 지방 행정조직이 개편되면서 고총의 축조는 둔화되기 시작하며 위의 3요소에 의한 양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즉 기존의 국가단계에서 직접지배를 관철시킨 진일보한 완연한 국가체제로의 이행 속에서 간접지배의 방식은 종언을 맞이하는 것이다. 한편 신라의 고분문화는 굴식돌방무덤, 즉 횡혈식 석실을 채용하는 봉토분이 완연한 주 묘제로 채택되며 묘실의 크기나 봉토의 규모도 모종의 표준화를 거친 것처럼 일률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 또한 직접적 지방지배를 관철시켜 지방 재지 집단의 권력을 억제하였던 결과로써 해석되기도 한다.
2.3.1. 신라왕릉
2.3.2. 신라의 고총 고분군
신라의 5~6세기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고총 고분군. 토기의 양식적 통일성, 신라에 의한 위세품 사여체계, 그리고 고총 고분군의 형성이라는 5~6세기대 신라고고학의 3요소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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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도면[25] 과 같이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경우에는 위의 도면처럼 고분군들이 형성되어 있다. 삼국시대를 포함한 동아시아 고대의 고분문화의 특질은 "위신(威信)의 표상"에 있다. 즉 고분을 크게 지음으로써 후대인들로 하여금 보이게 하였고 취락의 인근에 고분군[26] 이 형성되었다.[27] ] 즉, 지금의 남아있는 고분군의 존재만으로도 취락이 상정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저 도면에서 대촌(大村)에 해당하는 표지적(標識的)인 존재가 바로 '''고총(古塚)[28] '''이다. 신라 고고학 연구자들은 20m 이상의 지름을 갖는 고분(古墳)을 통상 고총이라고 한다.[29]
보통 고총을 중심으로 권역이 형성되있다. 권역의 설정은 "같은 양식의 토기 유물군"을 공유하고 "같은 묘제와 분제"를 공유하는 하위 고분군들의 분포 범위에 따라서 설정된다. 그리고 통상 그 분포 범위는 분지같은 수계망을 따라서 형성된 경우가 많다.[30][31] 이렇게 신라고고학에서 형성된 권역들은 위의 표의 구분과 같다.
물론 각 권역마다도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사로국에서 출발하는 신라도 4세기 전엽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경주 시내 북쪽 권역인 황성동 일대와 건천 분지, 안강 분지[32] ] 남산의 끝자락인 조양동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하다가 4세기 이후부터는 경산과 영천, 울산, 포항과 울진[33] 등지로 영향력을 확대[34] 시켜 나가며 5세기 중후엽을 전후한 시점에는 경상북도 권역 전체에 간접지배라는 방식으로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 포섭시킨다. 물론 경상남도의 낙동강 동부 권역에도 모두 영향력을 미치지만 부산의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 고분군의 경우에는... 재론의 여지가 남아 있다.[35] 부산만 논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양산까지는 신라의 예하에 두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각 권역, 즉 지역정치체 마다의 독자성이 어느 정도는 존재해 있었고 또 차등이 존재했다. 그 레벨이 높았던 지역정치체들은 건천 금척리 고분군, 경산 임당동 고분군, 의성 금성산 고분군, 창녕 교동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 건천읍에 존재하는 금척리 고분군이야 지역정치체라고 하기엔 경주에 너무 가까운 감이 있지만 여하간 금척리 고분군의 고총들은 대릉원의 천마총만큼 크다. 발굴 성과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수준이라서 구체적인 비교는 무리가 있으나 이런 지름이 40m가 넘는 고총이 있는 고분군 자체가 있다는 점에서 금척리 고분군의 집단은 경주의 관문적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써 일찍이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금척리 고분군에 대해서는 사량부의 거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경산 임당 고분군은 고총 고분군일 뿐더러 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발굴사업이 계속 이어져와 그 면모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 의성 금성산 고분군[36] 에서도 탑리리 1호분이라는 40m 급의 대형분이 발굴조사된 바 있다. 또 그 옆으로 탑리리 2, 3, 4호분 또한 약간 작지만 고총군이 형성되어 있다. 대리리 고분군에서는 3호분 및 5호분 등이 조사되었고 그 외에 대리리 40번대 후반 구간의 고총군과 대리리 45호분이 조사되었다. 탑리리 1호분에서는 고구려의 금동관이 출토된 바 있으며 다른 대리리의 고총고분에서도 금공품이 세트를 갖추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의성양식토기"라는 신라양식의 아류 양식의 중심지[37] 이다. 이 의성 및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경상북도의 북부권역에서 넓게 확인된다. 즉, 유통에 있어 경주의 거점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결과로 추정된다. 여담으로 의성지역에 존재했던 소문국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의 필사본에서 신라의 왕후씨족은 조문국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 창녕 교동 고분군.. 또한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비자벌로써 독립적으로 존재했느냐 아니면 신라의 하위 정치체였느냐의 문제가 있다. 여튼 창녕 교동 고분군의 규모도 상술한 고분군들에 필적한다.
그 밖의 고총 고분군들은 양상이 다 비슷비슷하다. 물론 기재된 일부 고분군 가운데서는 아에 발굴이 하나도 안된 곳도 있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은 고분군들도 나중엔 면모가 밝혀질 수 있다. 일부 발굴된 고총 고분군일지라도 젤 큰 고분들은 통상 발굴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2.3.2.1. 신라의 지방
신라는 4~6세기에도 위의 항목에서 서술된 신라의 고총 고분군이 존재하는 거점들을 중심으로 저마다의 '''토기 양식'''을 공유하는 권역을 형성하고 있다. 토기 양식이라는 것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토기의 생산과 유통(경제), 제사 방식의 동일함(문화)을 공유하는 점으로 비추어 볼 수 있으며 각 양식들이 신라 양식이라는 큰 틀안에서 지역적으로 상사성과 상이성을 보여주는 점에서 신라에 소속된 지방으로 파악할 수 있다.
각 지방들은 문헌에서처럼 2~3세기 대(또는 그 이전)에는 각자의 소국, 국으로써 존재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삼국사기에서는 2~3세기 이사금 시절에도 지방에 대한 복속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고고학적으로는 4세기는 되어야 경주의 주변부터 점진적으로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 포섭되어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2.4. 가야
2.5. 발해
2.6. 고려
2.7. 조선
3. 외국
3.1. 이집트
피라미드/이집트 항목 참조
3.2. 중국
4. 관련 문서
[1] 지리적인 의미의 남한이다. 임진강 유역 이남의 한반도 남부를 뜻한다.[2] 묻혀지는 사람[3] 거대한 무덤[4] 남북국시대를 지나면서 위신의 표출은 왕릉을 제외하면 고분문화에서는 점차 나타나지 않는다. 위신의 표출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규제받거나 종교적 영향으로 다른 방향으로 나타난다. 장례문화 자체도 불교가 들어오면서 후장(厚葬)에서 박장(薄葬)으로 변한다.[5] 물론 왕릉급과 그 밑에 레벨과의 차이는 있다.[6] 사실 유적의 보존을 위한답시고 하는 정비사업이 되려 유적의 훼손일 수 있다. 중국 측의 집안시 통구 고분군의 고구려 왕릉 정비는 유네스코에서 정한 수준에 따라 정비했다.[7] 고구려나 백제나 1~4세기의 몇몇 역사 기록에는 부회된 듯한 느낌을 주는 기사나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왕호를 가진 왕 등이 있다. 백제는 고이왕과 관련된 부분이고 고구려는 태조왕과 관련된 부분이다. 신라도 금석문 기록과 문헌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조상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8] 무용총, 각저총이 대표적. 그 외에도 삼실총이나 마조총이 있다.[9] 모두루총과 환문총, 연화총, 산연화총 등이 해당한다.[10] 강서삼묘가 대표적이며 오회분들의 벽화분 및 그 주변의 고분들 또한사신도를 채용한 벽화묘다.[11] 평양 초기의 석실봉토분이 그렇다.[12] 지리적인 의미의 남한이다. 임진강 유역 이남의 한반도 남부를 뜻한다.[13] 고구려 하위 계층의 무덤의 분류에 남한의 고구려 고분이 들어가는 것은 남한에 있는 고구려 석실들이 전부 소형분이기 때문이다. 온달을 보더라도 급이 되는 인물이 귀장했던듯(...)[14] 이 문서에서의 임의의 구분이다. 보통 고구려 남진에 관련돼서는 서부권역의 고분군들이 연구 대상이며, 말갈 내지는 맥국과 관련해서는 강원도 춘천 일대의 고구려 고분군들이 대상이 된다.[15] 창곡동 해당 무덤이 백제 무덤인지 고구려 무덤인지를 놓고 논쟁이 있다. 축조방법은 고구려식인데 나오는 유물 중에는 백제의 특징적인 방두정(머리가 네모난 못)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발굴보고자는 이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고구려 무덤으로 추정하였다.[16] 판교 신도시 개발과정에서 확인된 유적으로 고구려 석실과 백제 석실이 모두 확인되었으며 현재 판교박물관으로 이전복원하여 전시중이다.[17] 보통 일시적인 전쟁이나 경략, 약탈 등의 짧은 진출 시에 고분군이 형성되지는 않는다.[18] 한편 풍납토성 발굴조사에서는 고구려가 풍납토성을 활용했던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자세한 것은 각 항목 참고.[19] 냉수리 말고도 이런 측실이 달린 고분이 포항에 조금 있다.[20] 고배(굽다리접시)는 속성이 뚜렷하다못해 상징적인 수준의 지역색과 공통점을 갖는다. 일반 호(壺)류는 단순히 동그랗기만한 반면, 고배는 배신의 형태, 대각의 형태, 투창의 여부, 각 단부의 처리 등 다양한 요소와 장식 요소들이 상사/상이성을 보인다.[21] 돌무지덧널무덤으로도 불리는 적석목곽묘의 구조적 특징은 도굴 방지에 용이하다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꼭 적석목곽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반 수혈식 목곽, 석곽묘들도 도굴되지 않은 자료들이 많다. 지하식인 경우에 도굴을 피할 확률이 높은데 신라의 대부분의 고분자료들이 지하식의 묘제를 택했었다. 물론 털릴건 또 털렸긴하다.[22] 삼국시대 중에서도 신라는 승자의 나라였고 멸망도 비교적 순순히 이루어졌다. 고분의 축조량으로나 잔존량으로나 가야를 포함한 삼국시대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다.[23] 신라 양식의 중심이 경주 인 바 같은 형태의 토기들이 확장되는 것이 정치든 사회든 경제든 문화든 경주를 중심으로한 영향력 증대의 증거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24] 삼국시대엔 최소한 신라만큼은 확실히 고분과 취락이 인근에 같이 형성되었다. 백제나 고구려, 가야 또한 비슷했다.[25] 이희준, 2000, 삼한 소국 형성 과정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의 틀 -취락 분포 정형을 중심으로-, 한국고고학보43, 한국고고학회. p.130 <그림 5>에서 인용. 물론 저 도면은 원삼국시대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는 도면이지만 삼국시대에도 똑같이 적용이 가능하다.[26] 신라 권역에서는 경산 임당동 고분군, 대구 불로동 고분군과 봉무동 고분군, 대구 구암동 고분군, 가야 권역에서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봉황대 유적 등 무수히 많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이나 중국 길림성 집안시 통구 고분군 또한 마찬가지. 가장 대표적인건 역시 경주 대릉원이다.[27] 물론 백제는 고분 자체는 그리 크지는 않다. 백제의 고분문화는 마한으로 점철되는 전남 지역의 문화랑은 다소 달랐다.[28] 사실상 의미는 高塚이랑 상통한다고 보면 된다.[29] 신라고고학에서만 이 정의가 통한다. 큰 고분을 고총이라고 하는 것은 같지만 다른 백제나 고구려, 마한, 여러 가야들, 발해 등의 연구에서는 20m라는 기준이 딱히 정해진 것이 아니다.[30]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이런 문화적 권역을 따라서 그 권역에 대한 이름을 부여한다.[31] 위의 틀처럼 지금은 통합된 현풍이라던지 달성 등의 통합된 군 및 읍, 면을 사용해서 부르는 것이 관용적이다. 지금의 행정구역 역시 어느 정도는 자연지리에 맞지만 완전히 자연지리를 고려한 것은 아니다.[32] 여긴 경주보다 포항이 더 가깝다.[33] 의외로 동해안 권역으로의 진출이 빠른 편이다. 영동지역의 지리적 특징으로 일찍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34] 일찍 진출한 덕분인지 서술한 지역에서는 "지역 양식의 토기"가 없다. 지역색이 있다고 해도 거의 신라토기 표준형에 가깝다.[35] 분명한건 복천동 고분군에서도 신라의 영향력이 진하게 나타나긴 한다. 다만 그것이 친 금관가야의 세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보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36] 대리리 고분군, 탑리리 고분군, 학미리 고분군으로 명칭이 나뉘어져 있다. 최근에 금성산 고분군으로 통합되었다.[37] 사실 이것도 아주 약간 논란이 있다. 금성산 고분군에서는 의성양식 자체의 수량이 많지 않다는 점이 의외의 함정.. 그래서 경북북부양식 토기라는 표현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