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조영

 

1. 개요
2. 행적
3. 무공


1. 개요


임조영(林朝英)은 김용의 무협소설 신조협려에 나오는 인물이다.
주인공 양과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소용녀가 임조영의 제자의 제자가 된다. 임조영은 직접 등장하는 인물은 아니고 소설 시작 시점에 이미 죽은 과거의 인물로 언급될 뿐이지만, 당대의 천하제일인 왕중양과 경쟁할 정도로 강력한 무공을 갖고 있었다고 나오기에 독자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이 남아 있다.
무공만 탁월한 것이 아니라 고묘파의 창시자답게 각종 기예와 잡학에 밝았고, 미모 또한 천하절색이라 해도 좋을 수준이었다고 한다. 다만 자신의 재주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성격이 대단히 오만해서 자존심 때문에 왕중양을 마음에 두었으면서도 제대로 마음을 전해지 못했다고 한다. 스승을 통해 임조영에 대한 내력을 잘 아는 구처기는 왕중양과는 정말로 잘 어울리는 천하의 한 쌍의 남녀였으나 결국 함께 하지 못한 사연에 안타까워했다.

2. 행적


무림에서 일어나는 속된 일들을 좋아하지 않고 뽐내는 일도 좋아하지 않아서 이름을 널리 떨치지는 않았다. 왕중양이 세상을 버리고 은거해 있는 것을 바라지 않아, 며칠 밤낮 동안 고묘 밖에서 욕설을 퍼부어 그를 끌어낸 후 함께 천하를 종횡했다. 이후 돌에 지력으로 글자를 새겨서 무공을 겨루는 내기를 하여 이기고[1][2] 왕중양이 은거하고 있던 '활사인묘(活死人墓)'를 얻었다.
이후 활사인묘에서 살면서 고묘파를 창시했다. 당시 시점에서는 중병을 앓은 탓에 자신의 무공이 왕중양에게 처지게 된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활사인묘에서 왕중양이 무공을 연습하던 흔적을 보고 그의 무공을 깊이 연구하여 전진교의 모든 무공을 파해할 수 있는 옥녀심경을 창안하게 된다.
고묘파에서는 입문할 때 왕중양의 초상에 침을 뱉게 하는가 하면[3] 전진교 무공을 파해할 수 있는 무공을 개발하는 등 이래저래 전진교왕중양에게 원한이 많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사실 그 정체는 일편단심 왕중양 츤데레(…). 왕중양과 의기투합했음에도 끝내 활사인묘를 두고 내기를 걸어 결별하게 된 까닭은 그녀가 왕중양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왕중양 역시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는데 자신이 처자를 얻을 수는 없다 여겨 애써 거절했던 것. 구판중에는 동자공이라서 사랑을 받아주지 못했다는 듯한 묘사도 있었다. 이제는 개정작업을 통해 일양지의 동자공적 측면이 삭제되었지만...아 슬픈사랑. 결국 활사인묘 사건 이후 고묘파는 전진파와 철천지 원수지간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며 입문자에게 왕중양 초상에 침을 뱉게 시키고, 전진파 무학의 철저한 상극인 옥녀심경을 창안하는 등의 츤츤함을 보여주지만, 그 와중에도 왕중양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했다![4]
옥녀소심검법이라는 천하에 둘도 없을 검법은 전진파 검법과 고묘파 검법의 합격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녀는 자신이 강적을 만나 위기에 처하면 왕중양이 구하러 와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 검법을 창안해 낸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당대에 임조영을 위기로 몰아넣을 만한 강적은 '''높은 확률로 왕중양 정도밖에 없다(...).''' 결국 이 장대한 무공은 임조영 개인의 덕질로만 끝나고 그녀 살아 생전에는 쓰일 일이 없었다. 다행히 훗날 소용녀와 양과 덕분에 빛을 보게 된다.
본신의 능력이 정말 엄청난데, 무공만 놓고 봐도 그 왕중양에게 경쟁심이 생기게 할 정도의 수준이니만큼 천하오절급이라고 할 수 있는데다가 화석단의 일화에서 보이듯 지혜와 임기응변 또한 무척 뛰어나다. 게다가 왕중양의 이름 아래 천하 무공의 정종으로까지 칭송받았던 전진파 무공의 상극이 되는 옥녀심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창안해 냈다는 점에서 무림 사상 손꼽히는 기재임에 틀림없다. 후일 왕중양 역시 옥녀심경의 파해법을 창안했으나, 직접 무공을 창안한 임조영의 지혜에 비하면 그는 옛 선인의 가르침인 구음진경의 원리를 빌렸기에 스스로 그녀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자존심이 하늘처럼 높았던 왕중양은 이 일을 계기로 겸손의 도를 깊이 깨치게 되었고, 전진파 제자들에게도 고묘파와 마주치면 양보하도록 타일렀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임조영을 향한 전하지 못하는 마음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3. 무공


VS놀이를 좋아하는 무협 팬들은 임조영의 무공이 얼마나 강했나에도 관심이 많다.
소용녀의 말에 의하면 왕중양이 금나라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고 있을 때 임조영은 수련을 계속하여 더 뛰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왕중양이 활사인묘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는 병을 두 번 크게 앓아 무공이 왕중양보다 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옥녀심경을 창안하고 전진검법을 모두 파해했으니 더 높게 볼 수 있다고도 했다.
구처기또한 임조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대종사보다 윗급이라고 했으니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임조영은 천하오절급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용 무협의 과장된 표현법이 알려지기 시작하며서 반론이 나오게 되었다. 무공수위를 평가할 때는 말보다 실전을 우선하는 방법이 대세로 자리잡게 되는데 문제는 임조영은 과거의 인물이라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어서 평가하기가 난감하다. 왕중양은 나머지 사절과 붙어본 전적이 있지만 임조영의 대결 상대는 왕중양 뿐이었고 둘이 썸타는 사이였음을 감안하면 두 사람의 대결로는 제대로된 실력을 측정할 수가 없다. 곽정이 황용과 연애하던 시절 대결할 때마다 맞아주기만 했던 것을 생각하면.. 게다가 제자가 스승을 과장해서 띄워주는 건 당연한 일이고 구처기 입장에서도 임조영은 자신의 사부와 매우 친밀한 선배인데 비해 나머지 사절은 별 관계가 없거나(홍칠공, 일등대사) 원한마저 있다(황약사, 구양봉).
만약 임조영의 무공으로 오절급에 오른 제자가 있다면 증거가 되겠지만 그것도 아닌 것이 양과는 18살에 독고구패로 갈아탔고 소용녀가 강한 이유는 주백통의 좌우호박 때문이다. 그러나 임조영 역시 한 문파의 조사로서 옥녀심경이라는 심오학 무학을 창안했고, 왕중양도 대적하지는 않아도 재주에 대해 질투에 가까운 경쟁심을 품었을 정도이니 분명 당세 최절정 고수임에 틀림없다.

[1] 이때는 사실 돌을 무르게 하는 화석단을 사용해 왕중양을 속여 승리를 얻어낸 것이다. 구처기 왈, 지력으로는 천하 으뜸갈 일등대사의 일양지로도 맨손가락으로 나무에도 글을 새기지 못할 것인데 바위에는 어떻겠느냐고.... 하지만 왕중양은 임조영이 화석단을 사용한 것을 몰랐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으로 바위에 글씨를 새기는 임조영을 보고 지레 GG를 치고 만다(...).[2] 이때 부끄러워서 직설적으로 결혼하자고 말은 못하고 '내가 이기면 당신이 사는 집(활사인묘)에 들어가 살고 싶어요' 라고 말했는데 왕중양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고, 본인도 그러길 원했지만 결국 활사인묘만 줘버리고 떠났다. 결국 왕중양 노사께서 다 잘못한것이다...[3] 그러나 특이하게도 뒷모습이 그려진 초상이기 때문에 입문자는 왕중양의 면전에 침을 뱉지는 못하는 셈이다.[4] 김용 문학작품에서는 이렇게 사나움 뒤에 강렬한 사랑을 감춘 인물들이 정말 많이 등장한다. 동 작품의 구양봉이나 곽부, <천룡팔부>의 이추수천산동모, <의천도룡기>의 조민주지약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