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 파스토리우스

 

'''자코 파스토리우스
Jaco Pastorius'''
'''본명'''
John Francis Anthony "Jaco" Pastorius III
존 프랜시스 앤소니 "자코" 파스토리어스 3세
'''출생'''
1951년 12월 1일
'''사망'''
1987년 9월 21일
'''국적'''
미국 [image]
'''직업'''
가수, 베이시스트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웨더 리포트의 멤버로
2.3. 밴드의 리더, 그러나 마약 중독
2.4. 죽음
3. 인간관계
3.1. 가족 관계
3.2. 마커스 밀러와의 관계
4. 4현 베이스?
5. 여담


1. 개요


[image]

'''"나는 인간이 목소리를 내듯 베이스를 연주합니다. 내 연주는 내 이야기 같은 거죠. 마치 가수처럼."'''

자코 파스토리우스는 미국의 재즈 뮤지션이었다. 연주하던 악기는 베이스 기타이다.
동시대의 아티스트로는 스탠리 클락, 제프 벌린, 마크 이건 등이 있다.
대략 자코의 등장을 기점으로 해서 재즈에서 일렉 베이스가 메인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이 늘었다.
그의 이후에 나타난 재즈 베이시스트들 중 자코에 영향받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로 재즈 일렉 베이스의 연주 기법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이다. 마이클 맨링은 스스로 자신을 '자코의 수제자'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그를 존경했으며, 마커스 밀러도 젊은 시절 그의 음반을 틀어놓고 그의 플레이와 똑같이 연주하기 위해 몇 주를 연습했다고 한다[1]. 재즈 베이스의 주법을 개척한 연주자로서 상당수 뮤지션들이 존경하는 베이스 연주자를 꼽으라 하면 십중팔구 나오는 이름이다. 요약하자면, '''재즈계의 지미 헨드릭스.'''[2] 그만큼 재즈 베이스 레퍼토리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일렉트릭 베이스가 멜로디컬한 악기도 될 수 있다고 인식시켜 준 동시에 프렛리스 베이스의 대표자이기도 하다.[3] 자코의 플레이로 인해 프렛리스 베이스의 표현력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51년 자코는 펜실베니아주의 작은 마을 Norristown에서 게르만과 아이리쉬 혈통의 아버지 잭 파스토리우스(Jack Pastorius)와 스웨덴계인 어머니 스테파니 하팔라(Stephanie Haapala)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남동생인 그레고리와 로리가 있다.
그리고 7살때 가족들과 함께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포트 로더데일(Fort Lauderdale)로 이사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1963년 12살이던 자코는 초등학교 친구들과 밴드 소닉센스를 결성하여 음악 생활을 시작한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베이스를 연주한 건 아니며, 맨 처음으로 시작한 악기는 드럼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드러머였기 때문에 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훗날 웨더 리포트의 명작 <Heavy Weather>을 녹음할 때는, 그 유명한 Birdland를 녹음할 때는 직접 드럼을 연주하였다.
그러나 13세 때 미식 축구를 하다 손목 골절상을 당해 드럼을 포기해야 했다. 이렇게 자코는 정착할 악기를 쭈욱 찾아보다가 기타, 건반은 후딱 배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17살 때 콘트라 베이스의 저음에 매력을 느껴 돈을 모았고 이윽고 샀지만 그가 살던 플로리다는 매우 습한지라 아침에 일어나니 그의 말로는 '100만개로 쪼개 질 것 같은 크랙'이 생겼다고..[4] 결국 여러모로 관리하기 힘들었는지 나중에 재즈 베이스랑 교환했다고 한다.

2.2. 웨더 리포트의 멤버로


그는 10대의 나이로 포트 로더데일에 있는 여러 밴드에서 베이스와 편곡을 하였다. 그러다 1968년에는 플로리다에서 베스트 플레이어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21살이었던 1972년에는 다양한 밴드를 전전하며 세션으로 참가하고, 미국 남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였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코는 마침내 시야를 넓혀 리틀 비버, 폴 블레이, 팻 메스니 등 뮤지션들의 음반 작업에 참여한다. 그리고 1975년에는 뉴욕으로 건너가 재즈 퓨전 밴드인 웨더 리포트의 멤버가 되었다.
자코가 웨더 리포트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웨더 리포트는 어느 음악대학에 초청 받아서 그 곳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곳에는 그 유명한 자코가 베이스 강사로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조가 자코를 만나러 갔지만, 그들의 첫번째 대화는 시시콜콜한 농담으로 끝나고 말았다[5]. 얼마 후, 당시 웨더 리포트의 베이시스트였던 알폰소 존슨[6]의 후임 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왔고, 자비눌은 예전에 잠깐 만났었던 자코를 떠올리고 마침내는 그를 영입하였다.
이듬해 1976년, 자코는 데뷔 앨범 '''<Jaco Pastorius>'''[7]를 발매하였다. 그리고 같은 멤버인 자비눌과 웨인 쇼터와 함께 "Metheny" 앨범을 레코딩하였다. 이 때 자코는 스테이지에서의 카리스마와 레코딩에서의 열광적인 모습으로 범세계적으로 언론과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였다.
그는 주로 프렛이 붙어 있지 않은(프렛리스) 일렉트릭 베이스를 연주하였다. 그의 베이스가 프렛리스가 된 이유는 연습하다가 베이스에서 나는 버징 소리가 짜증 나서 박혀있던 프렛을 그대로 칼로뽑아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그의 사이코적인 행보의 인트로에 불과했다.
그의 연주는 언제나 도입부부터 놀랄 만한 멜로디와 리드미컬한 자유를 주어 '베이스'라는 악기의 가능성들을 보여줄 대로 보여주었다. 또한 Joni Mitchel의 1977년 걸작 'Hejira'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리드하는 많은 레코드에서 들을 수 있다.

2.3. 밴드의 리더, 그러나 마약 중독


자코는 1981년에 돌연 웨더 리포트와 결별하고 자신의 밴드 워드 오브 마우스(Word of Mouth)를 결성한다. 그리고 1982년 Warner Bros에서 자신의 두 번째 솔로 앨범 '''"Word of Mouth"'''를 세상에 내놓았다. 흥미롭게도 미국에선 실패했지만 일본에서는 흥행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밴드를 이끌고 순회 공연을 다녔다. 이때 25살의 천재 드러머 브라이언 멜빈이 합류하는 등 잘 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1984년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 2명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술과 마약에 빠지면서 완전히 뒤바뀌어버렸다. 원래 양극성장애가 있어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곧 관두었으며 결혼생활까지 실패하자, 술과 마약에 찌들어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8]
이후 술과 마약에 취한 나머지 각종 사고를 치고 다녔다. 술 먹고 술집에서 곁에 있던 손님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 감옥 가질 않나, 만취해서 남의 집을 멋대로 무단침입해서 감옥가는 일이 예사였다. 더 심하게는 술과 마약에 취해서 도로 한복판에서 옷을 홀랑 벗고 자다가 경찰한테 체포당하기까지 했다.
결국 자코는 정신 불안 증세로 감옥과 정신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하였다. 이로 인해 자코는 가뜩이나 안좋은 이미지가 더욱 나빠져 나락까지 추락한다. 후에 자코는 잠깐동안이라도 정신을 차렸는지 브라이언 멜빈과 함께 명반 '''"Standard Zone"'''을 레코딩한다. 하지만 이게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될 줄이야...

2.4. 죽음


1987년 9월 11일 자코는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산타나의 공연을 보고 자신이 10대 때 연주했던 플로리다 포트 로더데일(Fort Lauderdale)의 한 클럽인 미드나잇 보틀 클럽(Midnight Bottle Club)에 들어 간다. 그 곳에서 술을 거하게 마시다가[9] 우연히 클럽 밴드의 공연을 보게 된다. 이 때 자코는 갑자기 밴드의 베이스를 욕하면서 자신이 쳐보겠다고 행패를 부린다. 그러다 클럽 밴드와 시비가 붙었고[10], 결국 패싸움으로 번져 클럽 문지기인 Luc Havan[11]에게 떡이 되도록 맞았다. 이 여파로 자코는 얼굴 부분 두개골에 다수의 골절상 및 우측 안구 파열 등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결국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열흘 후인 1987년 9월 21일 뇌출혈로 사망하며 짧은 생애를 마쳤다. 향년 35세.

3. 인간관계


팻 메스니와 조니 미첼 등의 거장들과의 활동, 그리고 잘나가는 밴드 웨더 리포트, 사람들의 열광.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만한 성격이다보니 동료 뮤지션들 사이에서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12] 그는 언제나 공연이 끝나고 술을 마시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일주일 동안 연습을 하나도 안 했는데, 사람들은 나보고 더 늘었다더군!"

"안녕하세요, 신사 숙녀 여러분. 제 이름은 자코 파스토리우스 입니다. 세계 최고의 베이스 연주자이죠!"

이런 말들을 입버릇처럼 내뱉어대니, 동료 연주자들이 그를 좋게 보았을 리가 없다. 특히 자코는 거만할뿐만 아니라 욱하는게 심해서 화도 잘내다보니 인간관계는 그야말로 바닥을 기었다. 친한 친구도 많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는 자코의 지병인 양극성장애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그와 함께 연주했던 재즈 기타계의 거장 존 스코필드조차도 "자신이 만나본 천재 아티스트 중에 유일하게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자코였다"고 회상하곤 한다.

3.1. 가족 관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기혼'''이었다. 2번 결혼했고 첫번째 부인 트레이시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13] 두었고[14] 두번째 부인 잉그리드와도 슬하에 2남을 두었다. 둘 다 쌍둥이다.
본인은 나름 가족을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개차반인 성격과 알콜/마약 중독 때문에 가정적으론 좋지 못했다. 부인들이 자코에게 술과 마약을 끊으라고 권유했지만 끝까지 거부하여 부인들과의 관계가 무척 나빴으며 불화도 심했다.
첫번째 부인 트레이시와는 술과 마약 문제 때문에 걸핏하면 말다툼을 했고 욱해서 부인을 상습적으로 때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부인과 말다툼하다 폭행하여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특히 소속 밴드였던 웨더 리포트의 일본 투어중에도 만취해서 동행한 아내와 언쟁을 벌이다 멤버들과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폭행하는 바람에[15] 공연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공연 자체를 다 말아먹었다. 이로 인해 이미지가 단단히 추락했고 결국 밴드의 리더인 조 자비눌에 의해 밴드에서 해고된다. 이 사건으로 자코는 이혼당하고 양육권과 주택 소유권을 빼앗긴다.
후에 잉그리드라는 여성과 두번째 결혼을 하여 쌍둥이까지 얻지만 술과 마약 문제로 다투다가 그 성질을 못이기고 잉그리드를 폭행하여 1985년에 두번째 이혼을 당하고 양육권도 빼앗기게 된다. 한마디로 개차반인 성격 때문에 결혼 생활을 다 말아먹었다.
잉그리드와의 '''친아들''' 펠릭스 파스토리우스가 있는데, 그도 아버지를 이어 베이시스트로 활약 중이다.[16]
아들 펠릭스 파스토리우스의 베이스 시연
쌍둥이중 한명인 줄리우스 파스토리우스는 드러머로 활동중이다. 참고로 그는 아들이있는데 할아버지를 매우 닮았다.

3.2. 마커스 밀러와의 관계


자코에 관한 마커스 밀러회상 # 자코 사후 마커스 밀러는 어느 인터뷰 중 자코와 자신을 비교해달라는 요청에 '''나는 그의 연주를 들으며 음표 하나하나까지 모두 분석했고 따라하고자 했다'''며 선배 베이시스트에게 존경을 표했다. 자코와 마커스에 관한 여러 이야기 중 하나.

4. 4현 베이스?


흔히 해외 베이스 커뮤니티에 가서 다현 베이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자코는 4현밖에 안썼다!! 4현만 있어도 니들보다 잘친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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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는 하이C 셋팅의 5현 어쿠스틱 베이스도 썼다.
사실 4현 베이스가 베이스의 시작이고, 기본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다현 베이스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쟤 봐라 겉멋만 들어가지고" "자코는 4현만 써도 너보다 잘침" 이라 말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다현 베이스는 말그대로 4현 보다 많은 수의 현으로 보다 폭넓은 음을 내기 위한 것이다.

5. 여담


메탈리카의 베이시스트 로버트 트루히요가 자코 파스토리우스의 팬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2012년경 자코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인 Jaco를 프로듀스 하였고, 자코 사망 직전에 분실되었으나 2006년에 다시 발견된 자코의 베이스 Bass of Doom을 입수하여 유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는데 성공하였다. #

[1] 어느 인터뷰에서 밝히길 '''"음표 하나하나를 분석해서 따라했다."'''고 한 적도 있다.[2] 두 사람은 매우 비슷한 삶을 살아서 자주 비교된다. 둘은 한 악기의 가능성을 크게 확장하였고, 마약 중독 경험이 있으며, 어이없는 사인으로 요절했다는 공통점이 있다.[3] 다만 프렛리스 베이스의 창시자는 자코가 아니며 그 이전에도 프렛리스 일렉트릭 베이스는 있었고, 연주자도 있었다.[4] 나무로 만든 악기는 습도에 매우 취약하다. 나무는 성격상 습기를 머금었다 뱉었다 하는데 그 와중에 변형이 생기기 때문. 그래서 악기 제작자들은 바디나 넥에 탑이나 피니쉬를 올려 변형을 막기도 한다. 하지만 콘트라 베이스의 경우 나무가 그대로 드러나는 악기라...[5] 이 일화는 남무성의 만화 <Jazz It Up>에서 다뤄지는데, 검증된 이야기는 아니다.[6] 팀의 오리지널 베이시스트 미로슬라프 비토우스에 이은 두번째 베이시스트였다. 이후 그는 퓨전 락 그룹 ‘산타나’의 베이시스트가 된다.[7] 1. 개요에 있는 흑백 이미지가 앨범자켓이다.[8] 이 무렵의 인터뷰 영상 #, 정상적인 인터뷰가 거의 불가능해서 억지로 달래가며 진행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9] 사실 이 클럽은 회원제 클럽이라서 회원만 들어올수 있는 클럽이었다. 자코는 이 클럽에 들어오기 전에 주변의 술집을 돌면서 술을 많이 마셔 이미 만취한 상태였다. 밴드에게 시비를 걸었을 때에는 이미 몸도 가누기 힘들만큼 만취해 있었다.[10] 처음엔 술주정꾼이 시비거는것으로 생각해 당장 나가라고 했는데 말안듣고 욕설하니까 클럽 밴드를 빡돌게 만들었다.[11] 자코가 사망한 후 2급 살인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자코가 시비걸고 행패부린것이 감안되어 22개월의 징역형과 5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며, 복역 4개월이 지난 후 좋은 수감 태도로 가석방된다. 사실 이는 자코의 잘못도 있는데 조용히 술만 마시고 갔다면 괜찮았는데 만취해서 괜한 시비를 걸고 패싸움까지 났으니 클럽 문지기 입장에선 할 일을 한것뿐이다.[12] 마커스 밀러와 팻 메스니는 그런 그의 인간성에도 불구하고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몇 안 되는 인물들이다.[13] 아들은 존이고 딸은 매리다. 마누라는 줘패도 자식 사랑은 각별했던지 솔로 2집에는 John and Mary 라는 곡을 만들어 실었고, 거기엔 존과 매리의 육성까지도 녹음했다.[14] 이 사람 첫 결혼을 19세에 했다.[15] 곁에 있던 동료들이 뜯어말려서 그의 폭행을 저지했다.[16] 펠릭스 파스토리우스는 밴드 Yellow Jackets 소속이었으며, 이 밴드 소속으로 2014년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 때 내한한 적이 있다. 2015년 이후로는 Yellow Jackets에서 나와 따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