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메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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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rick Bruce Metheny (1954.8.12~)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크게 성공했으며 2020년 기준 3개의 골드 디스크[1] 와 20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또한 팝에서부터 프리 재즈에 이르는 광범위한 음악적 스타일로 인해 10개의 다른 카테고리에서 그래미상을 수상한 유일한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독보적인 팬 층[2] 을 형성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내한 공연을 하는 몇 안 되는 해외 재즈 아티스트중 하나이다.
이름의 정확한 발음은 '메시니(/məˈθiːni/ mə-THEE-nee)' 지만 국내에서는 종종 '메스니'로 표기되고 있다.
덥수룩하고 부시시한 사자 머리와 일명 죄수복으로 불리는 스트라이프 티셔츠, 나이키나 뉴 밸런스등의 미국산 스니커즈, 청바지 차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최근에는 블랙진에 체크무늬 남방을 많이 입는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변화가 있어왔는데 그런 변화 속에서도 변치않고 그의 음악을 관통하는 하나의 느낌을 꼽자면 역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듯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감상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여행하는 듯한 느낌'의 근원은 재즈라는 복잡한 어법 안에서도 꼭 놓치지 않는 서정적인 멜로디 라인에서 찾을 수 있다.[3]
76년 솔로 데뷔, 78년 팻 메시니 그룹의 데뷔 이래로 80년대 초까지는 기타, 피아노, 베이스, 드럼 등 전통적인 구성의 악기로 단출하고 담백한 사운드를 그렸다면, 80년대 후반부터는 라틴/월드뮤직에 대한 관심과 향취가 진하게 느껴지고, 2000년대 이후로는 더욱 다양해진 국적의 멤버 구성[4] 에서도 보이듯이 그만의 스타일 위에 다양한 월드뮤직의 느낌을 실험하고 있다.
1954년 미국 미주리의 켄사스 시티 근교 리스 서밋(Lee’s Summit)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 마이크 메시니(Mike Metheny)와 함께 8살 때부터 트럼펫을 불기 시작했지만 자기는 형의 실력만큼은 절대 못 불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2살 때 동네 농부의 차고 세일에서 깁슨 ES-175 기타를 중고로 산 이후 기타로 갈아타게 된다. 공부는 집어치우고 하루에 8시간에서 12시간씩 기타 연습에 전념한 덕에 시작한지 1년 만에 다운비트지[5] 에서 주관하는 장학생 프로그램에 선발될 정도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 공부는 완전 포기하다시피 해서 프렌치 혼 연주를 한 밴드 특기활동 점수등으로 메꿔 18세에 리스 서밋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뒤 마이애미 대학교 기타학과에 진학하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학장이 바로 선생 자리를 제안했다는 전설이 있다.[6]
1년 뒤 1973년 보스턴 소재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버클리 음악대학에 가게되고 입학 등급 시험에서 들어가자마자 최고 등급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버클리 음악대학 부학장이 바로 전설적인 비브라폰 연주자인 게리 버튼(Gary Burton)이고 불과 19세에 불과한 그에게 버클리 역사상 최연소 조교(teaching assistant)자리를 준다.[7] 팻 메시니 성장기에 관한 영문 인터뷰
팻 메시니의 첫 레코딩 데뷔는 1974년 재즈 뮤지션 Paul Bley가 세운 Improvising Artists Label에서 발매한 앨범 <Jaco>에 사이드맨으로 참여하면서 이루어졌다[8] . 그 이전부터 가수 조니 미첼(Joni Mitchell)의 백 밴드를 할 때 만나게 된 비운의 천재 베이시스트 자코 파스토리우스(Jaco Pastorius)[9] 만나 친구가 되었고, 이후 1976년 아방가르드 재즈의 명가 ECM에서 발표된 팻의 솔로 데뷔 앨범 <Bright Size Life> 협업으로 이어진다.
ECM이라는 레이블의 특성 탓도 있겠지만, <Bright Size Life>는 정통 재즈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서정적이고 풋풋한 사운드가 특징. 그렇다고 신인다운 어설픔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기타와 베이스의 두 천재가 뿜어내는 테크닉적인 완성도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주는데,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1970년대 재즈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와 같은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록 재즈(Rock Jazz)나 Funk, 아방가르드, Fusion, 신디사이저를 적극 이용하는 경향 등 강렬하고 자극적인 사운드가 주를 이루던 당시의 재즈 씬에 <Bright Size Life>는 기타-베이스-드럼 3인조의 단촐한 구성이지만 서늘하면서도 매우 서정적인 멜로디, 넘치거나 흥분하지 않고 절제된 즉흥연주, 정돈된 사운드를 높은 수준으로 선보여 신선함을 주었다.
1977년, 역시 ECM에서 2집 <Watercolors>를 발매하는데, 이 때 그의 오랜 음악적 동반자가 될 피아니스트 라일 메이스(Lyle Mays)[10] 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1978년, 라일 메이스와 드럼의 댄 고틀리브(Dan Gottlieb), 베이스의 마크 이건(Mark Egan)과 더불어 하얀 표지의 앨범<Pat Metheny Group>[11] 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그룹 활동을 시작한다. 여전히 초기 70년대 그의 경향 그대로 서정적인 멜로디와 화려하지 않지만 쿨하고 잘 정돈된 사운드가 특징이다. 그는 이 앨범에 <Jaco>라는 트랙을 실어 자코 파스토리우스와의 우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첫 그룹 앨범 <Pat Metheny Group>이후 1979년 두 번째 그룹 앨범 <American Garage>를 발표한다. 딜레이 이펙트를 건 팻의 깁슨 ES-175(농부로부터 구입한 그때 그 기타 맞다)와 라일의 오버하임 신디사이저로 대표되는 사운드가 특징인 이 앨범은 첫 곡 (Cross the) Heartland가 인기를 끌며 빌보드 재즈 앰범 분야 1위에 오르는 등 큰 성공을 거둔다. 이후 라일과 다소 실험적인, 그러나 그들의 음악적 색깔이 강하게 드러난 듀엣 앨범 <As Falls Wichita, So Falls Wichita Falls>(1981, ECM)를 발표하며 잠시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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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 Metheny Group, Offramp, 1982, ECM
첫 그래미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앨범 <Offramp>(1982, ECM)를 통해서 그는 재즈계를 넘어 음악계 전반에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Turn Left(좌회전) 도로 표시가 인상적인 커버의 이 앨범은 팬들이 단연 첫 손에 꼽는 그의 대표작. 특히 2번 트랙 재즈 발라드 Are You Going With Me?에서 그는, 이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기타 신디사이저[12] 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며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기타가 가진 표현의 영역을 한 차원 확장했다는 찬사를 듣게된다.[13]
이 곡을 포함하여 어두우면서도 감미롭고 부드러운 기타 선율이 매력적인 Au Lait, 팝 뮤직의 대가 James Tyler를 위한 곡 James 등 귀에 친근하게 다가오는 곡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지만, 프리 재즈를 바탕으로 한 실험정신이 엿보이는 타이틀곡 Offramp는 상당히 난해하기도 하다.
이 앨범에서 팻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미국적인 사운드를 넘어 브라질 음악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이며 향후 나아갈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브라질 출신의 멀티 뮤지션 나나 바스콘셀로스 (Nana Vasconcelos)의 보컬을 포함한 여러 효과음이 앨범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에 큰 역할을 하며, 베이스에 스티브 로드비 (Steve Rodby)를 영입하여 라일 메이스를 포함한 팻 메시니 그룹의 핵심 3인방 체제를 구축한다.
팻은 1983년 두 장으로 구성된 첫 라이브 앨범 <Travels>를 거쳐 1984년 ECM 레이블에서의 마지막이 된 앨범 <First Circle>을 발표한다. 드러머를 폴 워티코(Paul Wertico)로 교체하고 아르헨티나 출신의 꽃미남 멀티 뮤지션[14][15][16] 페드로 아즈나(Pedro Aznar)를 영입하여 라틴 음악적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튜닝이 맞지 않는 트럼펫이나 삼바 타악기인 아고고 벨, 그리고 오드 미터[17] 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음악적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22/8 박자의 골수팬이면 다 따라한다는 박수소리로 시작하는 이 앨범의 타이틀곡 <The FIrst Circle>은 팻의 영롱한 어쿠스틱 기타와 페드로 아즈나의 시원한 보컬, 멜로디를 바탕으로 한 극적인 전개로 팻 메시니 그룹의 또 다른 대표곡으로 떠오른다.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팻은 레이블을 Geffen으로 옮기지만 이후 나올 두 개의 앨범을 포함하여 라틴/브라질 음악 3부작의 첫 앨범으로서 <First Circle>은 큰 의미를 지닌다.
1987년 발표된 <Still Life (Talking)>은 팻 메시니 그룹의 최고 히트작으로 떠오르며 그룹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앨범이 된다.
40분을 갓 넘는 비교적 짧은 러닝 타임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곡이 지금까지도 팻의 대표곡으로 남아있으며,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모습이 생생히 머릿속에 묘사되는 듯한 Last Train Home의 경우 라디오용 버전으로 편집되거나 광고음악으로 사용될 정도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팻은 ECM 레이블을 떠난 것에 대해 음악적 성향의 문제는 아니며, 단지 ECM이 스튜디오 사용에 대해 너무 엄격한 룰을 적용했기 때문에[18] 스튜디오 자체를 악기로 생각하는 그의 철학을 구현하기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9] 하지만 실내악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ECM의 절제된 분위기가 좀 더 큰 스케일의 음악을 시도하려는 팻의 포부와 맞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이 앨범을 작업하면서 데이비드 블레마이어스(David Blamires)와 마크 레드포드(Mark Ledford) 등 멀티 뮤지션 라인업을 대폭 보강하였고, 기타의 마이크로폰을 자신의 몸에 붙여서 녹음하는 실험을 하는 등 사운드에 대한 집념을 보여주었다. 전작 <First Circle>에서 70년대 그의 음악 스타일 위에 라틴풍의 사운드를 차용하기 시작했다면, <Still Life (Talking)>에서는 라틴 음악의 어법과 요소들을 본격적으로 수용,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퍼커션에서 많은 보강이 이루어졌으며 라틴 음악과 월드뮤직의 향취가 완연하다.
2년 뒤 1989년 발표된 <Letter from Home>은 전작인 <First Circle>과 <Still Life (Talking)>과 음악적인 연속성을 가지면서 더욱 원숙하게 발전시킨 앨범이다. 지난 앨범에서 잠시 쉬었던 페드로 아즈나가 다시 등장하여 멋진 보컬을 선보이며, 오프닝곡 Have You Heard, 물 흐르는 듯한 멜로디 전개가 일품인 Better Days Ahead, 감미로운 소품인 타이틀곡 Letter from Home 등의 대표곡을 선보인다. 전작의 향취는 그대로 간직하면서
전반적으로 좀 더 밝고 경쾌한 느낌의 곡들로 전개해 나간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그룹으로서 5번째 연속 그래미상 수상(Best Jazz Fusion Performance) 및 두 번째 연속 골드레코드 기록이라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1993년 발표된 그룹의 두 번째 라이브 앨범 <The Road To You>는 라틴/브라질 음악 3부작의 베스트 같은 성격으로, 그룹의 전성기 음악에 가장 빨리 친숙해질 수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1995년 발표된 We Live Here는 또 다른 의미로서의 삼부작 시작을 알리는 앨범이다. 이전의 삼부작이 라틴 음악이라는 일관성으로 묶인 ‘trilogy’로서의 삼부작이었다면, 이번에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각기 다른 방법론적 실험의 나열인 ‘triptyque’으로서의 삼부작이다. We Live Here에서 팻이 선보인 음악적 소스는 R&B/다운템포 분위기의 루프와 월드 뮤직의 조합이었는데, 그 결과로 상업적인 성공과 함께 너무 듣기 편한 재즈를 추구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다운템포 리듬이 가진 앰비언트 뮤직의 성향에 기인한 것이지 코드와 멜로디, 그리고 솔로의 전개가 들려주는 음악적 원숙미와 세련미는 이미 정점에 달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애시당초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을 탐구하고 그 지평을 넓히려는 팻 메시니 그룹의 작업을 정통 재즈가 지향하는 바에 빗대어 본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논쟁만 불러올 뿐이다.
이듬해 발매된 Quartet 앨범은 마치 허를 찌르듯 핵심 인원으로 돌아가 팻, 라일, 스티브, 폴 네 명 만으로 레코딩에 임한다. 최소의 작곡을 바탕으로 그 틈을 임프루비제이션이 채우는 식의 작업은 마치 정교하게 짜여진 구성에 온갖 악기를 있는 대로 끌어들여 큰 스케일의 음악을 만들어 온 지금까지의 방향을 완전히 뒤집어 보여주려는 듯한 도전의식이 엿보인다. 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 앨범과는 달리 Quartet은 라이브투어를 전혀 하지 않았다.[20]
소속 레이블을 워너 브라더스로 옮겨 1997년에 발표한 Imaginary Day는 인도네시아, 이란, 켈트 등 제3세계 전통 음악의 영향을 바탕으로 재즈와 월드 뮤직의 결합을 통해 음악적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간 모습을 보여준다. 기타 제작자 린다 맨저(Linda Manzer)가 팻을 위해 제작한 42현 피카소기타가 이때 처음 등장하며, 록뮤직과 드럼앤베이스의 요소도 가미되어 수록곡 The Roots Of Coincidence는 Best Rock Instrumental Performance 분야에서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멜로디 라인이 매우 인상적인 Follow Me는 지역 방송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CD 패키지가 매우 특이하여 모든 문자가 암호화 되어있다.[21]
한동안 다른 작업들로 바빴던 팻은 2002년, 5년 만에 새로운 라인업으로 그룹 앨범 Speaking of Now를 발표한다. First Circle 이후 그룹 전성기를 함께 했던 폴 워티코 대신, 멕시코 출신의 젊은 신동 드러머 안토니오 산체스(Antonio Sanchez)[22] 가 처음 등장하는 앨범이다. 또한 카메룬 출신의 멀티 뮤지션 리차드 보나(Richard Bona)[23] 와 베트남 출신의 아방가르드 트럼펫 주자 쿠옹 부(Cuong Vu)[24] 가 합세하여 특정 장르나 지역적 색채를 바탕으로한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다른, 음악 자체의 추상성에 좀 더 근접한 음악을 선보인다.
이러한 노력의 최고 정점이자 공식적으로 팻 메시니 그룹의 마지막 앨범이 된 작품이 2005년 논서치(Nonesuch) 레이블로 옮겨 발표한 The Way Up이다. 하모니카의 그레고어 마레(Gregoire Maret)가 새로운 멤버로 영입되었고, 리차드 보나는 작업에 참여하였지만 그룹 멤버가 아닌 게스트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앨범 전체가 68분짜리 한 곡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단지 구성상의 편의에 의해 네 개의 파트로 구분되어 있다. 지금까지 팻 메시니 그룹의 명성이 선명한 멜로디에 기반한 테마와 그 사이를 채우는 현란한 임프루비제이션으로 구성된 작곡 스타일에서 비롯되었다면, 이 앨범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구성을 오가며 테마와 임프루비제이션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팻과 라일이 같이 작업한 바 있는 현대 음악가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와 에버나드 웨버(Ebernard Weber)의 영향이 짙게 느껴진다. 라이브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랜 시간 스튜디오 레코딩 작업을 통해 만들어낸 앨범이라 프로모셔널 라이브를 위해 재구성을 하는 과정이 유난히 힘들었다는 후문. 라이브 비디오는 서울 LG 아트센터에서 촬영되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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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 Metheny, Secret Story, 1992, Geffen
팻의 솔로 프로젝트 중 가장 야심차고 스케일이 큰 앨범이다. 시기적으로는 그룹의 두 삼부작 사이인 1992년에 발표되었으며, 커다란 로드맵을 가진 그룹 프로젝트 사이에 좀 더 자유로운 조건에서 뮤지션으로서의 음악 여정에 방점을 찍으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과거와 현재 그룹 멤버는 물론 투스 틸레망(Toots Thielemans), 찰리 헤이든(Charlie Haden), 질 골드스타인(Gil Goldstein) 등의 유명한 뮤지션이 대거 참여하였고, [26] 몇몇 곡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 레코딩되었다. 재즈와 월드 뮤직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는 하나 진정한 의미로서의 크로스오버 또는 퓨전으로 보아야 하며,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팻의 능력이 가장 자유롭고 극적으로 드러난 앨범으로 볼 수 있다. 라이브 또한 매우 공들여 기획되었으며 동명의 비디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래미상 수상과 골드 디스크 기록은 덤. 2007년 보너스 디스크가 추가되어 재발매된 바 있다.
An Excerpt from The Orchestrion Project
진정한 의미의 솔로 앨범은 1979년 ECM에서 발표한 <New Chautauqua>가 처음인데, 어쿠스틱,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를 혼자 연주하였으며 더빙을 통해 완성하였다. 가장 흥미로운 시도는 2010년 발표된 <Orchestrion>으로, 솔로 프로젝트의 정점이자 음악 역사상 전무후무한 시도인 자동연주기계를 만들어 팻이 연주하는 기타를 제외한 모든 악기를 기계가 직접 연주하게 하였다. 거대한 괴물과 같은 기계에 둘러싸인 채 혼자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신디사이저와 컴퓨터 음원을 이용해 얼마든지 실제와 같은 음색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즘 이런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채택한 것에 대해 팻은 실제 악기 연주가 악기 자체와 공기 등의 환경과 상호작용할 때의 미묘한 불확실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실제 작업은 컴퓨터에서 미디 신호를 보내는 순간과 기계가 악기를 연주하여 소리를 내는 순간 사이의 딜레이/레이턴시를 해결하는데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한다.
팻은 재즈 기타리스트이기도 하지만 뉴에이지로 분류되는 어쿠스틱 기타 연주자의 면모 또한 가지고 있다. 1999년 저예산 영화 A Map of World의 사운드트랙 앨범은 비록 영화음악의 특성상 오케스트레이션이 가미되어 있지만 오프닝 곡을 포함하여 어쿠스틱 연주가 중심이 되는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2003년 발표한 One Quiet Night은 집에서 하룻밤 만에 바리톤 기타 하나를 가지고 녹음한 앨범이며 [27] 2011년 발표한 What’s It All About은 팻의 앨범 중 유일하게 오리지널 곡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은 연주곡 앨범이다. 두 앨범 모두 Best New Age Album 분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였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음악적 여정 사이사이, 팻은 보다 정통 재즈 형식에 가까운 작업을 발표해왔다. 팻의 첫 앨범도 사실 트리오 앨범이지만, 첫 번째 재즈 형식의 구성으로 발표한 앨범은 1980년 ECM에서 발표한 두 장짜리 퀸텟 앨범 80/81로, 지금은 작고한 색소폰의 마이클 브레커(Michael Brecker)와 드러머로서 최고봉에서 서 있는 잭 디조넷(Jack DeJohnette) 등이 참여하였다. 좀 더 정통 재즈에 가까운 첫 트리오 앨범은 찰리 헤이든(Charlie Haden)과 빌리 히긴스(Billy Higgins)와 같이 작업한 Rejoicing(1984, ECM)이다. 특이한 것은 프리 재즈의 상징인 오넷 콜맨(Ornette Coleman)이 작곡한 곡들은 역시 프리 재즈답게 다른 수록곡들과 비교하여 두드러지게 난해하다는 점이다. 이후 1990년 발표한 Question and Answer는 담백한 트리오 소품들로 채워져 있다.
본격적인 트리오 타이틀로 발표한 앨범은 2000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적 상징성을 앞세운 Trio 99 → 00과 그해 말 발표한 같은 트리오 구성의 라이브 앨범 Trio → Live로서, 드럼에 빌 스튜어트(Bill Stewart), 베이스에 래리 그레내이디어(Larry Grenadier) 등 당시 젊은 뮤지션들이 참여하여 기타가 리드하는 컨템포러리 재즈 트리오의 가능성을 탐구한 수작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팻은 그의 의도를 가장 잘 구현하는 천재 드러머 안토니오 산체스(Antonio Sanchez)를 만나 베이스 크리스찬 맥브라이드(Christian Mcbride)와 같이 2008년 Day Trip과 Tokyo Day Trip을 발표하였다.
Unity Band/Unity Group은 The Way Up 앨범을 마지막으로 Pat Metheny Group 활동을 잠정 중단한 이후 2010년대 팻의 음악적 탐구를 같이 하고 있는 팀이다. 역시 안토니오 산체스가 드럼을 담당하고 있으며 색소폰에 크리스 포터(Chris Potter), 베이스에 벤 윌리암스(Ben Williams), 그리고 Unity Group에서부터 참여한 멀티 뮤지션 귈리오 카르마시(Giulio Carmassi)가 현재의 멤버이다.
팻과 공동 작업한 아티스트들의 목록을 보면 컨템포러리 재즈의 역사가 보일 정도로 비중 있는 아티스트들이 많다. 이로써 팻이 현재 재즈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팻이 사이드맨으로 참여한 앨범 역시 일일이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몇 개 의미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팻 메시니가 처음 기타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선배 기타리스트는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28] 였다. 한동안 그의 주법을 따라하던 팻은 그러한 노력에 흉내내기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느끼고 자신만의 음악을 찾기 시작한다. 이후 오넷 콜맨(Ornette Coleman)의 프리 재즈에 깊은 감명을 받아 1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음악적 자유분방함을 얻게 된다. 이에 덧붙여 지역적인 조건으로부터 비롯된 웅장한 자연에 대한 서정적 감수성이 데뷔 시기 그의 음악적 스타일을 특징짓게 된다. 팻 메시니 그룹을 결성한 이후에는 종종 브라질에 체류하면서 브라질 음악의 여러 요소를 재즈와 융합하는 시도를 하는데, 이렇게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재구성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결국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월드 뮤직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음악적 집대성을 이루어낸다. 많은 이들이 팻의 음악이 마치 여행을 연상시키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세계 투어를 다니거나 음악적 탐구를 위해 끊임없이 여행을 하는 팻과 그룹 멤버들의 경험이 그들의 음악에 녹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0년대 들어서서는 지역성이 배제되고 음악 본연의 추상성이 강조된 실험적 재즈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으며, 최근에는 유니티 밴드의 결성을 통해 정통 재즈의 형식을 인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미래의 재즈가 나아가야 할 바를 탐구하고 있다.
덧붙일 것은 팻 메시니 그룹과 쿼텟, 유니티 밴드 등의 활동을 통해 일련의 연속성을 가지는 음악적 탐구에 매진하면서도, 순수한 프리 재즈적 실험이나 지극히 서정적인 어쿠스틱 기타 앨범, 데이비드 보위[29] 나 조니 미첼 등 타 장르 아티스트와의 콜래보레이션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을 간간히 발표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어마어마하게 폭 넓은 음악적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확실한 자신의 개성을 유지할 줄 아는 이 시대의 독보적 기타리스트임에는 틀림없다.
Pat Metheny playing Pikasso 42-string guitar
재즈 트럼펫/EVI (Electronic Vavle Instrument) 연주자인 형으로 마이크 메시니가 있고 모로코 출신의 사진 작가인 아내 라티파 아자 (Latifa Azhar)와 결혼하여 슬하에 세 명의 자녀가 있다. 라티파는 2014년부터 뉴욕에서 아트 갤러리 AZART를 운영하며 디렉터를 맡고 있다. 홈페이지[30] 에 가보면 팻 메시니가 사회적인 이슈와 환경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뉴욕에서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결혼 전에는 세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재즈 연주자답게 1년에 300일 이상 월드 투어를 돌아서 변변한 집도 없이 보스턴의 작업실에서 먹고 자며 대형 창고에 물품을 넣어놓고 생활했다고 한다. 지금은 가족들과 보낼 시간을 갖기 위해 투어 일정을 200일 정도로 줄였다고 한다. 메시니의 연주나 음악에는 언제나 따뜻함과 슬픔이 녹아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언제나 여행을 떠나는 듯한 고독한 사운드가 다소 사라진 듯한 인상이 있어 팬들로서는 아쉽기는 하다.
메시니는 오랜 기간 민주당 지지자였고 대중 앞에 자주 드러내지는 않지만 찰리 헤이든에 의하면 그의 정치적 성향이 무척 강하다고 한 바 있다. 종교는 무종교이나 어렸을 때는 집안에 유니티 교회(Unity Church)의 영향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니티 교회가 소재한 도시 이름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팻 메시니의 곡인 "Unity Village"나 색소포니스트 크리스 포터와의 프로젝트, Unity Band의 이름도 어디서 유래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뉴욕에 소재한 아바타 (전 파워 스테이션)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오케스트리온'과 '메시니-멜다우' 사운드 앨범들에 엔지니어로 참여한 바 있는 강효민씨에 따르면 앨범 작업 기간동안은 늘 같은 음식만 먹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작업 기간에 첫 메뉴가 케밥이었다고 하면 일주일 동안 같은 케밥만 시킨다고 한다. 덕분에 같이 일하는 엔지니어나 연주자들은 죽을 맛이라고. 지금은 나이가 들었지만 워낙 체력도 타고 나서 밤새 녹음을 진행할 때면 1.5리터짜리 다이어트 콕 한 병만 있으면 거뜬하다고 한다.
케니 지에 대한 의견을 묻는 한 팬의 질문에 솔직히 엄청나게 싫어한다는 내용을 자신의 웹사이트에 답변 형식으로 2000년도에 올렸다가 내렸는데 바로 퍼져서 20년이 지난 지금도 인터넷에 돌고 있다.
케니 지의 말도 안되는 상업주의적인 행동이 재즈를 망치고 있다고 분개하는 내용. 실제 이 인터넷 문답 이전에 폴란드 TV에서 케니 지가 십대들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물은 인터뷰에서 이 부분만 발췌해 내보낸 것이 발단이 되었다.
케니 지가 루이 암스트릉의 곡에 색소폰 오버더빙을 해서 음반을 낸 것을 보고 타가수(토니 베넷 등등)들도 했지만, 적어도 이리 음악성이 없진 않았다며 만나거나 같이 공연한다면 들고있는 기타가 부서질 때까지 머리를 내려칠 거라고 말했다. 거기다 자기 주변인들한테 케니 지 공연이나 음반에서 연주하지도 말라고 할거고 자기도 케니 지와 절대 같이 작업할 일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여기에 케니 지는 "나는 원래 연예인이고 대중을 즐겁게 해주는 엔터네이너일 뿐"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자기 자신에 대한 조크로 아우디나 스니커즈 초코바 광고에 코믹하게 망가지는 모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최근에는 좋아하는 골프를 치러 많이 다니고 공연도 주기적으로 하기는 하지만 2015년을 마지막으로 음반 안낸지도 꽤 되었다.
아무튼 팻 메시니의 답문을 일부 살펴보면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얘기들을 했다: "케니 지는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질렀다. 무슨 시체 강간도 아니고 죽은 사람의 연주에 자신의 연주를 오버더빙하는 일을 했다. 이전에 나탈리 콜도 냇킹 콜의 녹음에 그런 작업을 했지만 그건 자신의 아버지였고 토니 베넷도 빌리 홀리데이의 녹음에 오버더빙을 한 것도 내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예술적으로 비슷한 레벨 사람들의 작업이라 크게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케니 지가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거장인 루이 암스트롱의 연주에 자신의 하급 연주를 갖다 붙인 것은 너무나도 오만방자한 믿을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것은 재즈를 연주하는 모든 음악인들이 발을 딛고 있는 가장 신성한 루이 암스트롱이라는 땅에 불법 침입한 것과 같으며 루이 암스트롱에게서 감동을 받아서 그의 뜻을 따르며 열심히 음악에 정진하고 있는 모든 재즈 뮤지션들을 엿먹인 것이다. 나는 내 주변의 모든이들에게 앞으로 케니 지의 공연이나 앨범에서 연주하지 말라고 했으며 나 역시도 그와 같은 무대에 서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를 만난다면 그에게 직접 이 말을 할 것이다. 내 기타가 부서지도록 그의 머리통을 후려치면서 말이다."
"나는 케니 지가 재즈 뮤지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케니 지가 솔로 데뷔전에 제프 로버의 밴드의 일원일때 내 콘서트의 오프닝으로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때의 인상은 재즈보다는 팝적인 연주를 하는 색소폰연주자들 - 데이빗 샌본,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을 많이 연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들만큼 뛰어난 연주자도 아니었다. 케니 지는 첫째로 리듬에 있어서 큰 문제가 있는 연주자였고 하모니와 멜로디를 구사하는데 있어서 밑천이 너무나도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 하고 있는것은 펜타토닉 5음계를 이용한 단순한 블루스 패턴 연주였다. 한마디로 그는 밴드 내에서 솔로이스트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역할 만을 하는 플레이어였고 제프 로버 역시 케니 지를 실제 연주할때는 그냥 서있는 정도로의 역할만 주었다."
"케니 지가 그나마 잘 하는건 그가 주로 구사하는 2~3가지 테크닉들 (한 음 길게 불기, 빠르게 불기-빠르게 부는 동안 화성도 맞지 않지만...)로 공연에서 관중들을 일시적으로 흥분시키는것이다. 그리고 요즘 들어서 느끼는건데 그가 부는 음은 계속 샾이 돼서 음정도 맞지 않는다."
"어차피 대중은 재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있고 세밀하게 재즈를 연주하지 않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 이미지만 보여주면 재즈라고 생각한다. 케니 지는 그런면에서 재즈 뮤지션이라고 대중이 생각하는데 내가 음악인으로서 생각할때 그는 재즈 뮤지션이 아니다." - 팻 메시니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영문 문답 전문
“재즈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루이 암스트롱에 대한 엄청난 존경심도 알겠고 엘리트 재즈 뮤지션으로서 엄청난 자존심도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재즈계에서 팻 메시니의 영향력과 위상이 엄청나기는 해도 그의 컨템포러리 재즈가 솔직히 순수 즉흥이라기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릭(lick)에 기반한 연주가 많아서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는 딱히 재즈로 평가하지는 않는데다가, 죽어가는 재즈 시장에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절충안으로 "Last Train Home"처럼 듣기 편한 연주로 재즈 앨범 최초로 골드 앨범 (50만 장 이상 판매)까지 달성하는 등 엄청 팔았으면서 거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Last Train Home"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1989년 미국 남부의 수퍼마켓 체인인 퍼블릭스의 추수감사절 연휴기간 광고에 나왔다고 공연 때 이 곡을 가리켜 "퍼블릭스 음악"이라고 메시니 스스로 농담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위의 문답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일에 평론가들은 다 어디서 뭐하고 있냐는 비난에 뉴욕 타임스에서도 좀 뻘쭘했는지 케니 지 음악을 상업적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대중의 눈으로 보면 다 대중문화의 일부인데 팻 메시니처럼 천재적인 뮤지션이 케니 지처럼 뭐 별 의미도 없는 음악에 그러냐고 칼럼을 내보냈다. 포인트는 듣는 이에게 음악적인 배고픔이 있냐 없냐는 것.
케니 지도 한 인터뷰에서 이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그(팻 메스니)의 얘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때는 그가 농담한 줄 알았다. 그 정도 되는 뮤지션이 다른 음악인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행위에 대해 실망했다. 더 점잖은 표현도 있을텐데 그런 방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뭐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또 그 일을 좋아하면 되는 것 아닌가. 사람들 모두 그 음반 작업(루이 암스트롱 오버더빙 음반)을 싫다고 하지 않고 내 음반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중 하나라고 말해주니까."
한편 메시니는 인터넷 혁명 이후 시장이 아예 사라져 버리다시피 한 어두운 재즈계의 현실 속에서도 책임감을 가지고 후진 양성을 위해 크게 힘쓰기도 한다. 2012년 커네티컷 주 노르위치에서 열린 내셔널 기타 워크샵 협회가 도산하여 매년 열리던 팻 메시니 여름 음악 워크샵을 못열게 되어버리자 전세계에서 비행기를 타고 자신에게 배우러 온 43명의 기타리스트 학생들을 위한 4일간의 행사 비용을 사비로 내기도 했다. 2013년 1월 다운비트지와의 인터뷰에서 메시니는 며칠간 밤새 학생들을 위한 작곡 과제등을 준비하고 패이는 도리어 자기가 냈다고 농담을 해 훈훈하게 하기도 했다.
팻 메시니는 1996년도에 버클리음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
2018년에는 미국 예술 기금(National Enodowment for the Arts)에서 재즈 뮤지션에세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NEA 재즈 마스터상을 받았다.
Patrick Bruce Metheny (1954.8.12~)
1. 개요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크게 성공했으며 2020년 기준 3개의 골드 디스크[1] 와 20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또한 팝에서부터 프리 재즈에 이르는 광범위한 음악적 스타일로 인해 10개의 다른 카테고리에서 그래미상을 수상한 유일한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독보적인 팬 층[2] 을 형성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내한 공연을 하는 몇 안 되는 해외 재즈 아티스트중 하나이다.
이름의 정확한 발음은 '메시니(/məˈθiːni/ mə-THEE-nee)' 지만 국내에서는 종종 '메스니'로 표기되고 있다.
덥수룩하고 부시시한 사자 머리와 일명 죄수복으로 불리는 스트라이프 티셔츠, 나이키나 뉴 밸런스등의 미국산 스니커즈, 청바지 차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최근에는 블랙진에 체크무늬 남방을 많이 입는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변화가 있어왔는데 그런 변화 속에서도 변치않고 그의 음악을 관통하는 하나의 느낌을 꼽자면 역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듯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감상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여행하는 듯한 느낌'의 근원은 재즈라는 복잡한 어법 안에서도 꼭 놓치지 않는 서정적인 멜로디 라인에서 찾을 수 있다.[3]
76년 솔로 데뷔, 78년 팻 메시니 그룹의 데뷔 이래로 80년대 초까지는 기타, 피아노, 베이스, 드럼 등 전통적인 구성의 악기로 단출하고 담백한 사운드를 그렸다면, 80년대 후반부터는 라틴/월드뮤직에 대한 관심과 향취가 진하게 느껴지고, 2000년대 이후로는 더욱 다양해진 국적의 멤버 구성[4] 에서도 보이듯이 그만의 스타일 위에 다양한 월드뮤직의 느낌을 실험하고 있다.
2. 출생과 성장
1954년 미국 미주리의 켄사스 시티 근교 리스 서밋(Lee’s Summit)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 마이크 메시니(Mike Metheny)와 함께 8살 때부터 트럼펫을 불기 시작했지만 자기는 형의 실력만큼은 절대 못 불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2살 때 동네 농부의 차고 세일에서 깁슨 ES-175 기타를 중고로 산 이후 기타로 갈아타게 된다. 공부는 집어치우고 하루에 8시간에서 12시간씩 기타 연습에 전념한 덕에 시작한지 1년 만에 다운비트지[5] 에서 주관하는 장학생 프로그램에 선발될 정도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 공부는 완전 포기하다시피 해서 프렌치 혼 연주를 한 밴드 특기활동 점수등으로 메꿔 18세에 리스 서밋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뒤 마이애미 대학교 기타학과에 진학하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학장이 바로 선생 자리를 제안했다는 전설이 있다.[6]
1년 뒤 1973년 보스턴 소재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버클리 음악대학에 가게되고 입학 등급 시험에서 들어가자마자 최고 등급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버클리 음악대학 부학장이 바로 전설적인 비브라폰 연주자인 게리 버튼(Gary Burton)이고 불과 19세에 불과한 그에게 버클리 역사상 최연소 조교(teaching assistant)자리를 준다.[7] 팻 메시니 성장기에 관한 영문 인터뷰
3. 음악적 여정
3.1. 솔로 데뷔와 초기 ECM 시절
팻 메시니의 첫 레코딩 데뷔는 1974년 재즈 뮤지션 Paul Bley가 세운 Improvising Artists Label에서 발매한 앨범 <Jaco>에 사이드맨으로 참여하면서 이루어졌다[8] . 그 이전부터 가수 조니 미첼(Joni Mitchell)의 백 밴드를 할 때 만나게 된 비운의 천재 베이시스트 자코 파스토리우스(Jaco Pastorius)[9] 만나 친구가 되었고, 이후 1976년 아방가르드 재즈의 명가 ECM에서 발표된 팻의 솔로 데뷔 앨범 <Bright Size Life> 협업으로 이어진다.
ECM이라는 레이블의 특성 탓도 있겠지만, <Bright Size Life>는 정통 재즈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서정적이고 풋풋한 사운드가 특징. 그렇다고 신인다운 어설픔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기타와 베이스의 두 천재가 뿜어내는 테크닉적인 완성도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주는데,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1970년대 재즈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와 같은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록 재즈(Rock Jazz)나 Funk, 아방가르드, Fusion, 신디사이저를 적극 이용하는 경향 등 강렬하고 자극적인 사운드가 주를 이루던 당시의 재즈 씬에 <Bright Size Life>는 기타-베이스-드럼 3인조의 단촐한 구성이지만 서늘하면서도 매우 서정적인 멜로디, 넘치거나 흥분하지 않고 절제된 즉흥연주, 정돈된 사운드를 높은 수준으로 선보여 신선함을 주었다.
1977년, 역시 ECM에서 2집 <Watercolors>를 발매하는데, 이 때 그의 오랜 음악적 동반자가 될 피아니스트 라일 메이스(Lyle Mays)[10] 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1978년, 라일 메이스와 드럼의 댄 고틀리브(Dan Gottlieb), 베이스의 마크 이건(Mark Egan)과 더불어 하얀 표지의 앨범<Pat Metheny Group>[11] 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그룹 활동을 시작한다. 여전히 초기 70년대 그의 경향 그대로 서정적인 멜로디와 화려하지 않지만 쿨하고 잘 정돈된 사운드가 특징이다. 그는 이 앨범에 <Jaco>라는 트랙을 실어 자코 파스토리우스와의 우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첫 그룹 앨범 <Pat Metheny Group>이후 1979년 두 번째 그룹 앨범 <American Garage>를 발표한다. 딜레이 이펙트를 건 팻의 깁슨 ES-175(농부로부터 구입한 그때 그 기타 맞다)와 라일의 오버하임 신디사이저로 대표되는 사운드가 특징인 이 앨범은 첫 곡 (Cross the) Heartland가 인기를 끌며 빌보드 재즈 앰범 분야 1위에 오르는 등 큰 성공을 거둔다. 이후 라일과 다소 실험적인, 그러나 그들의 음악적 색깔이 강하게 드러난 듀엣 앨범 <As Falls Wichita, So Falls Wichita Falls>(1981, ECM)를 발표하며 잠시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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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 Metheny Group, Offramp, 1982, ECM
첫 그래미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앨범 <Offramp>(1982, ECM)를 통해서 그는 재즈계를 넘어 음악계 전반에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Turn Left(좌회전) 도로 표시가 인상적인 커버의 이 앨범은 팬들이 단연 첫 손에 꼽는 그의 대표작. 특히 2번 트랙 재즈 발라드 Are You Going With Me?에서 그는, 이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기타 신디사이저[12] 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며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기타가 가진 표현의 영역을 한 차원 확장했다는 찬사를 듣게된다.[13]
이 곡을 포함하여 어두우면서도 감미롭고 부드러운 기타 선율이 매력적인 Au Lait, 팝 뮤직의 대가 James Tyler를 위한 곡 James 등 귀에 친근하게 다가오는 곡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지만, 프리 재즈를 바탕으로 한 실험정신이 엿보이는 타이틀곡 Offramp는 상당히 난해하기도 하다.
이 앨범에서 팻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미국적인 사운드를 넘어 브라질 음악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이며 향후 나아갈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브라질 출신의 멀티 뮤지션 나나 바스콘셀로스 (Nana Vasconcelos)의 보컬을 포함한 여러 효과음이 앨범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에 큰 역할을 하며, 베이스에 스티브 로드비 (Steve Rodby)를 영입하여 라일 메이스를 포함한 팻 메시니 그룹의 핵심 3인방 체제를 구축한다.
3.2. 팻 메시니 그룹의 라틴/브라질 삼부작
팻은 1983년 두 장으로 구성된 첫 라이브 앨범 <Travels>를 거쳐 1984년 ECM 레이블에서의 마지막이 된 앨범 <First Circle>을 발표한다. 드러머를 폴 워티코(Paul Wertico)로 교체하고 아르헨티나 출신의 꽃미남 멀티 뮤지션[14][15][16] 페드로 아즈나(Pedro Aznar)를 영입하여 라틴 음악적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튜닝이 맞지 않는 트럼펫이나 삼바 타악기인 아고고 벨, 그리고 오드 미터[17] 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음악적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22/8 박자의 골수팬이면 다 따라한다는 박수소리로 시작하는 이 앨범의 타이틀곡 <The FIrst Circle>은 팻의 영롱한 어쿠스틱 기타와 페드로 아즈나의 시원한 보컬, 멜로디를 바탕으로 한 극적인 전개로 팻 메시니 그룹의 또 다른 대표곡으로 떠오른다.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팻은 레이블을 Geffen으로 옮기지만 이후 나올 두 개의 앨범을 포함하여 라틴/브라질 음악 3부작의 첫 앨범으로서 <First Circle>은 큰 의미를 지닌다.
1987년 발표된 <Still Life (Talking)>은 팻 메시니 그룹의 최고 히트작으로 떠오르며 그룹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앨범이 된다.
40분을 갓 넘는 비교적 짧은 러닝 타임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곡이 지금까지도 팻의 대표곡으로 남아있으며,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모습이 생생히 머릿속에 묘사되는 듯한 Last Train Home의 경우 라디오용 버전으로 편집되거나 광고음악으로 사용될 정도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팻은 ECM 레이블을 떠난 것에 대해 음악적 성향의 문제는 아니며, 단지 ECM이 스튜디오 사용에 대해 너무 엄격한 룰을 적용했기 때문에[18] 스튜디오 자체를 악기로 생각하는 그의 철학을 구현하기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9] 하지만 실내악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ECM의 절제된 분위기가 좀 더 큰 스케일의 음악을 시도하려는 팻의 포부와 맞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이 앨범을 작업하면서 데이비드 블레마이어스(David Blamires)와 마크 레드포드(Mark Ledford) 등 멀티 뮤지션 라인업을 대폭 보강하였고, 기타의 마이크로폰을 자신의 몸에 붙여서 녹음하는 실험을 하는 등 사운드에 대한 집념을 보여주었다. 전작 <First Circle>에서 70년대 그의 음악 스타일 위에 라틴풍의 사운드를 차용하기 시작했다면, <Still Life (Talking)>에서는 라틴 음악의 어법과 요소들을 본격적으로 수용,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퍼커션에서 많은 보강이 이루어졌으며 라틴 음악과 월드뮤직의 향취가 완연하다.
2년 뒤 1989년 발표된 <Letter from Home>은 전작인 <First Circle>과 <Still Life (Talking)>과 음악적인 연속성을 가지면서 더욱 원숙하게 발전시킨 앨범이다. 지난 앨범에서 잠시 쉬었던 페드로 아즈나가 다시 등장하여 멋진 보컬을 선보이며, 오프닝곡 Have You Heard, 물 흐르는 듯한 멜로디 전개가 일품인 Better Days Ahead, 감미로운 소품인 타이틀곡 Letter from Home 등의 대표곡을 선보인다. 전작의 향취는 그대로 간직하면서
전반적으로 좀 더 밝고 경쾌한 느낌의 곡들로 전개해 나간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그룹으로서 5번째 연속 그래미상 수상(Best Jazz Fusion Performance) 및 두 번째 연속 골드레코드 기록이라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1993년 발표된 그룹의 두 번째 라이브 앨범 <The Road To You>는 라틴/브라질 음악 3부작의 베스트 같은 성격으로, 그룹의 전성기 음악에 가장 빨리 친숙해질 수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3.3. 팻 메시니 그룹의 90년대 후반 삼부작
1995년 발표된 We Live Here는 또 다른 의미로서의 삼부작 시작을 알리는 앨범이다. 이전의 삼부작이 라틴 음악이라는 일관성으로 묶인 ‘trilogy’로서의 삼부작이었다면, 이번에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각기 다른 방법론적 실험의 나열인 ‘triptyque’으로서의 삼부작이다. We Live Here에서 팻이 선보인 음악적 소스는 R&B/다운템포 분위기의 루프와 월드 뮤직의 조합이었는데, 그 결과로 상업적인 성공과 함께 너무 듣기 편한 재즈를 추구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다운템포 리듬이 가진 앰비언트 뮤직의 성향에 기인한 것이지 코드와 멜로디, 그리고 솔로의 전개가 들려주는 음악적 원숙미와 세련미는 이미 정점에 달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애시당초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을 탐구하고 그 지평을 넓히려는 팻 메시니 그룹의 작업을 정통 재즈가 지향하는 바에 빗대어 본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논쟁만 불러올 뿐이다.
이듬해 발매된 Quartet 앨범은 마치 허를 찌르듯 핵심 인원으로 돌아가 팻, 라일, 스티브, 폴 네 명 만으로 레코딩에 임한다. 최소의 작곡을 바탕으로 그 틈을 임프루비제이션이 채우는 식의 작업은 마치 정교하게 짜여진 구성에 온갖 악기를 있는 대로 끌어들여 큰 스케일의 음악을 만들어 온 지금까지의 방향을 완전히 뒤집어 보여주려는 듯한 도전의식이 엿보인다. 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 앨범과는 달리 Quartet은 라이브투어를 전혀 하지 않았다.[20]
소속 레이블을 워너 브라더스로 옮겨 1997년에 발표한 Imaginary Day는 인도네시아, 이란, 켈트 등 제3세계 전통 음악의 영향을 바탕으로 재즈와 월드 뮤직의 결합을 통해 음악적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간 모습을 보여준다. 기타 제작자 린다 맨저(Linda Manzer)가 팻을 위해 제작한 42현 피카소기타가 이때 처음 등장하며, 록뮤직과 드럼앤베이스의 요소도 가미되어 수록곡 The Roots Of Coincidence는 Best Rock Instrumental Performance 분야에서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멜로디 라인이 매우 인상적인 Follow Me는 지역 방송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CD 패키지가 매우 특이하여 모든 문자가 암호화 되어있다.[21]
3.4. 2000년대의 팻 메시니 그룹
한동안 다른 작업들로 바빴던 팻은 2002년, 5년 만에 새로운 라인업으로 그룹 앨범 Speaking of Now를 발표한다. First Circle 이후 그룹 전성기를 함께 했던 폴 워티코 대신, 멕시코 출신의 젊은 신동 드러머 안토니오 산체스(Antonio Sanchez)[22] 가 처음 등장하는 앨범이다. 또한 카메룬 출신의 멀티 뮤지션 리차드 보나(Richard Bona)[23] 와 베트남 출신의 아방가르드 트럼펫 주자 쿠옹 부(Cuong Vu)[24] 가 합세하여 특정 장르나 지역적 색채를 바탕으로한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다른, 음악 자체의 추상성에 좀 더 근접한 음악을 선보인다.
이러한 노력의 최고 정점이자 공식적으로 팻 메시니 그룹의 마지막 앨범이 된 작품이 2005년 논서치(Nonesuch) 레이블로 옮겨 발표한 The Way Up이다. 하모니카의 그레고어 마레(Gregoire Maret)가 새로운 멤버로 영입되었고, 리차드 보나는 작업에 참여하였지만 그룹 멤버가 아닌 게스트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앨범 전체가 68분짜리 한 곡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단지 구성상의 편의에 의해 네 개의 파트로 구분되어 있다. 지금까지 팻 메시니 그룹의 명성이 선명한 멜로디에 기반한 테마와 그 사이를 채우는 현란한 임프루비제이션으로 구성된 작곡 스타일에서 비롯되었다면, 이 앨범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구성을 오가며 테마와 임프루비제이션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팻과 라일이 같이 작업한 바 있는 현대 음악가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와 에버나드 웨버(Ebernard Weber)의 영향이 짙게 느껴진다. 라이브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랜 시간 스튜디오 레코딩 작업을 통해 만들어낸 앨범이라 프로모셔널 라이브를 위해 재구성을 하는 과정이 유난히 힘들었다는 후문. 라이브 비디오는 서울 LG 아트센터에서 촬영되었다.[25]
3.5. 솔로 프로젝트: <Secret Story>(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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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 Metheny, Secret Story, 1992, Geffen
팻의 솔로 프로젝트 중 가장 야심차고 스케일이 큰 앨범이다. 시기적으로는 그룹의 두 삼부작 사이인 1992년에 발표되었으며, 커다란 로드맵을 가진 그룹 프로젝트 사이에 좀 더 자유로운 조건에서 뮤지션으로서의 음악 여정에 방점을 찍으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과거와 현재 그룹 멤버는 물론 투스 틸레망(Toots Thielemans), 찰리 헤이든(Charlie Haden), 질 골드스타인(Gil Goldstein) 등의 유명한 뮤지션이 대거 참여하였고, [26] 몇몇 곡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 레코딩되었다. 재즈와 월드 뮤직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는 하나 진정한 의미로서의 크로스오버 또는 퓨전으로 보아야 하며,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팻의 능력이 가장 자유롭고 극적으로 드러난 앨범으로 볼 수 있다. 라이브 또한 매우 공들여 기획되었으며 동명의 비디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래미상 수상과 골드 디스크 기록은 덤. 2007년 보너스 디스크가 추가되어 재발매된 바 있다.
3.6. 솔로 프로젝트: 원 맨 밴드 <Orchestrion>(2010)
An Excerpt from The Orchestrion Project
진정한 의미의 솔로 앨범은 1979년 ECM에서 발표한 <New Chautauqua>가 처음인데, 어쿠스틱,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를 혼자 연주하였으며 더빙을 통해 완성하였다. 가장 흥미로운 시도는 2010년 발표된 <Orchestrion>으로, 솔로 프로젝트의 정점이자 음악 역사상 전무후무한 시도인 자동연주기계를 만들어 팻이 연주하는 기타를 제외한 모든 악기를 기계가 직접 연주하게 하였다. 거대한 괴물과 같은 기계에 둘러싸인 채 혼자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신디사이저와 컴퓨터 음원을 이용해 얼마든지 실제와 같은 음색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즘 이런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채택한 것에 대해 팻은 실제 악기 연주가 악기 자체와 공기 등의 환경과 상호작용할 때의 미묘한 불확실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실제 작업은 컴퓨터에서 미디 신호를 보내는 순간과 기계가 악기를 연주하여 소리를 내는 순간 사이의 딜레이/레이턴시를 해결하는데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한다.
3.7. 솔로 프로젝트: 어쿠스틱 소품
팻은 재즈 기타리스트이기도 하지만 뉴에이지로 분류되는 어쿠스틱 기타 연주자의 면모 또한 가지고 있다. 1999년 저예산 영화 A Map of World의 사운드트랙 앨범은 비록 영화음악의 특성상 오케스트레이션이 가미되어 있지만 오프닝 곡을 포함하여 어쿠스틱 연주가 중심이 되는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2003년 발표한 One Quiet Night은 집에서 하룻밤 만에 바리톤 기타 하나를 가지고 녹음한 앨범이며 [27] 2011년 발표한 What’s It All About은 팻의 앨범 중 유일하게 오리지널 곡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은 연주곡 앨범이다. 두 앨범 모두 Best New Age Album 분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였다.
3.8. 트리오, 쿼텟, 퀸텟 프로젝트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음악적 여정 사이사이, 팻은 보다 정통 재즈 형식에 가까운 작업을 발표해왔다. 팻의 첫 앨범도 사실 트리오 앨범이지만, 첫 번째 재즈 형식의 구성으로 발표한 앨범은 1980년 ECM에서 발표한 두 장짜리 퀸텟 앨범 80/81로, 지금은 작고한 색소폰의 마이클 브레커(Michael Brecker)와 드러머로서 최고봉에서 서 있는 잭 디조넷(Jack DeJohnette) 등이 참여하였다. 좀 더 정통 재즈에 가까운 첫 트리오 앨범은 찰리 헤이든(Charlie Haden)과 빌리 히긴스(Billy Higgins)와 같이 작업한 Rejoicing(1984, ECM)이다. 특이한 것은 프리 재즈의 상징인 오넷 콜맨(Ornette Coleman)이 작곡한 곡들은 역시 프리 재즈답게 다른 수록곡들과 비교하여 두드러지게 난해하다는 점이다. 이후 1990년 발표한 Question and Answer는 담백한 트리오 소품들로 채워져 있다.
본격적인 트리오 타이틀로 발표한 앨범은 2000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적 상징성을 앞세운 Trio 99 → 00과 그해 말 발표한 같은 트리오 구성의 라이브 앨범 Trio → Live로서, 드럼에 빌 스튜어트(Bill Stewart), 베이스에 래리 그레내이디어(Larry Grenadier) 등 당시 젊은 뮤지션들이 참여하여 기타가 리드하는 컨템포러리 재즈 트리오의 가능성을 탐구한 수작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팻은 그의 의도를 가장 잘 구현하는 천재 드러머 안토니오 산체스(Antonio Sanchez)를 만나 베이스 크리스찬 맥브라이드(Christian Mcbride)와 같이 2008년 Day Trip과 Tokyo Day Trip을 발표하였다.
Unity Band/Unity Group은 The Way Up 앨범을 마지막으로 Pat Metheny Group 활동을 잠정 중단한 이후 2010년대 팻의 음악적 탐구를 같이 하고 있는 팀이다. 역시 안토니오 산체스가 드럼을 담당하고 있으며 색소폰에 크리스 포터(Chris Potter), 베이스에 벤 윌리암스(Ben Williams), 그리고 Unity Group에서부터 참여한 멀티 뮤지션 귈리오 카르마시(Giulio Carmassi)가 현재의 멤버이다.
3.9. 콜래보레이션
팻과 공동 작업한 아티스트들의 목록을 보면 컨템포러리 재즈의 역사가 보일 정도로 비중 있는 아티스트들이 많다. 이로써 팻이 현재 재즈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색소포니스트 오넷 콜맨(Ornette Coleman)과 같이 작업한 Song X(1986, Geffen)는 팻이 가진 프리 재즈의 정신이 남김없이 드러난 괴작으로, 솔직히 쉽게 즐길 수 있는 앨범은 아니다 (셩격은 좀 다르지만 팻의 비교적 덜 알려진 아방가르드 앨범들 중 솔로 앨범 "Zero Tolerance for Silence"나 영국 기타리스트 데렉 베일리와 함께 한 "Sign of Four"도 마찬가지). 2005년에 미공개 트랙 6곡이 추가된 20주년 기념 음반이 발매된 바 있다. "Song X"는 비교적 듣기 편하고 서사가 있는 팻 메시니 그룹 음악을 중심으로 듣는 감상자들은 접근하기 어렵지만 재즈 평론가나 매니아, 전공자들에게는 뛰어난 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 같은 업계의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John Scofield)와 같이 작업한 I Can See Your House from Here(1994, Blue Note)는 두 기타의 숨막히는 듯 한 협연으로 많은 기타 팬들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서로 음악적 색깔이 확연히 다른 두 아티스트이건만 이 앨범에서만은 묘한 절충점에서 만나 각자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지점을 향해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 같은 고향 출신의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Charlie Haden)과 같이 작업한 Beyond the Missouri Sky (Short Stories, 1997, Verve)는 대륙적 서정성의 진수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앨범이다. 모두에게 익숙한 시네마 천국의 테마를 비롯하여 기타와 베이스가 펼치는 넉넉하면서도 섬세한 협주는 재즈를 어렵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렵지 않게 다가설 수 있는 대중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재즈 앨범의 전형과도 같다.
- 존 스코필드가 비슷한 연배의 동료라면 짐 홀(Jim Hall)은 재즈 기타라는 장르를 개척한 대 선배 중 한명이다. 팻 메스니는 기타 주법에서 짐 홀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해 왔는데, 이를테면 짐 홀은 잔향이 지저분하게 나는 것을 싫어해서 솔로 플레이 때 줄을 바꾸지 않고 최대한 한 줄에서 운지만 바꿔서 연주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팻 역시 짐 홀의 영향으로 이러한 주법을 즐겨 쓴다고 종종 밝혀 왔다. 그와의 협주는 팻이 오래 전부터 꿈꿔왔는데, 1999년 실현되었다. 신세대와 구세대를 상징하는 두 거장의 이름을 타이틀로 달고 나온 앨범에는 스튜디오 레코딩 11곡과 라이브 레코딩 6곡이 담겨있다. 1930년생인 짐 홀은 2013년 타계하였다.
- 폴란드의 국민가수 안나 마리아 조펙(Anna Maria Jopek)과 같이 작업한 Upojenie(2002)는 Are You Going with Me?와 같은 친숙한 팻의 곡을 보컬 버전으로 즐길 수 있는 색다른 앨범이다. 폴란드 버전(Warner)과 인터내셔널 버전(Nonesuch) 두 가지가 있다.
- 브래드 멜다우(Brad Mehldau)는 팻의 음악을 들으며 자란 비교적 젊은 세대의 피아니스트이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브래드 멜다우의 연주를 들은 팻은 연주의 서정성과 독창성에 반해서 공동 작업을 제안하였고, 브래드는 당연히 제안을 수락하였다. 첫 번째 앨범(2006)에는 피아노와 기타의 듀엣으로 녹음한 8곡과 브래드 멜다우 쿼텟이 참여한 2곡이 수록되어있는데, 쿼텟의 가능성에 흥미를 느낀 팻과 브래드는 다음 해에 쿼텟을 타이틀로 한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하였다.
- 아방가르드 작곡가이자 색소포니스트 존 존(John Zorn)의 유태인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한 Book of Angels 연작 앨범의 20번째 작품 Tap: Book of Angels Volume 20(2013) 초청 아티스트로 팻 메시니가 참여하였다.
- 2000년대 팻 메시니 그룹의 멤버였던 트럼펫 주자 쿠옹 부(Cuong Vu)가 이끄는 트리오와 2016년 Cuong Vu Trio Meets Pat Metheny 앨범을 발표하였다.
3.10. 세션 참여
팻이 사이드맨으로 참여한 앨범 역시 일일이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몇 개 의미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게리 버튼(Gary Burton)은 팻이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맺은 인연으로 종종 팻을 사이드맨으로 기용하여 앨범을 발표했다. 팻이 게리 버튼의 밴드를 떠난 지 13년 만에 다시 만나 레코딩한 Reunion(1990, GRP)과, 칙 코리아(Chick Corea)가 참여한 Like Minds(1998, Concord Jazz), 안토니오 산체스(Antonio Sanchez)와 스티브 스왈로(Steve Swallow)가 참여한 Quartet Live(2009, Concord Jazz) 등이 인기를 얻은 바 있다.
- 조니 미첼(Joni Mitchell)의 1980년 앨범 Shadows and Light에 자코 파스토리우스(Jaco Pastorius), 라일 메이스(Lyle Mays)와 함께 참여한 바 있다.
- 허비 행콕(Herbie Hancock), 잭 디조넷(Jack DeJohnette)과 Parallel Realities(1990, MCA) 앨범을 녹음하였다.
- 색소포니스트 조슈아 레드먼(Joshua Redman)의 1995년 라이브 앨범 제목이 Blues for Pat이고 (당연히) 팻이 참여하였다.
- 색소포니스트 마이클 브레커(Michael Brecker)의 앨범에 여러 차례 사이드맨으로 참여하였다.
4. 음악적 스타일
팻 메시니가 처음 기타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선배 기타리스트는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28] 였다. 한동안 그의 주법을 따라하던 팻은 그러한 노력에 흉내내기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느끼고 자신만의 음악을 찾기 시작한다. 이후 오넷 콜맨(Ornette Coleman)의 프리 재즈에 깊은 감명을 받아 1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음악적 자유분방함을 얻게 된다. 이에 덧붙여 지역적인 조건으로부터 비롯된 웅장한 자연에 대한 서정적 감수성이 데뷔 시기 그의 음악적 스타일을 특징짓게 된다. 팻 메시니 그룹을 결성한 이후에는 종종 브라질에 체류하면서 브라질 음악의 여러 요소를 재즈와 융합하는 시도를 하는데, 이렇게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재구성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결국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월드 뮤직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음악적 집대성을 이루어낸다. 많은 이들이 팻의 음악이 마치 여행을 연상시키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세계 투어를 다니거나 음악적 탐구를 위해 끊임없이 여행을 하는 팻과 그룹 멤버들의 경험이 그들의 음악에 녹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0년대 들어서서는 지역성이 배제되고 음악 본연의 추상성이 강조된 실험적 재즈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으며, 최근에는 유니티 밴드의 결성을 통해 정통 재즈의 형식을 인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미래의 재즈가 나아가야 할 바를 탐구하고 있다.
덧붙일 것은 팻 메시니 그룹과 쿼텟, 유니티 밴드 등의 활동을 통해 일련의 연속성을 가지는 음악적 탐구에 매진하면서도, 순수한 프리 재즈적 실험이나 지극히 서정적인 어쿠스틱 기타 앨범, 데이비드 보위[29] 나 조니 미첼 등 타 장르 아티스트와의 콜래보레이션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을 간간히 발표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어마어마하게 폭 넓은 음악적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확실한 자신의 개성을 유지할 줄 아는 이 시대의 독보적 기타리스트임에는 틀림없다.
5. 사용하는 기타
- Gibson ES-175 : 팻 메시니가 12세에 동네 농부로부터 구입한 깁슨 풀 할로우 바디 기타. 변변한 수리도 없이 엔드 핀에 칫솔이 꽂히는 등 온갖 개조를 당하며 혹사당하다가 결국 90년도 중반 경 퇴역하였다. 팻의 재즈적인 사운드를 대변해왔던 기타. 정확히는 1958년식의 픽업이 두 개 달린 D타입 모델인데 그는 리어 픽업의 고음역대가 살아있는 까랑까랑한 사운드를 싫어해서 아예 리어 픽업을 떼고 그 구멍을 덕트테이프로 막아버렸다. 한편 프론트 픽업을 주로 쓰는데 그 중에서도 Tone off하여 먹먹하고 아련한 듯 따뜻한 느낌의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이는 팻 메시니 특유의 따뜻하고 서정적인 기타 톤으로 정의된다.
- Ibanez PM200 : ES-175 퇴역 이후 유사한 사운드를 위해 아이바네즈와 시그니처 모델을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다. ES-175에 비해 바디 길이가 약간 짧고 다소 뚱뚱한 느낌인데 팻 메시니가 ES-175를 사용하며 느낀 큰 부피의 불편함 등을 고려하여 엉덩이 부분이 다소 짧고, 앞서 ES-175의 프론트 픽업만 쓰는 그의 취향 등이 반영되어 픽업은 프론트 한 개만 장착되어있다. 2000년대부터는 메인기타로 쓰이는 중. 한편 아이바네즈는 그 외에도 PM100(1픽업) PM120(2픽업) 등 몇 가지 시그니처 모델을 제작해 판매하고있다.
- The Manzer: 여성 기타 제작자 린다 맨저(Linda Manzer)의 어쿠스틱 스틸 기타. 초기 Rejoicing의 수록곡 Lonely Woman이 대표적인 곡이다.
Pat Metheny playing Pikasso 42-string guitar
- Pikasso: 린다 맨저가 최대한 많은 현이 달린 기타를 만들어달라는 팻의 주문에 따라 제작한 42현 기타. Imaginary Day의 Into the Dream이 대표적인 곡이다. 마치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처럼 바디 여기저기에 현이 달려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 Baritone: 역시 린다 맨저가 제작한 중저음이 두드러진 어쿠스틱 스틸 기타. One Quiet Night의 전 곡이 이 기타 한 대로 레코딩되었다.
- Roland G-303 Guitar Synthesizer: 롤랜드사의 기타 신디사이저. Are You Going with Me?와 Last Train Home 등 팻 메시니 그룹의 대표곡에 사용되면서 팻의 아이콘처럼 되었다. 특유의 관악기 같은 기타 신디사이저 사운드는 ES-175의 따뜻한 사운드와 함께 팻의 이미지를 대표한다.
- 1985 Ovation 1663 Classic Cutaway: 80년대부터 나일론 사운드가 필요할 때 쓰던 기타.
6. 기타
재즈 트럼펫/EVI (Electronic Vavle Instrument) 연주자인 형으로 마이크 메시니가 있고 모로코 출신의 사진 작가인 아내 라티파 아자 (Latifa Azhar)와 결혼하여 슬하에 세 명의 자녀가 있다. 라티파는 2014년부터 뉴욕에서 아트 갤러리 AZART를 운영하며 디렉터를 맡고 있다. 홈페이지[30] 에 가보면 팻 메시니가 사회적인 이슈와 환경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뉴욕에서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결혼 전에는 세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재즈 연주자답게 1년에 300일 이상 월드 투어를 돌아서 변변한 집도 없이 보스턴의 작업실에서 먹고 자며 대형 창고에 물품을 넣어놓고 생활했다고 한다. 지금은 가족들과 보낼 시간을 갖기 위해 투어 일정을 200일 정도로 줄였다고 한다. 메시니의 연주나 음악에는 언제나 따뜻함과 슬픔이 녹아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언제나 여행을 떠나는 듯한 고독한 사운드가 다소 사라진 듯한 인상이 있어 팬들로서는 아쉽기는 하다.
메시니는 오랜 기간 민주당 지지자였고 대중 앞에 자주 드러내지는 않지만 찰리 헤이든에 의하면 그의 정치적 성향이 무척 강하다고 한 바 있다. 종교는 무종교이나 어렸을 때는 집안에 유니티 교회(Unity Church)의 영향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니티 교회가 소재한 도시 이름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팻 메시니의 곡인 "Unity Village"나 색소포니스트 크리스 포터와의 프로젝트, Unity Band의 이름도 어디서 유래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뉴욕에 소재한 아바타 (전 파워 스테이션)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오케스트리온'과 '메시니-멜다우' 사운드 앨범들에 엔지니어로 참여한 바 있는 강효민씨에 따르면 앨범 작업 기간동안은 늘 같은 음식만 먹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작업 기간에 첫 메뉴가 케밥이었다고 하면 일주일 동안 같은 케밥만 시킨다고 한다. 덕분에 같이 일하는 엔지니어나 연주자들은 죽을 맛이라고. 지금은 나이가 들었지만 워낙 체력도 타고 나서 밤새 녹음을 진행할 때면 1.5리터짜리 다이어트 콕 한 병만 있으면 거뜬하다고 한다.
케니 지에 대한 의견을 묻는 한 팬의 질문에 솔직히 엄청나게 싫어한다는 내용을 자신의 웹사이트에 답변 형식으로 2000년도에 올렸다가 내렸는데 바로 퍼져서 20년이 지난 지금도 인터넷에 돌고 있다.
케니 지의 말도 안되는 상업주의적인 행동이 재즈를 망치고 있다고 분개하는 내용. 실제 이 인터넷 문답 이전에 폴란드 TV에서 케니 지가 십대들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물은 인터뷰에서 이 부분만 발췌해 내보낸 것이 발단이 되었다.
케니 지가 루이 암스트릉의 곡에 색소폰 오버더빙을 해서 음반을 낸 것을 보고 타가수(토니 베넷 등등)들도 했지만, 적어도 이리 음악성이 없진 않았다며 만나거나 같이 공연한다면 들고있는 기타가 부서질 때까지 머리를 내려칠 거라고 말했다. 거기다 자기 주변인들한테 케니 지 공연이나 음반에서 연주하지도 말라고 할거고 자기도 케니 지와 절대 같이 작업할 일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여기에 케니 지는 "나는 원래 연예인이고 대중을 즐겁게 해주는 엔터네이너일 뿐"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자기 자신에 대한 조크로 아우디나 스니커즈 초코바 광고에 코믹하게 망가지는 모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최근에는 좋아하는 골프를 치러 많이 다니고 공연도 주기적으로 하기는 하지만 2015년을 마지막으로 음반 안낸지도 꽤 되었다.
아무튼 팻 메시니의 답문을 일부 살펴보면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얘기들을 했다: "케니 지는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질렀다. 무슨 시체 강간도 아니고 죽은 사람의 연주에 자신의 연주를 오버더빙하는 일을 했다. 이전에 나탈리 콜도 냇킹 콜의 녹음에 그런 작업을 했지만 그건 자신의 아버지였고 토니 베넷도 빌리 홀리데이의 녹음에 오버더빙을 한 것도 내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예술적으로 비슷한 레벨 사람들의 작업이라 크게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케니 지가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거장인 루이 암스트롱의 연주에 자신의 하급 연주를 갖다 붙인 것은 너무나도 오만방자한 믿을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것은 재즈를 연주하는 모든 음악인들이 발을 딛고 있는 가장 신성한 루이 암스트롱이라는 땅에 불법 침입한 것과 같으며 루이 암스트롱에게서 감동을 받아서 그의 뜻을 따르며 열심히 음악에 정진하고 있는 모든 재즈 뮤지션들을 엿먹인 것이다. 나는 내 주변의 모든이들에게 앞으로 케니 지의 공연이나 앨범에서 연주하지 말라고 했으며 나 역시도 그와 같은 무대에 서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를 만난다면 그에게 직접 이 말을 할 것이다. 내 기타가 부서지도록 그의 머리통을 후려치면서 말이다."
"나는 케니 지가 재즈 뮤지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케니 지가 솔로 데뷔전에 제프 로버의 밴드의 일원일때 내 콘서트의 오프닝으로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때의 인상은 재즈보다는 팝적인 연주를 하는 색소폰연주자들 - 데이빗 샌본,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을 많이 연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들만큼 뛰어난 연주자도 아니었다. 케니 지는 첫째로 리듬에 있어서 큰 문제가 있는 연주자였고 하모니와 멜로디를 구사하는데 있어서 밑천이 너무나도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 하고 있는것은 펜타토닉 5음계를 이용한 단순한 블루스 패턴 연주였다. 한마디로 그는 밴드 내에서 솔로이스트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역할 만을 하는 플레이어였고 제프 로버 역시 케니 지를 실제 연주할때는 그냥 서있는 정도로의 역할만 주었다."
"케니 지가 그나마 잘 하는건 그가 주로 구사하는 2~3가지 테크닉들 (한 음 길게 불기, 빠르게 불기-빠르게 부는 동안 화성도 맞지 않지만...)로 공연에서 관중들을 일시적으로 흥분시키는것이다. 그리고 요즘 들어서 느끼는건데 그가 부는 음은 계속 샾이 돼서 음정도 맞지 않는다."
"어차피 대중은 재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있고 세밀하게 재즈를 연주하지 않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 이미지만 보여주면 재즈라고 생각한다. 케니 지는 그런면에서 재즈 뮤지션이라고 대중이 생각하는데 내가 음악인으로서 생각할때 그는 재즈 뮤지션이 아니다." - 팻 메시니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영문 문답 전문
“재즈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루이 암스트롱에 대한 엄청난 존경심도 알겠고 엘리트 재즈 뮤지션으로서 엄청난 자존심도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재즈계에서 팻 메시니의 영향력과 위상이 엄청나기는 해도 그의 컨템포러리 재즈가 솔직히 순수 즉흥이라기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릭(lick)에 기반한 연주가 많아서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는 딱히 재즈로 평가하지는 않는데다가, 죽어가는 재즈 시장에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절충안으로 "Last Train Home"처럼 듣기 편한 연주로 재즈 앨범 최초로 골드 앨범 (50만 장 이상 판매)까지 달성하는 등 엄청 팔았으면서 거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Last Train Home"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1989년 미국 남부의 수퍼마켓 체인인 퍼블릭스의 추수감사절 연휴기간 광고에 나왔다고 공연 때 이 곡을 가리켜 "퍼블릭스 음악"이라고 메시니 스스로 농담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위의 문답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일에 평론가들은 다 어디서 뭐하고 있냐는 비난에 뉴욕 타임스에서도 좀 뻘쭘했는지 케니 지 음악을 상업적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대중의 눈으로 보면 다 대중문화의 일부인데 팻 메시니처럼 천재적인 뮤지션이 케니 지처럼 뭐 별 의미도 없는 음악에 그러냐고 칼럼을 내보냈다. 포인트는 듣는 이에게 음악적인 배고픔이 있냐 없냐는 것.
케니 지도 한 인터뷰에서 이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그(팻 메스니)의 얘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때는 그가 농담한 줄 알았다. 그 정도 되는 뮤지션이 다른 음악인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행위에 대해 실망했다. 더 점잖은 표현도 있을텐데 그런 방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뭐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또 그 일을 좋아하면 되는 것 아닌가. 사람들 모두 그 음반 작업(루이 암스트롱 오버더빙 음반)을 싫다고 하지 않고 내 음반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중 하나라고 말해주니까."
한편 메시니는 인터넷 혁명 이후 시장이 아예 사라져 버리다시피 한 어두운 재즈계의 현실 속에서도 책임감을 가지고 후진 양성을 위해 크게 힘쓰기도 한다. 2012년 커네티컷 주 노르위치에서 열린 내셔널 기타 워크샵 협회가 도산하여 매년 열리던 팻 메시니 여름 음악 워크샵을 못열게 되어버리자 전세계에서 비행기를 타고 자신에게 배우러 온 43명의 기타리스트 학생들을 위한 4일간의 행사 비용을 사비로 내기도 했다. 2013년 1월 다운비트지와의 인터뷰에서 메시니는 며칠간 밤새 학생들을 위한 작곡 과제등을 준비하고 패이는 도리어 자기가 냈다고 농담을 해 훈훈하게 하기도 했다.
팻 메시니는 1996년도에 버클리음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
2018년에는 미국 예술 기금(National Enodowment for the Arts)에서 재즈 뮤지션에세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NEA 재즈 마스터상을 받았다.
[1] 팝이 아닌 재즈 분야에서 50만장 이상 팔리는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 앨범은 1980년대 말에서 90년도 초에 발표했던 작품들로서 솔로 프로젝트인 Secret Story와 그룹 프로젝트인 Still Life(Talking), Letter From Home이다.[2]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스노우캣을 들 수 있다. 스노우캣은 꿈에서 그의 공연에서 가서 사인받고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던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꿈에서조차 감격해서 울고 있었다고. 어떤날의 멤버인 조동익, 이병우와 유희열 등도 팻 메시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희열의 방송 오프닝곡인 ‘라디오 헤븐’은 부제가 ‘Homage to Pat Metheny’이기도 하다.[3] 그는 미국 중부 미주리(Missouri)주 Lee's Summit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 시절 몸으로 느낀 중부 지역의 대자연이 그의 음악에도 영향을 끼쳤을거라 짐작할 수 있겠다.[4] 안토니오 산체즈(Antonio Sanchez/Mexico), 쿠옹 부(Cuong Vu/Vietnam), 리처드 보나(Richard Bona/Cameroon) 그레고어 마레(Gregoire Maret/Switzerland) 등[5] 재즈와 블루스를 다루는 미국의 권위 있는 음악 잡지.[6] 당시 마이애미 대학교의 기타학과는 갓 만들어진 학과라 선생이 한 명 뿐이었고, 기타 선생이 자기가 하는 방식대로만 따라할 것을 강요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역사 교양 수업을 듣다가 연습할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그냥 나왔다고. 별로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팻이 상담을 위해 학장을 찾아 갔는데 이미 근처 클럽에서 간간히 기타를 연주하던 팻을 본 적이 있는 학장이 선생 자리를 제안했다고 한다.[7] 1973년 게리 버튼은 위치타 재즈 페스티벌에서 팻을 처음 만나 그 천재성을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해 버클리 음대로 초청을 한 것이다. 이후 자신의 퀸텟에 기타리스트로 영입하기도 하였다.[8] 레이블의 이름처럼 재즈 연주자들의 즉흥연주로 이뤄져 있는 앨범이다. 이전엔 Jaco Pastorius의 동명 데뷔 앨범에 참여했다고 적혀져 있었으나 정작 그 앨범은 기타가 아예 없다.[9] 팻은 마이애미에 있을 때 처음 자코를 알게 되었는데, 자신보다 몇 살 많지도 않은 자코가 신들린 듯 베이스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0] 2020년 2월 10일 66세로 사망했다[11] 하얀 표지에 Pat Metheny Group이라고만 되어있기 때문에 아티스트와 앨범 타이틀 모두 Pat Metheny Group이다.[12] 기타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기타를 연주할 때의 미디 신호를 신디사이저로 전달하여 신디사이저에서 소리가 나는 원리의 악기이다. 건반 형태의 신디사이저에서 완벽히 구현이 불가능한 벤딩, 슬라이딩, 비브라토 등의 현악기 주법을 신디사이저의 음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신디사이저가 건반 형태가 아닌 기타 형태로 연주 되는 것. 팻이 이때 사용한 모델은 롤랜드 GR-300/G-303 조합으로, 그가 특히 자주쓰는 샘플은 관악기와 같이 시원하게 뻗어나오는 소리이다. [13] 훗날 팻과 같이 앨범 작업을 하게 되는 피아니스트 브래드 멜다우(Brad Mehldau)는 10대 초반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을 ‘인생을 바꾸어놓을 정도의 충격’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팻의 공연에서 팬들의 가장 큰 환호를 듣는 곡이 Are You Going With Me?일 정도로 그를 상징하는 대표곡이 된다.[14] 게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잡다한 보컬, 기타, 트럼펫, 퍼커션 등 여러 종류의 악기 연주에 능한 뮤지션을 말하며 팻 메시니 그룹에서 페드로 아즈나 이후 데이비드 블레마이어스(David Blamires), 마크 레드포드(Mark Ledford), 리차드 보나(Richard Bona) 등 일련의 계보(?)가 형성된다.[16] 많은 악기를 다룰 줄 알지만 단연 돋보이는 연주는 베이스다. 당장 구글에 쳐봐도 베이스를 든 사진이 대부분.[17] Odd meter, 즉 홑박자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4분음표를 기준으로 5/4, 7/4 박자와 같이 하나의 마디에 홀수의 음표가 들어가는 경우를 말하며, 가장 널리 알려진 재즈곡으로 Take Five가 있다. The First Circle의 22/8 박자는 이러한 기준으로는 오드 미터가 아니지만, 오드 미터의 취지가 8분음표를 2개짜리 묶음과 3개짜리 묶음으로 나누어 패턴을 만드는 방식의 독특한 느낌이 핵심이다.[18] ECM의 설립자이자 프로듀서인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는 대단히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로, ECM에서 나온 음반들을 들어보면 굉장히 완벽주의적이거나 고집스러운 레코딩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ECM은 지금까지도 그런 기조 아래 이지적인 클래시컬한 사운드, 절제되고 차가운 북유럽풍의 재즈 등 그 나름의 독특한 음악적 특징을 유지하고 있지만, 아마도 상기한 이유로 표현력을 계속 확장하고 실험하려는 팻 메스니와는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19] 팻의 이러한 철학은 훗날 <Orchestrion> 프로젝트에서 말 그대로 현실이 된다.[20] 팻 스스로도 그룹으로 발표한 앨범 중 가장 어두운 음악들이라고 시인한 바 있으며 대중적으로도 큰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듣는 재미가 있는 앨범으로 알려져 있다.[21] 이미지와 알파벳 문자가 1:1 대응하도록 되어있다. 앨범 패키지 디자인으로만 그래미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는 그래픽 아티스트 스테판 새그마이스터(Stefan Sagmeister)의 작품.[22] 팻은 안토니오의 드럼을 매우 만족해했으며 이후 트리오와 유니티 밴드의 고정 멤버로 기용했다. 안토니오는 여러 솔로 앨범과 영화음악 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23] 기본적으로 베이시스트이기는 하나 팻 메시니 그룹에는 스티브 로드비라는 고정 베이시스트가 있으므로 주로 보컬을 담당하며, 곡에 따라 어쿠스틱 기타, 퍼커션, 프렛리스 베이스를 연주한다.[24] 본인 스스로 팻의 엄청난 팬이라고 한다.[25] 팻의 한국 사랑은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월드컵 때 응원과, 공연장서의 떼창과 리액션에 놀랐다고 한다. LG 아트홀이 이상적인 공연 환경을 갖추었다며 만족감을 표시한 바 있다.[26]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뮤지션만 25명이다.[27] 연주 중의 실수도 그대로 녹음되었다고 한다.[28] 엄지 피킹과 옥타브주법을 개발하여 재즈 기타의 전성기를 연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엄지로 기타를 치게 된 이유는 부인이 시끄러운 소리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29] 영화 Falcon and the Snowman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This is Not America’를 데이비드 보위와 같이 작업하였다.[30] http://www.patmethen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