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샤오셴
1. 개요
중화민국의 군인. 장제스의 재종손으로 국민혁명군 헌병단, 남의사에서 활동하였으나 1936년 서안 사건 중 살해되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00년, 절강성 봉화현에서 장제스의 종질인 장정인(蔣正寅)의 아들로 태어났다. 절강 제4사범학교를 다녔으며 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로 임용되어 고향인 봉화현의 진해현립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4년 쑨원이 1차 국공합작을 결성하고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삼촌인 장제스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샤오센은 교사를 사직하고 광저우로 떠났고 장제스의 추천으로 시험자격을 취득하여 황포군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졸업 후 국민혁명군 1군 1연대 소대장으로 임관하여 천중밍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에 나섰으며 2차 동정 중 혜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중대장으로 승진했다.
2.2. 헌병대 장교로의 생활
1926년 7월 북벌이 선포되자 삼촌을 따라 우페이푸와 교전하였고 호북, 호남 전선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을 인정받아 국민혁명군 1군 1연대 1대대장으로 승진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완료되자 수도 난징에서 헌병 제4단 단장으로 부임하여 근무하다가 1930년, 헌병 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그해 가을에 귀국 후 상교로 승진하여 헌병 제3단 단장 겸 헌병고선위원에 임명되어 베이핑에 부임, 헌병 양성에 노력하였다. 1933년 베이핑 헌병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승진하여 헌병 3단과 4단을 관할하였다.
1935년 5월 하북 사건이 발생하자 상하이시 보안처장 양호와 함께 사건 배후로 일본 제국에게 지목당했다. 일본군의 사카이 타카시 대좌와 타카하시 탄 소좌는 장샤오센을 남의사 화북구 총구 집행부장이자 사건의 직접 당사자로 지목하며 헌병 3단 부단장 정정과 함께 그를 파면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에 베이핑 군사위원회 대리 위원장 허잉친은 장샤오센을 전근시키겠다고 하고 6월 1일 장샤오센을 해임하였다. 해임된 장샤오센은 베이핑을 떠났고 1935년 군사위원회 위원장 시종실장 참모 겸 제3조 조장에 임명되었다. 1936년 10월 5일 육군소장으로 승진하였다.
2.3. 죽음
1936년 12월 4일, 장제스를 따라 서안을 방문하였다. 12월 12일, 양후청의 초청에 따라 서안성 안의 신성빌딩에서 연회에 참석한 후 서안 시내에서 서안의 전통 경극을 관람하였다. 이날 밤, 장제스의 다른 조카인 장화청과 함께 카드놀이를 하며 서안성 안에서 머무른 장샤오센은 다음날인 12월 13일, 서안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모르고 장제스가 머물던 화청지로 이동하던 중 동북군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장샤오센은 베이핑에 주둔하던 시절 동북군의 군기를 엄히 다스려 동북군의 원한을 사고 있었다. 장샤오센이 자신의 성명을 말하자 동북군은 즉각 장샤오센을 차에서 끌어내려 "네가 베이핑에서 죽인 수천명의 애국청년의 피값을 치러라!"라고 외치고 총살하였다. 동석했던 장화청은 마침 평상복을 입고 있어서 자신이 그냥 상인이라 둘러대고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다만 차를 타고 도주하려고 시도하다가 사살되었다는 진술도 있었다.
사건 정리 후 중장으로 추서되었고 시신은 고향인 봉화현으로 운구되어 매장되었다. 1948년, 계구 장씨 가문은 <육군중장 장군가전>을 써서 그를 기렸다. 부인 원정지와 첩 육씨 사이에서 3남 4녀를 낳았으며 이중에서 장남 장우륜은 아버지보다 먼저 요절했다. 이후 남편과 사이가 좋았던 원정지는 남편의 복수를 하기 위해 여러차례 장쉐량을 죽이려 했다고 한다. 한번은 장쉐량의 경호원들에게 체포되었으나 장쉐량이 사정을 알고 풀어주었고 장제스에게도 이를 보고하였다. 이에 장제스는 원정지에게 상하이의 빌딩을 사주어 장효선의 남은 일가가 상하이에서 살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3.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일제의 대륙침략,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