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당의 1차 북벌
1. 개요
1926년 7월부터 시작된 중국 국민당의 중국 통일 전쟁. 중국의 판도를 남방의 국민당과 북방의 장쭤린이 대립하는 구도로 바꾸어놓았으나 국민당 내부에서 고조된 갈등으로 인해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했고 국민당은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로 분열되지만 난항 끝에 서산회의를 통해 1925년에 분리된 서산회의파의 상하이 당중앙까지 포섭하여 영한합작을 통해 통합하는데 성공한다.
본 문서는 1926년 7월 국민당의 북벌 시작부터 1927년 9월의 영한합작 시기까지 다룬다.
2. 배경
2.1. 장제스의 북벌 주장
국민당을 세운 쑨원은 일찍이 호법운동을 전개하여 중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려 했으며 1922년 영풍함 사건과 1923년 차오쿤의 회선 사건 이후 혁명전쟁을 준비, 1차 국공합작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벌을 주장하며 중국을 통일시키고자 했으나 세력의 빈약함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체 1925년 사망했다.
이후 국민당은 국민당의 1차 동정, 국민당의 2차 동정을 통해 광동군벌 천중밍을 축출하여 광동을 장악했고 군민재정 통일선언 등 중앙정부의 군권, 재정권 통일에 반발해서 들고 일어난 1925년 객군 반란을 진압했으며 리쭝런, 바이충시 등 광서의 진보적 군벌들과 연대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출범했고 왕징웨이, 후한민, 쑨커 등이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대결했으나 장제스를 비롯한 군부, 소련과 공산당의 지지를 받는 좌파의 수장 왕징웨이가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빌미로 후한민을 비롯한 우파 당권파, 린썬, 쩌우루, 셰츠, 쥐정 등의 노동지파, 쑨커를 추종하는 태자파, 쉬충즈의 월군 군부를 숙청, 실각시키고 국민당을 장악했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집권에서 최소 묵인, 크게는 적극적인 군사력 제공과 호응으로 활약하여 일개 군사실력자에서 왕징웨이 체제의 2인자 수준에 오르게 되었다. 장제스는 1926년 1월 4일 북벌을 주장하였다.
1월 6일에는 국민당 2전대회에 출석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내가 오늘의 전국적인 상황과 본당의 전도를 자세히 관찰한 바로는, 우리 중국 국민당은 반드시 중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본다. 통일은 금년 중에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의 내부를 보면, 붕괴는 나날이 빨라지고 있으며, 본당이 금년에 더욱 노력하면, 군벌을 모두 타도하여 베이징을 수중에 넣고, 총리의 영구를 난징에 맞아들여 자금산에 안장할 수 있다."
왕징웨이와 미하일 보로딘은 표면상으로 이런 주장에 찬성하였으나 소련과 공산당은 국민당의 광동 기반이 아직 불안정하며 노동자, 농민 정책의 실시가 불충분하므로 장제스의 이런 북벌 주장을 시기상조라 여겼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1926년 2월 3일, 미하일 보로딘이 본국의 훈령에 따라 펑위샹과 회담하기 위해 광동을 떠나자 소련 고문단장이 된 키산카[1] 였다. 키산카는 회의석상에서 장제스의 북벌 주장을 강하게 비판하며 북벌이 반드시 실패한다고 장제스에게 맞섰다."현재의 국민혁명군은 완전히 정부의 관할 하에 있고, 명령 하나로 8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총은 6만 정을 갖추었고, 병사의 급여도 일정한 예산이 있으며, 병사의 생활은 이전보다 개선되어 있다. 또 각 학교에도 육군학생이 6천명 쯤 있는데, 이는 1개 사단에 필적한다. (...) 우리의 정부는 이미 밖으로 향해 발전할 만큼의 역량을 확실히 가지고 있다. (...) 요 2년 간에 국민혁명군이 거둔 다대한 성과는 분명히 삼민주의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다. 혁명군이 가는 곳에는 인민의 열렬한 환영의 표시가 있었고, 인민의 마음으로부터의 조력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도 혁명군은 바로 인민의 군대요 무장인 것이다."
2.2. 국공갈등
한편 왕징웨이의 집권 이후 소수에 불과한 공산당의 국민당 잠식이 심해지고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후한민, 린썬, 쩌우루 등 국민당 우파의 거두들이 차례로 숙청되자 이에 반발한 국민당 우파는 1925년 11월 서산회의을 개최하여 독자적인 상하이 당중앙을 설립함으로 국민당은 분열되었고 공산당은 장제스의 중재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파들을 상대로 가혹한 처분만을 일삼았다. 거기에 천중밍을 소탕하는 동정을 성공시킨 장제스의 정치적 위상이 올라가자 공산당은 장제스를 향해서도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신임 소련인 고문 키산카는 공공연하게 북벌은 성공할 수 없다면서 장제스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분노한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감, 광저우 위수사령관, 군사위원회 위원 자리에서 사퇴하겠다면서 왕징웨이에게 키산카를 귀국시키라고 촉구했으나 왕징웨이는 뚜렷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한편 장제스가 자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안 키산카는 장교들과 공산당원을 선동, 연일 반장 행동에 나섰다. 장제스를 비방하는 유인물이 나돌았고 정치교관들이 황푸군관학교 내부에도 돤치루이가 한 사람 있다는 식으로 장제스를 공격하며 생도와 장교들에게 장제스를 타도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2월 26일에는 2사단장 왕무공이 키산카의 사주로 반란을 일으키려 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장제스는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소련 외유를 기획하기도 했으나 비서 천리푸가 소련을 다녀오는 사이에 공산당의 음모로 몰락하면 걷잡을 수 없다고 조언하자 배를 타기 직전에 도로 돌아와서 광저우에 잔류했다.
그런데 이러한 구도를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중산함 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장제스는 공산당에 큰 타격을 입히고 프랑스로 외유를 떠나버린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군사위원회 주석에 올라 국민당을 장악하여 원래 목표인 북벌의 추진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소련에서 파견되어 있던 부브노프 사절단은 기존에 파견된 키산카를 비롯한 고문들이 불손한 언동과 북벌 문제에서의 과오를 저질렀음을 시인하고 북벌의 조기 실시가 타당하다고 입장을 선회했으며 파업을 비롯한 과격 행동을 종식하고 광저우 정권을 안정시키며 북벌을 위해 장제스에게 협조하는 것에 동의했다.
2.3. 중국의 혼란
1920년대 후반 중국 천하는 군벌들의 내전으로 혼란 그 자체였다. 1926년 직봉풍전쟁에서 장쭤린, 우페이푸, 옌시산은 힙을 합쳐 베이징을 점령한 펑위샹과 대결하고 있었다. 펑위샹은 1926년 3월 12일 대고 사건[2] , 3월 18일 열강이 대고 사건을 구실로 중국의 내정에 간섭한 것에 항의하는 3.18 사건 등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내부적 혼란에 시달렸고 주변 군벌들의 공세로 몰락할 위기에 처하자 소련으로 도주길에 올랐다. 이러한 중국의 정세를 지켜본 장제스는 지금이야말로 쑨원의 유지였던 북벌을 완수할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했다.
즉 더 머뭇거리면 열강이 군벌들을 사주하여 남방의 국민당을 소탕하려 들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중앙은 이 건의를 수용, 4월 16일 장제스는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6월 5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북방에서 국민군이 베이징, 톈진에서 퇴각하면, 중국의 정세변화는 신속하고도 중대한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봉천군이 베이징, 톈진을 점령하면, 중국에서의 일본의 세력은 더욱더 공고해진다. 영국은 또 호북, 하남의 우페이푸를 전력을 다해 부추길 것이다. 쑨촨팡은 강소, 절강에 주저앉아 있지만, 영국은 쑨촨팡에게도 우페이푸와 손잡을 것을 강요할 것이고, 미국도 최근에 쑨촨팡과 제휴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고 있다. 프랑스 역시 중국에서 소련의 세력이 다시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돌연 영일 양국과 연합전선을 결성, 운남의 탕지야오를 원조하여 우리들의 북벌을 견제하고 있다. 열강은 북방의 국민군을 처치한 뒤 반드시 전력을 기울여 광동, 광서의 혁명근거지까지 간섭해 올 것이다. 그 기한은 3개월에서 반년까지의 사이이다."
한편 호남군벌 탕성즈가 호남의 패권을 두고 다투다가 국민당에 합류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민당은 탕성즈의 국민당 가입을 허용하고 탕성즈의 호남 장악을 지원하게 되면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자세한 것은 탕성즈 문서 참조.
3. 전개
3.1. 준비과정
1926년 7월 1일 장제스는 군사위원회 주석의 명의로 북벌 동원령을 선포했다.
호남을 쳐서 우한을 함락시킨다는 것이 1차 목표였다. 국민당 중앙위원회는 장제스에게 당을 제외하고 민사, 군사, 사조직, 공조직을 아우르는 모든 통제권을 양도했다. 7월 4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가 북벌 출사 선언을 발표하면서 전국 각계에 북벌에 대한 협력을 호소했고 7월 5일 장제스는 중앙당부 군인부 부장에 임명되어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광저우에 국민혁명군 총사령부가 설치되고 리지선이 총참모장, 유영건이 총참의에 임명되었다.“우리 국민혁명군은 대원수의 유지를 받들어 혁명 이념을 철저하게 관철해야 한다. 인민의 번영을 지켜내기 위해 반드시 모든 군벌들을 무너뜨리고 반동 세력을 숙청하고 난 뒤에야 삼민주의를 실행하고 민족 혁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7월 9일 광저우 동연병장에서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취임식에 참여하여 북벌 서사전례를 거행했다. 5만명의 군인과 광저우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장제스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또한 장제스는 전 중국에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국민이 수재와 화재의 고통에 헐떡이고 있는데도, 토비 군벌은 악업을 돕고, 제국주의는 침략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본군이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구국 국민을 위해서일 뿐이다. 죄인을 토벌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고, 흉도의 수령을 격멸하여 평등을 회복하고 자유를 되찾을 때야말로 비로소 총리의 유명이 빛날 것이다. 우리 장병들이여, 백성의 선두에 서서 전진하라! 후퇴하지 말라!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주의를 실행하고, 개인을 희생하여 충심으로 혁명정신을 드러내라!"
당시 장제스가 우선적으로 상대해야할 군벌들은 75만에 이르는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우선 하남, 호북, 호남, 사천, 귀주를 지배하는 우페이푸는 25만명을 거느렸고 강소, 절강, 안휘, 복건, 강서 5성을 지배하는 쑨촨팡이 20만, 동북 3성과 화북을 지배하는 장쭤린은 35만명을 거느렸다. 국민혁명군은 총 8개 군,10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3대의 비행기로 이루어진 공군과 8척의 함정으로 구성된 해군이 있었다. 이중에서 북벌을 위해서 5만명 정도가 동원되었는데 구성은 다음과 같다."중정은 지금 취임에 즈음하여, 삼가 다음 세가지 일을 국민에게 알린다.
첫째, 제국주의자 및 그 주구와 끊임없는 결전을 하고,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
둘째, 전국의 군인과 일치하여 대외에 임하고, 삼민주의를 하루속히 실현한다.
셋째, 우리 저군으로 하여금 인민과 깊이 결합시켜, 인민의 군대가 되게 한다. 전국 인민은 함께 혁명의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한다."
우선 황푸군관학교 출신들이 몰려있고 장제스의 직할 부대인 최정예 부대인 1군, 사령관은 허잉친(하응흠)이었고 병력규모는 2만명이었다. 모든 부대 중에서 가장 무장이 잘되어 있었고 경험도 많았다. 2군은 1만 5천명으로 후난성의 전 성장인 탄옌카이(담연개)가 이끌었다. 탄옌카이는 원래 쑨원의 사람이었는데 중산함 사건 때 장제스의 편에 붙었다. 윈난성에서 소집된 3군은 주페이더 휘하의 1만명 규모였고 ‘우익 장군’ 리지선이 지휘하는 4군도 1만명 규모였다. 장제스는 공산당원들과 국민당 좌파들을 이 부대에 몰아넣었다. 이복림이 지휘하는 5군은 광저우의 수로 보호 공사를 맡고 있는 자치부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북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6군은 청첸이 이끌었고 7군은 광시성의 군벌인 리쭝런(이종인)이 이끌었는데 개혁적인 성향의 리쭝런은 진작에 국민당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7군엔 이슬람교도인 바이충시(백숭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 8군은 청나라 군인 출신인 ‘불교도 장군’ 탕성즈(당생지)가 지휘했는데 원래 후난 남부를 지배하던 세력으로 후난성 성장과의 분쟁에서 패배하여 국민당에 합류했다. 탕성즈는 7월 5일 제일 먼저 출병을 거행했다.
3.2. 초기 전개
3.2.1. 국민혁명군의 호남-우한 공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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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 영국 조계를 지나가고 있는 북벌군.
적의 규모가 엄청났기 때문에 국민혁명군은 우선 직예군벌 우페이푸를 격파하고 쑨촨팡을 친 다음에 장쭤린을 상대한다는 전략을 결정했다. 첫번째 공격 목표는 우페이푸의 거점인 우한 삼진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우한은 한양, 한커우, 우창 세 도시로 이루어진 대도시로 80만의 인구에 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고 우페이푸의 무기고가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신해혁명의 시작인 무창봉기가 일어난 곳으로 정치적 상징성도 있었다. 소련 고문인 바실리 블류헤르 등이 이곳을 우선 공격목표로 지목한 것도 당연했다.
7월 5일 탕성즈가 전선총지휘를 맡아 4,7,8군을 거느리고 호남성의 성도 창사를 목표로 북진했다. 북벌군의 정치공작이 주효하여 여러 군벌들이 싸우지도 않고 행복했고 철도노동자들을 비롯한 민중이 협조함으로 북벌군은 손쉽게 진격했다. 호북성 독리 진가모가 급전을 뛰워 우페이푸에게 우한으로 돌아와 지휘해달라고 부탁하자 섬서에서 펑위샹과 싸우던 우페이푸는 장쭤린과 장쭝창에게 펑위샹 문제를 맡기고 급하게 남하했다. 우페이푸는 연수에서 방어선을 치고 저항했으나 북벌군은 손쉽게 격파하고 9일 상향, 10일 상담, 11일에 창사를 점령했다. 호남군 총사령관 섭개흠은 퇴각했고 7월 12일 오전 3시, 장제스가 5만 명의 창사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창사에 입성했다. 군기엄정한 북벌군은 군벌군과 달리 약탈, 강간을 비롯한 대민범죄를 자행하지 않아 환영을 받았다. 북벌군은 기세를 몰아 19일에 평강, 22일 악양을 함락시키면서 호남이 북벌군의 손에 들어왔다. 7월 25일 탕성즈를 주석으로 하는 호남성정부가 수립되었다. 여기까진 손쉬웠으나 호북에서부터 우페이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우페이푸는 전열을 정비하여 무창 남쪽 80킬로미터 지점의 정사교에 진을 쳤다. 이곳에 진덕린, 유옥춘 등이 지휘하는 우페이푸 휘하의 최정예부대 2만명이 집결하여 북벌군을 저지했고 이에 장제스가 하승교에 전선사령부를 설치하고 직접 독전에 나섰다. 4군이 7천명의 직예군을 사살, 포로로 잡고 정사교를 점령하자 우페이푸는 정사교에서 퇴각한 장교 9명을 본보기로 처형하고 정사교를 탈환하라고 지시했으며 퇴각하는 병사들을 처형하기 위한 독전대를 배치하여 퇴각하는 병사들은 칼로 베어 죽였다. 7월 27일 심야에 우페이푸군은 필사적인 공격 끝에 정사교를 탈환했고 북벌군은 퇴각했다. 28일 북벌군은 정사교를 다시 점령했으나 마제가 지휘하는 직예군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29일, 장제스는 1군을 투입하여 정사교를 제압했고 오전 10시에 열차로 정사교를 건넜다. 8월 12일 장제스는 쑨촨팡에게 국민혁명군으로 귀순할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쑨촨팡은 북벌군의 빠른 진격을 보고 북벌군을 경계하여 '보경안민'의 구호를 내걸고 자치운동을 벌이며 북벌군의 정치공작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했다."귀형은 강소, 절강, 안휘, 강서, 복건의 치안책임자를 맡고 있지만, 만일 혁명의 조류에 순응하여 인민의 행복을 보전할 수 있다면, 중정은 반드시 정부에 귀형을 5개 성의 총사령관으로 승인할 것을 요청하겠다."
9월 1일 전선은 무창에 이르렀고 우페이푸는 2개 사단을 증강하고 홍산에 포대를 구축하여 무창을 요새화하였다. 우페이푸는 쑨촨팡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쑨촨팡은 눈치를 살피며 돕지 않았다. 9월 3일 오전 3시부터 북벌군의 무창 공격이 시작되었다. 야음을 틈타 결사대가 성벽을 올랐으나 중포와 기관총의 저항 때문에 막대한 사상자만 남기고 철수했다. 3일 심야에 장제스는 도가만에 도착하여 2차 공격을 지시했다. 5일 오전 3시, 북벌군은 다시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9월 6일 16시간의 격전 끝에 한양이 함락되었고 9월 7일에는 한구가 항복했다. 이런 전황을 보고 8월 17일 모스크바에 머물던 펑위샹이 귀국하여 9월 17일 국민혁명군 합류를 선언했다. 9월 23일에는 북벌에 그동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던 이오시프 스탈린마저 크게 기뻐하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한구는 이제 중국의 모스크바가 될 것이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무창에서는 유옥춘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이에 북벌군은 4군 소속 2개 사단과 포병들을 동원해 성을 포위하고 봉쇄전략을 실시한 다음에 강서성의 점령을 서둘렀다. 북벌군은 무창 성내를 비행기로 폭격하는 한편 '우페이푸를 타도하라! 불평등조약을 취소하라!', '장병의 투항을 권고한다!' 등의 삐라를 뿌려 선동했고 상인들에게 무창 안으로 식량과 금전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엄명했다. 9월 30일 정저주에서 우페이푸는 군사회의를 열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지만 이미 장령들이 싸울 의지를 잃어 우페이푸가 우한을 공격하라고 반격명령을 내렸음에도 따르는 자가 없었다. 결국 북벌군 공병대의 터널 전략까지 격퇴하면서 저항하던 무창은 결국 포위 41일만인 10월 10일 오전 7시 30분에 항복했는데 이날은 마침 신해혁명 15주년 기념일이었다. 장제스는 무창에 입성하여 열병식을 거행했다."우리 군대가 우한을 반격하지 못하면 직예, 산동연합군이 길을 빌려 와서 대신 공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발 딛고 설 땅이 없고 하남성 역시 지켜 낼 수 없게 된다."
3.2.2. 국민혁명군의 강서 -복건 공략
무창 공격이 진행되던 중인 1926년 8월, 장제스가 쑨촨팡에게 국민혁명군으로 귀순하라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것은 전술한 바가 있다. 쑨촨팡은 우페이푸 다음은 자신이 될 것이라 여기고 산동의 장쭝창과 의형제 결의를 맺어 더 이상 싸우지 않기로 협정을 체결했고 쑨촨팡은 서주에, 장쭝창은 연주에 주둔하며 서로 1개 여단을 초과하지 않으며 오성연합군이 우페이푸를 지원하러 가게 되면 산동을 통과할 것을 허락하기로 했다. 장쭤린 역시 우페이푸가 완전히 몰락하면 쑨촨팡이 오히려 북벌군에 합류할 것을 우려하여 왕잔위안을 난징으로 보내 쑨촨팡에게 자신과 힘을 합쳐 북벌군을 막자고 제의하자 쑨촨팡은 "서로 끌어 주길 원하며 상황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9월 9일 장쭤린은 우페이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이 짐승은 자신의 반동사상으로 교활한 술수를 벌인다. 그를 격파하고 제거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다."
1926년 9월 17일 장제스의 일기.
이후 장쭤린은 진윈펑을 난징에 보내 봉천군과 산동군이 절대로 진포선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고 공산당을 토벌할 때도 경한선만 쓰겠다고 쑨촨팡을 안심시킴으로 쑨촨팡을 반국민당 전선에 잔류시켰다. 쑨촨팡은 8월 31일 3방면군 총사령관 노향정을 강서성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북벌군을 견제하기로 했다. 국민혁명군도 쑨촨팡에 대항하기 위해 2,3,6군을 강서성에 배치했다. 조너선 펜비는 장제스가 무창 공격을 중단하고 강서성을 공격한 것을 바실리 블류헤르에 밀려 위축되었던 군사적 영광에 욕심이 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3] 하지만 레이 황은 공산당원들이 장제스에게 무창 함락의 공을 쥐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 군사적 영광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던 강서 전선으로 장제스를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8월 29일 장제스는 무창을 떠나 강서 전선으로 이동했다."우페이푸 장군이 패하여 우한이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동남의 반쪽이 전부 나와 형께 의지하고 있어 현재의 정세가 아주 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형과는 서로 작은 감정과 틈이 있었지만 우리 빨리 동쪽으로 가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9월 6일 국민혁명군은 강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날 평향이 함락되었고 19일 6군이 강서성의 성도 난창에 입성했다. 국민혁명군의 입성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은 이를 환영하고 쑨촨팡의 오성연합군의 시설을 파괴하는 등 국민혁명군의 진격을 도왔다. 하지만 소수의 병력으로 지나치게 깊숙히 진군한 것 덕분에 쑨촨팡의 반격을 허용하게 되었다. 구강까지 철수했던 오성연합군은 난창을 탈환하기 위해 대군을 투입했고 난창을 방비하고 있던 1만명의 국민혁명군은 수적열세 때문에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쑨촨팡은 난창을 점령하고 국민혁명군에게 협조한 혐의를 받는 시민들을 닥치는대로 처형했다. 초기의 무리한 공세 때문에 국민혁명군이 입은 피해는 1만명에 달했다. 강서성 공략을 독전하기 위해 난창으로 향하던 장제스는 난창을 도로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난창 서남서 60킬로미터 지점의 고안을 거점으로 삼고 반격을 준비했다. 9월 15일 장제스는 무창을 포위공격하던 1군 2사단을 빼내어 강서 전선에 배치했다. 장제스는 10월 12일, 1군 2사단과 4군을 투입하여 난창을 공격했으나 오성연합군의 화포 공격에 피해가 속출하자 철수했다가 보급선을 차단하는 포위기동작전을 실시했다. 11월 5일 구강이 함락되었고 11월 7일에는 난창이 항복했다. 이로써 오성연합군의 정예부대들이 궤멸하면서 쑨촨팡은 난징으로 도주했다. 이로써 강서성이 국민혁명군의 손에 들어왔고 북벌군은 4만명의 포로를 잡았다.
한편 허잉친의 동로군도 복건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복건 독판 주음인은 허잉친에게 패배했고 동로군은 12월 18일 푸저우를 함락시켰다. 주음인은 절강성으로 도주했다. 이로써 호남, 호북을 비롯한 양호지역, 강서, 광동, 광서, 귀주, 복건 지역이 완전히 국민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국민당은 13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총 7개 성, 1억 7천만 인구를 통치했다. 총 2만 5천명의 병사들이 전사했고 그중 1만 5천명이 강서 전역에서 소모되었으나 24개 군벌이 국민당에 합류하면서 국민당의 병력은 26만으로 늘었다. 하지만 급격한 숫자로 늘어난 군대 때문에 재정적 문제가 심각해졌다. 급료를 받지 못한 군사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고 재정 문제 때문에 장제스와 쑹쯔원의 관계가 최악으로 악화되어 관계 단절을 선언하기도 했다.[4]
북벌의 괄목할만한 성과에 국민당을 개무시하던 열강들도 태도가 전향적으로 바꾸었다. 영국은 원래 우페이푸를 지지했지만 국민당의 북벌이 대승으로 끝나자 한커우에 주 베이징 영국 대사를 보내 국민당과 회담을 가졌고 다른 열강들에게 중국에서의 안정적 이권을 위해 기존의 조약을 개정할 의사가 있음을 중국의 신정부에게 보여줘 신정부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의견을 보냈다. 하지만 국민혁명군은 매우 반외세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고 병사들이 선교사와 외국인들을 공격하면서 서구 열강과의 접촉이 엎어졌다. 이것이 국민당 좌파에서 내세운 혁명외교였는데 1927년 1월 3일 한구의 영국 조계지에서 영국 해군과 중국인들이 충돌하자 정무회의가 조계지의 행정을 국민정부에 이양했고, 국민정부는 치안유지를 이유로 조계지를 회수했다. 1월 6일에는 구강의 영국 조계지를 국민정부가 회수했다. 이런 과격한 혁명외교는 조계지 회수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으나 제국주의 열강을 분노시켜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높임으로 국민당 우파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3.2.3. 군벌들의 연합
우페이푸가 한구에서 후퇴한 다음날이었던 9월 7일,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은 심양에서 고위 군사회의를 열어 북벌군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우쥔성, 장쭤샹 등의 원로들은 소위 보경안민, 즉 기반이나 잘 지키고 북벌군을 상대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쭝창, 저옥박 등은 우페이푸를 지원하는 명목으로 남하하여 우페이푸의 기반인 직예와 하남을 차지하자고 주장했다. 장쭤린은 우페이푸의 기반을 차지하자는 주장에 귀가 솔깃하여 우페이푸에게 북벌군을 토벌하기 위해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우페이푸는 장쭤린의 속셈을 간파하여 자신은 아직 10만명의 병력이 있음으로 혼자서 우한을 탈환할 수 있으니 돕고 싶다면 무기나 보내달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장쭤린의 발해 함대를 빌려 광저우에 직접 공격을 가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우페이푸가 봉천군 파병을 반대하자 장쭤린은 남하를 포기했다. 장쭤린은 우페이푸에게 바오딩과 대정 지역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면서 우페이푸를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이 북벌 초기에는 군벌들이 힘을 합쳐 북벌군에게 맞서기는 커녕 자신들의 이권 문제에 집착하면서 다툼에 정신이 없었다.
허나 우한이 함락되고 쑨촨팡이 강서성에서 밀려나면서 더 이상 지켜볼수만은 없게 되었다. 장쭝창이 쑨촨팡을 도울 것을 제의하자 11월 11일 장쭤린은 톈진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쑨촨팡 지원 문제를 논의했다. 11월 13일 장쭝창이 톈진으로 와서 쑨촨팡과 우페이푸를 모두 도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11월 14일 톈진 채원에서 우쥔성, 장쉐량, 한린춘, 장쭝창, 우페이푸의 대표 진윈펑, 쑨촨팡의 대표 양문개, 옌시산의 대표 전응황이 참여한 가운데 회의가 소집되었다. 장쭤린은 자신은 중화민국 총통 자리에 아무런 야심이 없으며 북양파가 단결하여 군사문제를 해결한 다음에야 정치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은 병력을 남하하여 우페이푸와 쑨촨팡을 도울 것이니 동의를 구할 것이며 서북에서 펑위샹을 상대하는 것에는 옌시산과 합작하겠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다음날인 15일, 장쭤린은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여단장급 이상 장교들을 모두 참석시켰다. 장쭝창이 신속하게 친구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고 장쭤린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11월 29일 장쭝창은 직예, 산동, 하남, 강소, 안휘, 강서, 절강, 복건, 섬서, 산서, 차하얼, 열하, 수원, 길림, 흑룡강 등 15개 성의 연명으로 장쭤린을 안국군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여기에 쑨촨팡, 우쥔성, 장쭝창, 옌시산, 상진, 구영걸, 진조원, 장쭤샹, 노향정, 한린춘, 고유악, 주음인, 진의, 저옥박, 텅위린, 유진화 등의 북양군벌의 마지막 남은 실력자들이 연명했다. 12월 1일 장쭤린은 채원에서 안국군 총사령관 취임식을 거행했다. 장쭤린은 쑨촨팡을 안국군 부사령관 겸 강소, 안휘, 강서, 절강, 복건 5개성 연합군 총사령관에, 장쭝창을 안국군 부사령관 겸 직예, 산동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양위팅을 총참의로, 한린춘과 장쉐량을 육군 상장으로 임명했다.
한편 강서성을 잃은 이후 쑨촨팡은 진윈펑, 우광신, 웅병기, 유종기, 양문개 등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쑨촨팡은 돤치루이, 우페이푸와 힘을 합쳐 국민혁명군을 막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애국은 바른 길이 아니면 불가하며 우리를 지키는 것은 적화를 없애는 것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1926년 12월 1일 장쭤린의 반적 선언.
하지만 진윈펑이 합비에서 돤치루이를 영수로 추대해야 연합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우페이푸가 파견한 웅병기가 헛소리말라고 비난하면서 회의는 파행으로 치달았고 쑨촨팡은 밥이나 먹자고 허겁지겁 회의를 끝내면서 삼각연합은 실패로 끝났다. 이에 쑨촨팡은 1월 양문개를 장쭝창에게 보내 합작을 요청하자 장쭝창은 이렇게 말했다."우한과 강서 지구에서 패한 것은 물론 우리의 병력이 부족하긴 했지만 북양 장령들이 상호 협조를 안 한 것이 실패의 주요 원인입니다. 모두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함께하여 적과 싸우기를 희망합니다."
양문개는 장쭤린에게도 합작을 요청했고 장쭤린은 옛일을 묻지 말고 합심 협력하여 국민혁명군을 물리치자고 했다. 1927년 1월 쑨촨팡은 참모처장 유옥서와 수행원 2명을 대동하고 변복을 한채 전용열차를 타고 텐진으로 가서 장쭤린을 직접 만났다. 쑨촨팡은 채가화원에서 장쭤린과 회동했다. 쑨촨팡은 90도로 절하며 매우 공손한 태도로 장쭤린의 비위를 맞추며 자신에게 20만 대군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장쭤린은 만주에 80만 대군이 있으니 자신들이 힘을 합치면 어찌 백만대군을 꾸리지 못하겠느냐면서 하얼빈의 마지막 대대까지도 동원해 싸울 것이라고 했다. 장쭤린, 쑨촨팡, 장쭝창 등은 완전히 합작을 결의했고 장쉐량, 장쭝창, 쑨촨팡은 의형제를 맺었다. 쑨촨팡은 난징으로 돌아와 안국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여 장제스에 맞설 준비를 했고 12월 27일 장쭤린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1월 2일 구웨이쥔 내각을 재출범시킴으로 베이징의 정부 조직 문제를 해결했다.[5] 장쭝창도 3월에 저옥박 등을 거느려 난징에 도착했다. 쑨촨팡은 저옥박을 강소성 독판으로 임명했고 장쭝창은 양주에 주둔했다."우린 녹림대학 마적과 출신이고 당신들은 사관학교나 육군대학을 나오지 않았소? 아무 말 말고 우리 같이 남군을 치러 갑시다! 쑨 장군에게 말 전하십시오. 우리 꼭 함께 하자고 말입니다."
3.3. 중기 전개
3.3.1. 영왕운동과 천도논쟁
군벌들은 단결하고 있건만 국민당은 계파 갈등으로 인하여 오히려 분열하고 있었다. 이미 호남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호남성 정부를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한 탕성즈는 장제스의 총사령관 자리를 노리고 있었고 보로딘을 비롯한 공산당원들은 장제스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1926년 7월 7일 공산당 기관지 <향도>는 장제스를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려는 기회주의적 군인'이라고 비난하며 북벌을 반대했다. 그리고 광저우에서는 왕징웨이를 추대하여 장제스를 견제하고 황푸 군관학교 교장 자리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를 영왕운동이라 하는데 본격화는 1926년 6월 즈음이었다.1926년 8월 10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47차 회의에서 허샹닝이 왕징웨이 복귀를 발의하여 왕징웨이에게 각지에서 접수된 전문을 보냈다. 결론은 원론적이었으나 배경한 교수는 이것이 중앙이 영왕운동을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로 분석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당연히 장제스는 이런 영왕운동에 크게 반발했다.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장징장은 공산당이 영왕운동을 하는 것은 도장(장제스 타도)에 뜻이 있다고 보고했고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출신 장교들에게 영왕이 도장보다 나쁘다고 전보를 보내 불쾌감을 드러냈다. 1926년 8월 31일 장제스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9월 15일에는 블류헤르, 총정치부 주임 덩옌다와 회담하고 다시 불평했다."보로딘과 그 동료들은 혁명군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고 우리 당의 북벌이 성공하는 것을 막으려고 작정을 했다. 아, 총리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그의 계승자인 우리는 왜 이토록 어려운 상황에 마주쳐야 하는가!"
강서성 공격이 끝난 이후 장제스는 빨리 연해 지역까지 진격할 것을 주장했지만 보로딘 등은 서북의 펑위샹과 연계하는 것을 우선시하며 장제스의 주장에 반대했다. 하지만 11월 이후 장제스를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덩옌다의 총정치부는 장제스를 비난하는 선전문건을 발행하고 지휘관들을 임명하여 독자적인 별동대를 운용했다. 장제스는 12월 2일 덩옌다와 회담하며 공산당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소득이 없었고 오히려 덩옌다가 자신을 비난하는 선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혁명의 상황이 이와 같이 되어야만 하는가? 거만한 태도로 사람을 압박하고, 방해 책동을 펼치며, 사소한 일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통에 내장이 꼬이고 분노가 치민다. (그러나) 유일한 출로는 이런 모욕을 꾹 참고 넘기는 것일 뿐이다."
장제스는 1926년 9월 양호 지역에서 탕성즈를 견제하고 국민당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우한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우한 천도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장제스의 우한 천도론을 묵살하고 영왕운동을 국민당의 주요 의제로 삼았다. 장제스는 천두슈에게 왕징웨이가 돌아와봐야 소군벌들에게 이용만 당할 것이라고 공산당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천두슈는 "왕징웨이가 복직하면 국민정부의 역량이 강화되고, 새로이 가담해 오는 소군벌들과 장제스 간의 충돌도 완화해주며, 광둥의 부패정치를 청산하는 데도 역할을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영왕은 왕장합작이지 영왕도장이 아니다. 오히려 장제스의 군사적 지도권을 유지시키고 확대하려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당시 공산당은 장제스를 너무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장제스의 군사적 지위는 인정하고 장제스가 부득불 반대한다면 무리하지 않겠다고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결국 장제스는 영왕운동에 동의하는 것이 주도권 유지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9월 29일 왕징웨이의 귀국 복직을 환영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1926년 10월 15일에서 28일까지 열린 광저우 연석회의에서 영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왕징웨이의 복직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내기로 했다. 왕징웨이는 복직을 요구하는 전보를 받고 귀국길에 올랐으나 그가 귀국한 것은 1927년 4월이었다. 왕징웨이는 이것이 병세가 악화되어서 라고 주장했고 소련은 장제스가 왕징웨이에게 비밀리에 전보를 보내 오지 말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국민당은 천도문제를 놓고 결정적으로 좌파와 우파가 분열되었다. 장제스는 초기에 탕성즈 제어를 위해 우한 천도를 주장했으나 막상 11월 우한 천도가 결정된 이후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우한을 혁명의 근거지로 삼아 자신의 권위를 약화하려 하자 이에 맞서 난창 천도론을 주장하며 맞섰다. 난창과 우한의 대립은 실로 격렬해졌고 장제스 측에서 우한 천도를 잠정적으로 인정했음에도 우한은 장제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1927년 3월 10일 개최된 3중전회는 장제스의 국민당 상무위원회 주석직을 폐지하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력을 대폭 제한하는 등 장제스의 권한을 축소하고 장제스의 측근들을 정부 인선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장제스는 3중전회의 결정을 전해듣고 미쳐 날뛰었지만 진정을 되찾고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절강, 강소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3.3.2. 국민혁명군의 난징-상하이 공략
국민당 내부의 계속되는 정쟁 가운데서도 북벌은 계속되고 있었다.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맞서기 위해 북양군벌이 단결하자 북벌군은 1927년 1월 6일 난창에서 회의를 열고 대응을 논의했다. 동로군, 중앙군, 서로군을 나누어 장강 하류의 군벌들을 먼저 일소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 1. 동로군은 허잉친이 총지휘하며 항저우, 상하이를 목표로 한다.
- 2. 중앙군은 총사령관 장제스가 직접 통솔하고 청첸이 이끄는 강우군, 리쭝런이 이끄는 강좌군으로 나누어 난징으로 행한다.
- 3. 탕성즈가 총지휘하는 서로군은 섬서에 있는 펑위샹 부대와 연락을 하고 기회를 보아 하남성으로 진격한다.
봉천군대가 남하하자 하남의 우페이푸의 잔여 세력들은 잇달아 항복했다. 2월 6일 구영걸이, 2월 10일 전 대총통 차오쿤이, 2월 14일 토벌군 부사령 치셰위안이, 2월 16일 하남 군무 방판 미진표가 봉천 군벌에 투항했고 장쭤린은 미진표를 안국군 제18군 군장 겸 의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2월 중순에는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군대를 불러 장강 북쪽을 수비하려 했다. 3월에 이르러 장쭤린은 하남성 대부분을 함락시켰으나 남방에서 국민혁명군의 진격 속도도 신속했다.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동로군은 2월 10일 항저우를 함락하고 3월 18일 상하이의 남부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3월 14일 송호 해군 함대사령관 양수장이 귀순하여 국민혁명군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3월 22일에 상하이가, 3월 24일에 난징이 함락되었다. 한편 상하이에서는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공산당이 독자적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위해 여러차례 폭동을 일으켰으나 거듭 실패했다. 3월 21일의 80만명이 동원된 총파업은 3월 22일 쉐웨의 국민혁명군과의 공조로 마침내 성공할 수 있었다.[6] 3월 초에는 리쭝런이 안휘로 진입하자 쑨촨팡의 병사들이 앞을 다투어 항복했다. 결국 쑨촨팡은 장강을 넘어 도주했고 장쭤린의 대원수 추대에 참여했던 옌시산은 보경안민을 외치면서 발을 빼버렸다."직예, 산동 여합군 및 3,4 방면군은 나누어 진격하며 반드시 우한을 접수하고 광동과 호남을 취하도록 한다. 하남의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업신여기지 말고 그 일체의 모든 직위는 예전과 같다. 부대를 움직일 때에는 특별히 명령을 받고 움직이도록 한다."
3.3.3. 난징사건
3월 23일, 국민혁명군은 난징에 이르렀다. 장제스가 직접 군함 초동호를 타고 독전했고 3월 24일 난징이 함락되었다. 그런데 난징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폭동이 발생했고 이에 분노한 열강의 함대가 개입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국민당 우파는 이것이 공산당의 음모라고 주장했고 국공결렬에 한가지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3.4. 후기 전개
3.4.1. 4.12 상하이 쿠데타와 영한분열
장제스는 1927년 3월 26일 상하이에 입성했지만 상하이의 노동자들은 장제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상하이는 연일 파업과 시위로 혼란을 빚고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은 상하이에 독자적인 무장과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한 정부 역시 장제스를 실각시키기 위해 견제에 나섰다. 이에 맞서 국민당 우파 측은 우징헝 등이 감찰위원회를 통해 공산당을 비판했고 장제스도 총공회의 무장해제를 시도하였다. 결국 양측 간에 벌어진 첨예한 대립 끝에 4월 1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에서 면직되었고 장제스가 선제적인 군사적 대응을 선택하면서 청당에 돌입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4.12 상하이 쿠데타 문서 참조.
그간 우한 측에선 장제스의 대응이 '기껏해야 북벌에 나가지 않고 버텨보는 정도가 고작'일 것이라 인식하고 있었고 장제스와 허잉친이 독자적인 정부 수립 절차에 착수했단 첩보에도 강소성 지방정부의 조직에 관련된 일이라고 간과하고 있었다. 장제스의 행동이 거칠어지자 그제야 우한에선 장제스에게 더 이상 반동적인 행위를 하면 제명시키겠다고 위협하는 최후통첩을 결의했으나 장제스의 군사력에 정면대응하는 길에 대해서는, 왕징웨이의 우한 복귀를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 결국 제대로 된 대응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쿠데타 발생 이후에도 우한은 4월 17일 장제스를 제명하고 그에 대한 현상금은 걸었으나, 상하이-난징에 대한 군사적인 대응책은 장제스 개인에 대한 징계책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크다고 논하지 않았고 북벌을 재개하기로 했다. 우한의 대응은, 북벌을 통해 펑위샹, 옌시산과 합작하여 그들의 군사력으로 장제스를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우한의 소극적 대응에 4월 15일 저우언라이가 비난을 하였으나 바뀌는 것은 없었다.
4월 15일에 예정된 제2기 중앙집행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를 위해 5명의 중앙집행위원과 감찰위원들이 난징으로 모였다. 이들은 담화회를 열고 난징을 수도로 정하며, 우한의 '비합법적 중앙당부'를 취소하고 우한의 '가짜정부'를 취소하며 두 당에 걸친 분자의 당적을 취소한다 등 8개 방침을 결정, 4월 17일엔 정식으로 중앙정치회의를 개최하여 국민정부가 4월 18일부터 난징에서 공무를 개시한다는 것을 의결하였다. 후한민, 유영건, 우징헝 등이 합류했고 18일 오전, 구 강소성 의회에서 국민정부 성립식전이 거행되었다. 채원배가 후한민에게 수인했고 열병식이 거행되었는데 후한민은 병사들에게 "일치하여 총사령을 옹호하고 혁명진영을 공고히 하여 반혁명 세력을 타도하라"고 호소했다. 난징 국민정부는 <국민혁명 방략> 4개 조항을 발표, 당군과 인민의 더욱 밀접한 연대를 꾀한다, 청렴결백한 정부를 수립한다, 국내산업을 보호한다, 농공단체의 이익을 보장하고 그 발전을 돕는다 등을 서약했다. 또한 <전 장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북벌 완성을 향해 맹진할 것을 촉구했다.
우한 정부는 4월 17일 장제스 당적 박탈과 장제스 체포령을 내렸다.
또한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펑위샹을 임명하고 탕성즈를 부사령관으로 삼았다. 난징 정부도 미하일 보로딘, 천두슈, 담평산, 임조한,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곽말약, 오옥장, 류사오치, 쉬첸, 등옌다 등 197명의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로써 우한과 난징이 완전히 결렬하였는데 이를 영한결렬, 영한분열이라고 한다."장중정은 민중을 학살하여 당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와그 죄가 명백하다. 당 중앙 집행위원회는 이미 그의 당적을 박탈하기로 결정하였고 그의 본직과 각 직책을 해임한다. 전체 장병들과 혁명 민중 단체는 장중정을 잡아 중앙에 넘겨 그의 반혁명 죄를 징치하여야 한다."
3.4.2. 국민혁명군의 북벌 재개
4.12 상하이 쿠데타로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되면서 중국 대륙에는 우한 국민정부, 난징 국민정부와 기존의 베이징의 북양군벌 정부까지 모두 3개의 정부가 대립하는 상황이 펼쳐졌으나 여러가지 상황으로 인하여 기묘한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난징 정부는 경제력면에서 우한보다는 나았으나 특별히 여유로운 편은 아니었고 12만의 병력 중에 쓸만한 병력은 2,3만 밖에 되지 않았고 북방으로 쑨촨팡, 장쭝창을 비롯한 적대적 군벌들과 접하고 있었으며, 우한 정부는 10만의 병력 중에 8만명 정도의 정예병력이 있어 군사적으로는 우세했으나 공산주의 열풍이 양호 지역을 휩쓸면서 지방과 도시에서 총공회와 농민협회가 주도한 폭동과 파업, 적색테러가 극심하여 재정인 파탄과 이로 인한 민심 동요, 내부분열이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적대적인 군벌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장쭤린의 안국군 정부도 경제적인 문제가 심각하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었으며 서쪽에서 국민군을 선포하고 국민당의 편에 선 펑위샹의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위협하고 옛 동맹인 옌시산도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 국민당의 북벌이 이어지자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맨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우한 국민정부였다. 우한 측은 장제스 토벌과 북벌 중에 어느 쪽이 급선무인지를 놓고 논의를 벌였다. 기존의 코민테른 대표 미하일 보로딘은 펑위샹과 연계하여 북벌을 실시, 펑위샹과 조우한 후 소련과 연결되는 통로를 마련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자고 주장했고 신임 코민테른 대표 마헨드라나트 로이는 농민혁명과 광동 정벌을 주장했다. 결국 보로딘의 의견이 채택되면서 4월 19일 우한 국민정부는 동호에서 궐기대회를 열고 탕성즈를 앞세워 북벌을 재개했다. 이 시점에 펑위샹이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사령관에, 옌시산이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국민혁명군의 북진에 하남에 잔류한 우페이푸 군대는 완전히 격멸되었고 우페이푸는 5월 12일 공현을 떠나 이틀에 걸쳐 목숨을 건 도주를 해야 했다. 5월 21일 장쭤린이 우페이푸가 베이징에 파견한 대표인 번정을 만나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명했다.
이때 하남성이 국민당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본 옌시산은 타이위안에 국민혁명군 진수 연합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삼민주의 추종을 선포하여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 사령관 취임을 선언했다. 펑위샹도 5월 1일 서안에서 제2집단군 사령관 취임식을 거행하고 5월 5일 동쪽으로 진격했다. 펑위샹은 5월 26일 뤄양을 함락시켰으며 6월 1일 탕성즈 군대와 조우하였다. 옌시산도 산서성 일대의 봉천군대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려 산서성에서 봉천군벌을 완전히 축출했다. 이로써 우한 국민정부의 북벌은 일단락되었다."우 장군이 어떻게 되어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남양으로 갔습니까? 아니면 잠시 숭산으로 갔습니까? 어찌하여 나한테 한 글자 기별도 안하고... 당신에겐 편지 한통이라도 있었습니까? 나는 그를 믿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날 믿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한편 난징의 장제스도 5월 11일[7] 북벌 재개를 선포하고 북벌 이후 처음으로 장강을 넘어 진포 철로를 따라 진격했다. 허잉친이 지휘하는 1로군,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2로군, 리쭝런이 지휘하는 3로군을 동원한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진포철로의 요충지인 장팔령, 방부, 양주가 잇달아 함락되었고 5월 31일 쉬저우를 공격하여 6월 2일 점령했다. 장쭝창 군대는 약탈을 일삼으며 패주할 따름이었다. 쉬저우의 함락으로 난징정부는 강소, 안휘, 절강, 복건, 광동, 광서, 귀주, 사천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장쭤린은 쑨촨팡과 장쭝창에게 퇴각하여 병력을 보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민당의 북벌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일본 제국에선 대중유화책을 주장하던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와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이 사퇴하고 4월 21일, 강경한 다나카 기이치 총리가 취임한 상태였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국민혁명군이 산동에 이르자 칭다오의 일본 조계지 보호를 위해 1차 산동파병을 거행하여 중국인들의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다.
3.4.3. 장쭤린의 대원수 취임
위기에 몰린 장쭤린은 참모 양위팅의 건의에 따라 역시 반공을 표방한 장제스와 접촉하여 난징 국민정부와 화친하고자 했다. 장쭤린은 '국민혁명군과 화친하고 반공한다', '옌시산과 연대하여 펑위샹을 토벌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장제스에게 황하를 경계를 천하를 양분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장제스는 베이징에 사람을 보내 봉천-난징-산서의 3각 동맹을 조직하여 우한을 토벌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한편 6월 8일 장쭤린에게 삼민주의 순봉과 안국군을 국민혁명군으로 개칭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장쭤린을 동북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장쭤린이 지배하는 동북 지역의 통치권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장쭤린에게 명목상으로라도 장제스의 휘하에 들어가라는 요구였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장쭤린은 장제스가 백일몽을 꾸는 허황된 망상가라고 소리치며 장제스의 반공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명분으로 이를 거절했다.
6월 11일 베이징의 순승왕부에서 고급 장령회의가 개최되었다. 쑨촨팡, 장쭝창 등이 참여했고 정부조직 문제, 화평 문제, 최고 통수권 문제가 논의되었다. 봉천군벌의 원로인 장쭤샹, 우쥔성은 국민당에 투항하는 것에 반대하며 관외로 퇴각하여 만주를 사수하자고 주장했고 쑨촨팡, 장쭝창, 저옥박 등 관내가 기반인 군벌들은 결사항전론을 주장했다. 6월 16일 양위팅은 북방이 단결해야 남방을 누를 수 있으니 이를 위해 각군의 명칭을 통일하고 안국군 정부를 조직하여 모든 북방 군벌이 안국군 총사령관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쑨촨팡이 군사적 복종 뿐만 아니라 정치적 복종도 필요하다고 이에 즉각 찬동했다. 이에 정부 수반의 명칭을 무엇으로 정할지를 두고 논의가 벌어졌는데 총통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집정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던 중 장쭝창이 대원수를 주장했다.
쑨촨팡도 동조했다."오늘의 적은 북양계가 아닙니다. 싸우지 않는 것은 불가하며 싸우지 않으면 반드시 망합니다. 관에 들어가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통쾌히 한번 크게 싸워 봐야 합니다.직위를 높이게 되면 혹 정세가 나빠져 관외로 후퇴하더라도 대원수의 칭호가 잇으면 마치 광동에서 쑨원이 그런 것처럼 쉽게 호소력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한린춘 등 봉천 군벌의 장령들이 모두 찬성하였다. 장쭝창은 급기야 장쭤린에게 황제에 즉위하는 것을 제안했지만 장쭤린은 이를 승낙하지 않고 쑨촨팡, 장쭝창, 저옥박 등에게 필요한 군비와 물자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다른 사람들의 뜻에 따른다는 명목으로 대원수 추대를 승낙했다. 6월 16일 밤에 즉각 쑨촨팡, 장쭝창, 우쥔성, 장쭤샹, 저옥박, 장쉐량, 한린춘, 탕위린 등이 연명하여 쑨촨팡의 명의로 장쭤린을 안국군 정부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한다는 추대 전문을 발표해 전국에 타전했다."상장군을 대원수로 추대하고 안국군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남방의 군사 문제를 완성하는 일입니다."
장쭤린도 같은날 공산당 토벌의 전문을 타전했다.
장쭤린의 대원수 추대에 따라 북방 진위군, 직예-산동 연합군, 5성 연합군 등의 명칭들이 일률적으로 폐지되고 모두 안국군으로 통일되었다. 쑨촨팡, 장쭝창, 장쉐량, 한린춘, 장쭤샹, 우쥔성, 저옥박 등이 각각 안국군 1군단에서 7군단장에 임명되었고 장쉐량을 제외한 6인의 군단장이 의형제를 맺었다. 신임 내각 총리로 판푸가 임명되었고 구웨이쥔은 16일 당일에 즉각 사직 의사를 밝혔다. 장쭤린은 6월 18일에 회인당에서 대원수에 취임식을 거행했다. 장쭤린은 다음과 같이 선서를 낭독했다.
취임식을 마치고 3시 50분 순승왕부로 돌아온 장쭤린은 중화민국 군정부 조직령과 판푸의 내각총리 임명을 지시했다. 군정부 조직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본인은 분에 넘치게도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공화를 공고히 할 것을 서약하며 민주주의를 발양하고 내정을 쇄신하며 선린 외교에 힘쓸 것입니다. 이에 선서합니다."
- 제1조 육해군 대원수가 중화민국 육해군을 통솔한다.
- 제2조 대원수는 군정 시기 중화민국의 통치권을 행사하며 전국 인미은 법률 상의 권리를 향유하는 것을 보장한다.
- 제3조 군정부에 국무원을 두어 대원수를 보좌하며 정무를 집행한다.
- 제4조 국무원의 숫자는 국무총리, 외교총장, 군사총장, 재무총장, 재정총장, 사법총장, 교육총장, 실업총장, 농공총장, 교통총장이다.
- 제5조 대원수의 명령에는 국무총리가 반드시 부서한다. 각 주관 부문의 일은 각부 총장이 연대하여 부서한다.
- 제6조 국무원 및 각부의 관제는 달리 정한다.
- 제7조 중화민국 16년 6월 18일 이전 법률 명령이 본령과 서로 접촉이 안되면 알맞게 적용하도록 한다.
장쭤린의 대원수 취임에 대해 중국에 주둔한 열강의 외교관들은 승인한다는 일체의 발언이 없었다. 외교관들이 장쭤린이 개최한 외교 클럽 다과화에 참석한 것을 두고 군정 외교부는 외교 사절단이 대원수 추대를 승인한 것으로 간주했으나 열강은 끝내 장쭤린의 대원수 추대를 승인한다는 확인을 해주지 않았다.
3.4.4. 장풍합작과 국공결렬
당시 우한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거듭된 폭동과 전쟁으로 경제위기가 심각했으며 폭동으로 피해를 입은 우한의 국민당 장령들은 격노하여 공산당 숙청을 요구하고 있었다. 급기야 5월부터 하두인이 마일사변을 일으켜 호남의 공산당 숙청에 돌입하고 6월에 허젠이 반공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1927년 6월 1일, 스탈린으로부터 국민당 좌파와 연합하여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를 장악, 국민당을 개조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무장시킬 것이며 우한의 믿을 수 없는 우파 장교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숙청하라는 '5월 지시'가 내려오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이에 대한 공식적 입장 표명을 보류하고 소련과 펑위샹의 반응을 살피기로 했다.
6월 10일, 왕징웨이, 탄옌카이, 쉬첸, 덩옌다, 구멍위 등 우한 정부 대표단과 펑위샹이 정저우에서 회담했다. 펑위샹은 일반 병사의 군복을 입고 군용 트럭을 타고 나타났고[8] 하남성의 통치권과 재정원조를 요구했다. 6월 12일까지 이어진 회의 끝에 왕징웨이는 펑위샹의 요구에 동의했고 탕성즈의 부대를 우한으로 철수시켰다. 펑위샹은 장제스를 "늑대의 심장에 개의 폐를 가진 냉혹한 놈"이라고 욕하면서 우한 대표단을 만족시켰지만 펑위샹의 우한의 맹우로 보인 것은 불과 며칠에 불과했다.
장제스는 북방을 안정시킨 우한 정부가 틀림없이 난징을 공격할 것이라 여겨 펑위샹과 제휴하기 위해 리쭝런 등을 대동하고 6월 19일 쉬저우에 도착했다. 6월 20일 장제스는 쉬저우에서 펑위샹과 회담했다. 리쭝런은 펑위샹의 등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마침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와 펑위샹의 딸이 모스크바에서 동거를 시작한 참이었다. 4일 간의 회담 끝에 장제스는 펑위샹에게 하남성의 통치권과 매달 200만 위안의 재정 원조를 약속했다. 펑위샹은 국민혁명의 달성이라는 사명에 합의, 장제스와 연명으로 북벌 통전을 하였으며 우한정부에 통일을 호소하는 전보를 쳐 보로딘 귀국, 우한 국민정부 위원의 난징 합류, 탕성즈의 부대가 정저우로 와서 북벌에 협력할 것 등을 요구했다. 펑위샹은 자신의 지배 지역에서 반장, 도장 선전의 중지를 명령했고 덩샤오핑을 비롯해서 자신이 거느리던 공산당원 고문들도 모두 해고했다.[9] 펑위샹과 우호관계를 맺은 장제스는 보로딘 등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했다.
여기에 기대했던 소련의 지원이 시원치 않자 왕징웨이는 7월 15일 공산당을 정부에서 축출하고 국공합작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공산당은 7월 13일 선제적으로 국민정부 탈퇴를 선언하여 난창 폭동을 비롯하여 무모한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폭력 투쟁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이 역시 정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한 국민정부와 공산당의 결렬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국공결렬 문서 참조.
3.4.5. 장제스의 하야
장풍합작이 이뤄지면서 북방에 기대할 것이 없게 되고 장제스의 군세가 산동 지역에 진출한 틈을 타서 6월 23일, 우한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반장, 난징 타도를 주장하던 탕성즈가 난징 진격을 명령했고 장파쿠이, 청첸, 주페이더가 동진하여 7월 17일에 안휘에 진입했다. 이에 장제스는 북벌을 중단하고 난징 방위를 위해 북벌군을 후퇴시켰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군벌 쑨촨팡이 역습하여 장제스 군대를 밀어내고 난징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7월 24일 쉬저우가 다시 함락되었고 장제스가 직접 독전했음에도 열세가 두드러져서 결국 쉬저우 전선 전역에 걸친 총퇴각이 이루어졌다. 쑨촨팡의 공세에 밀린 탓에 장제스의 정치적 지위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제스는 7월 29일 하성준을 베이징에 보내 양위팅과 담판하고 휴전을 모색했다. 이에 양위팅은 봉천 군벌과 난징이 연합하여 펑위샹을 같이 토벌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곳곳에서 공산당 뿐만 아니라 장제스 역시 퇴출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장제스를 총사령관에서 동부군 사령관으로 좌천시키자는 주장이 군사위원회에 제기되기도 했다."나는 혁명의 한 부분이고 혁명은 나의 한 부분이다. 도저히 완전하게 은퇴할 수는 없다."
하야 이후의 장제스,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
7월 15일 분공을 결정했던 우한 정부는 공산당을 몰아내는 청당 작업을 실시하면서 펑위샹을 통해 난징 정부에 평화적 해결을 제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우한 정부는 장제스 하야를 조건으로 걸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난징의 리쭝런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징웨이는 우한 정부도 이제 반공을 표방하고 있으니 난징 정부와 우한 정부는 근본적으로 대립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고 탕성즈는 아예 8월 8일 전국에 '도장'을 타전하면서 장제스에 대한 공세 고삐를 쥐었다. 리쭝런 회고록에 따르면, 이때 장제스는 우한을 설득해보려 했으나 입장이 완강하여 실패했다 한다. 이에 장제스는 이때 다음과 같이 썼다.
8월 12일에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감찰위원회에서 왕징웨이의 주장에 넘어간 바이충시, 리쭝런 등 광서파는 우한과의 합작을 위해 장제스의 사퇴가 필요하단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리쭝런은 "장 총사령이 스스로 거취를 결정해 주었으면 싶다."라며 사직을 요구해왔고 쑨촨팡과의 싸움에서의 패배, 우한의 압력, 자신의 편을 들기는 커녕 우한과 합세하려는 광서파의 태도를 점검한 장제스는 결국 하야를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오직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나의 행동을 정하겠다."고 표명한 장제스는 바로 국민정부군 총사령직을 사퇴함을 알리는 사표를 국민정부에 제출하고 난징에서 상하이로 떠났다. 이때 우징헝, 장런제, 후한민, 차이위안페이, 리스쩡 등 5명도 '장제스와 진퇴를 같이 한다'는 명분으로 동반 사퇴했다. 다음날인 8월 13일, 장제스는 미리 준비해둔 사직선언을 낭독하며 영한합작을 위한 3가지 지침을 발표했다."시국의 분규와 내부의 복잡함은 남도 북도 모두 같은 모양이다. 단지 냉정하게 기다렸다가 기회를 보아 움직이면 최후의 승리를 얻지 못할 일이 없다!"
8월 11일 장제스의 일기.
조지 소콜스키 기자는 "몇분 동안 회의장은 정적에 휩싸여 아무도 말문을 열지 않았다."라고 당시 기자회견의 상황을 묘사했다. 다른 사람이 우한과 난징의 합병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발언을 하기 시작하자 장제스는 회의장을 빠져나가 즉시 임시 기차를 타고 난징을 떠나 상하이에서 자문들과 상의한 후 고향에 칩거했다. 뉴욕타임스의 미셀위츠는 시커우 마을의 절에 기거하던 장제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비록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는 정치적 패배를 당했으나, 장제스의 친위 부대가 상하이, 항저우, 난징 등에 고루 주둔해 있고 펑위샹, 옌시산 등의 실력자들이 장제스 옹호의 입장을 취하며 그의 사직을 반대하는 등, 그의 입장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장제스를 지지하며 난징 정부에 자금을 지원하던 청방과 절강 재벌들은 장제스의 하야에 발맞춰 자금 제공을 끊어 난징 정부의 경제난을 야기했다. 장제스 하야 이후 난징 정부의 월수입이 800만 정도였는데 장제스가 거둬오던 재벌들의 지원은 월 2천만에 달했었다. 또한 광동파가 장제스의 편에 섰다. 광동파 리지선이 시국선언을 발표, 바이충시와 리쭝런을 비롯한 광서파를 비난했고 이 때문에 리쭝런은 7군장직을 사퇴했으며 그 후임은 친장파가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광서 후방의 제15군 역시 친장파에 넘어갔다. 이후 장제스는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 외유를 떠났다."그는 침착해 보였고,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는 생판 다르게 긴장과 피로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3.4.6. 영한합작
통합의 걸림돌인 장제스가 하야를 하게 됨에 따라 우한과 난징은 통합을 논하게 되었지만 장제스가 하야하고도 입장 차이가 커서 난항을 겪었다. 여기에 1925년 분리된 서산회의파의 상하이 당중앙까지 개입하면서 논의는 더욱 복잡해졌다. 하지만 8월 들어 쑨촨팡의 공세가 거세지자 북양군벌에 맞서 단합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9월 16일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가 설립됨에 따라 세개로 갈라졌던 중국 국민당은 2년 만에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자세한 것은 영한합작 문서 참조.
하지만 왕징웨이가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자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9월 13일 사퇴 통전을 보내버리고 잠적해버리자 구심점을 잃은 국민당은 분열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북벌도 거의 중지된 상황이 되었다. 1927년 12월, 허잉친의 1로군이 군사위원회의 주도로 쉬저우를 탈환하고 산동성에 이르긴 하였으나 그 이후의 진전은 없었다.
4. 결과
1차 북벌의 결과로, 중국 대부분을 지배하던 북양군벌들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북양계였던 우페이푸, 쑨촨팡, 장쭝창 등이 대거 몰락하였고 장쭤린의 봉천군벌만 남게 되었다.
반면 중국 국민당은 기존의 광동성에 국한되어 있던 세력권이 복건, 호북, 호남, 절강, 강소, 하남, 산동에 이르게 되면서 2억에 달하는 인구가 국민정부의 지배 하에 들어왔다. 또한 사천의 류샹, 류원후이를 비롯한 변방의 유력군벌들이 표면상이기는 하나 국민당 가입과 국민정부 합류를 선언하는 등 국민정부의 명목상 영역 역시 크게 확장되었다.
비록 4.12 상하이 쿠데타와 국공결렬로 공산당과의 합작이 종결되고 공산당이 친공 부대를 포섭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국민정부의 아성을 흔들 수준은 아니었으며 펑위샹, 옌시산을 비롯한 강대한 군벌들이 국민당에 합류했다는 점에서 힘의 균형은 완전히 국민정부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한편 하야한 장제스는 사태를 관망하며 복직과 국민당의 2차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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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현대 중국 민족주의의 굴절(서울: 일조각, 2012).
- 서문당 편집실,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고양: 서문당, 2014).
- 서문당 편집실,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고양: 서문당, 2014).
- 서진영, 중국혁명사(파주: 한울아카데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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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너선 펜비, 장제스 평전 : 현대 중국의 개척자(서울: 민음사, 2014)
-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서울: 서교출판사, 2016).
- 나현수, 唐生智와 武漢國民政府 중국근현대사연구 29 (2006).
6. 관련문서
6.1. 단체/국가
6.2. 사건
- 영왕운동(1926.5.25~1927.4.1)
- 천도논쟁(1926.10~1927.3)
- 상하이 폭동(1926.10.24~1927.3.22)
- 난창 군무선후회의(1927.1.1~1927.1.7)
- 한커우 사건(1927.1.3)
- 난징사건(1927.3.24)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마일사변(1927.5.21)
- 1차 산동파병(1927.5.28)
- 국공결렬(1927.7.15)
- 난창 폭동(1927.8.1~1927.10.4)
- 영한합작(1927.9.15)
- 당계전쟁(1927.10.20~1928.1.25)
- 장제스-다나카 회담(1927.11.5)
- 장황사변(1927.11.17~1927.12.11)
- 광저우 폭동(1927.12.11~1927.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