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포군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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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 광저우의 구 황포군관학교 현장은 지금도 보존되어 박물관, 관광명소로 활용 중이다.

황푸 군관학교 교가. 가오슝으로 옮긴 지금도 쓰이는 중이다.
1. 개요
2. 역사
2.1. 기원
2.2. 개교
2.3. 교육과정
2.4. 생도 성향
2.5. 출신들의 활약
2.6. 조선인 출신
3. 남경으로 이전
4. 동문
4.1. 중화민국 국군(국민당군)
4.2. 중국인민해방군
4.3. 한반도 인물


1. 개요


1924년 중화민국 중국국민당 광저우 정부가 광저우 황푸에 세웠던 사관학교다. 정식명칭은 "국민당 육군군관학교".
이 학교는 이후 중화민국 군관학교로 개편되지만, 국민당 정부가 난징으로 옮겨간 1927년 이전까지 황푸에 있었고 우한에 분교가 있었는데, 분교 재학생들도 황포군관 출신으로 간주한다. 1930년 중앙군관학교로 이름을 개칭할 때까지 7기까지를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1] 이 학교는 황푸의 (영어식) 광동어 표기를 따서 영어권에서는 Whampoa Military Academy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장제스의 북벌의 성공에 절대적으로 공헌했으며[2][3], 여기에서 배출된 지휘관들은 후에 국공 양당의 핵심 지휘관이 된다. 장제스 교장 재임시절의 황포군교 출신은 국민정부군에서 "황포계"라고 불리며 장제스 직계로 간주되었다. 대략 국부천대 이후 1960년대까지 이들이 대만군(육군)의 수뇌를 이루었다.[4]
공산당의 초기 무장봉기에도 상당한 활약이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정치주임 재직시에 포섭하여 공산당에 가입시킨 황포군교 생도들이 상당수 있었다. 초창기 공산당의 무력은 이들이 다수였으나 난창 폭동-광저우 폭동-초공작전-대장정-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전사했다.[5] 특히 1927년의 공산당의 모험주의적인 봉기(난창, 광저우 폭동)는 황포출신이 주력이었는데, 이때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병력에 맞서다가 대부분 전사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을 때 인민해방군 고위직에서 황포출신들이 다수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5년 계급이 도입되었을 때 원수 10명중 2명, 대장 10명중 3명을 배출했다.

2. 역사



2.1. 기원


기원은 국공합작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신해혁명의 주역 쑨원은 자체군사력이 없었고, 군사적 재능도 없었기 때문에 군벌들에게 군사력을 빌려야 하는 처지였고, 군벌들은 쑨원의 명망을 이용해 세력을 불리다가 쑨원의 뒤통수를 때리기 일수였다. 쑨원은 이런 배신에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계속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이런 쑨원에게 손을 내민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1917년 혁명 후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봉쇄되어 있었고, 이를 뚫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리하여 쑨원(국민당)의 무력 집권을 돕는 대신 국민당은 집권 이후 소련과 동맹을 맺기로 약속했다.
소련은 이 약속대로 군사 고문들을 파견했는데 이들은 가장 시급한 문제로 국민당의 자체적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을 지적했다. 소련 고문들은 국민당과 연합한 양시민, 유전환 등의 군벌들을 언제 배신할 지 모르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이며 그들의 자질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매우 옳은 판단이었다. 이들 군벌군을 제외한다면 국민당의 군사력은 쑨원의 호위병력 20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바로 중화민국 군관학교의 전신인 황포군관학교였다.

2.2. 개교


1924년 6월 16일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의 정식명칭으로 개학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는 2년 전 예쥐와 천중밍이 쑨원을 습격했던 날짜였다. 쑨원이 개교 당시에 연설문을 낭독했는데 나중에 중화민국 국가의 가사가 되었다고 한다. 초대 교장은 장제스. 랴오중카이, 다이지타오, 저우언라이가 정치부 주임, 당대표로 일했고 허잉친이 교관으로 일했다.
소련의 군사학교를 모방해서 설립되었기 때문에 생도들의 사상교육을 담당하는 정치주임이라는 자리가 있었다. 초대주임은 쑨원의 삼민주의의 체계화를 담당한 다이지타오였는데, 이후 국민당으로 돌아갔다. 저우언라이는 부주임으로 부임했다가 다이지타오가 떠나자 다시 주임으로 승진하였다. 장제스와 저우언라이 둘은 국공결렬 이후 서로 적이 되지만, 그래도 저우언라이는 이 인연으로 이후 다시 장제스와 만났을 때는 "장(제스) 교장"이라고 불렀고, 장제스는 교장이라는 명칭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소련은 학교 운영 자금과 소총 8천자루, 탄환 400만발을 보내주었고 파벨 파블로프를 군사 고문으로 보내주었으나 그는 1924년에 사고로 익사했고 그를 대신하여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이 새로 부임했다. 사관 후보생 교육은 장제스가 청나라 군관학교와 일본 사관학교에서 받았던 군사교육, 일본의 군사교범, 중국 전통전략, 장제스가 본 붉은 군대의 전법을 참고했으며 기본 교과과정도 붉은 군대의 것을 상당 수준 반영하였다.
또한 교육에 사용되는 모든 언어는 학교가 있는 광저우에서 쓰이는 광동어가 아니라 표준중국어였다. 이는 처음부터 이 학교가 중국 통일을 위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2.3. 교육과정


황푸군관학교는 군사교육 뿐만 아니라 사상교육에도 힘쓴 고도로 정치화된 학교였다. 장제스는 군관 후보생들을 위해 훌륭한 처우를 마련하는 동시에 군관 후보생들의 기강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고 연좌제와 명령 없는 후퇴를 사형으로 다스리도록 하는 규칙을 확립했다. 장제스는 군관 후보생들에게 혁명에 타협이 없음을 설파했으며 동시에 전선에서 유용할 각종 훈련에도 매진했다. 그리고 이러한 엄격한 규칙을 자기 자신에게도 칼같이 적용했다.
하지만 황푸군관학교에서 양성하는 군사들은 소규모 부대에 어울리는 지휘관들이었지 군사 행정, 병참에 어울리는 인재들이 극히 적었다. 만약 대규모 부대를 운용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면 지식의 부족함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장제스와 러시아 교관들의 충돌도 시작되었다.
당초 러시아 교관들은 18개월 과정을 주장했지만, 단기간에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싶었던 장제스는 6개월 속성 훈련을 주장했다. 장제스는 이 분쟁에서 상하이나 저장성으로 훌쩍 떠나는 시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의 정치위원인 랴오중카이로부터 황푸군관학교의 경비를 자유롭게 쓸 권리까지 얻었다. 1924년 4월 21일에 광저우로 돌아온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교장 겸 광동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기 입학생은 500명이었으나 중간에 편입등이 많아서 최종적으로는 645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기는 6개월 과정으로 전원 보병과였으나 이후에는 포병과 기병, 공병 등의 여러 병종이 추가되었다. 2기부터는 교육기간이 1년으로 늘어났고, 3기부터는 13개월 등으로 점점 늘어나서 최종적으로 황포에서의 마지막인 7기(1929년 1월~ 1930년 9월)가 되면 20개월의 교육기간이 되었다. 졸업생수는 1기부터 7기까지 각각 645, 499, 1233, 2654, 2418, 3970, 1518명이다.(우한 분교 포함)

2.4. 생도 성향


전국의 국민당 당원들은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중학교 내지 고급소학교 졸업생을 후보로 추천하기 위해. 지원자들은 나라에 봉사하고자 하는 이유를 쓴 글을 제출해야 했고 최소 3년간 복무해야 한다는 조건에 응해야 했다. 총 645명의 1기 생도가 모집되었고 1926년에는 생도의 수가 3천 명에 달했다. 몽골, 티베트, 베트남[6], 타이완, 조선[7]에서도 생도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황푸군관학교의 정치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황푸군관학교는 무산계급의 훈련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도의 75%가 지주와 중농, 관료 집안의 자제였다.
상하이의 지원자들은 천치메이의 조카 천궈푸를 비롯하여 우익 조직이나 청방의 조직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황푸군관학교 내부에는 소련 고문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쑨원주의연구회를 비롯한 강력한 반공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의 생도들은 교장 장제스에게 충성하면서 장제스의 파벌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2.5. 출신들의 활약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으로 첫 실전 데뷔를 했으며 1925년 국민당의 1차 동정, 국민당의 2차 동정으로 군벌 천중밍을 격퇴했고 1926년 중산함 사건 이후 친공세력이 대거 숙청되면서 확고한 장제스의 직계 세력이 되었다. 이후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주력인 1군을 형성하여 나섰다.
국민당 정부가 광저우에서 우한에 천도하면서 우한에도 분교가 있었다.
1차 국공합작을 계기로 세워진 학교였다 보니, 이후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서 싸운 중국 국민당, 중국 공산당 양쪽의 주요 군사 지휘관들은 이곳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국공양당에 퍼쳤던 이곳 출신 지휘관들은 황포출신이라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특히 국민당은 총수인 장제스가 교장인지라 황포 출신들은 장제스를 교장이라고 부르면서 친분을 과시하였다. 국공내전을 다룬 중국의 선전영화들을 보면, 양군 지휘관들이 서로 안면이 있어서 적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당부할 때, "황포에서도 그놈은 참 특출했다"고 운운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2.6. 조선인 출신


많은 조선인 출신들도 이 군관학교를 나온 바 있다. 확인되는 사람만 200여명이며, 이들은 일제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서 만주지역 출신으로 위장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의열단이 암살ㆍ파괴활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어 해체하면서 단원들이 단체로 입교하였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인 김원봉은 4기생이다. 님웨일즈의 아리랑의 김산의 회고에 의하면 의열단은 무정부주의에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우언라이의 영향하에서 쉽게 비슷한 좌익사상인 공산주의로 전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좌익성향 조선인 생도들은 역시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의 공산당이 벌인 여러 봉기에서 대부분 사망했다고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익성향 조선인 학생들은 졸업후 국민당군에 복무하다가 광복군에 참가한 경우가 많다.
의열단 출신인 김원봉을 장제스가 적극 지원해준 것도, 황포군교라는 인맥으로 엮어져 있었기 떄문이다. 다만 김원봉은 장제스와의 관계 때문에 후에 북한에서 숙청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3. 남경으로 이전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장제스가 사실상 집권하고 기존 우한 국민당 정부를 무시하고 난징에 따로 정부를 세우면서 광저우에서 난징으로 옮겨온다. 이때 우한의 분교도 다 난징 본교로 흡수되었다.
4.12 상하이 쿠데타 직후인 1927년 4월 15일 장제스는 공산당 성향의 학생들을 모두 퇴교시켜 수용소로 보냈다.
소련은 이렇게 장제스의 방침에 발끈하여 황포군관학교의 교관들을 모두 철수시켰는데, 그나마 제대로 군사학을 전공했던 소련인 교관들이 모두 사라짐에 따라서 남경으로 옮겨온 군관학교의 교육의 질은 황포보다 더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본 육사에서 공부한 탕은백이 부랴부랴 일본 사관학교 커리큘럼을 참고하여 군관학교의 교육과정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 의해 중일전쟁 이전 10년간을 다수의 장교를 배출한다. 하지만 일본 사관학교도 딱히 모델로 삼기에는 세계 조류에 뒤떨어진 전근대적인 교과과정[8]이었다.
1930년 중앙군관학교라고 이름을 개칭한다. 이후의 역사는 중화민국 군관학교에서 참고.

4. 동문



4.1. 중화민국 국군(국민당군)


국공내전 이후 포로가 되거나 투항하여 대륙에 남은 자는 ★
  • 계영청 (일급상장, 1기)[9] 제3대 참모총장,
  • 팽맹즙 (일급상장, 5기) 제4대 참모총장
  • 왕숙명 (일급상장, 1기)
  • 두율명 (중장, 1기) ★
  • 황걸 (일급상장, 1기)
  • 다이리 (중장, 6기중퇴)
  • 마오런펑 (상장, 4기)
  • 정동국 (중장, 1기) ★
  • 송희렴 (중장, 1기) ★
  • 장영보 (중장, 4기) 1947년 국공내전 당시 전사
  • 후쭝난 (일급상장, 1기)


4.2. 중국인민해방군


초기 홍군 지휘관중 상당수가 황포군교 출신인데다가 2차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소속 황포 동문들중 다수가 포로/투항했기 때문에 떄문에 아예 동문회가 대륙에 생길 정도였다.
  • 쉬샹첸 (원수, 1기)
  • 린뱌오 (원수, 4기)
  • 쑹스룬 (상장, 5기)
  • 천겅 (대장, 1기)
  • 쉬광다 (대장, 5기)
  • 뤄루이징 (대장, 우한분교)
  • 쭤취안 (1기) 중일전쟁팔로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
  • 류즈단 (4기) 공산당 지도부가 장정후 피신해 온 옌안해방구의 건설자. 옌시산군과 싸우다가 전사.

4.3. 한반도 인물


[1] 일부 대만자료를 보면 난징에 옮겨온 6기나 7기 이후에도 황포X기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황포가 미 육사의 또다른 명칭인 웨스트포인트처럼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의 별칭이 된 것.[2] 중국의 다른 군벌들은 정규군이라고는 하지만 체계적으로 군사학 등을 교육한 장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일본 육사 등에 유학해서 신식 교육을 받은 극소수 장교들은 소수의 정예부대에만 배치되었다. 군벌 지휘관들 상당수는 최대 군벌 세력이던 장작림이 마적 두목 출신이었듯 인적으로 질이 높지 않았다.[3]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육사, 일본해군병학교(사관학교에 해당)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유일한 체계적인 장교 양성기관이었다. 중국 이외에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한국, 북한의 초창기 인재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4] 대만군의 국방참모총장은 육해공 돌아가면서 하는데 고괴원(1967-1970) 참모총장(4기, 일급상장)을 마지막으로 황포계는 역사에서 퇴장했다. 이후 참모총장들은 모두 남경이나 대만 시절 재학생들.[5] 다만 2차 국공내전(1946-49) 시절에는 공산당측 황포군교 출신들은 대부분 여단장급 이상으로 승진해 있었기 때문에 유력 인사들 중에 전사자는 거의 없다.[6] 호치민도 이때 황푸군관학교에 잠시 몸을 담은 적이 있었다.[7] 예를 들어, 의열단을 이끌어 활약했던 김원봉이 1926년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고 졸업한 뒤 국민혁명군 장교 신분으로 국민당의 북벌에 참여했다. 이외에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나중에 북한 정권 수반이 되는 최용건은 이 황포군관학교에서 3년 동안 교관으로 일했다.[8] 과도한 정신주의 및 엘리트주의의 문제점이 있었다.[9] 대륙의 대장에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