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

 


'''張禹
장우
'''
'''작위'''
안향후(安鄕侯)
'''최종직위'''
태위(太尉)
'''성씨'''
(張)
''''''
(禹)
''''''
백달(伯達)
'''조부'''
장황(張況)
'''아버지'''
장구(張歆)[1]
'''생몰 기간'''
?년 ~ 113년
'''고향'''
기주(冀州) 조국(趙國) 양지(襄地) 
'''재임기간'''
'''태위 재임기간'''
100년 9월 17일 ~ 106년 1월 13일
'''태부 재임기간'''
106년 1월 13일 ~ 107년 9월 21일
'''2차 태위 재임기간'''
107년 9월 21일 ~ 111년 1월 7일
1. 개요
2. 생애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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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의 명신. 자는 백달(伯達) 기주 조국 출신 할아버지인 장황(張況)의 족언니는 유수의 조부와 결혼하였다.

2. 생애


성격이 독실하고 검소한 장우는 아버지가 돌아갔을때, 백성들이 장례물품을 지원하였는데, 이것이 수백에 달하였다. 하지만 장우는 그것들을 받지않고 아버지가 남기신 땅도 모두 큰아버지에게 주었다.
65년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얼마안가 승진하였고, 76년에는 양주자사(揚州刺史)가 되었다.
장우가 장강을 건널려고 하자 한 관리가 오자서의 원혼이 장강에 있기에 건너기 어렵다고 만류하였다.[2] 그러자 장우는 "만일 오자서의 혼이 있다면, 내가 지금 장강을 넘으려는 것을 알고도 어찌 나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겠나?"라면서 강을 건넜다.
그리고서 각 군현을 직접 시찰하면서 억울한 누명을 쓴자를 풀어주고 죄인을 처벌하였다. 백성들은 장우의 통치의 순종하였다.
85년 연주자사(兖州刺史)로 이동하였고, 연주에서도 장우는 청렴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86년 하비상(下邳相)이 되었다. 서주(徐州)의 변방에 빈땅이 많음에도 황폐하여 사람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니 장우는 관개를 설치하여 물을 끌어다 쓰게 하였다. 공조(功曹) 대윤(戴閏)은 본래 태위(太尉)의 부관이여서 권세를 함부로 휘두르고 다녔다. 그러나 장우는 개이치 않고서 그를 처벌하니 장사(長史) 이하의 관리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94년 대사농(大司農)이 되었다.[3]
100년 9월 17일 태위가 되었다.
103년 한화제가 남쪽으로 순행을 하려고 하였는데, 당시 태위(太尉) 겸 위위(衛尉)였던 장우는 화제가 강릉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서 황제가 직접 남하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간언하였다. 화제는 그 말을 듣고 남하를 단념하고 장우에게 상을 주었다.
106년 1월 13일 태부가 되었다. 등태후한상제가 어리니 대신들을 궁에서 살도록 하였다. 장우는 닷새에 한번 씩 집에 갈정도로 황제를 보필하였고, 등태후는 그런 장우를 칭찬하였다.
107년 태위 서방(徐防)과 사공인 윤근(尹勤)과 함께 작위에 봉해졌고 식읍 천이백호를 받았다. 작위명은 안향후(安鄕侯).
그러나 9월 1일에 서방이 2일에 윤근이 해임되면서 불안감을 느낀 장우는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9월 21일 한안제는 그를 다시한번 태위로 임명시켰다.
111년 한안제와의 불화로 안향후 작위를 잃었다.
113년 집에서 죽었다.

3. 둘러보기





[1] 화양상(淮陽相)을 지내었다.[2] 오자서는 춘추시대 오나라의 대신이였지만, 부차와의 명령으로 자결하였고, 시체는 부차의 명으로 장강에 던져졌다.[3] 화제상제기의 기록. 등장서장호열전에서는 대사마(大司馬)를 하였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