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식(독립운동가)

 

1. 단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장인식
2. 논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장인식
3. 밀양시 출신 독립운동가, 장인식


1. 단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장인식


성명
장인식(張仁植)
본관
인동 장씨
생몰
1877년 ~ ?
출생지
충청도 단양군 북면 별곡리
(현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별곡리)[1]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장인식은 1877년 충청도 단양군 북면(현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별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음력 7월 이강년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했고, 그해 10월까지 영춘군 영춘읍 일대에서 의병 100명과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수차례 교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1908년 6월 4일 이강년이 청풍 까치재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체포되자, 그는 김상태(金尙台) 의병장의 부대에 소속되어 1909년 음력 2월까지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09년 음력 2월 헌병대에게 체포된 그는 1909년 5월 20일 경성공소원에서 유배형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장인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논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장인식


성명
장인식(張仁植)
일본식 성명
張本榮
이명
장만석(張萬石)
생몰
1900년 11월 11일 ~ 1966년 11월 4일
출생지
충청남도 논산군 양촌면 인천리
사망지
충청남도 논산군
추서
대통령표창
장인식은 1900년 11월 11일 충청남도 논산군 양촌면 인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11월 25일 서울 관철동에서 이약한(李約翰)의 권유로 대한민국혈복단(血復團)에 가입, 서무부(庶務部) 서무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의친왕 이강 명의의 논고문(論告文) 3통과 선언서(宣言書), <경고 이천만동포(警告二千萬同胞)> 20매, 혈복단 행정조직선포문(行政組織宣布文), 서약서(誓約書), 경고서(警告書) 등의 문서를 교부받고 이를 충남 논산, 공주, 강경 등지에 배포하기로 했다. 그는 공주로 내려가서 영명학교 교사 이활란(李活蘭), 같은 학교 학생 유준석(柳俊錫)[2]·강윤(姜沇) 등에게 위의 문서들을 제시하며 독립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0년 4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6년 11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장인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3. 밀양시 출신 독립운동가, 장인식


성명
장인식(張璘植)
본관
인동 장씨
생몰
1879년 7월 7일 ~ 1954년 8월 12일
출생지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고례리[3]
사망지
경상남도 밀양군
추서
대통령표창
장인식은 1879년 7월 7일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고례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밀양 표충사 승려 2명이 단장면 고례리 주막에 주민을 불러 모아 내일 태룡리 장날에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였으니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장인식은 다음날인 4일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행진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20년 3월 18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밀양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4년 8월 1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장인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2]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유준석과 동명이인이다.[3]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