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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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장석천(張錫天)
생몰
1903년 2월 25일 ~ 1935년 10월 8일
출생지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송곡리#
사망지
광주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학생 운동
2.3. 전라도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로 떠오르다
2.5. 노동 운동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장석천은 1903년 2월 25일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송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인오(張仁吾)로 소지주였으며, 위로는 두형이 있었다. 큰형 장석지(張錫之)는 아버지를 이어 집안이 소유한 토지를 경영했고, 작은 형 장석태(張錫泰)는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1924년에 조선총독부 토목기사가 되었다.
장석천은 완도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뒤 1918년경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다. 그는 중앙고보 재학 중에 3.1 운동을 접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식민지인으로 받아야 하는 차별대우에 반감을 품었다. 당시 중앙고보에 '호랑이'라고 불리는 일본인 체육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괴롭히곤 했다.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장석천은 그 교사를 폭행했다가 중앙고보에서 퇴학되었고,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한 뒤 1923년 3월에 졸업했다.

2.2. 학생 운동


보성고보를 졸업한 장석천은 관립 수원고등농림학교로 진학했다. 그가 2학년에 재학하던 1925년 10월 일본 북해도의 오타루 고등학교(小樽高等商業學校)가 수행하는 야외 군사 연습 때 교관 스즈키 코자(鈴木小左)가 작성한 군사 교안에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의 상황을 설정하고 재향군인과 생도대가 협력하여 조선인들을 절멸시킨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동아일보> 1925년 10월 23일자 기사를 통해 폭로되자, 이에 분노한 재일조선노동총연맹, 3월회, 재동경무산청년동맹, 조선인유학생학우회, 무산학우회, 흑우회, 향설회, 일월회 등 학생 및 사상 단체가 연합하여 일본 정부를 성토하는 선언문을 작성하고 이를 일제의 중요 기관에 발송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조선학생회는 1925년 11월 6일 강연회를 개최하고자 했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실패하자 11월 8일 총회를 열어 이에 강경 항의하기로 하고 집행위원을 선출했는데, 장석천이 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조선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재학 중에 사회운동과 관련한 강연회에 참가하여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1925년 11월 수원고등농림학교 강연부 주최로 서울의 영화관 개성좌(開城座)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가해 <농촌의 유지>라는 주제로 강연했고, 이어 1926년 2월에는 조선일보사와 시대일보사 후원으로 개최된 '전선조선학생웅변대회'에 참가하여 <'원만한 인격' 인간의 인위적 불합리를 논함>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기도 했다. 또한 1926년 6월 21일 2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이끌었다. 그들의 요구사항은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할 것, 입학시험을 년 2회로 할 것, 교사를 신축할 것 등이었다. 하지만 학교 측은 이에 불응하고 전교생 150여 명을 무기정학시켰다.
수원고등농림학교의 동맹휴학은 1926년 7월 4일 학부형들이 학교 측과 합의하면서 해결되었지만, 장석천은 불현듯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아마도 자신들의 요구가 제대로 관철되지 못하자 더는 학교에 다닐 마음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도쿄상과대학에서도 3~4개월 뒤인 1926년 10월 경 학업을 중단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그가 왜 귀국을 결정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2.3. 전라도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로 떠오르다


광주로 돌아온 그는 먼저 광주청년회에 가입했다. 광주청년회는 1920년 6월에 창립된 청년단체로 회원수는 230여 명이었다. 광주청년회는 강석봉(姜錫奉), 지용수(池龍洙), 조준기(曺俊基), 최한영(崔漢永), 김태열(金泰烈) 등을 중심으로 '계급적 단결로 해방운동의 전위가 되어 민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사회주의 단체로 변모했다.
1923년 12월 광주청년회 집행위원장 출신의 이기연(李起澔)이 면협의회에 피선되자, 강석봉 등은 그가 일제 기구에 아첨했다는 이유로 청년회에서 파면시켰다. 그리고 사회부를 신설해 다른 부문 운동과의 연대를 강화시키고자 했으며, 여성운동과 소년운동의 지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천우회, 전남해방운동자동맹 등 사상단체를 조직하여 대중운동을 공개적으로 지도했으며, 광주청년학원, 야학 등을 설립, 운영하고 강연회를 통해 청년들을 계몽하고 의식훈련을 실시했다.
하지만 1926년 1월 광주지역의 사회운동의 양대축이었던 광주청년회와 광주청년공제회가 서로 대립과 세력 다툼을 벌이면서 사회운동 자체가 분열될 위기에 몰렸다. 1926년 초 광추청년회는 지난해 12월 24일에 전소된 회관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전 청년회 간부 혹을 실업가들을 집행위원으로 보선했다. 광주노동공제회는 이를 두고 "광주청년회의 부르주아화"라 비판했고, 이에 분개한 광주청년회 측은 1월 12일 공제회관을 습격했다. 이후 두 단체는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했고, 한동안 광주노동공제회가 들어간 전남청년연맹 산하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6년 6월 경 두 단체 간의 타협점을 찾게 되면서 전남청년연맹에 가입한 광주청년회는 광주청년연맹으로 재탄생했다. 또한 9월 11일 두 단체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광주각단체대표간친회를 열기로 합의하면서 화해의 물꼬가 트였고, 9월 14일 사회주의운동을 통제할 기관으로 광주협회가 출범했다. ‘전 광주 사회운동단체의 통제기관’을 자임하며 각 부문운동의 유기적 통일을 도모한다고 했지만, 이후 광주지역의 사회운동은 서울계에 의해 재편되었다. 바로 이 즈음에 장석천이 들어온 것이다.
장석천은 광주청년회 후신인 광주청년연맹에서 활동했고 1926년 11월 초 광주고보, 광주농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성진회를 지도했다. 또한 광주청년연맹이 1927년 2, 3월 광주고보, 광주농교 졸업생들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느넫, 장석천은 이를 주도하면서 학생들에게 졸업 후에도 한민족을 위해 분투할 것을 격려했다. 또한 그는 강해석과 함께 졸업하는 성진회원들을 광주읍 남문통 요리점에 초대하여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

학교를 졸업하는 자는 앞으로 사회에 나가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 실 사회운동에 종사할 것이며, 재학생은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여 공산주의 연구에 조력하라.

그 후 장석천은 1927년 4월에 열린 전남청년연맹 정기대회에서 강해석, 김재명 등과 더불어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따. 이후 장석천은 광주청년연맹과 전남청년연맹 간의 통합에 주력했다. 그는 1927년 5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에 장성청년연맹 대표로 참가했으며, 같은 해 10월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장성청년연맹을 해체시키고 전남청년연맹의 장성청년동맹으로 새롭게 출범시켰다. 그해 11월 5일, 광주청년동맹은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파쟁을 청산하고, 청년운동을 통일시키고자 연맹을 해체했으며, 군 청년동맹을 창립시키고자 했다. 이때 장석천은 강영석, 김재명, 강해석, 국채진, 오영, 정윤모 등 광주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광주청년동맹창립준비위원에 선출되었다.
1927년 11월 9일에 개최된 광주청년동맹창립준비위원회에서, 장석천은 김재명, 강해석 등과 함께 동맹창립사무진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준비위원회는 각 면에 위원을 파견하여 동맹원을 모집한 뒤 청년동맹을 창립하는 대신 연맹체를 해체하고 각 면에 지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927년 11월 11일 전남청년연맹 제3회 집행위원회에서 단일 청년 동맹을 조직을 위해 지방 단일동맹설치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하여 위원별로 지역을 할당했다. 이때 장석천은 김재명과 함께 광주, 화순, 보성, 고흥 등지의 지방순회위원의 임무를 맡아 지방상황 조사, 미가맹단체에 대한 가맹 권유, 부담금 징수, 세포단체 위원회 소집, 단체상황 조사, 조직체 변경, 문서 감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1927년 11월 26일 광주청년회관에서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청년동맹이 창립되었다. 이때 장석천은 강영석, 강해석, 지용수, 국채진 등과 더불어 위원에 선출되었다. 대회는 장석천의 취지 설명, 김재명의 경과보고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결의사항은 분파 청년운동을 통일하여 노동․농민청년을 지도세력으로 하는 전국적 단일청년단체 완성, 전 민족적 단일당의 과도기적 임무를 지닌 신간회 지지, 무산계급신문인 대중신문 적극 지지, 지방 및 파벌의식 청산, 광주청년연맹 해체 등이었다.
이렇게 해서 출범한 광주청년동맹은 조선청년총동맹의 새로운 정책에 따라 계급적 청년운동에서 전 민족적 청년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조선공산
당의 노선에 따라 <대중신문>을 지지했다. 또한 신간회를 전민족적 단일당으로 인정하고 이를 적극 지지했다. 이런 가운데 1월 29일 장석천의 주재하에 전남청년연맹 제4회 집행위원회가 열렸다. 이 집행위원회에서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책임비서가 된 김재명의 사표가 수리되었고, 김인수, 강해석 등 장석천의 측근들이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렇듯 광주 지방의 청년운동은 장석천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장석천은 운동 주체를 청년에 국한시키지 않고 학생과 소년으로 확산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식민교육을 반대하고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시를 주장했다. 또한 현학적인 번역 이론을 배격하고 실천적 이론을 중시했는데, 특히 일본 도쿄의 일월회가 간행한 <대중신문>의 이론 투쟁을 배격했다. 이후 그는 학생운동에 심혈을 기울여 신사상 연구를 위한 독서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동맹휴학과 시위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또한 그는 광주소년동맹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연사로 참가하여 ‘소년운동의 지위’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하지만 광주지역 학생조직은 여전히 고려공산청년회 야체이카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에, 그가 학생운동을 주도하지 못했다. 고려공산청년회는 1929년 3.1 운동 10주년에 대규모 대중시위운동을 준비한 반면 그가 이끄는 광주청년동맹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1928년 4월 12일 광주, 송정 등지에 수십여 차례에 걸쳐 '불온문서'가 뿌려지고 전남 각 사회단체에 수십여 통의 선전문이 발송되었으며, 심지어 전남 경찰부장 등에게도 협박문이 보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발칵 뒤집힌 광주경찰서는 닥치는 대로 사회주의 성향의 인사들을 체포했는데, 장석천도 한길상, 장순기, 국채진, 지창수, 강해석 등과 함께 체포되어 가혹한 취조를 받아야 했다.
광주경찰서는 4, 5일간 밤낮으로 취조를 계속했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내보내기는커녕 검거 범위를 더욱 넓혀 광주소년동맹 간부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들 대부분은 그날 무사히 방면되었지만, 장석천을 비롯한 11명은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겨졌고, 1개월 만인 5월 8일에서야 무혐의로 풀려났다. 검거사건으로 정기대회 개최가 지연되자, 전남청년연맹은 1928년 5월 20일 대회준비위원으로 장석천과 강종득(姜宗得), 김인수(金寅洙), 김용표(金容杓)를 선출하고 6월 9일 담양청년동맹회관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1928년 6월 모든 준비를 끝내고 20여 단체 대의원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기대회가 거행되려 했는데, 돌연 담양경찰서가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이를 금지시켰다. 장석천, 강종득은 대회 자체가 무산될 것을 우려해 준비위원들과 함께 담양경찰서를 찾아가 항의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임시대회는 개최해도 좋다는 허가를 얻어냈고, 6월 11일 임시대회에서 장석천은 집행위원회 서무부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1928년 7월 전남 지역 사회주의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강해석, 지용수 등이 검거되면서, 장석천의 위상을 더욱 높아졌다.
1928년 7월 28일 긴급 소집된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회는 강해석, 지용수 등의 공백을 메꿀 인물로 장석천을 지명하고 그를 임시집행부 의장에 선출했다. 장석천은 의장으로서 경제위원회 신설, 농촌학교 설립, 야학 통일, 야학교 교과서 제작, 순회지도 강연 등을 결의했고, 나승규와 함께 학생 독서회를 직접 지도했다. 1929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차재정을 중심으로 공산당 재건을 위한 조선공산청년회가 결성되었을 때, 장석천은 조선공산청년회 전라도 지부 책임자에 선임되었다.
장석천은 1929년 5월 독서회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소비조합을 조직하고 학생 조직화에 적극 나섰다. 그는 소비조합을 통해 동지를 규합하고 독서회 운영자금을 조달하고자 했다. 그해 9월 초순경, 광주고보 독서회원이 60원, 광주고보 출신의 김기권이 5백원을 출자하여 장재성의 빵집 옆에 문방구점을 열었다. 이곳은 독서회원의 모임 또는 토론 장소로 활용되었다. 한편, 장석천은 일본 중앙대학을 중퇴하고 1929년 6월 귀국한 장재성에게 6월 중순경 광주고보, 광주농교, 광주사범학교 등 학생 10여 명을 중심으로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하고 그 곳의 책임비서를 맡게 했다.
강석천은 전남청년연맹 강화 작업에도 착수했다. 그는 전남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으로서 김형호(金亨浩) 8명을 위원으로 선출했고, 강해석의 동생인 강석원과 제수인 신경애(申敬愛)를 광주대표로서 집행위원에 선임했다. 또한 1929년 9월 전남지역 50여 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전남청년연맹 정기대회에서, 장석천은 광주고보 졸업 후 장홍에서 농민운동을 전개하던 왕재일 대신에 학생 독서회 조직에 나선 장재성을 집행위원으로 선임했다.

2.4. 광주학생항일운동


1929년 11월 3일 제1차 광주학생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전남청년연맹 학생부 책임자 장재성은 독서회 학생들을 통해 시위운동을 지도했고,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은 교가와 운동가를 부르며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장작, 곤봉, 배트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는 광주중학교를 습격하고자 했지만, 일본 경찰과 소방대의 강력한 저지에 무산되자 시위행진을 벌인 뒤에 해산하였다. 경찰 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주동학생에 대한 대규모 검거에 착수하여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 중 60여 명을 검사국에 송치했다. 이에 장석천은 제2차 시위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로 결심했다.
1929년 11월 4~5일, 장석천은 각계 사회단체 책임자들을 소집해 대책을 협의했다. 이때 장재성은 검거도니 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시위운동을 제안했고, 참석자들이 모두 찬성하여 제2차 시위계획이 추진되었다. 또한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학생시위로 확산시킬 것도 결의되었다. 그리고 투쟁을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학생투쟁지도본부’를 만들고 각기 업무를 분담하여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시키기로 하였다. 전국적 시위운동을 주도하게 된 장석천은 광주 및 전국의 학생 지도를 전담하기로 했다.
한편,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를 겸임하고 있던 장석천은 신간회 본부에 광주학생 시위 운동 소식을 전보로 전했다. 이에 신간회는 광주, 송정, 장성 지회에 광주사건의 진상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한편, 집행위원장 허헌을 책임자로 하여 광주로 파견했다. 장석천은 신간회 나주지회 위원장인 김창용 등과 함께 이들을 맞이하여 진상을 보고했다. 이때 그는 허헌에게 시위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킬 것이라고 알렸고, 허헌으로부터 신간회 차원에서 이를 적극 협조할 것이며 필요한 경비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또한 장석천은 조선청년총동맹에서 파견한 부건, 권유근과도 시휘 확산에 대해 논의했고, 장성청년동맹 집행위원인 강영석에게 권유근과 함께 서울로 상경해 서울에서의 학생 시위 운동을 준비하게 했다.
한편, 장재성은 제2차 시위운동을 위해 학생들에게 배부할 전단을 작성하고, 각 학교 독서회 관련 학생들을 불러 모은 뒤에 앞으로의 계획을 알리며 이에 적극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학생들은 이에 적극 찬성을 표하는 한편, 임시휴업이 끝나는 11월 11일에 수업시작 시간을 기하여 세 학교가 일제히 선전 전단을 살포하고 시위운동을 감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장석천은 완도 출신의 광주고보 5학년생인 김향남을 통해 이러한 학생들의 동향을 살폈고, 11월 10일 밤 광주고보생 6명을 규합해 시위운동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그는 장재성이 11월 11일에 거사일로 잡았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날짜를 12일로 변경하게 했다. 11일은 임시휴업이 끝나고 첫 등교하는 날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등교여부를 확인하기 어렵고, 12일은 장날이기 때문에 시위를 벌이기에 적당하다고 봤기 떄문이다.
거사 하루 전날인 11월 11일, 장재성은 일반 민중들에게도 배포할 ‘조선 민중이여 궐기하자’라는 제목의 새로운 격문을 작성했다. 장재성이 작성한 격문은 독서회원들에 의해 4천부가 인쇄되어 각 학교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 장석천은 그날 밤 장재성, 강석원, 박오봉, 국채진 등을 불러 모은 뒤 제2차 시위운동 계획을 최종 점검했다. 이윽고 11월 12일 아침, 농업학교의 교실에서 격문 전단이 배포되면서 시위가 촉발되었다. 광주고보에서는 선생의 지시를 받은 김향남이 5학년 을반 교실에서 학생들을 독려하면서 시위운동이 개시되었다. 이에 광주고보와 농업학교는 곧바로 임시휴교에 들어갔고, 13일에 광주여고보, 전남사범학교에서 시위 운동이 확산되었다.
일본 경찰들은 즉각 학생 검거에 나섰고, 시위 운동의 배후세력을 캐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 결과 광주형무소에 시위운동 가담자 2백여 명이 수감될 정도로 탄압이 혹독했다. 광주에서의 제2차 시위운동은 일제의 보도통제로 인해 밖으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역효과를 야기했다. 광주에서 조선인 여학생 2명이 일본 군인에게 절단당하고 한인 남학생 12명이 피살되었다는 풍문이 나돈 것이다. 한편 1929년 11월 8일 장석천의 지시로 서울로 상경한 강영석은 권유근과 더불어 조선공산청년회 학생지도기관인 학생부의 도움을 받아 서울지역의 학생 시위운동을 추진했다. 이들은 먼저 서울 각 중등학교에 세포조직을 결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고, 11월 16일 조선청년동맹 중앙부 인사들과 운동방안을 논의했다.
그들은 총동맹휴학, 시위운동, 격문살포 등 시위운동 방식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여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격문을 살포하기로 겨우 합의했다. 총동맹 휴학보다는 시위운동이 낫지만 현실적으로 시위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차선책으로 격문 살포로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11월 17일 서울로 올라온 장석천이 광주에 이어 서울에서도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면서 또다시 의견 대립이 벌어졌다. 장석천은 서울의 중앙부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고, 집행위원장 차재정 등은 서울은 경계가 엄중하여 시위운동을 일으키기 어렵고 많은 희생자가 따를 게 분명한데도 시위를 당장 벌이라고 요구하는 그를 비현실주의자라고 여겼다.
이렇듯 각자의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조선공산당청년회의 황태성이 시위운동에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논의는 급진전되었다. 결국 회의는 학생들을 동원한 시위운동과 격문 살포를 동시에 추진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에 차재정과 중앙청년동맹원, 신간회 경성지회원들은 격문 제작에 책임을 지기로 했고, 장석천, 황태성 등은 시내 각 중등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담당하기로 했다. 또한 차재정․심치녕․이병노․곽현 등은 각 학교 야체이카 및 대표자를 비밀리에 소집하였다. 그 뒤 장석천은 허헌을 만나 시위계획을 전달하는 한편, 지난날 약속하였던 바대로 재정자금 1백원을 건네받았다. 이 자금은 주로 격문 인쇄와 활동자금에 사용되었다.
장석천은 11월 20일 이후 15회에 거쳐 황태성과 함께 제2고보, 보성고보, 휘문고보, 중동학교 등 대표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일본의 제국정치를 배척하고 정치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조선 민중을 선동하여 운동을 하는 한편 구체적인 시위운동 방법 등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정해진 날짜에 각 학교 아침 조례시간에 선동 연설을 하고 대오를 지어 시가를 돌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하지만 각 학교 간에 입장이 갈려서 의견 합의가 어려웠다.
한편, 곽현은 장석천으로부터 50원을 건네받고 <만천하 학생동지 제군에게 격함>, <학생대중 제군에게 격함>, <전국학생 동 제군에 격함>, <피압박민중 제군에게 격함> 등 7종의 격문을 직접 작성하고, 중동학교 학생 곽이형과 함께 11월 17일부터 23일까지 8천여 매를 인쇄했다. 격문에는 “식민지노예교육 철폐”, “구속 학생의 석방” 등 학생들의 실제적인 요구와 더불어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획득, 치안유지법 등 악법 폐지” 등의 정치적 요구, “군사 경찰 정치 반대, 총독정치 반대, 타도 일본 제국주의” 등과 “대중적 시위운동을 조직하자”고 하여 향후 운동을 방향을 제시했다.
곽현은 권유근과 함께 격문을 배포할 명단을 확보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때 각 지방의 주요 군 청년회, 청년동맹 약 90개소에 격문을 우송했지만, 장석천이 제안한 "피압박민족의 실정을 호소하는 내용의 진정서를 영국 정부에 보내는 계획"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격문은 시위운동을 전개할 때에 살포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격문을 작성 인쇄한 곽훈이 12월 2일에 단독으로 시내 각 중등학교에 격문을 살포했다. 이에 경찰은 격문사건의 범인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조선청년동맹, 중앙청년동맹,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주요 간부와 회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 후 12월 3일부터 시위를 주동했던 인사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2월 5일 새벽 청년과학생 30여 명이 검거되었고, 12시 경 청운동 방면에서 장석천, 차재정 등 10여 명도 체포되었다. 등사된 격문 2만장, 8천매 가량은 광화문 경성 우편국에서 압수되었다. 하지만 시위는 12월 5일에 경성제2고보에서 예정대로 벌어졌고, 이후 서울에서의 시위 운동은 각 학교로 확산되어 12월 16일까지 지속되었으며, 30개교의 남녀 전문학교와 중등학교에서 1만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또는 동맹 휴학 운동을 전개했고, 1천 400여 명의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시위는 장석천 등의 노력 덕분에 이듬해인 1930년 3월까지 이어졌다. 국적으로 194개교, 5만4천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중등학교 학생 전체(8만9천여 명)의 60%가 이 운동에 참여했다. 이는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였다. 장석천은 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 주모자로 지목되어 1930년 2월 치안유지법으로 기소되었고, 그해 10월 광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어 10월 27일 1년 6개월의 징역을 언도받았다. 이에 그는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했지만 1931년 6월 13일에 1년 6개월 징역을 확정받았다. 이후 그는 광주형무소에서 왕재일, 임종근 등과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12월 13일에 출옥했다.

2.5. 노동 운동


장석천은 출소 후 전남청년동맹 상임위원을 지낸 적이 있었던 유혁을 찾아가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그는 유혁으로부터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 사는 이정윤을 소개받았지만, 당시 이정윤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유랑하는 처지여서 별다른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이후 그는 유혁의 도움으로 1932년 1월경 광주읍 명치정 함평여관에서 김호선을 만났다. 그는 김호선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그동안 재정 문제로 발행이 중단되었던 잡지 <봉화(烽火)> 간행을 책임지기로 했다.
장석천은 1932년 2월 서울로 상경해 경성부 혜화동에 기거하면서 자금조달과 전남 연락책 물색에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3월 1일 전남에 있던 김호선 등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계획을 포기했다. 그 후 그는 3월 초순에 민중서원 점원 권태석의 소개로 행정학회 인쇄소, 조선제사주식회사, 선일지물주식회사에 다니는 직공 정태익, 박영환, 신광옥 등을 소개받았다. 그는 그들과 함께 노동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자신은 출판 관련 부문을 담당하기로 했다.
그러나 장석천의 노동조합 결성 계획은 일제 경찰의 검문이 강화되면서 탄로나고 말았다. 일본 경찰은 1932년 9월 4일 국제노동절에 맞춰 항일 인사들이 서울로 잠입해 공장의 노동자들과 연락을 꾀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검문을 강화하던 중 박영환을 체포했다. 그들은 박영환을 가혹하게 고문해 장석천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자 한다는 정보를 얻어냈다. 결국 장석천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체포되었고, 1932년 10월 종로 경찰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1932년 10월 22일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된 그는 12월 24일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3년 4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후 만성 위장병이 극심해지자, 형무소 측은 그를 11월 7일에 보석 출감시켰다. 장석천은 몇년 간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35년 10월 18일 광주 본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33세. 그의 유해는 광주에 매장되었다가 2003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장석천에게는 20대 초반에 전남 남해안의 고금도에 사는 처자와 결혼하여 얻은 옥선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가 사망할 당시 옥선의 나이는 12살에 불과했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에는 어머니를 따라 고금도로 옮겨가 목숨을 부지했다. 그 뒤 옥선은 일제 말기에 징용되었다가 살아 돌아왔으나 6.25 전쟁 당시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장석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