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궈장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직예군벌의 수령으로 중화민국 2대 부총통, 중화민국의 계임 대총통을 지냈다.
북양정부의 총통 중에서 임기 중 사임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친 유일한 총통이며[1] 북양정부의 마지막 부총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일하게 임기 만료로 퇴임한 총통 치고는 안습이게도 재임 기간이 가장 짧은 총통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기이력
1859년 1월 7일 직예성 하간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 중 두명이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어 오랫동안 자신도 과거시험을 준비했고 1881년 과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당숙 풍감당의 도움으로 바오딩의 연지서원을 2년 다녔으나 때려추이고 1884년 회군 직자영에 입대했다가 1885년 천진무비학당에 들어갔다. 이때 1888년, 동시에 합격하여 1등으로 수재가 되었는데 신나서 학당을 때려치우고 1889년 순천 향시에 응모했지만 낙방하여 다시 학당으로 돌아왔다. 1889년 7월, 우수한 성적으로 천진무비학당을 졸업하고 임관 후 학당의 교습으로 남았으며 1893년, 회군장령 섭사성의 군대 막료가 되어 그의 신임을 받았다. 1894년, 섭사성 휘하에서 청일전쟁에 참여했으며 조선과 만주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청일전쟁 종전 후 섭사성의 추천으로 주일 청국 공사관 유경의 수행원에 임명되어 일본에서 잠시 근무하였으며 이때 후쿠시마 야스마사, 아오키 노부주메 등 일본군부의 인사들과 친분을 맺고 근대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한 후 1896년 귀국했다. 귀국 후 펑궈장은 여러 병서를 편찬하여 이를 위안스카이에게 보고했는데 소참에서 신건육군을 건설하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이를 매우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1896년 신건육군에 들어가 신군연병을 거들게 되었고 곧 이어 독조영무처(督操營務處) 방판(帮辦) 겸 보병학당 감독이 되어 위안스카이의 측근이 되었고 돤치루이, 왕스전과 함께 북양삼걸 중 한 사람으로 불렸다.[2] 이후 독조영무처 총판으로 승진했으며 왕스전, 돤치루이와 함께 <훈련조법상석도설> 22책을 편찬하여 수영학당의 표준교재로 채택되었다.
무술정변 이후 위안스카이가 서태후의 총애를 받게 되자 위안스카이를 수행하여 의화단 운동 기간 동안 산동성의 의화단을 진압했고 산동용영 1만명을 무위우군 선봉대로 개편하여 직예와 산동 접경 지대의 덕주의 의화단을 토벌했다. 1900년, 의화단 토벌의 공을 인정받아 부용지부로 승진했으며 산동성 제남에서 산동군 독조사업을 주관했다. 1901년 북양군정사교총판총판(總辦) 겸 영보병학당(營步兵學堂) 감독(監督)을 지냈으며, 다시 일본에 파견되어 철량, 봉산 등 만주족 귀족들의 일본 시찰을 보좌했다. 귀국 후 연병처 시정사에 임명되어 북양무비학당을 관리했으며 북양속성무비학당 총판 겸 장변학당 총판을 지냈다. 1903년에 위안스카이의 건의로 연병처가 설치되자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이 총리연병대신에, 위안스카이가 연병처회판대신에 임명되었고 위안스카이는 쉬스창, 돤치루이, 유영경, 육건장, 왕사진 등의 심복들을 연병처의 요직에 임명했는데 펑궈장은 북경연병처군학사정사(北京練兵處軍學司正使)로 임명되었다.
1906년에 황기몽고부도통(黃旗蒙古副都統) 겸 육군귀주학당(陸軍貴冑學堂) 총판(總辦) 등의 직책을 지냈고 2등 남작에 봉해졌다. 이 경력으로 청나라 황족들의 신뢰를 맏게 되었으며 1907년 육군부 군자처정사로 승진, 1908년 청서릉양각장치반대신에 임명되었다. 1908년, 선통제가 즉위하고 순친왕 재풍이 권력을 잡아 위안스카이가 권좌에서 축출된 이후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장쉰, 차오쿤, 뇌진춘, 장사옥, 돤즈구이, 강계제, 육건장, 돤치루이 등과 함께 하남성으로 낙향한 위안스카이를 연일 문안하며 북양군이 계속 위안스카이에게 충성할 것을 다짐했다. 이후 군자사 겸 2군의 사령관을 지냈다.
2.2. 신해혁명에서 호국전쟁까지
1911년 8월 추계군사훈련을 주관하였으며 동로 총통관에 임명되었다. 1911년 10월 무창봉기가 일어나자 위안스카이의 지시에 따라 호북성 창덕에서 기회를 엿보며 청조에 위안스카이를 복직시킬 것을 요구하는 무력시위를 하였고 위안스카이가 흠차대신에 임명되면서 10월 27일 1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혁명군 토벌에 나섰고 펑궈장은 우한 공격에 참가했다. 11월 27일, 북양군이 우한삼진 중 한커우와 한양을 점령하자 펑궈장은 기세를 몰아 우창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위안스카이는 1군 사령관을 돤치루이로 교체하고 펑궈장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집권을 도모했다. 군부에서 유력한 군주제 옹호자였던 까닭에 펑궈장은 금위군 총통 겸 차하얼 도통에 임명되었고 선통제의 퇴위가 목전에 다가오자 군주제 지지자들이 종사당을 조직하고 펑궈장에게 지지를 요청했으나 의미는 없었다. 오히려 펑궈장은 청실을 옹호하는 금위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자 금위군에 대한 우대조건을 약속하며 금위군이 위안스카이에게 복종하게 하는 등 위안스카이의 쿠데타를 적극 조력했다.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총통부군사처처장, 직예도독 겸 민정장관에 임명되었고 1913년 쑹자오런 암살 사건과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정계가 시끄러워지자 위안스카이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 소속인 안휘도독 백문울, 강서도독 리례쥔 등을 매국노라 비난하여 3독 해직 사건에 기여했다. 1913년 계축전쟁에서 강회선무사 겸 북양군 2군군장에 임명되어 혁명군을 진압했고 이 공으로 12월 16일, 강소도독에 임명되어 이후 난징에 주둔하며 남방의 실력자로 군림했다. 이후 육군상장으로 승진하여 선무상장의 칭호를 받았으나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을 신뢰하지 않아 심복 왕자명, 4사단장 양선덕, 10사단장 루융샹을 파견하여 펑궈장을 견제, 감시하게 했다. 이를 눈치챈 펑궈장은 더 이상 위안스카이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고 그를 멀리했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하고 5월에 신약법을 발표하여 황제를 꿈꾸었는데 펑궈장이나 돤치루이는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면 그의 자리를 물려받을 구실이 없어지므로 제제에 반대했다. 1915년 6월, 펑궈장은 량치차오의 요청에 따라 베이징으로 올라와 위안스카이에게 제제의 의사가 있는지를 묻었는데 위안스카이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1915년 12월, 끝끝내 홍헌제제를 단행하였다. 제제 이후 펑궈장은 12월 21일 1등 공작 겸 육군 참모총장에 책봉되었다.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에게 베이징으로 와서 취임하라고 했으나 펑궈장은 병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후 차이어, 탕지야오, 량치차오가 호국전쟁을 일으키자 초기에는 토벌을 통전했으나 호국군의 기세가 날이 갈수록 거세지자 수수방관하였고 오히려 절강성의 혁명군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 장쉰 등과 함께 오장군통전을 통해 제제 취소를 요구했고 4월 16일 위안스카이에게 퇴위를 권고하는 전보를 보냈다.
굴복한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4월에 돤치루이를 국무경으로 삼아 대총통 자리라도 보전하려 했지만 돤치루이는 노골적으로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며 권력을 엿보았다. 위안스카이는 마지못해 4월 21일 정부조직령을 발표, 5월 8일 정부조직법을 수정공포하여 정사당을 폐지하고 돤치루이에게 국무총리 자리를 주어 내각을 조직하게 했지만 돤치루이에게 실망하게 되었다. 이때 펑궈장은 장쉰, 제요림 등과 함께 위안스카이의 대총통 유임을 주장하였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을 이용해 돤치루이를 견제하기 위해 펑궈장을 이용하려 했지만 펑궈장 역시 위안스카이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5월 17일부터 6월 8일까지 위안스카이의 요청에 따라 난징회의를 열어 제제 취소 이후의 대책을 논한다는 구실로 위안스카이의 대총통 직위를 일시적으로나마 인정받으려 했지만 실제로는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3세력을 조성하려는 것이 목표였다. 허나 산동성을 시작으로 각성 대표들이 위안스카이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면서 회의는 소득 없이 종결되었다. 펑궈장은 오히려 위안스카이를 대신하여 시국수습의 명분으로 대총통이 되려고 시도했다는 비난을 받아 인망을 잃었다.
결국 6월 6일 위안스카이는 요독증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펑궈장은 돤치루이와 함께 위안스카이의 후계자 자리를 넘볼만한 인물이었으나 평소에 재물욕이 많아 검소한 돤치루이에 비해 인망이 부족했고 신해혁명 시에 남방의 혁명세력에 대한 강경론을 고수했기 때문에 남방이 그를 싫어하여 일단 후계자 승계에는 실패했다. 이후 리위안훙이 대총통이 되어 구국회와 약법 복구를 선포하면서 호국전쟁은 종결되었다. 8월 1일 국회가 복구된 이후 펑궈장은 10월 30일 부총통에 선출되었는데 자신의 기반인 강서성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11월 8일, 난징에서 부총통에 취임, 강소도독부에서 정사를 보았다. 이후 난징에 부총통 판사기구를 설립하고 사실상 강남의 대총통으로 행사하며 외국 기자들을 접견하며 위세를 부렸다.
2.3. 부원지쟁에서 호법전쟁까지
이후 중화민국은 대총통 리위안훙과 국무총리 돤치루이 사이의 정쟁인 부원지쟁으로 시끄러워졌다. 펑궈장은 돤치루이를 견제하려는 리위안훙과 연계하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직예군벌과 안휘군벌의 분열이 심각하지 않은 상태라서 돤치루이와도 가까웠고 1917년 3월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에서 사임해버렸을때 돤치루이를 설득하여 복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돤치루이 내각에 친일파 조여림이 포함되어있다는 이유로 불만을 드러냈으며 1917년 3월의 조정 이후 강서독군 리춘, 호북독군 왕잔위안과 반환동맹의 결성에 대해 논의했다. 돤치루이 탄핵 이후 리위안훙 지지를 천명하며 왕스전에게 내각을 구성할 것을 권했으나 왕스전은 이를 거절했다. 이후 부원지쟁의 폭발이 장훈복벽이라는 엉뚱한 사건으로 번지자 선통제에게 양강총독 겸 남양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장쉰의 무력 때문에 강제로 끌려다니던 리위안훙이 대총통직을 펑궈장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일본 공사관으로 도피하면서 중화민국 3대 대총통에 취임하게 되었다. 펑궈장은 여러 군벌들과 마찬가지로 복벽 반대를 통전하고 장훈복벽을 토벌했다. 하지만 선통제를 처벌하자는 남방의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를 표명했다.
국무총리에 복직한 돤치루이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하고 량치차오의 민국 재조설을 구실로 장쉰이 해산한 국회 복구를 거부했다. 강소를 중심으로 장강 하류 지역에 기반을 구축했던 펑궈장은 자신이 베이징으로 갔다가 오히려 정치적인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에게 장강 삼독 임명권이 있는지 확인 받은 후에야 8월에 베이징으로 올라와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했고 강소도독에 리춘, 강서독군에 진광원, 호북독군에 왕잔위안을 임명하여 환계와 대립했다. 이에 돤치루이도 호남독군에 푸량쭤, 장강상류경비사령 겸 사천사판사에 우광신을 임명하며 맞섰다. 한편 돤치루이의 독재에 반발한 쑨원이 광저우로 이동, 서남의 전계군벌 탕지야오, 계계군벌 루룽팅과 연계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였고 돤치루이가 무력토벌을 강행하면서 호법전쟁이 벌어졌다.
펑궈장은 전화가 자신의 기반인 강소성에 번질 것을 염려하였으며 호법전쟁을 진압하면 돤치루이의 위세가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서남군벌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화의를 주도하였고 11월에 정전령을 내리기도 했다. 호법군이 호남과 사천 전역에서 승리하면서 1917년 12월 국무총리 돤치루이도 하야해야 했지만 쉬수정의 사주로 장회지, 차오쿤, 니쓰충 등 주전파 독군들이 1차 톈진회의를 열고 남방을 토벌해야 한다고 압박하였기 때문에 1917년 12월 18일 돤치루이를 참전독판에 임명해야 했고 1918년 2월, 남방과 휴전에 동의하였으나 1918년 3월 옌시산 등 여러 독군들이 연명으로 남방 토벌을 요구하여 돤치루이를 국무총리에 복직시키고 다시 토벌령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북양군벌 내부의 분열도 심각하고 서남군벌들도 자신들에게 걸리적거리는 쑨원을 축출한 이후 화의를 바라는 통에 결국 호법전쟁은 흐지부지해졌다.
2.4. 임기 만료와 말년
1918년 8월 12일, 안복국회라고도 하는 신국회가 개막했다. 참의원 139명, 중의원 339명으로 구성된 안복국회는 왕집당을 중의원 의장으로, 유은격을 부의장으로 선출했는데 이들은 모두 돤치루이를 지지하는 안복계였다. 중의원 의장엔 교통계인 량스이가, 부의장엔 주계검이 당선되었는데 모두 사퇴하면서 안복계가 중의원 의장과 부의장 자리도 차지했다. 국회는 안복계가 330명, 교통계가 50명, 연구가 20명으로 돤치루이의 우세가 절대적이었다. 대총통선거법에 따르면 10월 10일에 펑궈장의 임기가 끝나게 되는데 직예독군 차오쿤과 장강 삼독은 펑궈장의 연임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펑궈장은 안복국회에서 돤치루이의 세력이 너무 큰 것을 보고 연임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연임하지 않으면 돤치루이가 총통이 되어 내전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돤치루이 쪽에서 직예파와 안휘파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인물인 쉬스창을 추천하며 만약 쉬스창 당선에 동의한다면 펑궈장에게 부총통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제안했고 만약 펑궈장이 부총통까지 양보한다면 자신이 국무총리에서 퇴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펑궈장이 동의함에 따라 펑궈장은 8월 13일, 대총통 불출마를 선언했으며 9월 4일 쉬스창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총통에 당선되었다. 10월 10일 쉬스창이 대총통에 취임함에 따라 펑궈장은 총통에서 퇴임했다. 이후 돤치루이는 약속대로 내무총장 첸넝쉰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내려왔지만 여전히 참전독판자리를 차지하여 안휘군벌이 중앙정부의 실세였다.
10월 23일 슝시링, 차이위안페이 등 명사들이 평화기성회를 조직하여 내전의 중지를 호소하자 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여 11월에 호법전쟁이 종결되었다. 펑궈장은 환계의 득세에 불만을 품고 고향으로 낙향했으나 쉬스창은 펑궈장을 달래기 위해 펑궈장에게 15사단과 16사단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내렸고 고향인 한간으로 낙향해버렸던 펑궈장은 1919년 10월에 다시 베이징으로 북상했으나 상경한지 얼마 안된 1919년 12월 12일 병사하면서 직예군벌의 수령은 차오쿤과 우페이푸가 승계했다. 이후 직예군벌은 장쭤린의 봉천군벌과 동맹하여 1920년 7월 안직전쟁에서 안휘군벌을 격파하고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된다.
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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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당위업에서 중국배우 풍공이 분했다.
리첼렌의 대체역사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도 등장한다. 위안 스카이를 암살, 돤치루이를 살해하고 왕스전을 감금해 정권을 잡지만 이로 인해 민심과 그나마 있던 신망을 전부 잃어버리고 작중 반동탁 연합에 비견된, 공화주의 파벌과 군벌 등의 반 펑궈장 연합에 공격받는다. 심지어 열강들조차 대부분 펑궈장이 더이상 가망이 없다 생각하고 나름대로 이권을 챙기려고 하는데, 오히려 열강들의 뇌절 덕분에 민심이 어느 정도 돌아서서 펑궈장이 잠시나마 연착륙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자금원이었던 아편장사가 우창의 국민당 정권 때문에 허리가 끊겨 그 많던 자금도 다 까먹고, 집권 과정에서의 태생적 한계로 갈수록 권위를 잃어가면서 마침내 북경을 탈출해 만주에 눌러 앉을 작정으로 대병력을 이끌고 만주를 공격하지만 대한민국군의 독가스 살포로 인해 패배, 도주 과정에서 아들이 측근들에게 배신당해 죽고 본인도 곧 측근들의 배신으로 붙잡혀 이후 오체분시당한다. 작중 '북양의 개'라는 별명으로 자주 언급되는데[3] 연이어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탓에 결국 열강의 푸들, 북양의 똥개 수준까지 비하당한다.
4. 주요 경력
5. 참고문헌
- 군벌,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네이버 지식백과 풍국장 문서
6. 관련문서
- 청일전쟁
- 러일전쟁
- 신해혁명
-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
- 쑹자오런 암살 사건
- 선후대차관 사건
- 계축전쟁
- 중화민국 국회 해산
- 홍헌제제
- 호국전쟁
- 부원지쟁
- 장훈복벽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외몽골 출병
[1] 1대 위안스카이는 임기 중 사망, 계임총통 리위안훙은 장쉰의 복벽으로 사임, 2대 쉬스창은 직예군벌의 협박으로 사임, 복임한 리위안훙도 직예군벌의 협박으로 사임, 3대 차오쿤은 펑위샹의 쿠데타로 사임했다. 대원수와 집정으로 확대해도 임시집정 돤치루이는 펑위샹의 위협으로 사임, 대원수 장쭤린은 국민혁명군에게 쫓겨 봉천으로 퇴각하다가 일본군에게 암살당해서 정상적으로 임기를 종료한 인물은 펑궈장 밖에 없다.[2] 다만 북양의 개라는 다소 뭣한 별명이었다. 펑궈장이 재물욕이 많고 탐욕스러운 것이 한몫했을 듯.[3] 왕스전은 북양의 호랑이, 돤치루이는 북양의 용이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