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홍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장진홍'''
'''張鎭弘'''

[image]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장재환(張在煥)
'''자 / 호'''
준극(俊極) / 창여(滄汝)·창려(滄旅)
'''본관'''
인동 장씨[1]
'''출생'''
1895년[2] 6월 6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
(현 경상북도 구미시 옥계동 무이미)
'''사망'''
1930년 7월 31일[3]
대구형무소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독립 운동
2.3.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
2.4.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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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장진홍은 1895년 6월 6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현 경상북도 구미시 옥계동 무이미)에서 부친 장성욱(張聖旭)과 모친 순천 김씨 김종려(金鍾勵)의 딸 사이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인동도호부 일대는 인동 장씨들이 집단으로 세거하는 곳이었다. 장진홍은 고향 인동의 인명학교(仁明學校)[4]에서 수학하다가 교사로 근무하던 장지필을 만났다. 장지필은 내산서당에서 한주학파의 대표적인 인사인 이두훈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청년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인명학교, 협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장진홍은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배일의식을 키웠다.
장진홍은 인명학교를 졸업한 뒤 1914년 4월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조선보병대는 일제가 1910년 한일병합 후 대한제국 친위대를 개편한 것으로, 매녕 50~100명을 모집했다. 조선보병대는 연령과 신체조건 뿐만 아니라 일본어, 조선어, 한문시험을 거쳐 선발했으며 일정한 급여가 지급되었다. 그가 조선보병대에 들어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곧바로 독립운동을 위해 국외로 망명한 것을 볼 때 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입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진홍은 조선보병대에서 상등병까지 승진했지만 일제 치하에 있는 군대에서 더이상 복무하기를 거부하고 1916년에 제대한 뒤 동년 12월에 경성부로 이사하여 독립운동단체인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점점 심해져 활동이 어렵게 되자 망명을 선택했다.

2.2. 독립 운동


장진홍은 1918년 중국 봉천으로 망명했다. 그는 이곳에서 고향 친구인 이내성의 소개로 김정묵(金正默), 이국필(李國弼)과 만났다. 그는 김정묵, 이국필과 독립운동에 대한 방략을 논의한 후 이국필과 함께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서 한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군대 양성에 몰두했다. 그는 조선보병대에서의 경험을 살려 보병조전(步兵操典)을 설치하고 수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당시 장진홍이 참여한 단체는 한인사회당이 조직한 적위대로 보인다. 한인사회당은 1918년에 조직된 후 무장 투쟁을 준비했고, 같은 해 7월 하바로브스크, 이만을 중심으로 한인의병대를 조직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100여 명의 한인 적위대가 조직되었고, 이들은 러시아 적군과 함께 하바로브스크 방어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하바로브스크가 러시아 백군에 점령되면서 해산되었다. 이때 장진홍이 조직한 보병조전 역시 해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장진홍은 국내로 귀국했고, 3.1 운동 과정에서 일제가 자행한 만행을 조사했다. 그는 전답을 매각해 600여 원의 자금을 마련했고, 행상을 가장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본군의 학살, 방화, 고문 상황 등을 상세히 조사한 뒤 1919년 7월 조사한 내용을 김상철(金相哲)에게 전달했다. 김상철은 경북 출신 미군하사관으로 당시 인천에 입항한 미국군함에 있었다. 장진홍은 그에게 미국으로 돌아가 조사 내용을 영문으로 번역해 세계 각국에 배부할 것을 의뢰했다.
이후 장진홍은 부산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경영하기도 하고 매약상을 가장해 각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어떻게 벌일 지를 모색했다. 그러던 1927년 4월 경북 경산군 경산시장에서 매약상을 맡고 있던 그는 이내성의 소개로 일본인 호리키리 시게사부로(堀切茂三郞)와 만났다. 공산주의자였던 호리키리는 사회제도의 불합리함을 역설하고 이것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관공서, 은행, 부호 등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혁명 촉진의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했다. 호리키리는 장진홍에게 폭탄 제조법과 자금을 지원하고 폭탄 투척을 실행할 것, 폭탄제조 재료인 다이너마이트는 도로공사장 또는 광산 등의 노동자를 매수하여 입수할 것, 만일 검거되면 동지들의 관계를 자백하지 않을 것 등을 설명했다.[5] 장진홍은 이에 찬성하고 의거 준비에 착수했다.

2.3.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


장진홍은 경북 영천에 거주하는 박문선(朴文善)으로부터 고바야시 간이치(小林貫一)라는 일본인을 소개받았고, 이 사람으로부터 3회에 걸쳐 다이너마이트, 뇌관 각 30개, 도화선 25척을 대금 15원에 양도받았다. 그는 이것을 재료 삼아 폭탄을 제조하여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형무소, 지방법원, 조선은행 대구지점, 동양척식주식회사 대구지점, 칠곡 부호 장길상의 집 등에 투척하기로 했다. 그는 이를 위해 황진박·박관영(朴觀永)을 포섭했다. 그러나 그들이 폭탄 투척을 사양하자, 장진홍은 단독으로 거행하기로 결심하고 칠곡의 봉화산에서 폭탄의 성능 실험을 실시했다.
장진홍은 자동차를 이용해 계획했던 장소에 모두 폭탄을 투척하고자 했다. 그러나 폭탄 투척을 도와줄 운전수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도보로 목적지에 가기로 하고 경상북도 도청, 경상북도 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등으로 투척 대상을 줄였다. 이윽고 1927년 10월 16일, 그는 자택에서 냄비, 솥, 괭이를 분쇄해 파편을 만들고 다이너마이트 뇌관 도화선을 사용해 폭탄을 제조했다. 그는 10월 17일 폭탄을 나무상자에 넣고 보자기로 싼 후 자전거로 대구에 거주하고 있던 매형 김상한(金商翰)의 집으로 갔다.
10월 18일, 장진홍은 부상을 치료한다는 이유로 대구의 덕흥여관에 투숙한 후 나무상자 4개에 폭탄을 넣어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신문지로 포장했다. 그리고는 여관 종업원 박노선(朴魯宣)에게 선물용 벌꿀상자이니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순으로 각 1개씩 배달해달라고 부탁했다. 박노선은 의뢰를 받고 먼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상자 1개를 전달했다. 그런데 포병 출신인 은행원 요시무라 게츠가 화약 냄새를 맡고 나무상자를 열어 폭탄임을 확인했다. 요시무라는 즉시 도화선을 끊고 다른 3개의 상자도 건물 앞 공터에 갖다놓게 한 후 경찰에 연락했다.
그 후 대구경찰서 고등계 주임과 순사 10여 명이 출동했고 폭탄을 배달했던 박노선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박노선이 체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터에 갖다 놓았던 폭탄 3개가 연이어 폭발했고, 이로 인해 은행 창문과 출입문이 파괴되고 경찰 4명과 은행원 등이 부상을 입었다. 장진홍은 김상한의 집에 들러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버리고 두루마기로 갈아입은 뒤 칠곡 부근에서 이빨 4개를 빼버리고 신발도 미리 준비해둔 구두로 바꾸어 신었다. 이렇게 인상착의를 바꾼 그는 경북 선산에 은신했다.
장진홍은 은신하면서도 또다른 의거를 준비했다. 그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1927년 12월 안동에서 친척인 매약상 장용희를 동지로 포섭해 경찰서, 은행 등 안동의 주요 기관 파괴를 추진했다. 그러나 장용희가 병사하면서 계획은 중단되었다.[6] 장진홍은 경북 영천경찰서 폭파도 추진했다. 그는 1928년 1월 영천에 거주하고 있는 김기용(金基用)에게 자신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의 범인임을 밝히고 동지로 규합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 5개와 뇌관 6개로 폭탄 2개를 제조한 후 김기용에게 전달해 영천경찰서를 폭파시킬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김기용이 의거 직전 체포되면서 실행되지 못하고 수사망이 좁혀오자, 장진홍은 1928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안경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동생 장의환(張義煥)의 집에서 1년간 거주하면서 오사카와 도쿄, 히로시마 사이를 왕래하며 은신하다가 동경 경시청 폭파를 준비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일제 경찰이 그를 전격 체포하면서, 이 계획 역시 무산되었다.
최석현이 집필한 <대구 조선은행 지점 폭탄범인을 법정에 보내기까지>에는 장진홍이 체포된 경위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일제 경찰은 장진홍의 동생 장의환이 수년 전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시 동성구에서 안경상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경북 경찰부는 구보전, 남부장 및 최석현 등 3명을 일본에 급파했다.
그들은 장의환의 안경 상점을 확인하고 오사카부 천왕사 앞에 있는 일출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 이춘득(李春得)․남주희(南周熙) 등을 포섭한 일경은 안경상점을 감시토록 했다. 그러나 좀처럼 장진홍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자, 최석현 등은 최후의 수단으로 여자 정탐원을 이용해 직접 안경점에 잠입시켜 확인하게 했다.
1929년 2월 18일, 여성 정탐원은 신원을 숨기고 안경상점에 들어가 장의환 부인의 동정심을 얻은 후, 하룻밤을 묵으면서 장의환의 7,8살 된 어린아이를 유혹해 김해중(金海中)이라는 인물이 2층 안경공장에 숨어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다음날 일경에 알렸다. 이에 일경들은 이춘득을 안경도매상으로 위장시켜 계약금 30원으로 안경 1만 5천 개를 조선에 판매할 계획인 양 주문하고 밤 11시에 장의환의 집에서 주연을 같이 하도록 하는 한편, 같은 시간에 현지 일본인 형사 2명을 지원받아 담을 넘어가 의사를 체포하기로 했다.
이러한 일본 경찰의 계략을 눈치채지 못한 장진홍은 직공과 이춘득 등 6명과 함께 동생의 집에서 식탁에 마주앉아 술잔을 주고받았다. 이때 일본인 형사 2명이 침입하자, 장진홍은 벌떡 일어나 전등을 부수고 암흑을 틈타 뒤뜰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장진홍은 일본에서 대구형무소로 호송되는 와중에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경찰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자살을 시도해 거의 죽기 직전에 발견되기도 했다.

2.4. 최후


장진홍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가족과 친우들의 권유에 따라 항소했지만 같은 해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는 자신을 조사하는 조선인 경관에게 "한민족의 피를 받고도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로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질타했다. 또한 <중외일보> 1930년 4월 25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고등법원에서 판결을 받을 때는 재판장에게 돌을 던지고 의자를 던지려 했다가 제지되었다고 한다.
1930년 8월 1일, <중외일보>는 장진홍이 사형 집행일을 앞두고 7월 31일에 돌연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일제 경찰은 사망 원인을 뇌출혈로 발표했다. 하지만 김영범의 저서 <경북인의 국내 의열투쟁>에 따르면, 장진홍은 왜적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모아둔 수면제를 한꺼번에 삼켜 자결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남율리 언덕에 매장되었다가 1973년 10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장진홍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상장군 금용(金用)계 황상(凰顙)파 12세 '''진(鎭)''' '''환(煥)''' 헌(憲) 항렬. 인동 장씨 29세.[2] 인동장씨대동보 2권 황상파에는 189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음력 6월 6일.[4] 현 구미 인동초등학교의 전신이다.[5] 송상도기려수필에 의하면, 호리키리는 이후 장진홍이 체포되었을 때 이내성과 함께 자결했다고 한다.#[6] 송상도기려수필에 의하면, 이후 장진홍이 체포되었을 때 자결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