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쭤샹
1. 개요
張作相. 청말의 군인, 봉천군벌의 일원. 장쭤린의 의형제로 봉천군벌의 원로 역할을 하였다.
2. 생애
1881년 봉천성 의현에서 태어났다. 원래 마적이었으나 장쭤린 휘하에 들어가 의형제를 맺고 신민부 순방영 초관, 단장, 여단장, 27사단장, 동삼성 순열사 참모차장 등을 역임했다. 1924년, 우쥔성과 길림성을 놓고 다투다가 승리하여 길림독군 겸 성장에 임명되었고 1925년 선후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해 쑨촨팡과 손봉전쟁이 발발하자 5방면 군단장에 임명되었으며 궈쑹링의 반봉사건 진압에 큰 공을 세웠으나 온건론을 주장하여 반봉사건에 가담한 군장들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국민혁명으로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북진하기 시작하자 보경안민을 주장하며 상대하지 말 것을 주장했으나 우페이푸, 쑨촨팡이 몰락한 후에는 장쭤린을 안국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여 맞서기로 결정했다. 1927년 쑨촨팡, 장쭝창 등과 함께 장쭤린을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하여 국민당에 맞서려 했으나 결국 국민당의 1차 북벌과 국민당의 2차 북벌을 당해내지 못하고 만주로 퇴각하게 되었다. 1928년 황고둔 사건으로 장쭤린이 사망한 이후 장쉐량을 보좌하여 1928년 동북역치를 연명으로 통전했고 이후 동북변방군 부사령관, 길림성 정부주석, 중앙정치회의 위원, 군사참의원 상장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929년 봉소전쟁 중에 국방사령관에 임명되어 소련군과 싸웠으나 크게 패했고 장쉐량과의 불화설이 나돌았다. 1931년 국민당 제3기 5중전회의 결과로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1931년에 나카무라 사건, 만보산 사건 등으로 중일관계가 험악해지자 하야시 규지로 봉천총영사를 비롯한 일본 외교부와 접촉하여 사태를 완화하려 시도했으나 일본의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소득이 없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였을 때는 부모상을 만나서 고향인 금주에서 상중에 있었다. 국민정부로부터의 독립에 끝까지 반대했으며 만주국 건국 후 톈진에 은거하였으며 일본 제국의 회유를 받았으나 듣지 않았다. 1936년 서안 사건이 발생하여 장쉐량이 연금되자 이후 장쉐량 구명운동을 벌였고 1948년 장제스가 그를 동북정무위원회 부주임위원으로 임명하여 만주의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따르지 않았고 국부천대 중 따라갈 것을 제의받았으나 대륙에 잔류하였다가 곧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학량과 중동로사건, 송한용, 중국사연구 10권, 중국사학회.
- 1928년 장학량정권의 동북역치, 송한용, 역사학연구 12권, 호남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