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봉사건

 

'''反奉事件'''
Anti-Fengtian Incident
[image]
반봉사건의 주역인 궈쑹링
1. 소개
2. 배경
2.1. 손봉전쟁
2.2. 봉천군벌 내부의 파벌 갈등
3. 전개
3.1. 반봉삼각동맹의 결성
3.2. 거사의 준비
3.3. 궈쑹링의 봉기
3.4. 장덩쉬안의 죽음
3.5. 장쉐량의 설득
3.6. 장쭤린의 하야 소동
3.7. 일본의 개입
3.8. 궈쑹링의 몰락
3.9. 곽군의 처리
4. 결말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1. 소개


반봉사건은 1925년 11월 23일 펑위샹과 대치하고 있던 장쭤린의 부하 궈쑹링이 혁명사상의 영향으로 장쭤린의 하야를 요구하며 동북국민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관동군의 도움을 받은 장쭤린에게 진압된 사건을 말한다. 흔히 궈쑹링의 반란이라고 한다. 궈쑹링이 자신의 부대를 국민군으로 일컬었기 때문에 국민군-봉천군벌 사이의 전쟁이란 뜻으로 국봉전쟁이란 용어도 쓰인다.

2. 배경



2.1. 손봉전쟁


1916년 위안스카이의 칭제와 사망 이후 중국 각지는 지방마다 거병한 군벌들에게 장악된 난세 중의 난세였다. 이중 만주를 위시로 한 동북 지역은 봉천군벌 장쭤린이 장악하고 있었고 장쭤린은 1917년의 호법전쟁으로 첫 관내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1920년 안직전쟁에 참여하여 돤치루이의 환계를 몰락시키고 차오쿤, 우페이푸의 직계와 손잡아 천하의 패권을 쥐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2차례의 직봉전쟁을 일으켜 직계의 우페이푸와 충돌했다. 1차 직봉전쟁에선 장쭤린이 패했으나 2차 직봉전쟁에선 장쭤린이 근대화를 통해 훨씬 강화된 군사력으로 우페이푸를 격퇴했고 우페이푸의 정통성을 제공해주던 북양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우페이푸의 부하인 펑위샹과 결탁하여 북경정변을 일으켰고, 이는 우페이푸가 수립한 차오쿤 정권이 무너지고 장쭤린이 중원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장쭤린을 도운 펑위샹은 장쭤린에게 배신당하여 서북 지역으로 밀려난 후였고 이후 장쭤린과 대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봉천파의 갑작스러운 확장은 여러 군벌들의 불만을 샀다. 1925년 10월 16일 절강독판으로 저장성을 지배하던 군벌 쑨촨팡이 봉천파에 전쟁을 선포, 남방으로 밀려난 우페이푸가 가세하면서 저장, 장쑤, 장시, 안후이, 푸젠의 군벌들이 오성연군을 조직하여 장쭤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를 손봉전쟁이라 한다. 이때 쑨촨팡 등은 펑위샹을 자신의 연합에 끌어들이려 했고 장쭤린도 펑위샹의 개입을 경계하여 장세량과 궈쑹링을 산해관, 톈진에 급파했다.
한편 당시 중국은 반제국주의 내셔널리즘이 끓어오르던 시절로 상하이, 광저우 등지에서 5.30운동을 바탕으로 조계회수운동 등이 벌어지며 열강에 침탈당하던 중국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민중과 지식인들의 움직임이 거센 시점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군벌들 역시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궈쑹링은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2. 봉천군벌 내부의 파벌 갈등


당시 봉천군엔 크게 세개의 파벌이 있었다. 장쭤린, 장징후이, 장쭤샹, 우쥔성을 비롯한 구파, 양위팅, 장덩쉬안 등 일본 육사 출신의 사관파, 육군대학과 보정군관학교 출신의 육대파였다. 궈쑹링은 중하급 간부들로 구성된 육대파의 우두머리로 양위팅이 이끄는 사관파와의 충돌이 심했다. 궈쑹링은 일찍이 1919년에 참모장으로 있던 시절부터 양위팅을 부도덕한 인물이라 비판하면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1922년 1차 직봉전쟁 이후 양위팅의 관내진출 전략에 맞서 동북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양위팅은 장쭤린을 구슬러 강남의 비옥한 땅을 정벌하자고 주장했다. 장쭤린이 양위팅의 손을 들어주면서 봉천군벌은 관내로 깊숙히 진출하게 되었다. 거기에 1924년 2차 직봉전쟁 때 궈쑹링이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논공행상에서 제외되면서부터 완전히 틀어졌다. 궈쑹링은 장쑤나 안후이 성의 독판 자리를 원했으나 양위팅이 그 자리를 자신의 파벌에게 주기 위해 저지하면서 둘은 크게 충돌했다.
자신이 원했던 장쑤 독판에 양위팅이 앉는 것을 본 궈쑹링은 격분했다. 일본 육군의 훈련을 참관한단 이유로 1925년 9월 일본으로 훌쩍 떠나버리기도 했다. 10월에 쑨촨팡이 손봉전쟁을 일으키자 장쉐량은 급히 궈쑹링에게 귀국을 종용했으나 궈쑹링은 지병을 핑계로 거부했다. 이에 장쉐량은 궈쑹링을 형이라 부르며 대국적으로 생각하여 부디 도와줄 것을 간청하는 친필 편지를 보냈고 관내에 진출한 봉천군의 지휘권을 궈쑹링에게 주겠다는 구두 약속을 하였다. 이에 궈쑹린은 귀국에 응하여 돌아왔다. '''그런데 궈쑹링은 이미 귀국 시점에서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전말은 이렇다. 1925년 10월 궈쑹링이 도쿄의 제국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는데 일본 참모본부에서 사람을 파견, '''"당신이 이번에 일본에 온 것은 장쭤린 장군의 밀약 체결 임무 때문에 대표로 온 것 아닌가?"'''라고 물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몰랐던 궈쑹링은 크게 놀라 그저 견학하러 온 것이라고 대답했고 이에 참모본부 사람이 실망하여 돌아가자 수상쩍게 생각한 궈쑹링은 일본 측에서 언급한 '밀약'의 존재에 대해 조사해 보았고 그 결과 장쭤린과 일본이 맺은 21개조 밀약을 알게 되었다. 장쭤린은 이를 조인하기 위해 대표를 일본에 파견하겠다고 통보했는데 사적인 임무로 도쿄로 온 궈쑹링이 대표로 오해받은 것이다. 궈쑹링은 제국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펑위샹의 부하 한푸쥐를 만나 장쭤린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인민을 저버리고 나라를 팔려고 한다고 장쭤린을 성토했다.

"장쭤린은 개인적 욕심에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고 국가를 팔아먹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기르던 호랑이 고기를 베어 늑대를 제집에 끌어들이는 격이니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나는 양심에 따라 일을 할 뿐이며 그가 만일 국민군을 공격하면 나는 그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이며 펑위샹이 장쭤린을 친다면 자신도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펑위샹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그는 장쉐량에게도 편지를 보내 자신이 장쭤린에 대항해도 거리낄 것이 없는 심정이라고 알렸다.
다만 앞서 서술한 이 '전말'에 대해서 끝내 궈쑹링이 장쭤린의 21개조 밀약의 존재에 대해 알았는지, 당시 실제로 밀약이 맺어졌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펑위샹 등이 그렇게 들었다는 식으로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궈쑹링이 귀국 길에 오를 때 그가 구체적 반란 계획을 세웠는지까진 알 수 없으나 장쭤린, 양위팅에 대한 깊은 반감을 품고 모종의 결심을 했던 것까진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3. 전개



3.1. 반봉삼각동맹의 결성


손봉전쟁의 시작으로 장쭤린은 10월 16일 상하이, 19일 난징, 11월 8일 쑤저우를 잃었고 2차 직봉전쟁으로 얻은 남방 영토를 대부분 잃었다. 양위팅은 펑위샹을 쳐서 북방을 안정시킨 다음에 쑨촨팡을 밀어내고 남방을 되찾자고 주장했고 동북군은 6개 방면군으로 개편되었다. 10월 24일 장쭤린은 일본에 있던 궈쑹링에게 급하게 봉천으로 돌아와 국민군 대비 작전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궈쑹링은 일단 장쭤린이 지시한 대로 톈진으로 가서 3방면군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3방면군 군장은 장쉐량, 부군장은 양위팅과 우진이 맡았으며 예하에 8,9,10군이 있었다. 우진이 8군장을 겸하고, 한린춘이 9군장, 궈쑹링이 10군장이었는데 3방면군 조직을 궈쑹링이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3방면군은 사실상 궈쑹링의 손안에 있어 7만명의 병력을 인솔하게 되었다. 하지만 궈쑹링은 펑위샹과의 싸움을 명분 없는 전쟁이라 여겨 불만을 품고 펑위샹과 협상할 것을 주장했다. 실제 장쭤린은 펑위샹과 협상하기 위해 허란주와 곽선교를 파견하여 수원 특구의 포두에서 펑위샹과 회담하게 했다. 허나 장쭤린은 펑위샹에게 쑨촨팡과 싸우는데 필요한 군대를 제공하거나 지역 방위를 위해 바오딩으로 출병하고 비행과 대포를 비롯한 각종 무기를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펑위샹 측은 장쭤린의 강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으면서도 단독으로 장쭤린에 맞서기는 어려웠으므로 쑨촨팡과의 합작을 모색하고 있던 찰나였는데 11월 5일 일본에 다녀온 한푸쥐가 귀국, 다음날 펑위샹에게 방일 결과를 보고했다. 이에 펑위샹은 반색하며 11월 7일 한푸쥐를 즉각 궈쑹링에게 파견해서 궈쑹링과 협상하게 했다. 장쭤린, 옌시산, 우페이푸의 동시 공격에 궁지에 몰려있던 펑위샹은 봉군 내부에서 궈쑹링이 내응해준다면 그만큼 반가운 일이 없었다.

"이것은 매우 큰일이다. 우리는 함부로 경솔하게 행동하면 안될것이다. 궈쑹링에게 친필 서신을 써 달라고 하고, 신임하는 한두 사람을 보내 같이 천천히 상의하자고 정중히 말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

한푸쥐는 톈진에서 궈쑹링을 만나 펑위샹의 의사를 전달했고 궈쑹링도 기뻐했다. 당시 궈쑹링은 요도염이 악화되어 톈진의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는데[1]그곳에서 동생 곽대명과 심복들을 소집하여 거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펑위샹은 자신의 전 참모장이며 경한로국 국장인 왕내모를 파견했고 궈쑹링은 인견백과 친동생 곽대명을 파견하여 협상하게 했다. 궈쑹링은 다음과 같은 친필편지를 심복들 편에 보냈다.
장쭤린이 일본 제국주의와 내통하여 나라에 해가 되고 인민에게 재앙을 안겨주는 조약을 체결하고, 국민군을 공격하는 것을 우리는 결사반대합니다. 만일 장쭤린이 국민군을 공격하면 우리는 즉시 장쭤린을 공격할 것이며 우리 부대는 국민군 제4군, 혹은 동북국민군으로 이름을 바꾸겠습니다. 우리 부대는 앞으로 동북을 개발하며 결코 관내의 문제를 묻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펑위샹은 이 편지를 받고 몹시 흥분하여 밤을 새워가며 이견백과 협상했다. 직예군무독판 리징린도 동참을 약속하였는데 그 대가로 직예와 열하, 2개 성을 달라고 요구했다. 펑위샹이 난색을 표하자 이견백이 말했다.

"이 선생의 참가로 우리들 공동 행동의 관계가 매우 커졌습니다. 일이 성사되고 나서 지역 방위를 누가 맡느냐 하는 것은 차차 상의하기로 하고 현재 지나치게 따지는 것은 적절치가 못합니다."

펑위샹이 이견백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펑위샹과 궈쑹링은 11월 19일에 반봉밀약을 맺었다. 밀약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군벌의 전횡을 배제하고 영원히 전쟁의 참화를 소멸한다.
2. 국가를 통일하여 민주정치를 실시한다.
3. 변강을 개발하여 국토를 보존한다.
4. 각자 서정에 힘써 내쟁을 하지 않는다.
5. 합법정부를 구성하여 외국인과 매국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
펑위샹은 추가로 궈쑹링이 자신의 부대를 동북국민군으로 칭할 것, 산해관 바깥, 즉 관외로 나가 동북의 개발에 힘쓸것, 관내의 일엔 간섭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고 궈쑹링은 모두 받아들였다. 이상의 합의사항에 펑위샹은 20일, 궈쑹링은 22일에 서명했다.
마지막으로 궈쑹링은 참모장 위익삼을 데리고 톈진 독판 사무실에서 리징린 및 국민군 대표 웅빈과 합작하는 방법을 논했다. 리징린이 국민군 제2군이 직예성 안에서 행동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자 웅빈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 제2군의 기율은 모두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펑 총사령관이 이미 명령을 내려 사람을 보내 제지하고 있으니 금후 피차 쌍방이 더 이상 문제가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에 리징린도 그의 부대를 궈쑹링의 뒤를 따라 산해관 방면으로 이동시키겠다고 보증하였다. 이로써 궈쑹링, 펑위샹, 리징린의 반봉 삼각동맹이 결성되었다.

3.2. 거사의 준비


장쭤린은 펑위샹을 압박하기 위해 궈쑹링에게 톈진으로 가서 국민군 작전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궈쑹링은 보경안민을 내세우며 이에 반대하며 장쉐량에게 펑위샹과 합작할 필요가 있다고 설득하고 있었다.

"동북은 땅이 기름지고 자원이 풍부합니다. 개발이 가능하여 다시 관내로 들어가 지지 기반 쟁탈 전쟁을 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나와 리징린의 의견인데 이것을 상장군에게 전달하여 고려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북은 양위팅이 다 망쳐 놓았습니다. 안휘, 강소에서 패하여 3개 사단 병력을 상실했습니다. 현재 양위팅은 또 상장군 주위를 끼고 돌면서 그들의 지지기반을 치려고 하니 이 포화에 다시 끼고 싶지 않습니다. 동북 사정이 좋아지면 이 양위팅을 돕는 유학생 출신들을 모두 쫓아내고 작은 장군님께서 모든 것을 맡으셔야 합니다."

그러던 중인 11월 20일, 장쭤린은 궈쑹링에게 부대를 펑위샹을 견제하는데 파견하고 궈쑹링 자신은 봉천으로 돌아올 것을 지시했다. 11월 22일 장쉐량이 톈진으로 가서 궈쑹링에게 장쭤린에게 직접 반전 의사를 말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궈쑹링은 장쭤린이 자신의 거병 의사를 눈치챈 것으로 여겨 오히려 장쉐량에게 양위팅, 장덩쉬안 등을 쳐서 독군에서 몰아내자고 권유했다. 장쉐량이 놀라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면서도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고 차를 타고 관외역으로 떠나버림으로 거절 의사를 드러냈다. 산해관에 이르렀을 때, 장쉐량은 19단 단장 장정구에게 방어 병력을 배치할 것을 요구했고 연산역에 이르러 호로도로 다시 이동한 다음 군함 진해호에 탑승했다. 이때 장쉐량은 진황도 철도를 지나는 궈쑹링의 부대에게 함포 사격을 명령할 수 있었지만 "모두 내 부하들이다."라고 말하면서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11월 22일, 궈쑹링은 한밤중에 3개의 전문을 보내 자신의 반란 사실을 알렸다. 첫번째 전문은 전한상이 쓴 것으로 4,6 변려문체로 쓰여 있어 읽기 어려웠는데 내전 반대와 전쟁 중단, 장쭤린의 하야, 장쉐량의 추대를 주장하는 글이었다.
해마다 전란이 일어나고 국고는 비었다. 세금은 날로 더해 가 인민들의 가정이 빈곤해졌다. (...) 한경 군장은 한창 나이에 의욕이 있고 넓고 깊게 아는 것도 많아 나라의 보배다. 비바람이나 뇌성벽력에도 흔들림 없이 궈쑹링과 함께해 온 동지이며 오랫동안 갈고 닦은 풍모가 있다. 받들어 성의를 다해 보좌하고 정치를 개혁하고 변경을 튼튼히 하자. 남발된 화폐를 거두어들이고 가혹한 세금을 줄이고 간교한 도적을 제거하여 사병을 튼튼히 기르고 문치에 힘쓰고 변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 노동을 장려하고 과격한 무리들을 없애자. (...) 나라의 이름으로 일을 한다.
두번째 전문은 양위팅 등 장쭤린의 측근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번 봉군에서 싸울 상대는 오직 한 사람 양위팅이다. 궈쑹링은 국가를 위하고 동삼성의 안전을 위한 대책으로 평화를 위해 출관하며 봉천으로 들어가 양위팅을 몰아내고 장쉐량 장군을 추대하고자 함이다.
세번째 전문도 양위팅 토벌을 촉구하는 글이었다. 전문은 양위팅의 죄상을 들추며 양위팅의 파면을 요구하고 있고 만약 양위팅이 파면된다면 즉각 부대를 변경으로 옮겨 둔전 개간으로 국방에 전념할 것이라고 밝혔다.

3.3. 궈쑹링의 봉기


만반의 준비를 갖춘 궈쑹링은 1925년 11월 23일 란저우의 휴업중인 성냥공장 건물에서 상교급 이상 장령들을 긴급 소집하여 회의를 열였다. 무장한 경호원들이 순시하는 가운데 긴장된 분위기의 100여명의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궈쑹링이 부인 한숙수를 대동하고 나타나 발언을 시작했다.

"민국이 성립된 지 10년 이래 병화가 끊기지 않고 있어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간 나라가 곧 망할 것입니다. 또 까닭없이 군사를 일으킨다면 우리 군인들은 다시 전쟁의 고통에 들어갈 것입니다. 상장군 면전을 독차지하고 있는 양위팅이 바로 우리가 타도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 사람은 제멋대로 전횡을 일삼고 있으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권신이 안에 있으니 대장이 어찌 밖에 나가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끝까지 싸워 난관을 돌파하고 양위팅, 장덩쉬안을 자기들 지역의 독판 자리에서 내쫓아야 합니다. 현재 이들은 강소와 안휘의 인민들에게 쫓겨났고 또 우리는 이들 지지 기반을 수복하여 접수해야 하며 이들이 기를 쓰고 저항해도 우리는 이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나는 이미 생각을 굳혔습니다. 이후는 국내 전쟁에는 절대 참가하지 않겠습니다. 동북의 토지는 광활하고 자원이 풍부한 곳입니다. 개간에 종사하고 나라를 위해 둔전을 하면 무서운 전쟁이라도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내정에 관하여 궈쑹링은 성자치 실행, 상공 보호를 통한 자본 절제, 빈곤 타파, 정병주의 채택, 금융 정리, 민업 보호, 교육비 투자와 의무교육 실행, 인재본위를 통한 인재 등용, 지방자원 개발 및 실업 진흥, 교통 정리, 경찰 정돈 등을 천명했으며 외정에 대해서 일본과 조선인의 이민 제한, 일본의 엄정중립 요구를 내세웠다. 궈쑹링은 종이를 내밀었다.

"현재 두가지 명분이 있습니다. 종이에 써 놓았으니 모두 와서 서명을 하십시오. 어떻게 하는지는 각자 알아서 원하는 곳을 선택하면 됩니다. 첫째는 '병력을 이동하여 개간 사업에 참여하고 국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이고 둘쨰는 '무력통일을 고수한다'입니다."

각 사단 연대장들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5사단 조은진, 6사단장 제은명, 12사단장 배춘생, 7사단장 고유악은 거사에 반대했으나 어쩔 수 없이 서명을 했고 나머지 장령들도 따라서 서명했다. 서명이 끝나자 궈쑹링이 외쳤다.

"우리의 이 거사는 아무 문제없이 꼭 성공을 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실패한다면 나는 오직 죽음으로 대신할 뿐입니다."

한숙수도 즉시 일어나 한마디 했다.

"장수가 고통스럽게 죽는다면 저 역시 살지 않을 것입니다."

궈쑹링은 거사에 반대한 조은진, 제은명, 배춘생, 고유악을 톈진에 휴식 명목으로 보내 리징린에게 맡겨 연금시켰고 자신과 긴밀하지 않은 만주 구파 소속의 사단장과 연대장들 30여명을 억류한 후 휘하 병력을 5개 군으로 재편성하고 사령부를 설치했다. 총사령관은 당연히 궈쑹링이었고 참모장에 추작화, 비서처장에 전한상, 정무처장에 임장민, 부관처장에 고여염, 군수처장에 노목정, 외교처장에 왕정연[2], 항공사령에 팽진국이었으며 전선 총지휘는 송구령, 1군 군장에 유진동, 2군 군장에 유위, 3군 군장에 범포강, 4군 군장에 제운, 5군 군장에 위익삼을 임명했다. 이 인사 명령서는 장쉐량과의 공동 명의였는데 이는 장쉐량 추대의 뜻을 알림으로 봉천군벌 내부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것이었다.
11월 25일 펑위샹이 장쭤린 토벌 통전을 보냈다.
장쭤린은 국가 안위와 인민이 죽고 사는 것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전쟁만 좋아하여 직예와 산동에 화를 끼쳤고 경기 지역을 핍박하였다. 상하이 사건을 일으켜 앞잡이가 되어 온갖 못된 짓을 하여 참을 수가 없다. 군대로 학생과 노동자를 탄압하여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고 있다.
이날 광저우 국민정부의 혁명단체들도 국민대회를 열고 돤치루이 정부와 봉천군벌 타도 및 궈쑹링 지지 집회를 열었다. 11월 29일 리다자오가 중국 국민당 정치위원회 명의로 혁명 선언을 발표하여 제국주의와 돤치루이, 장쭤린 타도를 호소했다. 12월 1일 중국 공산당과 중국 공산주의 청년연합회가 <전국 민중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전국 혁명의 민중, 국민당원, 군인은 속히 베이징의 거사에 함께 일어나 안복계 정부를 무너뜨리고 전국 통일의 국민정부를 수립하여 정권을 인민에게 되돌리자."라고 호소했다. 서산회의파도 궈쑹링을 옹호하며 궈쑹링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11월 30일 궈쑹링은 산해관에서 정식으로 부대를 동북국민군으로 개칭하고 애민, 구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녹색 완장을 병사들에게 차게 했다.

3.4. 장덩쉬안의 죽음


한편 궈쑹링이 표적으로 삼은 사람 중 하나인 장덩쉬안은 11월 7일 덕주에서 장쭤린의 명령으로 4방면군 군장으로 임명되었다. 장덩쉬안은 집익교와 진침을 여단장으로 삼아 부대를 이동시키고 자신은 소수 수행원만 데리고 잠시 쉬다 봉천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몰랐던 장덩쉬안은 전용열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란저우에서 궈쑹링의 참모장 팽진국을 만났다. 팽진국이 정중하게 장덩쉬안에게 말했다.

"궈 군단장께서 지금 감기가 아주 심해 독판을 영접하러 나오지 못했습니다. 궈 군단장은 강 독판을 만나 뵙기 원합니다."

장덩쉬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동차를 타고 란저우로 들어오자마자 즉각 성냥공장 지하에 수감되었다. 궈쑹링은 장덩쉬안을 만나주지도 않고 즉각 총살하라고 지시했고 병사들이 장덩쉬안에게 성안으로 이동시키겠다는 구실로 차를 태운 후 백사장으로 끌고나와 차가 모래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여 내리게 한 다음 등 뒤에서 총을 쏘아 죽였다. 궈쑹링은 장덩쉬안을 죽인 후 특별전문을 타전하여 그의 죽음을 알렸다.
장덩쉬안을 란저우에서 총살에 처했다. 함부로 병력을 남용하여 전쟁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궈쑹링은 장덩쉬안과 사실 개인적인 원한이 좀 있었다. 우선 젊은 시절 허란주의 휘하에 같이 있으면서 둘은 정적 관계였으며 2차 직봉전쟁 중 궈쑹링이 장덩쉬안과 자신의 부대를 교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장덩쉬안이 반대했다. 이에 화난 궈쑹링은 멋대로 병력을 철수시켰는데 이를 두고 장덩쉬안은 군령을 위반했으니 군법회의감이라고 경극 배우를 흉내내며 조롱하였다. 또한 장덩쉬안은 궈쑹링이 가지고 싶었던 안휘성의 독판을 차지한 전력이 있었다. 궈쑹링은 장덩쉬안의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장덩쉬안은 안휘 독군이 되었다가 사람들에게 쫓겨났지만 여전히 자기의 위치가 확고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동북으로 돌아와 장쭤린을 뵙고 새로운 부서로 가는 것을 도모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바로 내가 평소 역겨워하던 행위였다. 내가 오늘날 동북군을 동북으로 철수시켜 새로운 동북을 건설하려고 하는 즈음 그는 여전히 안휘 독군을 맡을 생각만 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란저우에서 구금하여 죽인 것이다."

하지만 장덩쉬안은 평화적인 사람으로 대인관계가 좋아 봉천군벌 내부에 두루 친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 장덩쉬안을 재판도 없이 총살시켜버리자 봉천군벌의 장령들은 궈쑹링이 개인 원한으로 사람을 쉽게 죽인다 여겨 반감을 품게 되었다.
또한 궈쑹링은 동북군 제5방면군 12군장 겸 열하 도통 감조새, 기병사단장 탕위린, 11군 기병사단장 우침징 등이 자신의 처우에 불만을 품고 궈쑹링에게 가담하고 싶다고 제안했을 때도 자신의 우세에 너무 자신감을 품어 감조새에게 총참의를, 탕위린과 우침징에게 참의를 주겠다고 할 뿐 이들의 포섭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감조새, 탕위린, 우침징 등은 궈쑹링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전력인 장쭤샹의 제5방면군 소속이었으므로, 만약 이들이 궈쑹링에게 합류했다면 장쭤린은 흑룡강의 우쥔성이 오든 일본군이 오든 궈쑹링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위익삼, 유진동, 고기 등의 측근들이 궈쑹링에게 감조새, 탕위린, 우침징 등에게 큰 보상을 약속하여 이들을 포섭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궈쑹링은 듣지 않고 제4군으로 하여금 봉천과 열하의 감조새와 탕위린 부대를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궈쑹링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여긴 이들은 장쭤린에게 합류했는데 장쭤린은 이들에게 옛일을 묻기는커녕 오히려 더 높은 급여를 약속하였다. 이후 궈쑹링에게 기병 부대의 부재는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왔다. 위익삼은 후에 이렇게 불평했다.

"궈쑹링은 위인이 잘난 체를 잘하며 혼자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너무 성급하게 서둘러 대사를 그르치고 말았다."

또한 추작화를 비롯하여 믿을 수 없는 장령들을 신임했고 훗날 추작화는 불발탄을 지급하는 등 사보타주를 일삼았다. 그리고 장쭤샹의 아들 장정구를 90단장으로 임명하는가 하면 제은명의 아들 제가정도 그대로 두었다. 당연히 장정구와 제가정은 봉천군에 합류하여 반란을 알렸다. 공군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아예 장쉐량 직속부대라서 장쭤린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여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자마자 전부 다 봉천으로 비행기를 타고 철수해버렸다. 궈쑹링은 3군단 참모처장 팽진국을 보내 공군을 접수하려 했으나 팽진국은 공군 없는 공군 사령관이 될 뿐이었다.

3.5. 장쉐량의 설득


한편 장쭤린은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경악하였다. 하루종일 장쭤린은 누워 담배를 피우다가 욕설을 뱉었다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장쭤린은 일단 11월 24일 양위팅을 소환하여 궈쑹링이 보낸 두번째와 세번째 전문을 보여주었다. 장쭤린이 궈쑹링을 달래기 위해 자신을 파면하길 원한다는 것을 눈치챈 양위팅은 사직서도 제출하지 않고 즉각 하야해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양위팅의 해임은 단순히 궈쑹링을 달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궈쑹링의 전문이 장쭤린을 겨냥하고 있음은 대강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전문 어디에도 장쭤린을 직접적으로 제거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므로 궈쑹링의 가장 표면적인 요구인 양위팅을 먼저 제거하여 궈쑹링의 회군 명분을 약화시킨 것이었다. 이후 장쭤린은 장쉐량을 봉천으로 불러 야단치고 궈쑹링을 만류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11월 24일 밤, 장쉐량은 비서 주광목, 참모 강화남, 일본인 고문 키가 세이야 소좌를 대동하고 궈쑹링을 만나러 갔다. 11월 25일 호로도에서 진해호에 탑승한 장쉐량은 25일 진황도에 도착하여 궈쑹링에게 키가 소좌와 일본 의사 모리타를 통해 전화로 면담을 요청했지만 궈쑹링은 거절했다. 11월 27일, 장쉐량은 모리타에게 다시 한번 부탁해서 서신을 궈쑹링에게 전해 면담을 요청하며 거사가 불가능함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28일에 궈쑹링은 완강하게 대답했다.

"이번의 거사는 여러 번 심사숙고 후에 결정한 것이므로 지금 절대 중지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42세가 되었고 이렇게 병든 몸이 되어 아마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상장군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야한다면 나는 장쉐량 군에게 말하여 일본에 한 3~4년 유학을 가려 합니다. 이 기간 중 나의 뜻과 포부가 일부 실현되면 원래 가지고 있던 모든 자리를 장쉐량에게 넘겨주고 저도 하야하여 한가로이 구름을 떠도는 들판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학처럼 남은 여생을 보내고자 합니다. 나의 이 뜻을 상장군에게 전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궈쑹링이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며 시라카와 요시노리 사령관과 요시다 시게루 총영사에게 보증을 세우도록 하겠다고 했다. 모리타가 궈쑹링의 대답을 전하자 장쉐량은 5일간의 휴전을 제안하며 그 안에 장쭤린의 대답을 받아오겠다고 했다. 궈쑹링은 두통의 편지를 장쉐량에게 보내 장쉐량을 상장군에 옹립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장쉐량은 이 거절의 답신을 보냈다.
형의 후의에 입어 이 쉐량이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되어 그 두터운 정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직 쉐량에게 친우의 의리로 대해주지만 개인의 욕심에 앞서 아직 아버지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고로 형이 동삼성을 통치하고 경영하는 것에 대하여 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쉐량은 비록 만번 죽더라도 천추에 오명을 남기는 명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에 궈쑹링은 다시 장문의 편지를 보내 회군을 멈출 순 없다는 뜻을 전했다. 결국 장쉐량은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어 28일 군함을 타고 다롄을 통해 봉천으로 돌아왔다. 양위팅도 29일 봉천으로 돌아왔고 장쭤린은 30일 궈쑹링 토벌령을 내렸다.

3.6. 장쭤린의 하야 소동


궈쑹린 휘하의 7만 군사들은 봉군 중에서도 최고 정예였기 때문에 초반부에 궈쑹링 군대는 매우 손쉽게 진군했다. 12월 5일 연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장쭤린은 그날 밤 바로 군정회의를 열어 궈쑹링의 요구대로 하야를 해야 겠다는 뜻을 밝혔다. 12월 6일, 봉천 대리성장 왕영강이 일본 총영사관으로 가서 요시다 시게루 총영사에게 1천명 정도의 경찰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니 일본군을 보내 봉천성 안의 치안유지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일본측은 이를 즉각 수락하여 12월 7일 수비대를 파견하여 각 기관과 성 대문에 보초를 서고 민간인으로 변복한 일본 경찰들이 성 안에 배치되었다.
12월 7일 궈쑹링이 금주를 함락시켰고 신민현의 강둑에 이르렀다. 봉천이 위험해지자 장쭤린은 장군부 문 앞에 다롄으로 가는 전용 자동차를 대기시키고 하루종일 수십개의 트럭을 동원하여 개인 재산을 일본 조계지로 이동시켜 도주할 준비를 하였다. 가용 가능한 주력부대 대부분이 궈쑹링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장쭤린으로서는 손 쓸 수가 없었다. 장쭤샹의 길림군으로는 부족했고 우쥔성의 흑룡강 부대는 너무 멀리 있어 제때 도착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병력이 북대영에 있는 왕서화의 1개 보충 여단이었는데 장쭤린은 왕서화가 궈쑹링의 편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급박하자 도박을 한번 하기로 결심하고 장군부에 왕서화 등 위관급 장교 110명을 호출하였다. 아침 8시, 장쭤린은 본관 건물 계단 위에서 모여 있는 장교들을 맞이했다.

"내가 너희들을 오라고 한 것은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잘 알 것이다. 궈씨 놈이 반역을 했다! 이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너희들 젊은 장교들은 모두 나를 따르라!"

이에 왕서화가 경례! 라고 외치면서 달려와 경례하며 보고했다.

왕서화:"상장군께 보고드립니다. 교도대 군관과 학생들 대부분은 가버렸고 남은 인원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장쭤린:"남은 놈들은 왜 안 간거야! 안에서 내통하려고 그러는 것 아니야?"

왕서화:"아닙니다! 아닙니다!"

장쭤린은 흥분하여 일장연설을 하였다.

"총과 대포를 내줄테니 용감히 싸우라! 내가 무기를 내주면 너희들은 궈씨 놈과 안팎에서 호응해 서로 잘 놀아도 나 장쭤린이 이곳을 떠난다면 내가 사내자식이 아니다! 나는 너희들이 궈씨 놈하고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서 궈씨 놈에게 알려 어서 이곳으로 오라고 해라. 내가 그놈을 기다릴 것이다. 내가 그놈하고 한번 겨루어 보겠다. 칼을 내 가슴 한복판에 꽂아 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 하는가! 모두 날 보고 마적 출신이라고 하는데, 제기랄! 내가 누구의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출세한 줄 아는가? 옛날에 나는 청조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후일 러일전쟁에서 외국 놈들이 날 이용했는데 내가 무기 좀 얻으려고 그놈들을 이용했다. 뺏기도 하고 편취도 했지만 모두 우리를 무장시키기 위함이었다. 후에 관하고 불화하면 큰일을 못하기 때문에 내가 청조 정부에 순순히 따랐다. 내 뒤에 배경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심양에 온 후 어떤 사람이 케케묵은 방식으로는 안된다고 해서 가움당을 만들었다. 내가 쉐량이를 보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땅을 지키라고 했다. 후에 궈씨 놈이 와서 강무당 교관 노릇을 했고 그 빌어먹을 놈이 군단장까지 되었다. 내가 뭐 그놈에게 잘못한 것이 있는가? 그놈은 자기가 공이 있음에도 자기 지지 기반을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고 있다. 내가 색시 혼숫감을 해 주듯이 하나하나 해 주어야 하는가! 나중에 자기가 한 지방을 책임지는 독군이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어디 의리도 없이 인면수심의 생각을 하여 양심에 털도 안난 짓거리를 한단 말인가! 좋아, 내가 이번에 심양을 그놈에게 넘겨줄테니 기다려 봐라. 왕서화! 너희들은 그놈을 도와서 오랫동안 잘해봐라!"

왕서화가 다시 경례를 붙이며 외쳤다.

"궈씨의 신임은 이미 떠나 버렸습니다. 저희들은 모두 상장군과 작은 장군님의 사람들입니다. 저희들 양심에도 피가 있으므로 우리에게 무기를 주면 인심을 잃은 반도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습니다."

장쭤린은 그제야 표정을 부드럽게 하면서 물었다.

"너희들 모두 할 수 있겠느냐?"

모든 장교들이 그렇다고 우렁차게 대답하자 장쭤린이 외쳤다.

"너희들은 모두 궈씨의 심복이 아니란 걸 알겠다. 왕서화! 내가 너를 혼성 여단장에 임명하고 소장으로 진급시킨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모두 한 계급씩 진급시킨다. 우리에게는 무기가 있고 은화도 많다. 곧 병사를 모집하면 숫자가 확 많아질 것이다. 밤낮으로 훈련을 시켜 전선으로 보내자! 좋아, 이제 모두 돌아가라!"


3.7. 일본의 개입


궈쑹링이 봉기하자 일본 제국에서는 자신들의 동북에서의 이익이 침해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11월 26일 자신의 참모 우라 수미에 중좌를 궈쑹링에게 보냈다. 궈쑹링은 아라키 대위, 키가 소좌 등을 배석시키고 우라와 만났다. 우라 중좌는 반봉에 대한 생각을 바꿀 것을 위협적으로 요구했지만 4시간 반 동안의 회의 끝에 궈쑹링의 생각을 전혀 바꿀 수 없었다. 결국 우라 중좌는 궈쑹링의 군사 행동에 대해 일본의 여러가지 방면의 경고가 있을지 모르니 이에 반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궈쑹링은 무력만능을 믿지 말라고 받아쳤다. 한편 중국에 대한 불간섭, 유화정책을 표방하던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은 궈쑹링의 봉기에 대해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12월 1일, 궈쑹링은 주중 일본공사 요시자와 켄키치에게 성명을 발표했다.
중일 양국에서 조약상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 이외 귀국의 개인과 동삼성 당국과의 경제 계약이나 혹은 우리 인민들과 공동으로 경영하는 합법적 사업에 대하여는 이전과 같이 계속 유효함을 승인한다. 귀국 인사가 동삼성 정부와 기관에 고문으로 초빙된 경우에는 계속 임용할 것이다. (...) 오로지 우리 군이 기의한 때부터 봉천으로 올때까지 동삼성 정부와 장씨 개인과 외국인이 맺은 일체의 계약은 모두 무효로 한다. 또 이번 의군의 행군에 있어서 만일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부득이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차관을 공급하거나 군 장비를 공급하여 상대방을 이롭게 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양국의 친선 관계를 해칠 수 있다.
이는 일본의 기존 이익을 옹호하겠지만 그 이후에 추가로 체결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궈쑹링은 12월 7일 금주를 점령한 후 외교처장 인루겅을 파견, 공산당을 반대하며 펑위샹과도 제휴하지 않고 그저 동삼성의 민주화와 중국군대 개혁을 바랄 뿐이란 입장을 전달하며 남만철로 통과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궈쑹링의 부관 조운비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은 궈쑹링에게 우라 중좌를 다시 파견하여 만약 일본과 장쭤린이 체결한 밀약을 승인한다면 장쭤린 하야를 압박하고 궈쑹링을 돕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각하께서 심양으로 들오게 된다면 먼저 대일본제국이 만몽에서 누리고 있는 특수 권리를 승인하셔야 합니다. 일본의 동삼성 투자에 대한 이익을 보호하고 장쭤린과 일본이 맺은 밀약을 준수하셔야 합니다. 장쭤린은 이미 밀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만일 각하께서 이 조건을 승인하시면 일본 제국은 각하 군대의 편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하지만 궈쑹링은 거절했다.

"이번 우리 군이 회군하는 것은 중국의 내정 문제입니다. 귀국의 간섭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이 일본의 특수 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에 일본은 장쭤린의 권좌를 유지하는 것이 일본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동삼성 교섭총서처장 나정환의 회고에 따르면, 시라카와가 파견한 참모장 사이토와 미우라가 장쭤린과 회담했다고 한다. 사이토가 관동군의 제안을 전달했다.

사이토:"현재 궈쑹링군의 선봉 부대는 금성을 지나 신민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만일 관동군의 도움을 요청하시면 우리는 모든 걸 사양하지 않고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장쭤린:"지금 성안이 허술해 이미 전보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군대를 불러 놓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당장 오기가 힘들어 그게 걱정입니다. 만일 곽의 군대가 성안으로 밀려들어오면 나는 잠시 뤼순으로 피해 있을 생각입니다. 관동군은 좋을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사이토:"각하께서 뤼순에 잠시 가신다면 저희로서도 매우 환영입니다. 지금 모든 걸 준비해 놓았으니 각하의 안전에 대하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일은 없으리라고 보지만 곽의 군대가 신민현을 공격해 들어오면 관동군은 조약 규정에 따라 그들에게 통지하려고 합니다. 즉, 중국 군대가 남만철로 부지에서 작전을 할 수 없습니다. 필요시 관동군은 출병하여 막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성내 진입은 불법입니다. 우리 관동군은 몇개의 요구 조항을 고려하고 있으니 만일 각하께서 괜찮다고 여기시면 서류 위에 서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이토가 타자기로 쳐서 전달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 1. 일본 신민은 동삼성과 내몽고 동부 지역에 상조권을 갖는다. 즉, 당 지역 주민들과 같이 거주와 상공업에 종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 2. 간도 지구 행정권을 양도한다.
  • 3. 길돈철로를 연장하고 도문 이동의 조선 철로와 연결한다.
  • 4. 조창도 소속 각 현에 일본 영사관 개설을 허가한다.
  • 5. 이상 4개항의 상세한 실시 방법과 이 밖의 사항은 일중외교기관이 공동으로 협의한다.
장쭤린은 이에 즉석에서 서명했다고 한다.
12월 7일, 일본의 가토 다카아키 수상,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 우가키 가즈시게 육상은 긴급회의를 열고 시라카와 사령관에게 장쭤린과 궈쑹링 양군에게 경고하며 관동군을 배치할 것을 지시했다. 12월 8일, 관동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궈쑹링에게 남만철도와 그 부속지에서 발생하는 전쟁을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으며 봉군이건 곽군이건 남만철도 12킬로미터 내에 접근할 수 없으며 접근한다면 일본군이 무장을 해제시킬 것이라고 위협했다.

"제국의 부속 토지는 물론 인근 부근에서의 전투 발생은 제국의 이익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군인의 직책상 당연히 좌시할 수 없다."

이는 표면상 장쭤린과 궈쑹링 양자에 대한 경고같지만 실제로는 위기에 처한 장쭤린에 대한 구원이었다. 12월 14일, 봉천을 점령하기 위해 마충성 여단이 영구를 공격하려 하자 일본군 수비대가 영구를 중립지대로 선포하고 마충성 여단의 진입을 저지하며 경고를 보냈다.

"곽군은 남만철로 부지 30킬로미터 이내로 들어올 수 없으며 요하 연변의 작전도 할 수 없다."

12월 15일, 일본의 내각 긴급회의는 동북 지역으로의 출병을 결정하였고 시라카와 사령관이 2차 경고를 보냈다.

"일본군은 남만철로 부속 토지의 기점에서 종점까지 20화리 이내에서의 직접적 전투 행위와 부속 토지 내에 치안을 문란시키는 일체의 군사적 행위를 금지한다."

또한 관동군은 대석교, 요양, 봉천, 무순, 철령, 개원, 장춘 등 14개의 만철선 중요 지점에 무장부대 진입금지라는 푯말을 내걸었으며 내지와 조선에 주둔한 2개 사단을 봉천에 투입하여 남만철로에 주둔한 병력을 4만명으로 증강시켰다. 궈쑹링은 일본의 개입에 대해 항의했다.

"비록 금지 구역을 설정해 놓았지만 만일 우리의 진입을 막는다면 일본군 역시 공격을 감행하겠다."

서산회의파도 일본이 만주에 개입할 자격이 없다고 항의하며 린썬쩌우루를 대표로 하여 일본 공사관에 일본의 출병에 대한 항의를 전달하고 사태를 원만히 해결해줄 것을 주문했다. 또한 궈쑹링에게 "만난을 극복하고 군벌세력을 위해 제거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줄 것"을 당부하는 격렬의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일본은 서산회의파 따위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구체적인 회답을 주지 않았다. 일본은 오히려 장쭤린에게 철도를 제공해 흑룡강과 길림의 장쭤린 부대를 수송해주었고 봉천에 참호를 파서 전투에 대비해주는가 하면 치안까지 책임져주었다.

3.8. 궈쑹링의 몰락


12월 20일 궈쑹링은 신민을 점령하고 만주의 원로들에게 통전을 보내 장쭤린을 교육을 파괴한 죄, 여론을 억압하고 자치를 파괴한 죄, 과도한 징병으로 농촌을 해친 죄, 용인이 공정치 못한 죄,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개인 축첩으로 민중에게 해를 끼친 죄를 성토하며 자신이 장쭤린을 단죄하고 새로운 동삼성을 구축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다음날인 12월 21일, 궈쑹링은 총공격을 명령했다. 일본의 방해로 곽군의 진격이 정체된 사이, 시간을 벌어 우쥔성의 흑룡강 부대를 받은 봉천군은 크게 증강되어 궈쑹링 부대의 2배가 넘었고 궈쑹링에게 없었던 우수한 기병대가 존재했다. 포병 전력은 궈쑹링이 우세하였으나 일본은 즉각 장쭤린의 포병 전력을 증강해주었다. 봉천군 포병사령부 참모장 료안방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궈쑹링의 반란으로 당시 봉천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포병 14단이 장쭤린 포병의 주력 부대가 되었다. 이 부대를 주축으로 전투를 하였고 또 포병 부대에 있던 포병 인원을 전부 끌어다가 사용했다. 대포는 마차에 실어 진지로 운반했으며 매 포분당 포탄 300발을 직브했다. 한번 쏘고 나서는 쉬게 했다. 동시에 장쭤린은 또 일본인 포병을 고용했다. 이때의 일본인은 약 200여명이었으며 장쭤린의 고문 아라키가 봉천 지역 내에서 찾아온 제대 군인들이었다. 일본군은 또 대량의 군 장비와 탄약 등 2개월이나 사용할 수 있는 양을 봉군에게 지원해주었다.
12월 23일 새벽, 우쥔성의 2개 기병 사단이 궈쑹링의 후방기지인 백기보를 습격하여 군량미, 군수물자, 탄약 등을 불태워버림으로 궈쑹링 부대는 큰 타격을 입었고 신민의 사령부가 점령당했다. 관동군이 장쭤린의 편에 선 것이 확실해지자 궈쑹링의 부대 내부에서 탈영, 배반자가 크게 늘었다. 배후를 지원해줘야 할 펑위샹 등도 자기들 내분에 투닥거리느라 도움이 전혀 안됐고 결국 궈쑹링 부대는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12월 24일 아침, 궈쑹링은 고급 장령회의를 긴급히 소집하여 일부 부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겠다고 선언했다. 제운에게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구방자로 철수하라고 지시했고 자신도 떠났다. 추작화가 본부 참모장과 동북 국민군 총사령부 명의로 각군에 공격 정지 명령을 내린 후 장쭤린에게 급전을 보내 궈쑹링이 달아났다고 알렸으며 장쉐량에게도 전화하여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패주하던 궈쑹링은 아내와 함께 체포되어 12월 25일 요하에서 처형되었다. 궈쑹링의 죽음에 대해서는, 궈쑹링 문서의 해당 단락 참조.

3.9. 곽군의 처리


패주하던 궈쑹링의 잔여 병력 대부분은 장쉐량이 장쭤샹과 논의한 후, 거류하에서 접수하였다. 난데없는 반란에 하야까지 고려해야 했던 장쭤린은 극도로 분노해 있었고 녹림파 우쥔성, 사관파 양위팅은 모두 궈쑹링에게 가담한 여단장들을 처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장쭤샹은 심양으로 가 자신이 궈쑹링의 잔여 병력과 장령들을 접수했으며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 것을 청했다. 장쭤샹과 함께 장군부 건물을 찾았던 제5방면군 군단 참모처장 왕지우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장쭤린을 만나러 들어가니 우쥔성, 장징후이, 양위팅, 왕영강 등이 앉아 있었다. 장쭤샹은 궈쑹링은 이미 죽었으니 기타 장령들은 일률적으로 용서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동북군 내부에 장기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모순의 영향으로 장쭤샹의 건의는 전체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는 두 시간동안 힘을 다해 변론했으나 공기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몇놈은 죽여야 한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장쭤샹은 울면서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먼저 죽이십시오. 다시는 이런 참극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어 분위기가 좀 누그러졌다. 참석자들은 이 문제를 장쉐량이 알아서 처리토록 하는게 좋겠다고 장쭤린에게 간청을 드렸다. 장쭤샹은 장쭤린의 성격을 잘 알므로 혹시 나중에 태도가 바뀔 것을 염려해 신민에 전화를 걸어 장쭤린이 직접 장쉐량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건의했다. 이렇게 하여 일이 매듭이 되었다. 오랫동안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실내 공기가 신선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휴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위, 유진동, 범포강 등 체포된 궈쑹링의 군장들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죽이겠다고 날뛰다가 참모장 우국한 등의 만류로 일단은 참았다. 이후 우쥔성은 체포된 군장들을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장쭤샹은 궈쑹링 부부 이외 한 사람도 죽이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장쭤린은 각 군장들을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후 장쭤린은 내부 결속을 위해 다시 한번 연극을 했는데 궈쑹링 토벌을 기념하는 연회를 연 다음에 일부러 부장 부관들로 하여금 연회 중에 궈쑹링 부대에서 내통한 문서들을 발견했다고 보고하게 한 것이다. 장쭤린은 짐짓 화가난 것처럼 마구 날뛰다가 궈쑹링은 이미 죽었으니 끝난 것이라면서 문서들을 태우라고 지시함으로 내부 결속을 강화했다.
마지막은 궈쑹링이 추대하겠다고 했던 장쉐량의 처리였다. 12월 29일, 장쭤린은 장군부 집무실에서 길림성 독판 장쭤샹, 흑룡강성 독판 우쥔성, 총참의 양우정, 봉천 대리성장 왕영강, 참모처장 우국한, 하얼빈 특구장관 장징후이, 비서장 원금개, 사단장 탕위린 등을 모아 3성 군정회의를 소집하여 처리를 논했다. 먼저 장쭤린은 하야 소동을 벌였다. 비서장 원금개가 내일 발표할 예정이라는 장쭤린의 하야 전문을 읽었다.

"나 장쭤린은 재주 없고 덕이 없어 전쟁의 화를 불러 일으켜 사직을 하고 정권을 인민에게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금후 동북의 행정은 왕영강 공에게, 군사 문제는 우쥔성 공에게 넘기고자 합니다. 중앙의 우수 인재들이 동북을 맡아 주실 것을 청합니다. 본인은 자리를 이양하고 물러나고자 합니다."

우쥔성이 손과 머리를 휘저으며 자신은 하루도 맡지 못한다고 즉각 거절했다. 왕영강도 일어나 거절했다.

"영강은 한 성의 정무를 맡기에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지금 오직 상장군께서 계셔 수시로 지시를 받기 때문에 나라를 잘못 다스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방금 오 독군이 군사를 책임지지 못한다고 했는데 저 또한 정치를 맡을 수 없습니다. 동북의 시국을 위해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예측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내우외환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상장군은 국가와 인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막중한 책무가 있습니다."

양위팅도 만류했다.

"강소와 안휘에서의 좌절과 실패로 전국을 소요케 한 반란을 불러왔으니 제가 재난의 장본인입니다. 군법에 따라 엄중히 처리해야 하지만 상장군의 관용을 받아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시었습니다. 전반적 대세를 보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현재 리징린은 이미 톈진에서 물러났고 펑위샹이 동부군을 지휘하고 있어 우리도 이에 맞서 빨리 곽군의 잔여부대를 수습하여 재편성해야 합니다. 요서의 요새를 봉쇄하고 강한 부대를 보내 직예-산동 연합군으로 펑위샹군을 격퇴하고 베이징과 텐진을 점령해야 북방이 안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위기 존망이 걸려 있는 이때 상장군이 물러나 쉰다는 것은 절대 말이 안됩니다. 동북의 형세가 이렇게 중대하고 어수선한데 상장군께서 어떻게 관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장쭤린은 못이기는 척 하야를 물리더니 갑자기 표정을 무섭게 하고 군정집법처 처장 창인화이(상음괴)를 불렀다. 창인화이가 오자 장쭤린이 소리를 쳤다.

"창인화이 처장! 너, 전용차를 타고 가서 쉐량이를 당장 나한테 잡아 가지고 와! 내가 직접 총살시킬 테니까! 네가 그놈을 놓치면 대신 네 목을 가져와야 한다!"

창인화이가 당황하여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나가려 하자 우쥔성이 손을 저으며 상장군에게 할말이 있으니 천천히 가라고 했다. 장쭤린이 우쥔성을 노려보며 무슨 할말이 있냐고 묻자 이 모든 것이 아들을 살리려는 연극임을 간파한 우쥔성은 과거는 몰라도 이제는 장쉐량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이라고 변명했다.

"장 군단장이 없다면 누가 가서 흩어진 곽군의 군대를 달래겠습니까? 흩어진 병사들을 보면 위익삼 부대만 하더라도 2만명이나 지금 산해관에서 버티고 있는데 만약 풍군에 붙어 버린다면 궈씨의 힘보다도 몇배는 커질 것입니다. 쳐부순다 해도 봉천군으로는 벅찹니다. 그래서 곽군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누가 가도 안될겁니다., 제가 감히 갈 수도 없고 상장군 역시 안됩니다. 장쉐량 장군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가 손을 한번 들어주면 모든 사람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장쉐량 군단장이 다시 한번 앞으로 나가야 텐진, 베이징이 우리 수중에 들어고고 그래야 제가 상장군을 베이징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당시 산해관에 잔류한 위익삼의 부대는 신민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병력손실을 전혀 입지 않은 상태였고 펑위샹과 장쉐량이 서로 자신에게 합류하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장쭤린은 폭발한 것처럼 마구 소리를 쳐댔다.

"당신, 입 닥치시오! 나, 장씨는 말이오 여태까지 일을 공평하게 처리해 왔고 상벌을 분명히 해왔소. 내가 길렀다고 모두 잘 대해 준 것은 아니오. 쉐량이 이놈이 궈씨 놈하고 한패가 되어 얼마나 손해를 끼쳤소! 그놈의 자식들이 강무당하고 교도대 만든다고 수백만원의 은화를 써버리고 교과 노릇 한단다고 더럽게도 거들먹거린 이 개자식들! 왕영청이 사단 병력 몰고 가서 아직도 방향을 못 잡고 헤매고 있는 그 망할 자식을 까버리고 오도록 하시오! 궈씨 놈과 쉐량이는 길림, 흑룡강성 군대를 업신여겼는데 왕영청이 가서 이놈들을 까부수라고! 나 장쭤린은 여태까지 공평하게 사람을 써왔소. 리징린, 장계곤, 허란주 이 사람들은 모두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야. 나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던 사람이란 말이오. 또 우효후는 우페이푸의 외손자인데 내가 우페이푸와 원수가 되어 싸운게 여러 해 되지만 내가 그놈 외손자를 중용하고 있잖아! 궈씨 이놈이 처음 심양에 있을 때 보따리르 끌러 보니 달랑 숟가락 2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 쉐량이가 그놈이 인재라고 말하고 어떤 시련에도 잘 견딜 놈이라고 해서 내가 2000원의 은화를 그놈에게 주고 또 집까지 마련해 주었소. 그때 그놈이 감격해서 그놈 어미가 우리 마누라를 찾아오기도 했소. 그놈은 자기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공이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오. 탕위린과 나는 같은 배를 타고 생사를 넘나들고 있어 궈씨 놈도 그러려니 했는데, 쉐량이가 그놈 편이 되어 궈씨 놈한테 당나라 이세민의 청군측이란 못된 걸 배웠지 뭔가. 내가 만일 쉐량이를 직접 죽이지 못하면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미안할 일이지. 창인화이! 너, 내 명령을 집행하지 않고 서 있으니 내가 너부터 쏴 죽이겠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소리를 지르는 듯 했지만 실은 자신과 봉천군벌의 원로세력인 녹림파를 추켜올리는 말들이었다. 총참의 양위팅도 눈치를 채고 장쭤린을 말렸다.

"상장군, 노여움을 푸십시오. 오 독군 말이 맞습니다. 이 형세를 풀기 위하여 장 군단장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또다시 그에게 전군 통솔 지휘권을 주어야 형세가 전환됩니다. 장 군단장이 아니면 불가합니다. 장 군단장이 반란에 가담했다지만 사실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군단장 한 사람에게만 죄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왕영강도 끼어들었다.

"근래에 상장군께서 너무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국가를 위해 몸을 보중하셔야겠습니다. 곧 휴회하기를 건의드리겠습니다."

이에 장쭤샹과 우쥔성이 부축하여 장쭤린과 함께 퇴장하였고 장쭤린은 장쉐량의 모든 직위를 해임하고 조사받게 하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아들을 죽이겠다는 장쭤린의 연기는 그날로 끝이었다.

4. 결말


궈쑹링의 반란을 진압한 장쭤린은 의기양양하게 다시 북경을 점령하고 공세적 태도로 전환했으나 관동군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한 것 때문에 장쭤린은 친일매국군벌이란 이미지가 매우 고착화되고 말았으며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장제스남방에서 진격해오자 북양군벌들을 규합하여 맞섰으나 결국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고 본인도 관동군의 음모로 황고둔 사건에서 암살당하고 만다. 이 반봉사건은 장쭤린의 무리한 관내 진출과 더불어 봉천 군벌의 경제를 붕괴시키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고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만만해보이는 소련을 건드려 중동로 사건을 일으키나 바실리 블류헤르가 지휘하는 소련군에게 개패듯이 두들겨맞고 몰락하고 뒤이어 만주사변까지 맞게 되면서 봉천군벌의 멸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후 궈쑹링이 거느렸던 정예부대는 그대로 장쉐량이 흡수하여 권력기반으로 삼았다. 이들은 궈쑹링이 키웠던 부대였기 때문에 장씨 가문에 대한 충성과 궈쑹링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존재였다. 이후 만주로 달아나던 장쭤린이 황고둔 사건으로 폭살당하고 장쉐량 정권이 들어서자 궈쑹링의 부하들은 장쉐량을 도와 궈쑹링의 원수인 양위팅 등을 몰락시키는데 일조했고 동북군벌의 주도파가 되지만 그들도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면서 같이 쓸려나가게 되고 만주 구파가 일본의 주구가 되어 만주국을 세우게 된다.
궈쑹링의 외교처장인 인루겅은 후에 한간으로 변절하여 기동사변 등 일본의 중국 침략에 협조하였고 중일전쟁 종결 이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궈쑹링의 심복 성스차이는 일본으로 도주하였고 이후 장제스에게 붙어 국민혁명군에 합류하였으며 다시 신강성의 지배자로 등극한다.

5.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郭松齡의 '反奉事件', 송한용, 역사학연구 19권, 호남사학회.
  • 국민혁명 초기 국민당 우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김영신, 동양학 49권 49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학량정권연구(1928~1931), 송한용 박사학위 논문.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1] 꾀병이라 보는 경우도 있는데 궈쑹링이 지병 때문에 일본에서 앓던 것도 그렇고 실제로 아프긴 했었다.[2] 부임하자 않아 인루겅과 제세영이 대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