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창

 

1. 장창(長槍)
2. 한국사의 장창
3. 후한 말의 서예가이자 위나라의 인물 張昶
4. 후한 말의 인물 張敞
4.1. 창작물에서
5. 삼국시대의 인물 張暢
6. 초한쟁패기 ~ 전한의 인물 張蒼


1. 장창(長槍)


말 그대로 긴 을 말한다. 파이크 참고.[1]

1.1. 던전앤파이터의 무기


던전 앤 파이터/아이템/장창 문서 참조

2. 한국사의 장창





무예도보통지 1권 가장 처음에 나오는 무예가 장창을 다루고 있으며, 창법에서 가장 기초적인 모습을 다루고 있다.
『병장기(兵仗紀)』에 이르기를,
'장창을 쓰는 법은 양씨(楊氏) 홀로 정통하였다. 말하기를 배꽃이 변환을 헤아릴 수 없이 하는 것처럼 그 길은 묘리를 터득한 자가 드물었다. 지금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가창, 마가창, 김가창, 장비신창, 오현신창, 괴돌창(拐突槍), 괴도창, 아미창, 월창, 지설창이 있다. 보병이 쓰기에 마땅한 것은 소목창, 약주창, 아경창, 태녕필창 등이 그런 류이다.'
왕명학(王鳴鶴)이 이르기를,
'장창은 쓰는 법이 양씨(楊氏)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른바 이화창(梨花槍)이라 하여 천하에 모두 숭상하였다.'
라고 하여 양가창법이 곧 장창이라는 의견이 있으며 반대로 그냥 개인 병기나 가전 무술로써 긴 창을 사용했어도 어쨌든 장창이니 무예도보통지처럼 군사무예로서 1장 5척이라는 긴 길이의 창을 사용하는 장창법과는 다르다는 의견도 있다.
길이는 1장 5척 창 자루는 주목이 제일이라고 척계광(戚繼光)의 말을 인용하면서 당시 중국식과의 차이점을 밝히고 있다. 즉, '오늘날 창끝에 혈조(血槽)가 있다. 창날 아랫부분에 작은 석반을 대고 창자루 아래에 준이 있다.'라고 하여 훨씬 발전한 장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장창은 조선무예는 아니며 중국에서 가져온 무예로 기효신서에도 나오는 무기로 길이로 적을 제압하는 창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다. 본래 12세였으나 훈국랑 한교가 12세를 복원해서 24세를 완성해 무예도보통지에는 장창 전보, 장창 후보라고 해서 전하는데 후보가 바로 한교가 복원한 12세이다. [2]
기예로서의 장창법은 전보와 후보로 나뉘어서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오는 장창법 24세 중 명 진영에서 조차 12세만 전해져 온 것을 한교(韓嶠)가 창조 개발한 것이다. 즉 기효신서에 나오는 장창법 24세를 새로 구성하고 조선인의 체격과 정서에 맞게 창조하였거나 혹은 전래의 장창법을 체계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18기 협회에서는 짧은 창을 들고 휙휙 휘두르는 개인의 기예로서의 창법을 보여주지만 무예 24기 협회는 척도를 고려해 정말로 긴 창을 들고 시연을 하는데 원체 그쪽은 진법에 신경을 쓰며 단체시연을 주로 하다 보니 뽀대도 나고 또 원앙진 등에 실제로 적용시키며 복원한 장창법이기에 나름대로 괜찮다는 평이 많다.
그런데 요즘 장창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의견이 조금씩 나오고 있는데, 장창이 순수한 양가창법이 아니라, 조선 전기의 갑을창법의 보병용 창술 보창세와 수입해온 양가창법을 혼합해서 사용한 짬뽕 무술이라는 의견이 종종 튀어나오고 있다. 물론,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불명.

3. 후한 말의 서예가이자 위나라의 인물 張昶


(? ~ 206)
후한 말의 서예가이자 위나라의 인물로 자는 문서(文舒). 장환의 아들이자 장지, 장맹의 동생.
회음 사람으로 장초를 잘 써 그 당시에 형 장지와 서로 비슷해 아성(亞聖)이라 불렸으며, 급사 황문시랑을 지냈다.
유송의 양흔은 채고래능서인명이라는 책에서 당지 장지의 서예 작품이라고 불렀던 것들은 대부분 장창이 썼다고 해 그 평가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장회관은 서단에서 역대 서예가를 신품, 묘품, 능품 등 세 등급으로 분류했는데, 그의 장초, 팔분, 초서 등은 형태를 정교하고 개성 넘치게 그려내는 기법이 뛰어난 것이라고 한 묘품에 분류했지만 예서는 사뮬의 형태를 꼭 빼닮게 해 틀림없이 그려냈다고 하는 능품에 나열했다.
장회관이 장지와 유사하지만 근골이나 자연스러운 자태는 따라가지 못했는데, 화려하고 착실한 미가 있다면 장지를 계승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당나라의 이사진도 장창의 글씨는 부드럽지만 골력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위관의 아들로 서예가인 위항은 장창에 대해 장지의 제자는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평가를 했으며, 그의 작품으로는 화악묘비 등이 있다.
화악묘비에 205년에 글씨를 적어 그 뒷면에는 종요가 관문 동쪽을 진압하고 이 비 뒷면에 글씨를 이르기를 한나라 급사 황문시랑 회음 장부군 창은 자가 문서로 이 비문을 세웠다고 기록했으며, 비 머리에는 당시 사예교위 시중 동무정후 영천 종요 자는 원상을 쓰다라고 기록했다.

4. 후한 말의 인물 張敞


생몰년도 미상
공손강의 수하의 인물.
한(漢)나라에서 영제 때 한(韓), 예가 강성해 한나라의 군현이 이를 통제하지 못하면서 군현의 백성들이 다수 한으로 유입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조조가 원소를 제압하고 화북을 통일한 상황에서 건안 연간[3]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거친 땅을 분할해 대방군을 세우면서 공손모와 함께 유민들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 한, 예 등을 공격해 한으로 유입되었던 백성들을 한으로부터 떠나게 했고 왜, 한 등을 대방에 복속되도록 만들었다.

4.1. 창작물에서


진삼국무쌍6에서는 공손연의 난에서 등장해 공손연군의 북서쪽 본진에 해당하는 양평성 내부에 있는 양평서내성에서 공손연과 함께 위치하고 있다.
진삼국무쌍7에서는 양평의 전투에서 등장해 북서쪽에 있는 양평성에서 왕건과 함께 위치하고 있다.
삼국지 한말패업에서 관도대전 시나리오에서 삼고초려 시나리오 까지 공손도,공손강 진영으로 나온다

5. 삼국시대의 인물 張暢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의 인물. 자는 위백(威伯).
오군 사람으로 오나라에서 벼슬을 지냈는 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낙양에서 오나라 사람들에 대해 채홍이 큰 붓을 호미와 쟁기, 종이와 죽간으로 비옥한 밭, 심오한 묵상을 경작, 예의를 풍년으로 삼는다고 했으며, 사마염이 오 땅의 명사에 대해 물었다. 채홍은 그 때 다급한 터라 대답하지 못해 오나라 땅의 명사들의 이름과 행장을 열거하라는 칙명을 내렸기에 물러나 생각해서 알고 있는 바를 적어 주준에게 편지를 적어보냈다.
편지를 통해 채홍이 오전, 주탄, 엄은, 고영, 육기, 육운 등과 함께 장창을 천거했으며, 채홍이 장창에 대해 타고난 품성이 강인하고 총명하면서 뜻과 행동이 맑아 혼란한 가운데에 있으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아 추운 겨울에도 무성한 소나무이자 어두운 밤에도 빛나는 빛이라고 평가했다.

6. 초한쟁패기 ~ 전한의 인물 張蒼




(? ~ 기원전 152년)
본래는 진나라에서 문서를 담당하는 관리, 어사였다가 죄를 짓고 도주했다. 이후 유방의 군대에 합류하였는데, 유방이 남양을 공격하러 갈때 객으로 종군했가 무슨 죄를 지어 허리를 베는 형벌인 요참형에 쳐해질 위기에 처했는데, 왕릉이 구명해주어 목숨을 건진다. 그 이유라는게 '피부가 살지고 뽀얗기가 박속과 같았다.'라는 매우 예뻐서라는(...)게 약간 황당하지만. 요참형은 원래 공개집행에 수형자의 옷을 모두 벗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함양 공격에도 참여하고 정형 전투에 참가해 무공을 세우는 등, 유방군의 2군으로서 활약하고, 초한쟁패기가 끝난 뒤에는 진나라 시절 익힌 관료능력과 초한쟁패기 기간동안 군 경험을 살려 변경의 수비나 중앙의 행정에서 능력을 발휘. 상국 소하는 장창을 상국부에 상구시켜 회계 보고를 주관하게 하였고 여후가 사망하자 한문제 유항을 황제로 옹립한다. 승상의 자리까지 올라 자신을 살려준 왕릉보다도 더 출세했지만 장창은 언제나 왕릉을 아버지처럼 모시고, 휴일에는 언제나 왕릉의 집에 문안을 올렸다고 한다.
이후 승상 관영이 사망한 뒤를 이어 한문제때는 승상에 올라 여러 물건이나 음악, 음률의 표준 규격을 정하거나 역법을 정리했다. 장창은 이후 춘추좌씨전을 전수하였으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산술서인 구장산술의 기초를 닦기도 하였다.

7. 대한민국여자축구 선수


해당 항목

[1] 다만 파이크가 장창 그 자체는 아니다.[2] 이런 면에서 보면 이미 그 시대부터 무예의 복원이라는 것이 존재.../ 조선은 오랜 평화+정부 통제로 무술의 맥이 약해져 있었다. 개개인으로서는 평화로우니 무술을 배울 필요가 없고, 정부로서는 그런 상황에서 굳이 칼질 배우려는 인간들은 반란분자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터지며 무술서 등도 화르륵 타올랐다. 익힌 사람도 없는데 기록도 없어지니 무술 자체가 삭제된 상황이라 중국에서 몰래 가져온게 기효신서다. [3] 196 ~ 220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