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전한)
王陵
? ~ 기원전 180년
1. 개요
한나라의 개국공신. 공신서열 12위. 안국후(安國侯)에 봉해져 5천 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2. 생애
유방과 같은 패현 사람으로 원래 그 현에서 유명한 건달이었는데, 유방 역시 젊은 시절 건달로 살아갈 때 왕릉을 형님처럼 모셨다고 한다. 패현 저잣거리를 한주름 잡고 있던 유방의 위세도 왕릉에 비할 수가 없었는데, 결코 보통 인물이 아닌 셈이다. 소문난 효심과 협객기질도 왕성해서 그를 형님처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유방이 거병하여 패공이 된 후 관중으로 진격하여 함양에 도착할 무렵, 독자적으로 수천의 무리를 모아서 남양에서 봉기해 나름대로 세력을 형성했다. 이 무렵에는 유방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으나[1] 한왕이 된 후 촉에 있다가 항우를 공격할 무렵 군사를 유방의 한나라에 예속시켰다.
이 때 항우는 왕릉의 어머니를 잡아다가 군중에 두고는 왕릉의 사자가 도착하자 왕릉의 어머니를 후대하면서 왕릉을 초나라로 귀순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2] 는 비밀리에 심부름꾼을 아들에게 보내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어머니는 칼을 뽑아 목숨을 끊고 말았다. 삼국지연의의 서서의 일화가 떠오르는 대목. 이를 알고 대노한 항우는 왕릉 어머니의 시체를 가마솥에 삶아버렸다. 효자였던 왕릉은 매우 분노하여 결국 항우에게 가지 않고 유방 휘하에서 장군으로 각지에서 활약, 마침내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3]"이 늙은이를 위해 왕릉에게 한왕을 잘 섬기라고 전해주시오. 한왕은 훌륭한 어른이시니 이 늙은이 때문에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오. 이 늙은 아낙네가 죽음으로써 당신을 전송하리다."
왕릉은 옹치라는 사람과 사이가 좋았는데 이 옹치라는 사람은 뒷날 유방에게 제후직을 받기는 하지만, 이전에 유방을 배신한 경력이 있어서 유방은 옹치를 대단히 싫어했다.[4] 이런 이유도 있고 본래 왕릉도 유방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공신들보다 봉지를 늦게 받아 안국후의 작위도 늦게 받았다고 한다.
유방이 죽을 때 '왕릉은 우직하다'는 평가를 남겼을 정도로 강직하고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 성품이었다. 임협 출신이라는 점이 이런데서 잘 드러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서한삼걸의 일화 때 유방을 칭송하면서도 굳이 "폐하께서는 오만무례하십니다"라는 안해도 상관없을 말을 덧붙인데서 잘 엿볼 수 있다. 유방 사후 여후가 집권했을 무렵 상국 조참이 죽자 우승상이 되어 좌승상 진평, 다른 개국공신 주발과 함께 국정을 이끌었다. 왕릉이 우승상이 된 지 2년 뒤에 혜제가 죽자 여후는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어 여씨 일족을 제후국 왕으로 삼고자 하여 우승상 왕릉을 불러 이게 되는 일이냐고 물었더니 왕릉은 강직한 성품답게 "안 됩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진평과 주발에게 물으니 이들은 된다고 했다. 어이가 없어진 왕릉이 진평과 주발에게 "예전에 선제와 함께 백마의 피를 마시며 맹세했을때 공들은 그 자리에 없었소? 이제 선제께서 붕어하시고 태후가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 하는데 공들은 태후에게 아부하며 맹세를 배반하니, 무슨 낯으로 지하에 계신 선제를 뵈려 하시오?"라고 따지자 이에 대한 진평의 답변이 유명하다.
이 답변을 들은 왕릉은 더 할 말을 잊었다. 이 직후 왕릉은 여후에 의해 태부가 되었지만, 태부 자리는 실권이 없는 명예직으로 이는 승진을 가장한 좌천과 다름없는 조치였다. 이에 화가 난 왕릉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낙향하여 다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고 7년간 칩거해 있다가 기원전 180년에 사망했다. 웃기게도 그렇게 싫어한 여씨들과 같은 해에 사이좋게 죽었다. 그의 작위는 아들 왕기가 이었고 현손 때까지 이어지다가 주금(酎金) 문제로 봉국을 박탈당해서 후 작위는 끊어졌다."지금 조정에서 질책하고 간언하는 것은 우리가 우승상만 못하오. 하지만 사직을 보호하고 유씨의 후손을 안정시키는 것은 우승상께서 우리만 못하실거요."
어쨌든 그 치열했던 초한전쟁 시기에 항우에 맞서 선두에 섰으면서도 무사히 살아남았고, 유방과 처음에는 다소 껄끄러운 면이 있었음에도 한나라의 우승상까지 올라갔으며, 험악한 여태후 시절에도 관직에서는 물러났으나 목숨을 보존해서 유방과 여후보다 더 오래 살긴 했았으니(본래 유방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15년을 더 살았다. 고대 사회라는걸 감안하면 꽤 장수한 편이다)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이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3. 미디어 믹스
3.1. 초한전기
초한지에서는 번쾌, 관영 등과 함께 한의 맹장 중 한 명으로 등장하며 지략도 어느 정도 겸비한 인물로 묘사된다. 특히 한신이 조나라, 연나라, 제나라를 점거하기 위해 북벌을 갔을 무렵 한신을 대신해서 계략을 써 항우를 엿먹이기도 한다. 또한 실제와는 달리 유태공을 비롯한 유방의 가족들을 패현에서 구출하는 공[5] 을 세우고, 형양성이 포위되었을 때 직접 야습을 해서 항우를 죽일 뻔 하다가 후퇴한 적도 있었다. 위에 언급한 어머니의 일화도 좀더 극적으로 각색해서 왕릉이 매우 지극한 효자라서 유방 가족을 구출 할 때 바로 근처에 있던 자신의 어머니를 미처 데려오지 못해 결국 초나라군이 어머니를 납치해 가서 남몰래 가슴앓이하는 묘사가 나온다.
3.2. 고우영 초한지
국태공의 구출작전에 한신에게 계책을 내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무술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나와, 야습 때에 항우와 몇 합을 겨루고 바로 그 항우로부터 '저만한 검술을 가진 이는 처음 본다' 라는 고평가를 받는다.
[1] 친분은 여전히 유지되었는지 패공 시절의 유방이 양무를 공격하던 중 장창이라는 사람이 죄를 지어 죽게 되었는데, 죽이려고 벗겨놓고 보니 몸은 장대한데 피부가 매우 예쁜 것에 감탄한 왕릉의 부탁으로 목숨을 건졌다. 장창은 나중에는 왕릉과 같은 승상까지 출세하지만 언제나 왕릉을 아버지 모시듯 했다고 한다.[2] 왕릉이 유방과 동향 친구 사이이니 그의 어머니와도 오랫동안 안식이 있는 사이였을 가능성이 높다.[3] 반대로 서서는 조조에 꾀임에 넘어가 어머니가 자살하고 그 보복으로 조조에 대해 간언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건 연의의 창작이다.[4] 유방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지던 장수들이 많았는데, 유방이 옹치에게 상을 내리자 모두가 불평을 멈추고 가만히 기다렸다. 저런 놈도 상을 받는데 당연히 우리들도 기다리다 보면 받겠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인 것이다.[5] 왕릉 혼자만의 공은 아니고 본래 호형호제하던 민병대 형제의 지원을 받았다. 이 형제들은 왕릉과 함께 탈출하다가 종리말과 영포가 이끄는 초군에게 뒤를 밟히자 왕릉과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초군과 싸우다 전원 전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