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무기)
槍, Spear, やり
1. 개요
길다란 장대 끝에 뾰족한 끝이 있어, 휘두르고 찌르고 던지는 게 가능한 병기. 보통 길이에 따라서 단창, 장창으로 구분한다. 베는 무기는 아니다.
동양에서는 일반적인 단창이나 장창 이외에 당파와 낭선 등이 쓰였으며 그 외에 서구에는 장창 이상으로 길이를 늘린 파이크나 사리사, 기병돌격에 최적화된 랜스가 있다. 그 외에 던지는 용도로 제작한 투창이 있다.
2. 상세
창은 인류가 역사 초창기부터 사냥용으로 쓴 유서깊은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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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총을 든 후부터 대형 포유류를 멸종시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에 따르면 인간은 수십~수만 년 전부터 가는 곳곳마다 대형 포유류를 족족 멸종시켜 왔다. 위의 그림처럼, 현존 아프리카 코끼리보다 훨씬 거대한 매머드조차 인간 앞에서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어야 했다. 그 원동력이 창이다. 인간이 확실하게 '''먹이사슬 최정상'''에 올라선 시점은 창을 쓴 후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은 길이가 1~2m(또는 그 이상)인데, 이 거리가 인간에게는 매우 확실한 안전을 보장하고, 동물들 대부분에게는 (심지어 호랑이, 사자 같은 최상위권 맹수들조차) 극복할 수 없는 거리이다.[1] 매머드 외에도 바이슨, 아메리카 마스토돈, 땅늘보등 신체스펙이 아주 특별한 극소수 케이스는 예외일 수 있겠지만, 인간이 그 창을 집어 던지기 시작하면 똑같은 신세가 된다. 또 창은 운동에너지의 '''효율성'''도 뛰어나서, 잘 만든 창에 적당한 힘과 기술이 실리면 베는 무기나 두들겨 패는 무기에 비해 훨씬 확실하게, 하마 같이 무식한 피부와 근육도 한 방에 뚫어 버릴 수 있다. 거기에 두 사람 이상 '''조직력'''이 더해지니 동물에게는 정말로 답이 없는 것이다. 하마, 아프리카물소 등 초대형 야생동물은 물론, 사자의 먹잇감인 타조와 누조차 인간의 집단 투창 짤짤이를 버티지 못하고 과다출혈과 쇼크로 쓰러진다.
투석, 돌도끼 등 온갖 무기를 집어들고 덤벼드는 인간에게 밀리던 동물들은 창의 등장으로 인해 확실히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인간 자체가 의외로 신체적 스펙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인간도 스스로 잘 모르는 능력이지만, 수십km 이상을 계속하여 뛰거나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지구력과 무언가를 집어 던질 수 있는 힘만큼은 인간이 모든 동물을 통틀어 가장 우수한 편이다. 물론 운동부족에 시달리기 일쑤인 현대인 대부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어차피 천부적으로 타고난 스펙이라 훈련하고 단련하면 충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창이 준 또 다른 의의는, 사냥과 전투에서 개인 무력에 의존하는 비중이 매우 줄어 들었다는 점. 현장까지 쫓아올 수만 있다면, 그리고 조직력을 갖추면 전술(진형), 다양한 작전(치고빠지기나 유인, 함정 등)으로 개개인에게 특별한 무력이 없어도, 헤라클레스나 척준경 같은 영웅호걸이 없어도 맹수들을 언제든 사냥할 수 있게 됐다.
사용법을 익히기 쉽고, 공급이 용이해서 세계 어디에서나 인간은 창을 수렵과 전투무기로 사용했다. 다만 대양에 의해 고립되어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는 부메랑을 먼저 개발했기에 석창을 수렵, 전투용 병기로 사용한 시점이 상당히 늦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사냥꾼이 창을 가지고 다녔고, 보어스피어 같이 서양에도 사냥창이 있었다.
고려나 조선에서는 호환이 발생하면 관청에서는 사냥꾼들을 모집하여 퇴치하였다. 이때 호랑이 사냥꾼들은 활이나 조총 몇 발로 타격을 준 후 계속 추적하여, 마지막에는 창으로 직접 찔러 쓰러 뜨리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2]
이후 싸움 규모가 부족 단위를 넘어 국가 단위 전쟁으로 커져가면서, 창은 수렵도구보다는 '''전쟁무기'''로 쓰인다. 칼에 비해 제작비가 저렴하며 대량생산이 쉽고[3] , 진형짜는 법, 찌르는 법만 집중적으로 훈련해도 (개인전이 아닌) 전쟁터에서 제구실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훈련기간[4] 과 병력확보에 어떤 무기보다 수월했다. 그래서 조선의 '검계' 등 고대~중세의 깡패집단들이 칼은 흔히 가지고 다녔지만, 창을 들고 다닌 경우는 드물었다. 은닉성/휴대성 문제도 있지만, 창을 들고 무리지어 다니면 깡패가 아닌 '''반란'''을 꾀하는 집단으로 보여 관군 등 공권력에 몰살당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창은 '전쟁'을 뜻하는 도구로서, 수호지에서도 집집마다 창을 마당에 꽂아놓은 마을에 이방인으로 들른 양산박 단원이 "마을에 곧 전쟁이 있을 예정인가요?"라고 묻고 마을사람이 그렇다고 답하는 대목이 나온다.
창대 창의 거리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점점 길어지다 사리사와 같은 장창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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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과 폴암의 예시.
창은 기본적으로 끝부분에 있는 창날로 찌르는 무기이다. 그러나 창의 자루 부분을 타격 병기로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며 제대로 타격했을 때의 위력도 생각보다 뛰어나다. 쇳덩이가 달린 막대기를 전력으로 휘두르면 타격무기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중국에서는 봉술과 창술의 발달이 상호보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장창병들이 일제히 창을 들어올렸다가 내리치면서 그 타격으로 상대편 진형에 피해를 주는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창은 본질적으로 '찌르는' 병기이기에, 기본적으로 근접거리 교전에 있어 다른 무기에 비해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상대방이 달라 붙어 버릴 경우 찌르기는 불가능하고, 타격을 하려고 해도 원심력을 살리기 쉽지 않아 위력이 급감한다. 특히 길이를 최대한 늘린 장창의 경우 검과 같은 단병을 사용하는 상대에게 매우 취약했다. 때문에 막무가내 징집병이 아닌 제대로 된 부대의 장창병들은 언제나 다른 병종들과 함께 상호보완적으로 운영되었다.
물론 이는 1:1 내지는 소수 대 소수의 대결에서 그렇다는 이야기이며, 100대 100, 1000대 1000 이상의 집단전으로 들어 갈수록 창, 특히 무식할 정도로 긴 창의 위력은 어마어마하게 올라간다. 사리사 항목 참조. 창이 '''만병지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건 이렇듯 집단전에 극도로 특화된 특성 때문이다.
참고로 총안법에서 창은 도검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일부 폴암도 마찬가지. 사실 형법 등에서는 도검류에 무기가 될만한 날붙이 전반을 집어넣는다.
여담이지만,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에서는 사람을 공격한 인도호랑이가 주민 10여 명이 휘두른 막대기에 맞아 죽은(...) 일이 발생했다. 창 등 간격있는 무기를 집어든 인간 집단이 얼마나 막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3. 다른 무기와의 비교
창은 일반적으로 검보다 제작단가가 싸고 제작하기가 매우 쉽다. 굳이 금속이 아니어도 적당한 길이의 날카로운 무언가만 충족되면 되며 그것만으로 충분한 살상효과를 가질 수 있다. 일례로 죽창과 같이 대나무를 끝부분만 뾰족하게 자르더라도 매우 위험한 흉기가 된다. 조금 더 공을 들여 주변의 뾰족한 돌을 막대기의 끝에 줄로 묶기만 해도 완성된다. 또한 금속으로 만들더라도 창날에만 철을 투자하면 되는 탓에 중요한 자원인 철을 아낄 수 있었다.
다만 민간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검과 창을 비교했을 때, 검은 검집만 허벅지에 매달아 두면 운신에 불편함 없는 은닉과 휴대 용이성이 있었다. 따라서 배우기만 하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사용이 가능했지만, 창의 경우 휴대하려면 창을 들고 다니거나 등 뒤에 매야 함으로 휴대성에 악영향이 있었으며, 휴대한다 하더라도 필요할 때 거창하는 속도가 칼이나 곤봉에 비해 느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민간에서 창술은 일본의 고류무술쪽을 제외하면 전승되기 어려웠다. 단 단창을 이용한 창술은 사용법이 유사한 스몰소드에서 영향을 받아 발달할 수 있었고, 따라서 스몰소드 검법에서 발달하거나, 창과 특성이 유사한 봉술로 이어졌다. 창을 들고 다니면 역적이라는 말은 무협소설에서 쓰이던 문학적 창작이며, 중국을 지배하는 유목민족들은 한족이 무기를 든 것을 규제했지, 딱히 종류를 가리지는 않았다. 물론 이게 완벽하게 시행되진 않았다. 한족이 지배하는 시기나 조선에서도 무술을 닦는 것 자체를 규제하거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빌미로 썼을 뿐, 무기 종류를 딱히 따지지는 않았다. 즉 누군가가 사람들 불러모아서 무술과 신체단련을 하는 등, 군사훈련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숙청을 위한 빌미로 삼거나 반체제행동으로 규제를 했지,[5] 딱히 무기 자체를 규제하지는 않았다. 당장 조선시대 때만 하더라도 사냥꾼은 창을 가지고 다녔다.
검병 같은 경우 창병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6] 거의 모든 방면에서 대응할 수 있는 유동성이 있었지만, 이러한 장비를 제대로 다루려면 전문적인 훈련과정을 통한 숙련이 필요하여 병사 하나당 유지비가 매우 비쌌다.
거기다 숙련도를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훈련과 충분한 방호를 위한 장비의 보급에 들어가는 재정상의 문제로 로마의 레기온이나 에스파냐의 로델레로들이, 그리고 조선의 팽배수 등의 검병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정예군으로 취급되었다.
반면 창은 높은 숙련도를 필요로 하는 검병들과 다르게, 위급할 때 농민을 징집하여 장창을 쥐어주고 훈련 몇 번을 끝으로 줄을 세운 뒤 탈영을 막기 위해 독전관을 세우고 방벽으로 세우기만 하면, 다른 병종들이 제 일을 해준다는 전제 아래에서 효율이 꽤 높다. 더군다나 유럽은 용병들을 제외하면 소속감도 충성도도 없는 징집병들이 전쟁의 주력을 차지하는 경우가 잦았으므로,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면 지휘관들은 소부대의 기동보다는 대부대의 통제에 의한 기동 및 전투를 중시했다. 이런 특성상 탈영병 발생 억제를 위해서라도 창병들을 많이 쓰게 되었다. 이 흐름은 전열보병까지 이어졌고, 통제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심해져서 나중에는 비인간적인 전열보병시대의 가혹행위로 그 이름을 떨쳤으며 현재도 똥군기를 비롯해 각종 부조리와 악습으로 내려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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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팔랑크스를 파고드는 로마군[7]
이처럼 창은 무장화 측면에서 매력적인 장점이 있는 만큼,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다. 검에 비해 휴대성이 좋지 않고, 내구도 면에서도 자루 부분은 비용 절감을 위해 목재로 만드는 경우가 잦았기에 검보다 약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단점은, 창날 안쪽으로 파고드는 공격[8][9] 에 매우 취약했다는 점이었다.[10]
따라서 창은 보통 저숙련도 병력을 대량 소집할 필요성이 있을 때 주 무장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렇게 징집된 병사들이 길이가 긴 창을 들고 대규모로 전개해 기병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곤 했고, 상대 측에서는 팽배수, 레기온, 도펠죌트너같은 검병들과 투사무기들을 이용해 창병진을 기병 돌격 이전에 와해하고자 했다. 다만 검병의 경우 특성상 기동전을 펼치며 싸워야 하고, 병과 특성상 오랜 양성기간이 필요했으며,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도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창병에 비해 쉽게 양성되는 편은 아니었다.
투사무기류들은 무기와 궁시, 탄약류의 확보부터 운용인력 유지, 병력배치와 진형유지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쉬운편은 아니었다. 총기가 등장한 후에 창은 이전시기보다 더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근접전 능력이 떨어지는 초창기의 총병을 보호하기 위한 이동식 방벽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창병의 입지가 이전시대보다 훨씬 올라가게 되었다. 다만 총검 이라는 희대의 발명품으로 총병도 대기병 방진같은 업무를 수행 할 수 있었고, 그전에도 총기의 발달과 운용법의 발달로 총을 비롯한 원거리 무기로도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던 케이스가 나올정도였으며[11] 창의 가격도 비쌌고 유지보수가 힘든점 때문에 전장에서 사라졌다. 또한 창도 아무나 써도 성능이 발휘되는 무기가 아니라서 장창병의 경우 5년을해야 쓸만하다는 소리를, 10년을 해야 고참병 소리를 들을수 있을정도다. 아예 스웨덴에서 북방전쟁같이 전쟁이 많아지자 자국군이 강군 취급받는데도 외국에서 고문관들을 데려왔는데 이들은 스웨덴군 장창병들을 보고 처음 서유럽 출신 고문관들이 파이크 제대로 집지도 못하고, 방진도 제대로 못 만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예 한국같이 총병들에게도 도검류를 쥐어줘서 근접전을 수행하게 한 경우도 있다. 다만 이것은 소속된 집단에 대한 소속감, 충성도가 높아야 하고 집단 상층부가 하층부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이 높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일본은 테르시오마냥 장창병의 비율을 높게 유지하였다.
창기병의 경우에는 양손으로 잡다가 겨드랑이에 창을 끼우는 카우치드랜스 방법을 도입하여 충격력을 극대화시켜 냉병기 중에서는 비할 데 없는 강력한 정면충격력을 이용, 대 보병전을 수행했었으나 창기병 돌격은 창보병들 처럼 대열을 이루지 않으면 효율이 몹시 떨어져서 열을 유지한 채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방향전환이 어렵고 측면이 약하며 상대도 순순히 아무 대책도 없이 정면충돌해 주지 않는 데다가, 진형이 풀리거나 창의 거리 안쪽으로 파고들면 급격하게 불리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거기에 돌격거리 계산 잘못하면 죽어나가는 건 창기병들 몫. 거기에 창에 상대가 100% 맞아준다는 보장도 없다. 19세기 영국군 내에서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훈련받은 검기병들은 검으로 창의 공격을 어떻게 받아내는지 알기 때문이다. 창기병들도 검도 가지고 있었지만, 급할 찰나에 빠르게 뽑아서 대응하기가 어려웠고 뽑는다 쳐도 검기병보다 검에대해 숙련도가 떨어져서 발악밖에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훈련 강도와 기간도 일반 기병보다 강하고 길어 쉽게 양성할 수 없었다. 기병 전투는 측면 잡히는 쪽이 지게 되어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서 나폴레옹 이후로도 기병의 주력은 검과 총을 사용하는 후사르가 될 수 밖엔 없었다.
보병들도 하도 당하다보니 마차, 거치형 방패, 말뚝, 이동식 목책, 마대자루, 기타 수단을 동원한 야전축성, 투사무기 도배같이 별의 별 대책들을 강구하여 가면 갈 수록 이전에 비해서는 효용이 떨어지다가 아예 화기까지 등장하자 16세기에 기병창 돌격으로 대표되는 기병창과 중갑을 위시로 한 충격력 위주의 기병 전술이 쇠퇴하면서 같이 쇠퇴하였다. 아예 기병의 위상이 이전시대보다 확 낮아졌을 정도라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예시를 든다면
1503년 4월 28일에 일어난 체리뇰라Cerignola 전투가 있는데 이 전투에서 활약한 에스파냐의 명장인 'Great Captain' 코르도바는 1495년 세미나라 전투에서 스페인군이 프랑스군에게 패배한 뒤로 아르퀘부스 또는 아키버스라고 부르는(사용 하는 부대명도 각자의 발음차이 덕분에 아케버시어또는 아르퀘부시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부대의 숫자를 크게 늘려놓고 있었던 것을 이용해 프랑스군이 잘 볼 수 없는 위치에 야전 참호와 토담을 만들고 총병과 쇠뇌(크로스보우)병을 다수 배치함으로서 프랑스군 기병대는 지근거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고, 총지휘관인 느무르 공작 루이도 그 피해자 중 하나로 등록되고 말았다. 이후 프랑스군의 포병대는 에스파냐군의 야전축성을 파괴하는 데 실패했고, 이후 에스파냐군의 기보 총돌격은 프랑스군을 패주시키며 에스파냐군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그래도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는 여전히 기병이 승패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덕분에 기병의 위상약화는 백 년 정도 늦출 수 있었다.
1759년 7년 전쟁 당시 민덴 전투에서는 전투 중 명령 착오로 중앙에 있던 영국-하노버군 8개 보병 대대, 대략 5천명이 평지에서 정예 기병대가 버티고 있는 프랑스군 중앙으로 전진하는 자살행위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를 보고 7천 5백 명의 프랑스 기병대들이 5천 명의 영국군을 항해 돌진했지만 3번에 걸친 돌격에서 27미터 거리에 들어왔을 때 영국군이 쏜 사격을 맞고 전부 실패했다. 심지어 마지막 돌격에선 메종 뒤 루아(국왕근위대)기병여단이랑 카라비니에 드 프랑스(프랑스 기총병대)라는 프랑스 최고의 기병 2천을 투입했는데도 대기병 방진조차 짜지 않은 영국군 23보병연대 로열 웰시 퓨질리어한테 막혔다.
이후 창기병은 울란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거진 사라졌다. 물론 동양의 경우에는 동원되는 숫자가 서양과는 아예 차원이 다르고 게다가 대량의 병력이 발사하는 투사무기에 의해 이득보다 피해를 더 볼 확률이 많아 창기병이 전열 돌파를 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팔기군 재현만 보더라도 갑옷을 충실히 같은건 검이나 다른 근접전 무기를 든 경우고 창을 든 경우는 이보다는 경장으로 입거나 아예 궁기병처럼 입기도 했다. 서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서 흉갑이라던지 방어구를 충실히 입은건 총을 가진 검기병 또는 검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그래도 창기병은 울란과 퀴레시어를 적절히 조합해서 쓰던 나폴레옹 덕분에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약간은 살아났지만 이미 주력은 이전시대부터 그랬듯 총을 가진 검기병 또는 검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창보병들의 경우 이야기가 복잡하다. 우선 창에 대한 하드카운터였던 폴암과 검(여기서의 검은 보통 지칭되듯이 도와 검류전반을 가리킨다)의 대결을 본다면(다만 폴암과 검 양쪽에 걸쳐져있는 클레이모어, 투핸드소드, 쯔바이핸더, 구겸도, 언월도, 피, 참마검 등의 무기들은 제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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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공간을 가진 폴암 > 검과 방패(좌)[12]
접근을 허용했을 때 검과 방패 > 폴암(우)[13]
다만 이들의 전투에서 보듯이 검이든 폴암이든 충분한 공간이 있어야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창은 창병방진을 해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먹잇감들을 몰아줄 망치의 역할을 해줄 다른 병종들을 모은다면(간단히 말한다면 검과 방패병) 같은 공간에도 여럿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을 이용, '''좁은 공간에 여럿이 들어가 순간적으로 일 대 다로 상대방을 몰아버리는 속칭 다굴로 별 손실 없이 간단히 척살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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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창병방진 단독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당장 제철기술의 발달로 검들의 성능이 일신되자 검병이 주력인 로마군이 창병들이 주력이었던 그리스문화권의 국가들을 전부 패배시키고 무릎을 꿇렸으며 이 때부터 창은 확실히 보조무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3전투를 뽑자면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는 측면공격으로 무너뜨렸고 피드나 전투에서는 전면에 생긴 틈을 통해 무너뜨렸으며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는 아예 대놓고 정면에 싸움을 걸어 무너뜨렸다. 이 전투 외에도 레기온과 팔랑크스간 전투에서 양 쪽에 발생한 킬 레이쇼와 팔랑크스들도 보조병들을 쓸만큼은 썼다는 것을 보면 기존에 '일부'를 중심으로 퍼졌었던 정면 팔랑크스 우월론은 무언가 잘못되었단 것을 알 수 있다.
중세시대에도 비싼 장비와 훈련비를 부담 가능했던 기사나 전사들의 존재로 인해 입지가 별 나아지진 않은데다가 사슬갑옷과 트랜지셔널 아머의 등장으로 점점 유효타를 먹이기 힘들어졌다. 창병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근접전 무기가 아니라 조준하고 찌르고 활이나 쇠뇌를 휘두르듯이 휘둘러 근접한 적에 저항하는 비소모성 원거리 무기에 가까워서 이들에게 근접전을 맡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로 4~5m되는 장찰을 든 창병이 4~5열 이상 두툼하게 배치된다 하더라도 그 창병들이 일제히 공격할 수 있는것도 아니고 연속적으로 창을 전방으로 세운 진형에서도 보통 앞 창날과 뒤 창날 간에 0.8-1m 정도의 간격이 있어서 창날을 하나씩 피하거나 15~17세기마냥 창 밑으로 침투하거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서양 양손검병 묘사화에서 나온 것 마냥 아예 검으로 창대를 잘라가며파고드는 것이 가능했다. 앞의 레기온 vs 팔랑크스 경우나 15세기말~17세기 중반까지 있었던 장창방진끼리의 싸움에서 란츠크네히트의 경우 투핸드소드나 할버드를 든 병사를 앞쪽에 배치했고 서로 싸우는 당시 그림을 봐도 서로 검들고 싸우는 도펠죌트너 같은 검병들이 앞에서 백병전을 하고 뒤에서 파이크병들이 뒤에서 화력지원하는 방식으로 싸웠었다.
조선의 경우 이 근접전을 수행하는 병과의 중요성이 드러나는데 과전법의 한계로 기존 관료들이 토지를 겸병하자 신규 임용된 관료들에게 땅을 지급해 줘야 할 땅이 모자르게 되어 군인들에게 지급된 토지까지 주다보니 결국에는 기존체제로는 정규군의 병력 수요조차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까닭은 기본적으로 세조 이전의 조선의 군사체계는 양인개병제가 아니라 엄연히 말하면 전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세병제에 가까워서 지정된 군호에서 병사들을 차출해 병력 수요를 채웠는데 군호로 지정된 사람들이 장비와 보수 마련자금의 재원인 곡식을 재배할 만한 땅을 관료들에게 지급하면서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세종 말기와 문종시기를 지나며 심화되었다.
이렇게 되면 왕권은 떨어지고 신하들의 세력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세병제의 장점은 팽배수와 중기병 같은 훈련만으로는 기르기 힘든 병종들을 비교적 수월하게 수급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러면 병력 수급이 점점 힘들어진다. 물론 근접전을 수행할 장검류나 장도류들을 든 도수가 있지만 이들은 기존 오위체계 내에서도 팽배수를 지원하도록 되어있지 이들이 도펠죌트너처럼 일선에서 싸우는 역할이 아니었다. 창병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근접전 무기가 아니라 조준하고 찌르고 활이나 쇠뇌를 휘두르듯이 휘둘러 근접한 적에 저항하는 비소모성 원거리 무기에 가까워서 이들에게 근접전을 맡길 수도 없었다.
창병들의 육성도 쉬운 게 아닌 게 굳이 창병 문서로 갈 필요도 없이 세조 이후 조선 후기인 1625년에 경기도 속오군에 화포수(火砲手) 3000명, 장창수(長槍手) 1000명, 대검수(大劍手) 1000명씩을 조직하기 위해 무기를 조달하려고 했지만 10년 뒤인 1635년에도 창대로 쓸 목재 조달이 되질 않았다. 조총(조선군에서는 조총병이 화포까지 맡은 듯 하다고)들이나 장검들은 어떻게 조달이 되었는지 별 큰 언급이 안되었지만 창은 전혀 그렇지 못했는데, 대놓고 구굉이 장창 1000개를 만드려고 하는데 자루가 없어서 자루로 쓸 만한 나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 경기도의 참나무는 너무 무거워 들 수도 없어서 가시나무나 종가시 나무를 써야하는데 그럴만한 나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식물의 특성상, 같은 품종이라 해도 자라는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좋은 목재가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게 더 문제. 창을 제대로 만들 경우 창대로 쓸 재료의 문제(아무 나무나 쓸 수 없다)와 제작 난이도 문제(가운데에 심에 쓸 목재와 주변부에 결합할 부품 등)로 인해 후대에 등장할 총보다도 비쌌다. 조선기준 조총가격이 3.5석일 때 창대가격만 2석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조선 선조도 피난 중 명군에게서 장창을 받아보고 장창을 만들려고 하는데 장창으로 만들 목재 재료가 부족하다(구득할 방법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 대나무 대를 이용한 창을 쓰라 할 정도였고, 인조도 조선에서는 창이 요긴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일이 매우 형편없다. 각별히 정밀하게 만들어 정벌하는 데에 쓰는 것으로 삼으라는 말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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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으로 총병을 보조하는 테르시오 진형의 모습
이렇게 테르시오의 등장으로 장창이 총병의 보조 병과로 전쟁 전면에 나오면서 다시 창병의 중요성이 올랐다. 중국의 기록이나 맘루크들의 전투경험에서도 드러나듯이 기병 자체를 척살하는 데에는 창은 효용이 매우 낮았고(특히 중국 기록에서 이것이 드러난다.) 오히려 검이나 다른 단병기를 든 병사들이 효과적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돌진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은 단병기만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고, 어차피 총병들이 딜링을 넣어 적들을 고꾸라뜨리니 창병들은 고기방패가 되어 1차적인 접근 차단만 해주면 되었다.
그리고 기병도 갑옷을 입어도 총에 어차피 뚫리는 판이니 비싼 전신 갑주 대신 중요 부위만 방호하거나 아예 갑옷을 얇게 만들어 입기 시작했기에 창병에게 본격적으로 데미지를 입게 되어 창병은 총병과 함께 제2의 전성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화약무기의 지속적인 발달로 창병의 보조가 없어도 총병만으로 충분한 저지력을 가지게 되었다. 창병이 막아야 하는 충격기병이 대부분 사라져 버리고 테르시오로 대표되던 방어력은 좋은데 돌격력이 애매한 장창 기반의 밀집 방진을 잡기 위해 사격전에 치중한 선형진(Line formation)이 나타나고, 장창 방진은 날이 갈수록 사거리와 위력이 강해지는 대포와 총으로 인하여 입지가 좁아졌고 총검의 개발로 전장에서 보병이 사용하는 전투용 창은 완전히 사라진다. 반면 카라콜로 한번 망했던 기병의 트렌드 변화로 기병용 병기로서는 장점이 남아있어 더 오랫동안 쓰이긴 했다. 이후 창은 주력 무기의 위치를 상실하고, 의장용이나 사냥용으로 주요 용도가 변화하게 되었다.
4. 창술
5. 창잡이
창을 사용하는 사람을 창잡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창잡이 문서로.
5.1. 창병
창을 사용하는 병과.
5.2. 랜서
창(랜스)를 사용하는 기마병.
6. 역사
6.1. 유럽
창은 그 특성상 근접전 무기가 아니라 조준하고 찌르고 활이나 쇠뇌를 휘두르듯이 휘둘러 근접한 적에 저항하는 비 탄환 소모성 원거리 무기에 가깝고 밀집해서 사용할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그것을 극한으로 끌어낸 것이 그리스 시대에 개발된 팔랑크스라는 진형이다. 롱 스피어의 장점인 길이를 최대한 늘린 사리사라는 장창이 등장하면서 상대의 접근조차 불허하는 단단한 진형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창의 특성상 길이가 길어질수록, 무게가 급증하고 다루기도 힘들어졌으며 정면을 제외한 측면과 후면을 들이치는 근접전에 대응하기도 힘들었고 진형이 깨질시 너무나도 취약하게 되었다. 때문에 검을 들고 틈을 비집거나 만들면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로마군의 레기온에 그리스의 팔랑크스는 무너지고 동부 지중해는 로마 군의 손에 떨어진다. 물론 이 단점은 팔랑크스를 운용하는 국가들은 다 알고있었지만 이들은 국력의 한계와 타성에 젖어 단점을 보완하지 못했다.
고대 로마 말기 이후 동로마 제국과 그 근방을 제외하고 유럽에서는 중세 초까지는 로마수준으로 대규모 전투병을 유지하는 국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형식의 팔랑크스는 사라지게 된다. 물론 로마의 레기온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편제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고, 바이킹등의 민족들이 2~3미터의 짧은 창을 이용하여 사용하는 방진 같은 것은 계속 이어지지만 이 시대의 기록이나 이 시대풍으로 만든 문학작품들에게서 나타나듯이 전투의 주력이면서 군대의 정예는 검을 든 전사들이나 기사들이었고 실트론은 원래 검과 방패로 구성하던 것이니만큼 창은 급조병력들의 무기거나 보조무기로 지내게 되었다.이후 기사계급의 발호와 제철 기술의 발달로 갑옷이 발달하면서 창으로는 뚫지 못하고 검을 들고 움직이기에는 운동성이 매우 나빠지므로 폴암류의 복합 날을 가진 무기들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중세의 무장 중 하나인 할버드와 폴액스, 빌이다. 창을 주력으로 쓰는 병력은 스위스군 정도.
그러나 화약무기의 개발로 주 무기가 화기인 총으로 변해갈 때 테르시오전술의 주축으로서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차지하게 된다. 로크루아 전투이때의 창은 과거의 주력 병기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장전속도가 느린 초기형 총병과 상대방 총병과 창병에게 돌격해서 진형을 무너뜨리거나 전과확대를 꾀하는 검병들을 엄호하기위한 역할이었다.
18세기에 이르면 총의 성능향상과 대포의 발달로 인해 밀집대형이 자살행위가 되어버리고, 총을 이용한 라인배틀이 주류가 되면서 주무기로써의 쓰임새가 다했다. 19세기경까지 부사관의 지휘용/상징용 무기로 스펀툰이라는 단창이 남아있긴 했으나, 19세기 말이 되면 그마저도 깃발을 매다는 깃봉의 형태로 간략화되어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 오는 것을 제외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총검은 총검술의 발달과정에서도 드러나듯이 검의 일종이기 때문이라 논외.
6.2. 중국
영어로 쓰면 여전히 spear지만(병음으로 qiang이라고 쓰기도 한다), 무기의 분류법인 창 외에도 창(槍)이라고 불린 무기가 따로 존재했다. 즉 보다 큰 집합의 창과 그 안에 든 창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은 창(槍), 조선은 궁(弓), 일본은 도(刀)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창이 저리 각광 받는 이유는 바로 숙련의 용이성으로 인한 훈련기간의 짧음과 유교적 병농일치제에서 나오는 인구 수의 조합 때문. 특히 중국은 워낙 인구수가 방대하여 창의 사용 빈도가 다른 국가들보다 높았는데 병농일치제로 서양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징집병 물량을 뽑아내려면 창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징집병이 아닌 숙련병은 검을 중시하여 한나라 시대 때 양손 검술이 융성했고, 이는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져 당 태종은 1000명의 검사들을 휘하에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양손검이라는 검의 길이가 87cm가 약간 못 되어서 서양의 롱소드에 비하면 좀 짧았다고 한다.
최초 제작자는 촉한의 제갈량이라고 하나 정작 제갈량 등장 이전에도 찌르는 용도의 무기는 엄청 많이 있으므로 제갈량이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좀 있다. 상기에서 말한 큰 집합의 창보다는 그 분류하의 창이라고 하는 무기의 종류를 제작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제갈량이 발명자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긴 나무 자루 끝에 크고 작은 날붙이를 단다는 개념은 이미 금속으로 된 무기를 만들기 시작하기 전부터 있었다.. 중국에서도 이런 개념으로 맨 처음 만들어진 찍는 戈가 있고, 이건 최소 상나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유물이 발견되고, 찌르는 투겁창인 矛가 동주 시대에 유물이 있고, 둘을 합친 戟이 있었다. 본디는 슴베창을 특칭하던 槍은 전국시대 말에는 이미 등장했다.
창이 특히 발달했던 중국의 창은 기본적으로 긴 막대 끝에 나뭇잎 모양의 창날과 창날 밑에 영이라 불린 붉은색의 끈 묶음이 있다. 이 끈 묶음이야말로 중국 창만의 특징이라 할 만한데, 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세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는 적을 찔렀을 때 그 사람의 피가 손잡이를 타고 내려와서 손을 미끄럽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간단한 장식이라는 설, 세번째는 칭기즈 칸이 서방 원정시에 적의 머리를 잘라서 창 끝에 매달아서 용맹을 과시한 것이 영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칭기즈칸이 생각 외로 빨리 죽어 중국을 지배한 기간이 짧기에 세번째는 별 의미없어 보인다.
그리고 실제 창을 사용시의 효과를 보면 아마도 1번과 2번의 이유가 모두 맞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문 위키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이 qiang은 최고급 목재로 만들어서 세게 휘두르면 탄성을 받아 휘는데, 고수가 창을 휘두를 때 창날의 이런 기동과 영의 시야 방해 효과가 겹치면 적은 지금 창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저 적을 견제 하기위해 창끝을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리기만 해도 눈길을 끄는 특유의 붉은 영 덕분에 적의 집중을 상당히 흐트리게도 할 수 있다.
창의 뒷면에는 창준(槍준 / Spear tail)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창날이 있다. 이는 창을 지면에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하거나 창날로 인해 생기는 무게 중심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하여 사용했고, 창날이 부러질 경우 임시방편으로 쓰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유사하게 그리스의 팔랑크스가 사용했던 사리사에도 달려 있었다. 다만 사리사는 지면에 고정시키기보다는 팔랑크스를 유지하며 들고 찌르는데 필요한 무게 중심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끝에 무게추 달았다. 민간용 창은 보통 준이 달려 있지 않다.
길이는 상당히 다양하나 최소한 사용자보다는 길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길면 기동성이 떨어지니 사용자의 세배[14] 가 넘는 길이는 안 된다는 중국 장병기의 원칙이 있었다. 단창을 제하면 2미터 이하는 없고 오히려 그 아래면 창을 쓰는 의미가 없다.
창의 단점을 해소하기 위해서 철창(鐵槍)이라는 것도 존재하였다. 나무를 전혀 쓰지 않고 모조리 철로 만든 것으로, 당연히 속은 비어있지만 철이 다보니 자루가 손상될 염려가 적고 타격 무기로도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공격력은 크게 상승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무거워 다루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널리 쓰이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창이 전장에서 도태되면서 실전형 창술이 사라진 것은 서양 뿐이 아닌지라 남아있는 것은 민간의 물건들인데 이로 인해 대단히 섬세하고 오묘해 숙달하려면 긴 기간이 필요한 창과 창술이 남아 있다. 쿵후나 우슈에서 사용하는 창은 백낙곤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무협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창이 이것이다.
한편 중국은 화창의 영향인지 총(銃)이란 한자가 있음에도 총기류를 창(槍)이라 적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권총을 수창(手槍)이라 부르거나 기관총을 기관창이라고 표기한다. 건슬링거 걸을 신창소녀神槍少女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6.3. 대한민국
조선 왕조 이전 고대에는 동예 병사들이 길이가 3장짜리[15] 긴 창을 들고 싸웠으며 보병 전술에 뛰어났다고 한다. 다만 여기서 쓰인 창은 매우 크고 아름다워 한 사람이 쓰기에는 힘들고 두 명 이상이 함께 썼다고 한다.[16]
삼국통일전쟁 말기에 일어난 나당전쟁에서 매소성 전투 때 역시 신라의 장창병이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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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출토 쇠창.출처 서양의 할버드와 비슷하게 생겼다. 해당 유물은 드라마 해신에서 신라군의 창으로도 나온 바 있고, 비슷한 유물이 개성에서 출토된 적도 있다. (북한에선 철검이라고 한다.)
조선의《무예도보통지》에서는 24기 중 창법이 첫번째로 소개된다. '장창이 무예의 왕이다'라는 구절도 적혀 있으며, 무예가들 사이에서도 '천 번 내려치는 것이 한 번 찌르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속담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찌르는 것은 베는 것보다 빠르게 가능하며 힘을 집중하기에 좋다. 편곤도 사실상 조선 창기병이 멸종된 상황에서 숙련이 쉬우며 강력하여 기병의 장병기로 들어온 것이지 멀리서 찌르는것의 강력함은 변함이 없다.
임진왜란 당시 한 군관이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을 받아 창술의 기록을 남겼고, 훗날 스스로 연구하여 독자적인 세법을 추가하였다고 한다. 이중 명에서 배운 것이 12세, 스스로 깨우친 것이 12세로 모두 합쳐서 장창 24세라고 부른다.
한국의 장창이 중국의 장창과 다른 점은 혈조가 있고 날 아래에 석반이 있다는 점 등이다. 특히 석반을 날카롭게 갈아서 적이 자루를 잡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준은 거의 예외없이 달려있다. 길이는 1장 5척으로 3미터가 조금 넘는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에서 삼지창의 일종인 당파가 도입되었는데 사극의 포졸들이 들고 나오는 바로 그 물건으로[18] 장창과는 다른 운용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곁가지를 이용해 적의 무기를 걸어 재껴 적의 장병기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주 용도였다. 길이는 7척 정도로 장창의 절반 길이였는데 길이가 너무 길 경우 적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의 무기를 막아낼려면 최전선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용도에 맞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력과 담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또한 화전을 비롯한 화약무기를 발사할 때 받침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날 사이에 발사체를 끼우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죽장창의 길이는 2장으로 4미터를 훨씬 넘는 통대나무에 얇은 칼날을 달아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강도가 약한 단점이 있지만 길이가 길고 탄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기창[19] 은 지휘용, 의전용으로서의 무기이지만 24기 중 하나에 속하며 세법이 따로 존재한다. 기창을 하나의 무기체계로 인정한 것도 조선군만의 특성. 물론 실제 전장에서 활용될 기회는 적었다.
조선 전기에 무과 시험과목에 기창을 포함했었고, 오위진법에서도 사용한 것을 보면 주로 보병용 단병접전에 썼으며, 개인 호신용 무술로서 남아있던것 같다.
《무예도보통지》에 따르면 2.5미터 정도의 창의 무게가 2.5 Kg라고 한다. 또한 창자루의 재질로는 척계광의 기록을 인용해 조목(稠木, 치밀하고 단단한 나무)이 제일이고, 합목(合木, 여러 나무를 합친 것(참조))이 그 다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6.4. 일본
일본식 창은 '야리(槍)'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야리 문서 참고.
7. 가공 매체에서의 창
- 창잡이 문서 참조.
8. 관련 문서
[1] 창의 공격을 '''일단 맞고''' 시작해야 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무조건 선제공격권을 가진 셈.[2] 활과 조총에 타격을 입고 도주한 호랑이가 마지막까지 상당한 체력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호랑이 사냥꾼들에게는 갑옷도 필수품이었다. 경번갑 등 좋은 갑옷의 방어력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정도를 훨씬 능가하여, 호랑이의 앞발 공격에도 몸통의 직접적인 외상은 확실히 보호할 수 있다. 물론 얻어 맞은 뒤 날아가 나무나 바위에 부딪히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다이렉트로 흉곽이 열리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3] 참고로, 창날보다도 수급이 어려운 재료는 창대였다. 본격적인 군용 창은 3m를 훨씬 넘기는데, 이처럼 곧고 길며 단단한 목재를 대량으로 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어려웠기 때문이다.[4] 창에 비해 활이나 검은 매우 어렵다. 제대로 된 궁수, 검사가 되려면 아무리 열심히 수련해도 3~5년 이상은 너끈히 걸린다. 활로 이름을 날린 우리나라나 잉글랜드에서는 궁수 양성에 최소한 7년을 잡는다. 반면 창은 몇 주 동안 기본기만 열심히 굴려도 아쉬운대로 머릿수를 채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5] 대표적인 사례로 정여립의 난이 있다.[6] 기병의 접근을 위해 진을 치거나 등[7] 이밖에도 로마군과 마케도니아군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삽화들을 보고 싶다면, 옆의 링크를 참조하기 바람.링크[8] 이를테면 야지에서 갑작스레 행해지는 매복이나, 방패로 공격을 막으며 창대를 치고 들어오는 검병같은[9] 로마 레기온이 특히 팔랑크스 상대로 이런 약점을 활용, 팔랑크스 부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곤 했다.[10] 이와 비슷한 사례로 조선 후기의 학자인 성대중(成大中 1732~1812년)이 쓴 책인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일본군이 조선에 두 번째로 쳐들어온 정유재란 때, 길이 5미터 짜리 긴 창인 낭선을 든 명나라 병사 5명이 일본도를 든 일본군 병사 한 명과 싸웠는데, 일본군 병사가 명나라 병사 5명을 모두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바늘을 던져 왜군을 죽인 조선의 병사[11] 파비아전투라던지 스페인 아르퀘부스의 사격에 기병공격이 막혔다.[12] 여기서의 폴암은 빌이다.[13] 여기서의 검은 아밍소드이다.[14] 6척(180cm) 기준 5.4m. 서양 장창과 길이가 비슷하다.[15] 1장은 10척이고 삼국시대 한국에서 1척의 기준은 후한척인 23cm였으니, 계산하면 무려 6.9미터가 된다![16] 사실 창이 너무 길면 그 무게 또한 늘어나기 때문에 혼자서는 들기가 어렵다.[17] 하지만 이는 방송 다큐멘터리에서의 추측으로 재구성한 것일 뿐 삼국사기에 나온 매소성 전투 기록은 너무나 소략해서 전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심지어 당측 기록도 아닌 신라측 기록임에도 기본적으로 기록해야 할 신라측 지휘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전투이다.[18] 물론 그 이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삼지창은 있었다. 초기 철기시대부터 유물이 나온다. 하지만 전통 삼지창은 당파와는 날의 형상이 달랐다.[19] 깃발 달린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