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수(1964)
1. 소개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선수, 외야수 장태수와는 달리 좌투좌타. 포지션은 투수.
2. 선수 경력
외야수 장태수와는 달리 그저그런 선수였던 이 선수가 주목을 받았던 건 1987 신인 1차지명에서 외야수 이정훈을 제치고 삼성의 지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삼성의 속사정은, 한국시리즈에서 번번이 준우승하는 원인이 타선은 빵빵한 데에 비해 항상 투수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데 있다고 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력보강이 급할 필요가 없다는 타선보다는 투수력의 보강을 우선시하던 때였다. 실제로 장태수가 입단한 1987년의 삼성은 팀타율 3할을 기록할 정도로 타선은 막강했다. 그래서 이정훈 대신에 좌완투수인 장태수를 선택했는데, 이 때문에 2차지명으로 밀려나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게 된 이정훈은 선수생활 내내 고향팀인 삼성에 지명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오기로 삼성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게 되고, 이는 이정훈이 프로에서 성공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비록 신인지명 당시의 팀 사정에 의한 것이었지만, 지금와서 비교적 연령대가 낮은 팬들에게는 단순히 이정훈의 근성을 가볍게 본 삼성구단의 오판 취급 받는 분위기. 물론, 삼성의 선택의 결과와 그 후의 두 선수의 야구인생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이 점 때문에 평생 이정훈과 비교되면서 까이게 된 어떤 의미에서는 안습한 선수. 하지만 당시의 삼성의 상황을 무시한 지나친 결과론이라는 시각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의 삼성구단은 타격 쪽으로는 아쉬울 게 없는 팀이었고, 게다가 당시 삼성의 외야진은 장효조-허규옥-장태수로 이어지는 실업야구 시절부터 인정받은 '''검증된''' 주전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신인지명을 하면서 얘로할까 얘로할까로 살짝 고민하는 정도의 신인이었던 이정훈이 이들을 제치고 첫해부터 주전으로 도약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오히려 이정훈 개인으로서는 삼성이 지명을 안 해준 덕분에 선수층이 얇은 빙그레에 입단해서 입단 첫해부터 주전을 차지할 수 있었고, 신인왕까지 수상할 수 있었다.
하여간 이 투수 장태수는 기대만큼 해주지 못했고 1988년 말 선수협 파동 후 김시진, 장효조 등과 함께 롯데로 트레이드되었다. 롯데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을 못하고 1990 시즌 후 선수생활 4년만에 은퇴했다.
3. 은퇴 후
현재는 대구의 교동시장에서 횟집을 경영하고 있는데, 나름 시장의 명물로서 장사가 잘 되는 듯. 가게 내부에는 삼성을 비롯한 여러 야구선수들의 사진과 사인이 벽에 걸려있다.
4. 기타
외야수 장태수와는 한자까지 같이 써서 삼성 재적시에는 기자들은 물론이고 기록원들 조차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그냥 등번호로 구분해서 '4번 장태수', '28번 장태수'라는 식으로 불렀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