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진

 

'''김시진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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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의 감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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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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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1998'''
'''2000'''
'''2003'''
'''2004'''

'''아시안게임 금메달(코치)'''
'''2010'''






'''1985,1987 KBO 리그 다승왕'''


'''1985,1987 KBO 리그 승률왕'''


'''1985 KBO 올스타전 미스터 올스타'''


'''김시진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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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9번'''
김한근(1982)

'''김시진(1983~1988)'''

홍성연(1989~1990)
<color=#373a3c>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8번'''
오명록(1987~1988)

'''김시진(1989~1992)'''

김종석(1993)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79번'''
결번

'''김시진(1993~1995)'''

팀 해체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79번'''
팀 창단

'''김시진(1998~2007)'''

팀 해체
'''서울 /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79번'''
윤학길(2008)

'''김시진(2009~2012)'''

최만호(2013~2015)
<color=#373a3c>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9번'''
윤학길(2011~2012)

'''김시진(2013~2014)'''

손상대(2015~2018)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회 위원장'''
'''KBO 경기운영위원회 위원'''
'''이름'''
김시진 (金始眞 / Kim Si-Jin)
'''출생'''
1958년 3월 20일 (66세)
[image] 경상북도 포항시
'''국적'''
[image] 대한민국
'''학력'''
포항중앙초 - 포항중 - 대구상고[1] - 한양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1차지명 (삼성)
'''소속팀'''
'''[image] 삼성 라이온즈 (1983~1988)'''
[image] 롯데 자이언츠 (1989~1992)
'''지도자'''
[image] 태평양 돌핀스 투수코치 (1993~1995)
현대 피닉스 투수코치 (1996~1997)
[image] 현대 유니콘스 1군 투수코치 (1998~2006)
[image] 현대 유니콘스 감독 (2007)
[image] 넥센 히어로즈 감독 (2009~2012)
[image]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13~2014)
1. 개요
2.1.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경력
3.1. 투수 코치 시절
3.2. 감독 시절
3.3. 비판
3.3.1. 7년간 계속된 미숙한 경기운영
4. 롯데 감독 사퇴 이후
5. 별명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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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롯데 자이언츠, 히어로즈, 현대 유니콘스 감독.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통산 100승 투수[2]'''. 삼성 라이온즈의 첫 선발 에이스이자 1980년대 선동열, 최동원과 함께 한국프로야구를 지배했던 우완 특급 대투수이기도 하다.
은퇴 후에는 은사이자 전 삼성 감독인 정동진의 부름을 받아 태평양 돌핀스에서 1993년에 투수코치직을 시작하였으며, 태평양이 현대 유니콘스가 되면서 2006년 시즌까지 현대의 투수 코치직을 역임하였고 2006년 시즌 종료 후 LG 트윈스로 이적한 김재박 감독의 뒤를 이어 자신의 커리어 첫 감독이자 현대의 2대 감독이 되었다. 현대 유니콘스의 해체 이후 히어로즈 구단이 창단하면서 감독에서 해임되었고, 2008년 시즌에는 KBO 경기 감독관으로 재직하였다. 2009년부터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으로 재직하다가 2012년 후반기에 중도해임당하였다. 이후 바로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아 '''만 20년''' 만에 부산으로 귀환했다.
넥센 팬들에게는 '''유에서 무를 창조하는 사람만 좋은 무능력자''', 롯데 팬들에게는 '''8888577이후 다시 비밀번호를 시작한 사람만 좋은 무능력자''', 삼성 팬들에게는 '''승리의 마스코트'''로 기억되는 남자[3]. 전 소속 팀 넥센은 김시진을 해고한 다음해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었고 2014년에는 코시진출에 성공하였으나, 우승을 위해 김시진을 모셔왔다는 롯데는 부임 첫해부터 '''5년간 이어온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기록을 깨버렸다.'''

2. 선수 경력




2.1. 플레이 스타일


구속은 140km대 초중반, 잘 나오면 140km 후반까지 나올 정도로 빠른 편이었지만 동시기 또다른 특급투수였던 '''최동원''' '''선동열''' 등에 비하면 떨어진다. 다만 구속 150km을 찍었다는 말이 있다. 사실 김시진이 활약했던 시기가 1980년대임을 생각해보면 저 정도 구속이면 엄청 빠른거다.[4]
공의 가감속 조절 능력, 흔히들 완급조절이라 부르는 그것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슬라이더나 커브 등 다양한 정상급 구종을 구사했으며, 이중 체인지업은 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서 수준급이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5] 또한 코너웍에 집중해서 상대타자를 속여 삼진을 잡아내는 플레이를 주로 구사하는데, 정작 제구력이 정상급이었던 건 아니었던 듯하다. 피볼넷이 통산 4위고 1985년 세운 121볼넷은 무려 단일시즌 2위 기록이다. 다만 정상급 투수들과 비교해서 볼넷이 많은 편인건 맞지만 85시즌의 단일시즌 기록은 270이닝 가까이 되는 많은 이닝에 수반된 기록이고 9이닝당 볼넷은 4.04개로 아주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사기적인 컨트롤 능력과 빠른 구속, 뛰어난 변화구를 갖춘 완전체 두뇌파 투수로 제구력을 바탕으로 승부를 보는데... 제구력이 매우 좋은 편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 하지만 전성기 땐 제구력과는 별개로 탈삼진 능력은 매우 우수했던 투수였다. 위에 있는 라이벌인 선동열, 최동원처럼 매우 삼진을 잘 잡냐 라기 보다는 잡더라도 공 하나 하나 세밀함을 치우쳐 뜬공을 많이 잡기도 하였다.
몸이 늦게 풀리는 기질이 있어서 등판 직후 꽤 고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김시진이 털린다면 1~3회 내로 집중공략당하거나 몸이 안 풀려서 자멸하는 등 빠른 시간에 털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아마 수많은 피볼넷의 몇몇은 몸이 안 풀렸을 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계투로는 적절하지 않은 스타일.[6]
큰 경기에서 '''새가슴''' 기질이 있어서 포스트시즌에서 단 '''1승도 기록하지 못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는 달리 호투를 펼쳤는데도 타선이 안 도와줘서 패배한 포스트시즌 경기도 몇 있다.[8]
기록 상으로는 볼넷이 매우 많고, 현 시점 통산 755피볼넷으로 통산 피볼넷 부문 4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앞에 있는 후배들인 송진우, 이강철, 애제자 김수경은 물론이고 아래에 있는 쌍방울의 에이스 김원형이나 박명환보다도 통산 프로 연차가 많지 않다.
외적으로 삼팬들이 크보 역대 최고의 두뇌파 투수라고 찬양하는 경우가 있긴 한데, 두뇌파 투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사실이나 볼넷이 매우 많아서... 때문에 역대 최고의 두뇌파 투수는 김시진보다는 장호연이나 정삼흠을 꼽는 사람이 많다. 실제 장호연은 삼진을 잡는거 보다 공 하나 하나로 끊어 잡는 스타일이라 삼진을 많이 잡는 경향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구성이 매우 대단했던 투수로, 1985년 기록한 269.2이닝은 정규시즌 이닝기록 역대 3위이며, 포스트시즌 기록 포함 시 5시즌 연속 200이닝(1983년~1987년)을 기록했다.[9] 이외에도 1985년 총 투구수인 4,231구는 KBO 리그 단일시즌 3위이며, 1989년에는 한 경기 최다 투구수 승리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219구)

3. 지도자 경력



3.1. 투수 코치 시절


1992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대구상고/삼성시절의 인연으로 정동진 감독의 부름을 받아 태평양 돌핀스의 투수코치로 부임했고,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코치까지 이어지게 되었다.[10] 과거의 명성답게 투수 육성에 강점을 보이면서 현대 유니콘스를 투수왕국이자 강팀으로 이끄는데 일조했고, 투수 전문가로써 명성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조련을 겪은 투수들은 한동안 좋은 스탯을 보여 주다가도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부진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김수경, 조용준, 오재영, 신철인, 황두성 등 많은 투수들이 부상으로 신음했다.[11] 무엇보다 가장 문제인 건 엄청난 연투를 시키면서도 혹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등 현대 야구와는 맞지 않는 투수관을 가지고 있으며, 본인이 연투를 시키고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등 오직 감으로만 투수교체를 한다. 코치 시절부터 연투와는 상관없이 그저 지나 이기나 무조건 기용하는 선수만 기용하고 병적인 좌우놀이 성향을 보였다. 2000년대 초반의 신철인의 '''6연투 기사'''는 김시진의 투수관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6연투를 시켰다는 기사
상체보다 하체 위주로 피칭을 시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서양인과 동양인의 골격이 너무 달라 자칫하면 큰 부상이 오는 투구폼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반대로 하체 위주보다 상체로 전력투구를 하는 선수가 있는데 바로 마이클 보우덴이 이렇게 피칭을 한다.
또 다른 문제점은 좌완 투수의 폼을 잡아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완 투수들과는 달리 그가 키워낸 좌완들의 경우, 투수 개개인의 체질과 스타일은 무시한 채 똑같은 투구 폼을 일률적으로 적용시켰다. 대표적으로 舊 유니콘스 & 現 히어로즈의 소속이었던 이상열[12] 오재영[13] 장원삼[14]. 등은 투구폼이 모두 비슷하다.[15]
김시진 본인과 정민태 코치가 한국을 대표하는 정통파 투수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떠난 이후로도 히어로즈의 투수들은 상당수가 140km/h의 볼과 그것을 뒷받침 할 슬라이더와 120Km/h의 낮은 커브나 벌컨 체인지업과 스플리터 볼을 주무기로 삼고 있는데 제구 불안이라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고 이걸 떠날 때까지 해결하지 못했다.
현재도, 2019년이 된 히어로즈 투수진들 보면 아직도 장작 쌓고 불놀이 하는 투수들이 많다. 그렇다고 김시진 경질 이 후 변한건 없었다.
그리고 경질 이 후 2013년에는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해서 투수를 키워내기는 커녕 있는 투수마저 다 '''망가뜨리는''' 모습에 역시나 투수 조련가는 거품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현대 유니콘스 시절에도 나오던 평이었는데 당시 현대는 아마 시절부터 최고로 꼽혔던 선수들을 비싼 계약금을 주고 싹쓸이했었다. 즉, 야구는 기본적인 자질이 굉장히 중요하기 마련이므로 김시진이 투수들을 다 키웠다는건 어불성설이다.[16]
그러나, 이 항목에 꽤나 부정적으로 서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코치 김시진으로서의 평은 이미 높을만큼 높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 야구가 그렇듯이 선수들의 부상이나 부진은 대부분 혹사 탓이 크다. 지금에서야 투수코치 권한이 조금 늘어났지만 지금도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감독이 투수운용의 전권을 휘두르며 불펜투수를 노예질하기 마련이다. 또 롯데 자이언츠에 있는 2군 투수들이 왜 크지 못했는지 생각해보면, 황폐화된 2군 코치진을 첫번째로 꼽아야 할 것이다. 코치진의 실적부터 의문스럽고, 코치 숫자는 항상 부족하다. 또한 현장의 평이나 아마추어 시절 평가를 종합해 보면 롯데는 절대 자질이 좋지 않은 선수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다.

3.2. 감독 시절


스타 선수가 위대한 감독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의 전형적 예시로 김시진보다 무능한 감독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김시진이 유능하다는 건 아니다. 7년 간 감독 자리에 있으면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감독이다.[17] 환경이 좋지 못했던 사실만 부각되었을 뿐 감독으로써 딱히 보여준 것도 없는 인물. 그럼에도 삼성 팬들의 쉴드덕에 여러 커뮤니티에선 유능한 감독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넥센 감독 시절엔 09 기아처럼 되지 않는 이상은 4강이 힘든 전력이였기에 어느 정도 쉴드가 있었다. 또한 넥센측이 장원삼, 이현승, 이택근은 물론 여기에 트레이드불가라고 하면서 애지중지 키웠던 황재균마저 트레이드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넥센 감독으로써 욕보단 동정하는쪽이 많았다.
하지만 롯데감독이 된 이후엔 성적에 대해서 욕을 많이 먹었다. 물론 후임인 이종운 감독과 CCTV사건과 롯데 프런트가 나쁜 이미지를 보이면서 어느 정도 동정하는 팬이 늘었다. 이만수처럼 과거의 레전드이기 때문에, 그리고 선수 시절이나 감독 시절이나 삼성 승리의 보증수표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삼성이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넥센 히어로즈 시절 김시진이 삼성전 2할대 승률을 기록하면서 엄청난 일조를 했으며,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한 후에도 별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김시진의 감독 시절 통산 삼성 라이온즈전 승률이 무려 2할 8푼대인데 10번 만나면 2~3번 이기고 7~8판을 져주니 좋아할 수 밖에.[18] 롯데 팬들은 정작 넥센 팬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주는데 삼팬들이 넥센 팬 코스프레를 한다며 매우 불만이 많았다.
그 동안 김시진이 감독으로 몸담았던 팀들이 전부 모기업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해체 직전의 팀이거나, 스폰서가 없어서 트레이드로 운영하는 팀이거나, 선수단을 CCTV로 감시하고 프런트가 감독 작전권까지 간섭하는 희대의 개막장 팀 등 감독 혼자 뭔가 손써보기에는 난이도가 몹시 높은 꽤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은 참작되어야 한다.
2013 시즌 롯데에서의 실패는 분명 감독 본인 잘못이지만 2014 시즌에는 시즌전 이미 권영호 수석코치부터 별 이유없이 잘린 것을 시작해서 프런트의 선수를 향한 폭언과 훈련 스케줄에 대한 간섭, 또한 시즌이 시작된 후에는 대표이사가 4월부터 번트 대지 말라, 최준석, 장성우를 2군에 내려라, 박종윤을 쓰지 말고 최준석히메네스를 쓰라, 기타 타순을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는 등(이때 이미 사퇴의사를 한번 밝혔다.) 이미 2014년의 롯데 성적의 향방은 시즌 전부터 이미 그의 손에서 서서히 떠났다고 봐야 한다. 특히 팀이 잘 나갈 때 내려가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히메네스, 유먼 교체를 요청했지만 프런트에서는 스카우트만 파견한 후 유야무야했고, 시즌 중반에 DTD할때 공필성 코치가 투수조 이간질(투수운용 간섭)하여 정민태 코치와 싸우고, 프런트 고위관계자는 감독 욕을 프린트해서 코치들 앞에 던지고, 이후 단장이 감독 불러서 그나마 남아있는 사단 포함 4명을 2군으로 내린다고 협박하며 사퇴를 종용할 때 두번째로 사퇴한다고 하는 등 2014 시즌에는 팀에 대한 통제권이 사실상 없어진 상태였기에 동정표를 받고 있다. 게다가 그 다음 시즌에 적극적인 지원과 프런트의 불간섭을 등에 업고도 화끈하게 8위를 기록한 이종운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어쨌든 그 인성이 좋은 평가를 받고 불운도 참작되어야 하지만 비교적 객관적으로 능력을 검증받을 수 있었던 12시즌 넥센에서의 성적과 13시즌 롯데에서의 성적만 봐도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없다는 것이 2구단 팬들의 중론. 성적 못내면서 투수 혹사라도 안하면 리빌딩에라도 좋은 평가를 받을테니 혹시 모르겠는데 분명히 혹사를 하기 때문에 각각 양날의 검인 김재박, 김진욱 감독보다도 현역 복귀 가능성은 훨씬 더 떨어지는 인물이다.

3.2.1. 현대 유니콘스 시절


현대 유니콘스 No.79
김시진(金始眞)
2007년 LG 트윈스로 이적한 김재박 감독의 후임으로 투수코치에서 감독에 선임되었다. 당시 현대 타선은 팀타율 1위를 찍을 정도로 강타자들이 즐비한 좋은 타선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초반부터 광적으로 번트 지시를 하였다.[19] 투수관리 미흡과 노환수,조용훈으로 대표되는 몇몇 투수들만 자주 기용하는 투수운용, 지나친 좌우놀이등으로 답답한 경기 운영능력을 보여주었다. 타선에서는 나이가 많은 선수들이 많음에도 2군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는 선수들에게 기회를 잘 주지 않았다. 결국 현대는 중위권과 하위권을 오락가락 하다가 최종 순위를 6위로 마치게 되었다. 감독으로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시즌이 끝나고 현대가 해체하게 되면서 현대의 마지막 감독이었다는 이유만으로 팬들의 동정을 사게 되었으며 일명 뚝리타라고 불리는 광적 팬들이 생기게 되었다.

3.2.2. 넥센 히어로즈 시절


넥센 히어로즈 No.79
김시진(金始眞)
[image]
현대 유니콘스의 해체 후 감독 자리에서 해임되었고, 2008년 KBO 기록관으로 근무하다 2009년 히어로즈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용병을 모두 타자로 가져가면서 덕 클락, 황재균, 이택근, 클리프 브룸바, 강정호, 송지만 등이 이끄는 강력한 타선을 내세워 한때 4강 싸움까지 노려봤으나 에이스 이현승을 4일 로테로 굴리는 등 투수들을 땡겨쓰거나 혹사로 투수진이 흔들리면서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가장 문제점은 감독이 되자마자 어려운 팀 상황에서 팀 투수진을 이끌고 새로운 선수들을 발굴했던 정명원 코치를 대뜸 2군에 보내고 코치로서 1년은 커녕 단 1주일조차도 경험이 없는 생초짜 정민태를 1군 투수 코치에 기용하면서 넥센 투수들을 망가뜨렸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넥센 히어로즈 홈페이지의 영웅방에서는 투수들이 단체로 부진하자 연일 김시진과 정민태를 비난하는 글들이 많았으나 시즌 후 역대급의 현금 트레이드가 터지면서 선발투수 세 명과 중견수를 모두 잃는 바람에 이때부터 김시진 감독을 동정하는 분위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초대권까지 뿌리며 팬들이 만들어준 팀 창단 부동의 1번 타자 전준호의 은퇴식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서''' 섭섭해한 팬들이 많았다. 이건 어쩔 수 없는게 김시진이 안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보이기가 본인 입장에서 창피해서였다. 김시진은 시즌 후 방출 대기령 선수에서 동명이인이던 베태랑 투수 전준호, 이상열 등이 대거 방출되는 것과 팀이 돈이 없어서 FA로 LG에 떠나보낸 정성훈과 간판 투수들 및 타자 주전 멤버 4명을 대거 트레이드로 보내는 등 어수선해지기 마련이었다. 김시진이 여기서 막고 싶어하였으나 방출 된 선수들에게 미안하고 지켜주지 못했다는 등 말을 제대로 전달을 못했다고 했다.
2010 시즌에는 금민철고원준이라는 새로운 투수를 발굴해내는 등 분전했으나 순위는 작년보다 떨어진 7위로 마감했다. 개구라 치다 걸린 이장석황재균을 팔아먹고 트레이드로 온 김민성. 김수화는 성적도 못내서 팀에 민폐만 주었다. 여기다가 더 어이없는건 잘만 하던 덕 클락을 방출 시켜버리고, 데려온 게 크리스 니코스키. 9G 2승 6패 6.68로 눈 썩는 성적을 보여줬으니, 이 때부터 김시진 감독을 싫어하는 안티 팬들이 점점 생겨나지 시작한다.
2011 시즌은 넥센을 완전히 무기력한 팀으로 만들면서 창단 첫 최하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본인이 점찍어 놓은 트레이드 된 4번타자 박병호의 가능성, 이택근의 친정 복귀 등 팀의 플러스 요소들이 많이 보이면서 다음 시즌에 기대를 갖게 했고 본인 역시 구단으로부터 재계약을 받으면서 한층 더 안정된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2012 시즌, 새로운 거포 박병호와 3년만에 20홈런으로 복귀한 강정호, 27승을 합작한 외국인 선발 듀오, 신인왕 서건창 등 출중한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고, 비싼 야구장이고 인기없는 야구팀이지만 이에 힘입어 근근히 만원관중이 될 때 팀도 승승장구하며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전반기 이후 점점 불안한 기미를 보이더니 '''DTD'''를 선보이게 되었다. 더불어 오심 판정도 엄청나게 받더니, 생애 첫 퇴장까지 당하지 않나.
이 때문에 결국 빡쳐버린 넥센 팬들이 넥센 히어로즈 공홈 게시판에서 김시진과 정민태를 퇴출하자는 릴레이를 펼쳐기도 했다. 그 동안 나름 점잖은 편이었던 넥센 팬들[20]이 김시진을 자르라고 구단에 전화를 하기도 했으며 팬 커뮤니티에서 조차 그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자 결국 참다 못한 구단 측에서 경질을 하게 되었다. 사실 김성근이 특출나게 광적인 팬이 많아서 유명했던 거지, 김시진 팬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이 당시 혀갤은 무조건 김시진 편이였으니까. 당시에도 특기인 동정론을 사는 언플이 나왔고, 당연히 대부분의 야구팬들은 이장석을 비롯한 넥센 수뇌부를 비난했다. 심지어 앞으로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말도 있었다.
참고로 넥센 시절 그의 최대 업적이라면, 정치설로 인해 LG 트윈스에서 반 강제적으로 나왔던[21]염경엽(前 현대 유니콘스 수비코치)을 다시 넥센 히어로즈로 데려오고 이장석을 설득해 그에게 주루/작전코치직을 맡긴 것이다. 어쩌면 후임자를 자기 스스로 데려온 셈이다. 지금이야 순망치한의 관계이지만, 예전 염경엽과 이장석은 서로 불편한 사이였다. 재창단 후 이장석의 행보에 불만을 가졌던 염경엽은 15년 넘게 있어 온 직장을 박차고 나갔고, 이장석 역시 자기 싫어서 한 번 나간 적이 있는 사람을 곱게 볼 리가 만무하다. 게다가 LG에서 흘러나오는 염경엽과 관련된 흉흉한 소문들은, 이장석의 그러한 편견을 더욱 부채질했을 터... 그런 이장석을 설득시켜서 염경엽을 기어코 팀에 복귀시킨 김시진의 행보는, 오늘날 넥센의 성적을 봤을 때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염경엽 항목 및 본 글의 아래 각주에도 기술되어 있듯이 당시 두산 베어스가 그를 데려오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했는데, 만에 하나 염경엽이 넥센이 아닌 두산으로 갔다면 지금의 넥센은 과연...

3.2.3. 롯데 자이언츠 시절


[image]
롯데 자이언츠 No.79
김시진(金始眞)
그러던 2012년 11월 5일, 갑자기 자진사퇴한 양승호의 뒤를 이어서 롯데와 3년 감독 계약을 체결하였다. 더불어 정민태 코치도 세트로 딸려갔다.[22]
롯데 입성이 확정된 후 롯데 팬들의 반응은 대체로 뜨뜻미지근하다. 일단 2012 시즌의 변변찮은 경기운영 모습에 평가가 많이 떨어진 상태인 것도 있고, 무엇보다 팀 스타일을 1년만에 바꿔 우승한다는 건 무리라는 평이 많았기 때문.[23] 다만 한 수 아래라 평가받던 넥센이 김시진을 경질한 이유는 '우승하기 위해서'인데 롯데는 그런 감독을 역시 '우승하기 위해서' 데리고 온 것이었으니 자존심도 좀 상할 일이다. 무엇보다 김시진이 마음에 안든다기 보단 같이 데리고 왔던 오른팔 정민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크다. 정민태 때문에 썩 괜찮게 투수진을 이끌었던 주형광이 2군으로 밀려나면서 별로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차라리 정민태를 안 데려왔으면 환영 했을거란 의견도 많다.
다행히 인터뷰를 예쁘게 해[24] 팬들 사이에서 나름 평가가 좋아졌다. 그러던 중 넥센 히어로즈가 마무리 훈련을 한창 하고 있던 도중에 박흥식 타격코치를 전화 한 통으로 롯데로 꼬셔왔다. 과거 김시진 감독 역시 김재박 감독의 코치 빼가기에 큰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행한 것. 이로 인해 롯데 팬들 사이에서는 지지도가 많이 올라갔으나 그나마 남아있던 우호적인 넥센팬들은 대부분 김시진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급작스러운 감독 교체로 사기가 떨어진 롯데 자이언츠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 기자들한테 많은 질문을 받았다. 취임전이므로 이에 대한 말은 아끼고 있지만 조정훈을 잘 만들어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3.2.3.1. 2013 시즌



3.2.3.2. 2014 시즌



3.3.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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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진을 두고 열악한 팀 사정 탓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7년이나 감독을 맡고도 한번도 포스트시즌을 밟아보지 못한 감독은 없으며[25], 2012년 넥센의 전력은 이택근이 LG에서 돌아오고 박병호의 재능이 만개하면서 충분히 4강권을 노려볼 만한 전력이었기 때문에 팀 탓만으로 그의 무능함을 전부 옹호할 수 없다. 전반적으로 넥센에서는 후임자인 염경엽 감독과, 롯데에서는 전임자 감독과 비교당하며 그다지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다.
넥센에서는 성적을 내지 못했으나 리빌딩에 성공했다는 옹호론이라도 있었으나, 투수진을 태워먹은 롯데에서는 그런 거 없다. 특히 아무리 프런트 문제와 2군 인프라가 중요하다지만 투수조련사로서의 명성과 다르게 그가 감독을 맡은 이 타신투병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평가가 박해지는 중이다. 결국 그가 그나마 넥센에서 중간이나 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염경엽, 박흥식 등 우수한 코치의 덕을 많이 봤을 뿐, 본인하는 것이 없으면 오히려 다행인 수준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양승호-김시진 시대 롯데에서 혹사당했던 불펜투수들이 다시는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김시진에 대한 여론은 롯데 팬들 사이에서 지금도 정말 차가운 편이다. 양승호 감독은 일단 혹사를 해서라도 성적을 냈기 때문에 덜 까이고[26]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성장하는 와중에 비리로 감옥에 갔기 때문에 추억보정이 있는 편이지만 김시진은 성적도 못내고 혹사도 시키고 그렇다고 리빌딩에 도움을 준 것도 아닌 암흑군주로 평가된다.[27]

3.3.1. 7년간 계속된 미숙한 경기운영


2009년에 욕을 많이 먹었지만[28] 2010, 2011년도에는 팀 사정상 동정론이 우세했다. 하지만 2012년 시즌 히어로즈 창단 이후 최고의 전력을 만들어줬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거품이 많이 벗겨졌다.
2010년도부터 말도 안되는 번트 야구를 구사하는 중인데,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어중이떠중이들이 번트도 못대는 바람에 팬들의 목을 붙잡는 경향이 심해진다. 이 증세는 2011년도에 더욱 악화, '''무사 2루라고? → 번트'''라는 희한한 알고리즘을 가지고 경기를 치르고 있다. 김재박은 번트를 잘 훈련시키기라도 했고, 하다못해 양승호는 적재적소에 작전을 구사하지만, 김시진은 그런 것도 없다. 물론 타선이 워낙 제때 터져주지 못해서 이런 극한 스몰볼을 구사하는 걸 수도 있지만, 그 스몰볼이 작전 능력도 없고, 투수 능력도 없는 팀에 적용될 수 있을까? 마치 2010 시즌에 한대화가 직면했던 문제와 비슷했다.
투수 운용에서는 '''불펜혹사의 역대급 감독이다.''' 과거 이보근, 조용훈, 위재영, 신철인, 조용준, 황두성, 송신영, 오재영, 박준수, 노환수, 이상열, 권준헌, 마일영, 이현승, 박장희 등 수많은 선수들이 희생당했으며 이보근은 3년 연속 8~90이닝을 소화하며 어깨부상에 시달려야했고 150이 넘던 직구가 이젠 140도 겨우 나오는 등 구속 저하와 구위 저하가 동시에 일어났다.[29] 그나마 송신영은 고무팔인 덕택에 오래 살아남았지만 조용준, 신철인, 박준수, 노환수, 황두성, 조용훈 등은 재기도 못하고 결국 망가져버렸고[30] 쓸쓸하게 은퇴하거나 방출되었다. 롯데로 이적한 후에는 이명우, 강영식, 김성배, 정대현의 노예질이 돋보이고 있다.
불펜 운용에서 또 하나의 문제점은 '''맹목적인 좌우놀이'''이다. 이것 때문에 2010년~2011년 LG 트윈스 감독이었던 박종훈 前 감독이 많은 비판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김시진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다만 김시진 재임기간 동안 넥센이 비인기 구단이라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을 뿐...2012 시즌 시작하자마자 터진 4월 8일 경기의 씨앗도 김시진 감독의 좌우놀이로부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는 팬들은 뒷목 잡고 쓰러질 지경.[31] 2012시즌 이후 투수 좌우놀이는 적어진 편이나 타자를 좌우놀이 형식으로 배치하는 것은 여전하다.
거기다, 그놈의 원 포인트 릴리프. 잘 던지던 김상수를 내리고 오재영을 올려서 볼넷주고 다시 또 한현희로 바꾼 적도 있었다. 2011년 임찬규가 그렇게 위기상황에서 굴려지다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려되는 부분이었는데, 결국 한현희는 부진 끝에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2012 시즌 후반기의 부진 때문에 팬들에게 비판받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투수교체 타이밍에는 제대로 된 원칙도 없다고 비판받는다. 물론 정명원 코치가 떠난 이후[32]로 2012년도 넥센의 불펜이 2010, 2011년도보다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김시진 감독의 어이없는 투수교체 타이밍으로 피를 본 건 한두 번이 아니다. 누가 봐도 내려야 될 때는 그대로 가고 그냥 가만히 냅둬도 될 때는 바꾸다가 말아먹는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매 시즌이 끝나면 김시진은 잘한것도 없으면서 언론에 감정팔이로 넘어가곤 했는데, 한동안은 소속팀의 외적인 문제와 주전 선수들의 수준 등으로 쉴드가 가능했지만 그덕에 성적에 상관없이 거액의 연봉만 받아 철밥통 감독을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무엇보다 팀의 장악력이 전혀 없었으며 언론에 한 말과는 달리 정작 시즌에 가서는 다르게 운영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작전을 보이기도 했다.
감독으로서 별다른 업적이나 성적을 내지도 못하고 무려 7년 넘게 감독하면서 매년 거액의 연봉을 챙기고 있으니 이쯤되면 이 시대 최고의 땡직업 김시진 감독이라 불러도 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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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과 2014년 한정으로 화요일 징크스가 있었다. 2010년 넥센의 화요일 성적은 2승 1무 18패로 역대 최저였는데, 4년만에 롯데에서 1승 1무 18패를 찍으면서 본인의 기록을 직접 갱신했다. 선수단 장악력이 부족함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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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기에 선수들을 쥐어짜서 성적을 올려놓은 뒤 후반기에 DTD한다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무조건 스프링 캠프 때부터 자기가 찍어둔 선수만 주야장천 쓰는 이른바 쓸 놈만 쓰는 야구를 반복하다보니 주전 선수들의 체력 안배가 안 되는데, 그걸 개선하지 못한 채 해마다 반복 중. 소위 쓸놈쓸 야구는 2012시즌 넥센 DTD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데, 투수진이 완전 붕괴된 상태에서도 2군에서 호투하고 있는 전유수, 이태양, 임창민 등은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33] 결국 이 세 명은 트레이드와 특별지명으로 다른 팀으로 옮기자 마자 1군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거기에 더 심각한 것은 자기가 찍은 선수는 부상 중이라도, 재활이 끝나지 않았더라도 무조건 계속 쓴다는 점이다. 역시 2012시즌의 송지만, 유한준, 정수성이 대표적으로 이 3명 모두 재활이 안 끝난 상태에서 무리하게 끌어쓰다가 선수개인 성적도 망치고, 팀 성적도 망쳤다. 심지어 정수성은 손뼈에 금이 간 상태로 대주자로 내보내더니 수비에 나중에는 타격까지 시켜서 당시 양상문 해설위원이 저러면 선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고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시한 적도 있다.

4. 롯데 감독 사퇴 이후


롯데를 떠난 후에는 코칭스태프 대신 전력분석관, 행정가로 활동 중이다.
태평양-현대-넥센 시절[34] 그와 한솥밥을 먹었던 염경엽 감독이 김시진 본인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미국과 일본을 돌면서 야구 공부를 한다고 한다.
이후 프리미어 12 대회를 앞두고 안치용, 이종열과 함께 국가대표팀 전력분석관으로 합류, 전력분석 팀장으로 선임되었다. 대한민국 경기가 있을 시간에는 관전하지 않고, 그 시간에 타국 국가대표팀의 경기 분석을 했다고 한다. 삿포로 돔에서 열린 개막전 때 그는 일본이 아닌 대만에 머무르며 분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예 한일전을 앞두고서는 오타니 쇼헤이 이후를 공략하자는 생각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다만 대회를 앞두고 베네수엘라 국가대표팀이 갑작스럽게 엔트리를 무려 13명이나 교체하는 바람에, 베네수엘라 대표팀에 대한 전력분석은 애를 좀 먹었다고 한다.
투수코치 시절 준수한 업적을 감안하면 김시진의 감독으로서의 무능은 야구에 대한 내공 부족보다 감독 자리에 맞지 않는 여린 심성에서 나온다는 분석이 설득을 얻고 있기에, 감독 이외에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활약하는 것이 좋은 선택인 듯하다.
그리고 그 실력을 인정받았는지, 2017 WBC에서도 국가대표팀 전력분석 팀장을 맡았다.
삼성을 3승 라이온즈로 만들 뻔한 초보 감독의 삽질을 보다못한 일부 삼성 팬들이 이만수와 함께 차기 삼성 감독 후보로 꼽고 있다. 물론 여기서 이전의 계투 혹사는 하지 말아야겠지만...
2018년에는 김재박이 잘리면서 공석이 된 경기감독관을 맡게 된다.
2018년 12월 30일 KBO 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5. 별명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 꼴뚜기는 친구 별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야구를 그만두면서 얼떨결에 꼴뚜기란 별명이 김시진에게 넘어온 것. 본인은 야통이나 야왕같은 별명을 부러워하는 것 같지만 현실은 꼴뚜기…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레알 '''꼴'''뚜기가 되었다.
2011 시즌 시범경기 중계에서 이순철 위원과 한명재 캐스터을 통해 선수시절 투쓰리로 불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명재 캐스터 말로는 신중한 승부를 즐겨했다고…(저 아름다운 사사구 기록을 보자) 그러나 볼넷이 많아 볼넷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2012 시즌 들어서 넥센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으며 '''돌시진'''으로 불리고 있다.
2013년에도 새 별명이 생겼'''었'''는데 바로 2013년 중국의 지도자 이름을 따서 언어유희로 만들어낸 '''시진'''핑. 팀의 지도자라는 감독의 직책과 맞물려서 어울리는 별명으로 한 때 쓰였'''었'''다. '''결국 성적이 내려가자 시진, 시진빙으로 바뀌었다'''.
2014년에는 닥치고 좌우놀이와 병맛의 투수교체를 보여주며 '''좌우성애자''', '''뚜발놈''', '''빙시진''', '''시진빙'''이란 별명들이 쓰인다. 롯갤에선 아예 빙시진이라고 부르고만 있다. 여기에 갓동님과 합쳐서 '''빙동님'''이라는 별명까지 탄생한 것은 덤.[35]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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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년부터 2019년 현재까지 30년이 넘는 프로야구 역사에서 유일한 삼성 출신 미스터 올스타이자, 정명원과 유이한 투수 미스터 올스타. 삼성 출신 중에서 레전드 타자인 이승엽, 양준혁 등등 수 많은 삼성의 강타자들을 제치고 그가 유일한 미스터 올스타로 남아있다.
  • 현역 시절 삼성 라이온즈에서 프로야구 최초 100승을 세우기도 했으나 삼성과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하다. 그야 롯데의 심장과 삼성의 두뇌를 바꾸었다는 말을 들었던 충격적인 최동원-김시진 트레이드로 좋지 못한 말년을 보낸 김시진이 삼성에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게 이상할 터. 현역 시절에 배터리#s-4를 이뤘던 이만수도 비슷한 상황이나, 이만수는 삼성에서 감독직을 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김시진은 감독 시절 때 삼성만 만나면 호구 잡혀서 소속팀 팬들에게 피는 못속인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 팀 승리 후 감독과 인터뷰를 진행할 때, 매 대답의 시작이 대부분 "글쎄요"다. 넥센 히어로즈 갤러리에서는 주로 "꼴뚜기 ㄱㅆㅇ" 등의 글로 자축포를 날렸다.
  • 'MBC 히스토리 후'에서 장효조 선수 특집을 했을 때, "형, 뭐가 급해서 그렇게 빨리 갔어?"라는 멘트로 수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은근히 많이 우는 편. 정이 많은 성격임을 알 수 있다. 현대 없어질 때도 울고, 절친이었던 최동원 사후의 모 다큐에서도 울고, 넥센에서 짤렸을 때도 울고.
  • 한겨레에서 개고기를 주제로 '오피니언 리더' 몇 명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프로 스포츠인의 대표 격으로 선정되어 인터뷰를 했었다. 여기 이 기사를 통해 그가 푸들을 키우는 애견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안타깝게도 그 푸들은 2012년 8월 말에 김시진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한때 야구 기자들 사이에서는 경질 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것이 곁을 떠난 푸들 때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참고기사
  • 프로야구매니저가 원년부터 1987년도 시즌까지의 선수카드 업데이트가 되었는데, 김시진의 커리어 하이 시즌인 1985년도 시즌은 당연히 EX카드이며 엄청난 능력치와 구질을 자랑한다. 덕분에 게임 내의 삼성팬들은 환호했으며, 타 팀팬들은 운영진 전체가 사실은 삼빠가 아니냐는 원성을 듣게 만들었는데 이건 네다챔들이나 하는 소리고 실제로는 레일융 레영호 등에 밀리는 쓰레기카드다.
  • 이만수 前 감독과 특별한 사이이다. 대구상고 동문, 한양대 동문, 삼성 라이온즈 동문이자 고교 배터리, 대학 배터리, 프로팀 배터리의 관계이다. 이따금씩 방송에서 김시진이 이만수에 대한 일화를 말하는데 이게 꽤 웃기다. 선생님 빠따 사건이라던지[36], 손바닥 성냥사건이라던지, 1980년 일본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김시진이 차출됐다가 어깨 부상으로 출국 전날 엔트리에서 빼고 이만수가 대타로 갔다가 병역특례를 받았고 김시진은 그 해 현역으로 입대했다는 에피소드 등이 많다.[37] 그런데 이 배터리는 2014 시즌이 끝나자 무능한 삼성 출신 감독들로 남고 말았다. 안습.
  • 이만수아내와 초등학교 동창이다.
  • 한대화와 무척 친하다. 학교라던지 프로팀이라던지 선수 생활과 코치 시절 같은 팀을 한 적이 없고 한국시리즈에서 수 차례 대결한 사이임에조 서로 사이가 좋다. 한대화가 한화 이글스 감독 재직 시 넥센 전에는 꼭 넥센 덕아웃에 찾아와 '꼴뚜기 형'을 찾곤 했다. 서로 아이스크림도 떠먹여 주거나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프로야구판이 학연 등으로 많이 연관되어 있는 것에 비추어 보면 독특한 관계이다.
  • 염경엽 감독에게는 은인일 수 있는 인물. 파벌설 때문에 LG 트윈스를 나와야 했던 그를 불러준 인물이고[38], 그가 감독이 될 때 격려까지 해줬다.[39]
  • 지도자가 된 이후 삼성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선동열 감독의 임기완료까지 2군 감독으로 있다가 1군 감독으로 승격되는 조건이었고 계약조건도 좋았지만, 자신이 삼성으로 갈 경우 김시진 사단으로 불리는 코치들의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기에 거절했다고 한다.[40] 또한 기아 타이거즈에서도 투수 코치로 영입 제안을 했으나 이루어지진 않았다.
  • 야구판에서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는 야구인 중 한 명이다. 오죽하면 독하지 못해서 감독으로서 자질이 꽝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 그대로 감독으로서는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 2016년 12월 5일 KBS 뉴스 9에서 강정호의 음주운전 사고로 인해 참고인으로 인터뷰하였는데 방송으로는 음성변조되었고 심지어 자막도 '김시진'이 아닌 前 넥센 감독이라고 소개되는 굴욕을 당했다.[41]
  • 엄청난 불운의 인물로 유명하다.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차출되었으나 어깨부상으로 하차, 병역특례를 받지 못한 것을 시작으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음에도 당시 군인 신분이라 병역특례를 받지 못하고, 한국시리즈에서의 졸전으로 인한 패전에 버금가는 불운으로 인한 패전[42] 횟수에 이로 인한 새가슴 이미지, 결국은 이 때문에 트레이드되는데 마침 리빌딩 시기라 기회도 못 받고 은퇴... 게임에서는 이름값에 걸맞지 않게 능력치가 짠 편이기도 하다. 감독으로의 커리어를 보자면 감독이 된 것도 불운이 아닐까 싶다.
  • 1980년에 당한 어깨 부상의 여파로 당초 입단할 예정이었던 포항제철 행이 무산된 후 육군(경리단) 야구팀에 들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신병 훈련 면제라는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전역을 앞두고 프로 입단에 대비한다는 말이 육군 고위층에게 안 좋게 들리면서 혜택을 받은 사실이 들통나 말년병장 때 훈련소에서 굴렀다고.
  • 아들인 김재현도 야구를 했었다. 인천고를 나왔으나 홍익대 진학 후 1년만에 야구를 접었다.
[1] 49회 졸업생이다.[2] 역대 최단기 기록[3] 선수시절은 팀의 에이스 투수로 승리를 안겨줬고, 감독시절은 말 그대로 친정팀에 허구헌 날 승리만 조공했다.[4] 당장 선동열 이전 해태의 에이스로 군림했던 이상윤이 당대 투수로서는 정말 빠른 구속의 공을 던져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 구속이 145km대. 그리고 이상윤이 김시진보다 두 살 어리다.[5] 이러한 체질은 게임인 마구마구에서도 그의 이름을 본 따 SJ-체인지업을 만들어줬다.[6] 실제 김시진은 당대 에이스 치고는 불펜 등판 빈도가 적은 편이나, 불펜 등판 빈도가 줄어드는 건 커리어하이 바로 다음 해인 1986년 시즌부터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커리어 후반기에는 아예 현대 야구의 선발투수 수준으로 불펜 등판 빈도가 적다.[7] 특히, 장효조의 만세 사건이 이 시리즈에서 터진거다.[8] 대표적인 경기가 1984년 한국시리즈 3차전. 그 외에도 1984년 한국시리즈 1차전, 3차전의 부상 투혼 등판이나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의 초반 난타 허용, 1987년 한국시리즈 1차전[7]에서의 야수실책 퍼레이드 등 억울하거나 운이 없었던 적도 존재한다. 하지만 1986년 한국시리즈 5차전, 1987년 한국시리즈 4차전은 부인할수 없는 졸전이다.[9] 83년 229.1이닝(PS 기록 없음) - 84년 233.2이닝 - 85년 269.2이닝(PS 기록 없음) - 86년 217.1이닝 - 87년 205이닝[10] 허나. 96년도 창단 당시 현대 유니콘스 투수코치는 하기룡이 맡았고 김시진은 실업야구팀인 현대 피닉스 투수코치를 맡아 명성을 쌓다가(현대 피닉스는 실업리그 전승을 거둔 바 있다.) 97년 말에 유니콘스 1군 투수코치로 올라왔다. 당시 현대 유니콘스는 자금난으로 망해가던 쌍방울 레이더스 에서 '''박경완'''과 조규제, 마일영을 잡아왔다.[11] 김수경은 2001년 부상을 당한 이후 10승 4점대 평균자책점을 꾸준히 기록하는 평범한 투수가 되었고, 조용준은 2005 시즌 후 사라졌으며, 신철인은 2006 시즌 이후로 잔부상 때문에 1군과 2군을 오가는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조용준, 신철인은 2010년에 모두 방출당했다. 황두성 역시 2009 시즌 이후로 1군 경기에 등판하지 못하고 2011년에 은퇴했다. 다만 오재영의 경우는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허리 부상이 문제였다.[12] 한화 이글스 소속 당시에는 성적도 시망이라 현대로 트레이드 되어 오히려 성적이 좋아진 케이스[13] 첫해 신인상을 얻었지만 '''2년차 징크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망했다가 결국, '''군대에 갔다와서 재기에 성공'''하였지만, 또 다시 부상[14] 쳐망해가던 현대 유니콘스 시절 좌완 에이스로 당해년도 입단을 하여 동기들인 류현진, 한기주, 나승현과 함께 리그 올해 신인 Best 4에 올랐다. 단, 저들과 달리 장원삼은 대졸로 인해 입단을 미루고 대학을 갔다. 앞서 셋은 고졸 출신들[15] 스트라이드되는 오른발의 내딛는 위치를 조정해 축이 되는 왼발과 스트라이드되어 뻗는 오른발의 위치를 좁게 해서 상체의 반발력과 회전반경을 크게 해서 공의 구력을 높이고 적절하게 릴리스 포인트를 조절한다.[16] 허나, 현대 유니콘스 시절 투수 코치 부임 때는 여론 때문인지 몰라도 타 팀 프런트들 마저 부러움을 받았었다.[17] 포스트시즌과 인연이 없다. 2012년 넥센 감독시절에는 전반기를 3위로 마쳤지만 후반기 뒷심부족으로 6위로 밀려나면서 포스트시즌 탈락했다. 시즌 도중에 경질 되는 아픔도 겪여야만 했다. 2013년 롯데감독으로 부임되면서 5할이 넘는 승률을 기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에 탈락했다. 이정도면 지지리 운이 없는 정도....[18] 그리고 김시진이 감독자리에서 물러나자 거짓말처럼 삼성의 통합우승 신화도 막을 내렸다. 비록 정규시즌은 여전히 삼성이 1위였다고는 하지만.[19] '김시진의 현대'도 번트가 많은 이유는?[20] 이 무렵에 LG 팬들은 감독과 주장을 데려다놓고 청문회를 시켰고, SK 팬들은 감독이 경질되자 구장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 게 바로 문학구장 소요 사태.[21] 친한 친구인 김기태 수석코치가 감독으로 승진하면서 수석코치직을 권했지만, 본인이 여론을 감안하여 고사했고, 히어로즈로 갔다.[22] 이 때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이장석이 이젠 감독하고 코치도 롯데한테 팔아먹냐는 개드립이 흥했다. 근데 돈 줘야 될 거 안 주게 됐으니 이득은 맞다.[23] 그러나 롯데가 퇴보하고 있다면 모를까 매 시즌 눈에 띄게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 로이스터 체제에서는 멘탈을 가다듬었고, 양승호 체제에선 세밀한 플레이를 많이 향상시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밀번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건 멘탈면에서나 기량면에서나 팬들이 생각하는 것보단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24] '대충 지금 팀을 봤을때 어떤 면이 부족해 보이나'란 상투적인 질문에 '오자마자 그런 말을 하기엔 팀을 이끌었던 前 감독(양승호)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라고 노 코멘트했다. 이 인터뷰 하나로 지지율은 급상승했다.[25] 당연한 면이 있는게 보통의 경우 감독으로서 계속 저런 성적이나 찍고 있으면 애초에 7년씩이나 자리에 붙어 있을 수가 없다. 가까운 예로 한 번 감독직을 맡은 뒤로, 타 팀 '''감독'''으로 부름받지 못 하는 한대화, 이순철 등이 있다.[26] 물론 비싸게 사온 유망주 고원준의 혹사는 욕을 먹는 편. 거의 데드암이 왔고 토미존 서저리 이후에도 2016년 구속회복이 안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다만 이것도 고원준 본인의 워크에씩 논란 때문에 또 비난의 초점이 희석되는 측면이 강하다.[27] 이 평가는 CCTV 파동의 2014년 빼고 2013년 1년만으로도 나오는 평가이다. 일부 이상한 팬들이 '2013년에도 최하진이 감독했다더라'하고 우기지만 롯데 팬들의 시각은 2013년에 쳐말아먹었으니 최하진이 만행을 부릴 여지가 생긴 것이 아니냐, 2013년에도 실권이 하나도 없었으면 자리 맡은게 잘못 아니냐라며 굉장히 차가운 반응을 보인다.[28] 2007년에는 현대그룹에서 지원을 중단한 뒤 팀의 미래조차 기약할 수 없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29] 18시즌 기준 140 후반 직구도 간간히 던진다.[30] 노환수와 조용훈은 여전히 임탈로 묶여서 재활 중이였다가 끝내 재기하지 못하고 은퇴했다. 관리만 잘받았으면 나름 제 몫을 해줄 투수들이 그렇게 사라졌고, 현재 넥센의 불펜이 참담한 원인중 하나인셈.[31] 윗부분에서 언급한 대로 타자 운용시 좌우놀이는 더욱 심각한 ''맹신''급이다. 계투진 운용에서의 좌우놀이는 많이 줄어든 편이지만 선발 타자 라인업이나 대타를 내는 경향을 살펴보면 좀 심할 정도로 플래툰을 신봉하는 듯 하다.[32] 거기다 정명원 코치가 떠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김시진 감독의 정민태 편애였기 때문에 스스로 자초했다는 시선이 많기 때문에 누구 탓 할 것도 없다.[33] 2011 시즌 퓨처스리그 세이브왕 출신인 전유수는 군 제대 후인 2012 시즌 들어서 1군 구경도 못해보고 강진에 쳐박혀 있다가, SK로 건너가자마자 준수한 추격조 불펜(사실상 노예)가 되었다. 2012 시즌 전반기 내내 퓨쳐스리그에서 선발 투수로 준수하게 활약하던 임창민과 이태양은 1군에선 고작 3~4이닝이 끝이였다. 그것도 2명 모두 콜업후에 첫 1군 출전을 무사만루같은 위기상황에 올려서 멘탈을 박살낸 다음에 다시 2군에 쳐박아버렸다. 이런 행태는 롯데에서도 반복되는데 2군에 괜찮은 투수가 있어도 1군 첫 등판을 극한의 위기상황을 해결하라고 무턱대고 올려서 멘탈을 박살내고 다시 2군으로 보내버린다.[34] 염경엽과 김시진은 2000년 이전 태평양-현대 시절에는 코치와 선수로, 2001년 은퇴식을 치른 후부터 2006년까지는 코치와 팀 운영진(프런트)으로, 2007년과 2012년에는 감독과 코치 지간이었다. 코치, 감독은 김시진, 선수, 운영진, 코치는 염경엽.[35] 다만 네이버 스포츠 댓글에 빙시진이란 표현을 쓸 경우 10분 이내로 자동 삭제된다.[36] 대구상고 정동진 감독 취임날에 선수들이 하라는 훈련은 안하고 놀러다녔고, 이 소식을 들은 정동진 감독이 내 불찰이니 나를 때려라 라고 했다. 그래서 김시진이라든가 여러 사람이 대부분 말렸는데, 뜬금없이 이만수가 감독이 자신을 때리라고 하니까 진짜로 감독을 배트로 때리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뭐.. 다들 울먹이면서 잘못했다고 감독에게 사과하는 훈훈한 일로 끝났지만, 하필 이 소식이 쫙 퍼지는 바람에 전국의 대구상고 동문들이 들고 일어나서 정 감독이라던가 여러 사람이 일을 수습하느라 애먹었다고 한다.[37] 여기에 더해서 김시진은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육군 경리단 신분으로 참가하고 대회 우승을 하나 군인 신분이기에 다른 멤버들과 달리 병역특례를 받지 못한다.[38] LG에서는 절친인 김기태 감독이 수석코치로 불렀으나 파벌설 때문에 거절했고, 두산에서도 적극적으로 불렀으나 김시진이 부르자 은혜를 갚으려고 돌아갔다고 한다. 기사 참조.[39] 스포츠투나잇의 염경엽 감독 인터뷰 참조.[40] 결국 선동열 이후 실제 1군 감독 자리를 받은건 대구중-경북고 출신으로 삼성을 한결같이 지켜온 프랜차이즈 스타 류중일 수비코치였다. 현재의 삼팬들에게는 김시진 영입이 현실화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보는 중.[41] 강정호가 2009년, 2011년 당시 넥센 소속일때 음주운전 전과가 있었는데 그 때 감독이 김시진이였다.[42] 주로 야수진의 실책 퍼레이드, 부상투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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