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융
1. 소개
재일교포 출신의 일본프로야구와 한국프로야구에서 활동한 前 프로야구 선수. 본명은 니우라 히사오(新浦 壽夫), 한국명은 김일융(金日融). 도쿄도 세타가야구 태생.
2. 선수 경력
2.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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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오카 상고에 입학하여 1968년 팀을 여름 코시엔 준우승에 올려놓았다. 184cm라는 당시 일본야구계에선 엄청난 큰 키를 가진 강속구 좌투수였기 때문에(당시 일본에선 야구선수가 175cm만 넘어도 큰 키에 속했다) 각 구단의 뜨거운 스카웃 표적이 되었다. 심지어 제2의 가네다 마사이치가 될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해 학교를 중퇴하고 드래프트 번외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게 되는데, 당시 요미우리가 일본인 선수만 드래프트에 참가 가능하도록 하는 규정의 허점을 이용하여 니우라를 영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파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드래프트 규정은 '''"국적을 불문하고 일본의 학교에 소속하는 선수는 모두 드래프트를 거쳐야 한다"''' 라고 변경되었다.[1]
그러나 사실 입단 당시에 어깨부상이 있었고, 17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문에 입단 후 2년간 공을 일절 잡지않고 2군에서 러닝 훈련만 계속 하라는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의 명령을 받았다. 이후 성인이 된 1971년에 1군에 승격하여 19시합 등판(10시합 선발), 4승 3패의 성적을 기록했고, 이듬해엔 5시합만 구원등판하여 승패 없는 부진한 시즌을 지냈지만, 센트럴리그 - 일본시리즈 9연패의 최종년도인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갔다. 그 후 위력 있는 속구와 커브를 주무기로, 나름 순조로운 성적을 올렸으나, 1975년엔 팀이 구단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최하위를 했고, 니우라 역시 역시 2승 11패로 부진한 성적을 남겼다. 덤으로 이 해 10월 15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對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최종전 때 선발 등판하였으나 4-0으로 패전 투수가 되어 카프의 첫 우승을 허용하고 말았다(...)[2]
그러나 나가시마의 양아들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의 신뢰를 받아 꾸준한 등판기회를 얻으며 컨디션을 추스린 김일융은 1976년부터 1979까지 202경기에 등판(그 중 45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4년 연속 2자리수 승리와 2자리수 세이브를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심지어 1977년, 78년엔 2년 연속으로 센트럴리그 최우수 방어율과 최다 세이브를 동시에 석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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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들과 함께 오로나민C 광고에 나온 김일융(20초부터 나오는 두번째 CF에서 초록 추리닝을 입고 러닝하는 선수). 첫 번째 CF에서는 장훈의 모습도 보인다.
1980년 이후로는 '유리몸의 에이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전성기때 구원과 선발을 오가며 무리한 등판을 한 까닭에 몸이 망가지며 성적이 영 아니었기 때문이다.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김일융을 아끼던 나가시마가 퇴단한 후 감독으로 부임한 후지타 모토시는 에가와 스구루를 편애하면서 구위가 떨어진 김일융을 중간계투로 강등시켰고, 그로 인해 김일융의 팀 내 입지는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결국 1983년 시즌을 마친 후 나가시마의 권유를 받아들여 요미우리를 떠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게 되었다. 일본 내 다른 팀의 이적 제의도 많았지만, '''"아버지의 나라에 진출해서 한국프로야구 발전에 기여해 보라"'''는 나가시마의 말에 설득 되었다고 한다.[5]
당시 OB 베어스도 요미우리 구단주인 '''쇼리키 토오루'''(요미우리 신문 창업주 쇼리키 마쓰타로의 아들)와 박용곤 구단주와의 친분을 이용하여 김일융을 영입하려 했지만, 삼성은 요미우리의 실질적인 실력자인 신문사 사장 '''고바야시 요소지'''(쇼리키 마쓰타로의 사위)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했고 결정적으로 이건희 구단주가 나가시마 감독과 친분이 깊은 점을 앞세워 김일융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6] 게다가 당시 김일융에 대한 이적료, 계약금, 연봉 합쳐서 물경 5,500만 엔(당시 환율로 약 2억 원, 엄청난 금액이다)을 지불한 데다가 그것도 모자라 덤으로 집과 자동차까지 줬다고 한다.
결국 삼성의 인맥빨+돈X랄에 밀린 OB는 그 해 창원에 새로 지은 2군용 연습구장을 "니우라(김일융) 데리고 올 돈으로 지었다" 라고 자조하며 '''니우라구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OB 베어스는 김일융 대신 최일언을 영입하게 된다.
1984년부터 3년 간 삼성의 실질적인 에이스로 활약하였다.[7] 일본으로 돌아온 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는 힘으로 윽박지르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기교로 타자를 잡을 수 있는 요령을 배웠다" 라고 밝힌 것과 같이 한국에서의 3년은 자신의 투구 기술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된 기간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빠른 공보다 현란한 변화구 위주로 타자들을 농락했고 특히 커브 하나를 던져도 느린 커브, 더 느린 커브, 아주 느린 커브로 세분화시키는 완급조절과 포크볼[8] 을 장착하며 최고 투수의 반열에 올랐다.
1984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한국시리즈에서 6차전까지 3승을 거뒀다. 최동원도 3승을 거두고 있던 상황이라 롯데와 삼성 둘 중 어느 팀이 우승하더라도 시리즈 4승 투수가 나왔을 상황. 비록 7차전에서 유두열에게 역전 3점홈런을 얻어맞은 흑역사도 있었지만[9] , 1985년에는 25승 6패로 압도적인 성적을 남기고 당대 최강의 원투펀치를 이룬 김시진과 공동 다승왕이 되며 삼성의 전후기 통합 우승에 크게 일조했다. 사실 팀내 라이벌 관계가 치열했던 김시진과 김일융의 파국을 방지하려고 김영덕 감독이 일부러 등판 스케줄을 조절하여 둘이 사이좋게 25승을 챙기도록 손을 썼다. 역시 '''관리야구'''(...)의 대가. 대구 출신의 프랜차이즈 에이스인 김시진과 비교하면, 재일교포 출신인 김일융은 실질적인 에이스임에도 불구하고 용병(?)에 대한 텃세로 손해를 본 셈. 김일융은 상대적으로 강팀과의 매치에 더 많이 투입되었고, 김시진은 약팀을 확실히 잡기 위한 경기에 많이 투입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의 투수 운용을 보아도, 롯데가 먼저 1, 3, 5, 7차전에 최동원을 선발로 내세울 것임을 공언한 상황에서 삼성 김영덕 감독은 김시진을 최동원 출전 경기에 투입하여 에이스로서의 모양새를 살리면서도 이기면 더 좋고 져도 아쉬울 것 없는 카드로 사용한 반면, 김일융은 최동원이 선발로 나오지 않은 짝수 경기에 투입되어 확실한 승리를 챙겨오기 위한 카드로 사용하려 하였다. 실제로 6차전까지 김시진이 2패, 김일융이 3승을 거두게 되면서 김영덕 감독의 전략은 주효했다. 마지막 운명의 7차전에 투입된 것도 김일융이었다.
1986년에는 눈에 띄게 체중이 줄고 설탕에 밥을 비벼 먹는 등 괴악할 정도로 단 음식에 집착하는 증세를 보여서 일본에 건너가 진찰하였는데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 이로 인해 인슐린 주사를 하루에 2번을 맞아야 하는 생활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병이 있다는 사실을 숨긴채 호텔 화장실과 같이 일체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주사도 맞고, 시즌 내내 치료차 한국과 일본을 수차례 왔다갔다 하면서 마운드에 올랐다. 병에 대해 끝끝내 공개를 꺼려 해서 한때 김일융이 성병에 걸렸다는 괴소문이 퍼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해 성적은 13승 4패. 김일융이 괴물인지 그 당시의 프로야구 수준이 떨어졌던 건지(...).
일단 1986년도가 극한의 투고타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1984~1985년보다 성적이 떨어진 건 맞다. 또한 한국에서 3시즌동안 2점대 평균자책점을 유지했지만, 일본에 가자마자 3~4점대로 오르고, 한국에 오기 전 1981~1983년도 기록을 봐도 3년동안 242.2이닝을 던지며 9승을, 한국에 온 후 1984년도에 222이닝을 던지며 16승을 했다. 완급조절을 하면서 이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 시절처럼 윽박지르기 위주로 했다면 방어율 0~1점대도 가능했던 투수였다.[10]
1986년 한국시리즈 땐 삼성의 유일한 승리 투수이기도 했다. 삼성은 2차전 선발 김일융을 내세워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지만 1차전과 3, 4, 5차전을 해태에게 연달아 패하며 3번째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김시진과 반대로 큰 경기에 강하다는 걸 또 다시 증명하였다.[11]
현역시절 김일융의 별명은 황금박쥐, 밤의 신사였다. 밤의 신사는 김일융이 유독 야간 경기에 강했고, 외모에 걸맞게 매너가 깔끔해서 붙은 별명. 팀 내 경쟁자였던 김시진과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가 우리팀의 진정한 에이스"라고 추켜세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같은 재일동포 투수이자 요미우리 입단 동기인 장명부와는 매너와 사생활, 심지어 청결함 같은 사소한 것에 있어서까지 자주 비교되곤 했다.
그러나 한국계임에도 불구하고 조총련계를 제외한 재일교포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한국어를 할 줄 몰랐고[12] , 성격도 내성적이었던 탓에, 한국에서 생활하던 내내 불편하게 살았다고 한다. 삼성 시절 거의 일본인과 다름없는 그에게 어느 정도 차별도 있었던 듯하며, 후에 이에 대해 회고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고.
이미 고등학교 중퇴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면서 일본에 귀화한 데다 김일융 자신도 한국 사람이라는 의식이 크게 없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쯤 되면 말이 고국이지 외국인 용병과 다를 바 없었다. 김일융을 재일동포가 아닌 순수 외국인 신분의 선수로 친다면 역대 최강의 외국인 선발 투수 중 한 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13]
하지만 김일융이 고국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모국에서 한번 뛰어 보자는 말에 설득당해서 일본 내 다른 팀의 제의를 뿌리치고 일본에서는 전혀 알아주지 않던 한국으로 이적한 것을 보면 모국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김일융이 1986년 시즌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복귀한 것에는 당뇨병 치료 목적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86년 당뇨 판정을 받고 나서 김일융은 시즌 중 일본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당뇨 치료를 받았었다.
김시진과는 사이가 매우 껄끄러웠지만[14] , 장효조와는 절친이었다. 둘이 매우 친했는지 전지훈련 캠프 때도 같은 방을 자주 썼고, 출퇴근도 항상 같이 했었다고 한다. 5살[15] 이나 차이 나는 선후배 사이였지만 친구, 동료로서 진솔한 대화도 많이 나눌 정도였다. 장효조가 롯데로 트레이드된 당시에도 김일융이 국제전화로 많은 조언을 해주었고, 일본 전지훈련 기간에도 기분 전환을 위해서 매일같이 통화했다고 한다. 장효조에게 야구인의 마음가짐, 그리고 진정한 프로 선수가 지녀야 할 자세 등을 집중적으로 전수하면서 장효조가 트레이드 사건에 대한 아픔을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 1등 공신이 바로 김일융이었다. 또한 김일융도 한국에서 힘겨운 생활했을때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동료 역시 장효조가 유일했다. 2011년 3월 11일에 터진 대지진 때 장효조가 전화한 적도 있다.[16]
완투나 완봉을 하는 날에는 컨디션 조절을 위해 술 한 잔만 마시고 바로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 당시 한국 야구계에서는 완투나 완봉을 하면 밤새 술을 마시며 자축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팀 동료들에게 애써 술을 사양하며 잠자리에 든 김일융은 꽤나 낯설게 여겨졌다. 나중에 술담배를 지독하게 못하는 양준혁과 이승엽이 고참급으로 올라가면서 자취를 감췄지만...
2.3. 일본프로야구 2기 시절
김일융은 1987년 일본 프로야구로 복귀하게 된다. 이 때 나이가 '''36세'''였음에도 일본에선 김일융에 대한 추파가 굉장히 뜨거웠고, 그 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가 현금 트레이드로 김일융을 영입하는 데 성공. 삼성은 당시 받은 이적료 1천만엔(당시 환율로 3,200만원)을 경산구장 건축비용에 보탰다. . 그 해 김일융은 다이요에서 11승을 거두며 컴백상[17] 을 수상한다. 1989년에는 13피안타 완봉승의 괴기록을 세우기도.
1989년 모습
그러나 지병이었던 당뇨병이 그를 계속 괴롭혔고, 1992년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했다가 7시합만 등판한 뒤 시즌 도중 다시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지만 야쿠르트에서도 14시합밖에 등판하지 못한 채 결국 21시합 등판, 1승 4패 방어율 7.08의 부진한 성적에 그치며 이해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3. 은퇴 후
1994년엔 '나와 야구와 당뇨병'이란 자서전을 출간하였고, 이 후 일본프로야구 평론가로 활동해 나갔다. 그러나 당뇨병이 점점 심해져서 그 일도 곧 그만두었다.
어느 정도 혈당이 정상화가 되었는지 삼성과 지바 롯데와의 2005 아시아시리즈 예선전 경기때 오랜만에 모습을 보이며 선동열과 함께 한국쪽 시구-시타 호흡을 맞추기도 하였다.
삼성-日롯데전, 김일융 시구-선동열 시타
2007년 LG 트윈스의 사이판, 오키나와 전지훈련때 투수 인스트럭터를 맡았었고, 2009 WBC때는 도쿄 돔에서 봉중근과 같이 있는 모습도 보였다.
LG 트윈스 인스트럭터 김일융
봉중근과 김일융
현재는 도호쿠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과 한국 동아일보의 스포츠동아 일본 주재 통신원으로 활동중이다. 지금도 일본내에선 tv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18][19] 2012년에는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x교진 OB전에 투수로 등판하기도.
2015년 11월에는 자신의 모교인 시즈오카 상고 야구부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게 되었다.
4. 미디어에서의 김일융
- 사무라이 자이언츠 - 주인공 방바 방의 2군 선배로 등장하고, 애니메이션 판에서 방바가 한큐와의 시범경기에서 감독대행(...)을 맡을 당시 선발투수로 낙점되었으나, 4회까지 퍼펙트로 막다가 5회에 퍼펙트가 깨진 것을 시작으로 개털린다(...).
- 신 거인의 별 - 선발 등판할 때마다 잘 던지다가 한번 삐끗하면 개털리는 패턴을 반복하며 나가시마 거인의 꼴찌 추락의 주범(...) 중 하나로 나온다. 은퇴했던 하나가타의 평에 따르면 "소질은 있어보이나 정신력이 약해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5.1. 일본 시절
5.2. 한국 시절
6. 관련 문서
[1] 이 해 김일융과 함께 드래프트 번외로 요미우리에 입단한 재일교포 투수가 장명부였다. 다만 요미우리의 주축 투수로 자리잡은 김일융과 달리 장명부는 여러 차례 트레이드를 거쳐 비교적 늦게 기량이 피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 진출 전의 양자의 성적은 일본시리즈 2호 우승의 주축이면서 91승을 거둔 장명부가 80승을 거두고 요미우리 암흑기를 겪은 김일융보다 앞서있었다. [2] 사실 니우라는 이날 5.2이닝 1실점으로 꽤 호투했으나, 타선이 단 1점도 얻어내지 못하면서 결국 패전투수가 된 거였다(...) 덤으로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도 9회 초 니우라의 후속투수 오가와 쿠니카즈가 히로시마의 외국인 용병 게일 홉킨스에게 우승을 결정짓는 스리런 홈런을 맞은 게 치명적이었는지라 니우라에겐 꽤 억울한 일일지도...[3] 얼굴형 때문에 김일융이 아닌 권영호라는 의견이 있다.[4] 왼쪽 옆에 있는 권영호가 쓴 모자를 보면, 삼성이 1989~1994년 사이에 사용했던 디자인이다. 링크의 기사를 보면 1989년 시즌 후에 잠깐 인스트럭터로 온 듯. #.[5] 참고로 나가시마 할배는 장훈의 교진행 주도부터 시작해서 친한성향이 매우 강했다. 당장 이승엽이 요미우리 입단당시 나가시마가 감독시절에 달던 33번을 받을 정도였다. 물론 야스쿠니신사 참배건으로 집권당과 사이가 매우 험악했던 와타나베 구단주 할배가 직접 줘버렸지만...[6] 나이는 나가시마가 6살 연상이나 동생뻘인 이건희가 먼저 저승길로 가버렸다. 참고로 둘의 친분을 바탕으로 삼성과 요미우리 자매구단 관계를 주도적으로 맺기도 했다.[7] 특히 3년 동안 KBO 좌완투수 중 유일하게 단일시즌 2완봉 이상 기록했다.[8] 1985년 삼성의 베로비치 스프링캠프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에이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로부터 배웠다.[9] 만약 삼성이 우승했다면, 최동원이 아닌 김일융이 한국시리즈의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10] 1977~1978 시즌성적을 보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1976~1979년 혹사로 그 이후 성적이 감소했다는 점도 감안을 해야한다.[11] 김시진은 3, 5차전 패전 투수가 되었지만 김일융은 당뇨병에 걸린 와중에도 2차전 승리 투수가 된 걸 보면 실로 대단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12] 하지만 민단계열의 요미우리 직속 선배인 장훈은 한국어가 유창하고 장명부처럼 모친과 친형의 선영을 경남 창녕군(장훈의 본적지이기도 하다.)에 모셔다 놓을 정도로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13] 장명부는 한 시즌 30승을 찍긴 했지만 그 이후 성적이 곤두박질쳤고(그래도 장명부는 비록 일본으로 귀화했지만 자신을 통명인 '후쿠시 히로아키'가 아닌 본명인 아키오(明夫)로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고, 부친이 돌아가시면 고향인 충남 아산의 선산에 묻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등 자신이 한국계라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다. 서툴긴 해도 인터뷰 때마다 가급적 한국어로 말하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다니엘 리오스는 약물 때문에 논외. 게다가 김일융은 3년 내내 꾸준히 좋은 성적을 냈다. 그나마 비견될수 있는 선수를 곱자면 앤디 밴 헤켄과 더스틴 니퍼트 정도. 하지만 이 둘도 2010년대 이후에 활동한 선수들이니...[14] 1984시즌 개막전 삼미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했다가 금광옥에게 3점 홈런을 맞으며 김시진의 승리를 날려버렸고 김일융 자신은 연장전에서 삼성이 결승점을 뽑으면서 승리투수가 된 게 결정적이었다. [15] 프로필과 달리 장효조의 실제 출생 연도는 1954년이라는 말이 있다.[16] 하필이면 그 해가 장효조의 마지막이 되었다.[17]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컴백상을 모방해 부상, 부진 및 질병을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한 선수에게 주는 특별상. 1974년부터 시상 중인데, MLB와 달리 두드러진 성적을 낸 재기 선수가 없을 경우 수상자가 없고 그 사례가 꽤 많다.[18] 2019년 기준으로 김일융이 당뇨병에 걸린지 33년이나 되는 해이다.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라 볼 수 있다.[19] 사실 당뇨병은 합병증이 무서운 거지 혈당수치가 안정적이면 크게 문제될 건 없다. 매일 식이조절과 운동을 꾸준하게 병행하면 당뇨병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20] 김시진과 함께 공동 1위. KBO 최초의 좌완투수 20승 기록이기도 하다. 토종 좌완 투수는 야생마와 양현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세우지 못한 대기록. 외국인 좌완투수 중에서는 앤디 밴 헤켄이 2014년에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