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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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남도 부여군에 위치한, 지금은 터와 석탑 그리고 석불좌상만 남아있는 백제 시대의 절이며, 미륵사와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절이자, 사비백제 시대의 대표적인 불교유적이다. 현재 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역사
이 절이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고 한다. 다시말해 정림사는 사비백제 시대에 백제의 수도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설물로서 여겨졌다는 이야기다. 폐사지가 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고려시대 불상의 존재나 아래 설명할 고려시대 기와조각의 존재를 볼 때 적어도 신라시기를 지나 고려 초기까지는 사찰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절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그 이름도 잊혀졌지만,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1] 라는 명문이 적혀 있어, 정림사라는 이름이 밝혀졌다. 이 명문이 아니었다면 청암리 사지나 경주 장항리 사지마냥 현재 주소를 따 동남리 사지라고 불렸을지도 몰랐을테니 천운인 것이다.[2] 이후 2008년 발굴조사를 한번 더 하게 되고, 이와 동시에 정림사의 유물을 보관하고 전시한 정림사지 박물관이 개장하였다.
3. 절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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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후지사와 가스오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정림사의 가람배치는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있으며, 강당 건물과 중문이 회랑으로 이어져있는 북위의 양식인 일탑식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백제의 영향을 어느정도 받아서 세워졌다고 알려진 일본의 시텐노지에서도 볼 수 있는 가람배치 형식으로, 이후의 연구에서도 사비백제시대의 절은 모두 이런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의견이 정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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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8년 정림사지를 재발굴 해본결과, 강당 좌우에 2구의 부속건물지와 금당뒤의 승방지가 발견되었다. 다시말해, 정림사의 가람배치 형식은 이전에 정설로 통하던 중문과 금당이 회랑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가 아닌 회랑이 각각 동회랑, 서회랑, 중문과 이어진 남회랑으로 분리되어있고, 동, 서회랑이 각각 금당 동, 서쪽에 위치한 부속건물에 이어져있는 형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발굴된 능산리 사지와 왕흥사지의 가람배치도 이런 형식의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정림사는 이후 사비기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 양식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기단은 기와를 쌓아만든 와적기단임이 밝혀졌으며, 현재는 불상의 보호각으로 사용하기위해 복원한 강당을 제외하고 이 와적기단 유구만 복원했다.[3]
3.1. 정림사지 오층석탑
4. 사적 제301호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