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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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5층 석탑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백제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1. 개요
백제 후기 수도 사비의 중심에 있었던 사찰 정림사지에 남아있는 석탑.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특이한 부분으로는, 석탑인데도 목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660년 백제멸망전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7월 18일 멸망시킨 후 한 달 정도가 지난 8월 15일에 이 탑에 정복 기념으로 새긴 비문이 남아있다. 그리하여 평제탑(平濟塔)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형식상으로도, 역사적 이벤트상으로도 나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기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의 단골소재다. 700여 년의 유구한 백제 역사에 비하면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의 문화유산은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조각이나 공예품에 비하여 건축 자료는 극히 적다.[1] 다만,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만이 백제시대 건축의 모든 것을 대변하려는 듯 제자리에 원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남아있다.
백제시대에 건립된 대부분의 사찰은 금당 앞뜰에 거대한 목탑을 두는 가람배치였다. 이 경우 목탑이 차지하는 평면 너비 때문에 금당 앞뜰의 공간은 좁아지게 마련이다. 최초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은 사찰 안에 목탑과 함께 건립되었기 때문에 세부적인 면에서나 평면 구조면에서 목탑이 위치하는 공간 구조를 따르고 있다.
이에 반해 정림사는 기존의 백제 사찰과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기존에 목탑이 금당 앞뜰을 넓게 차지하던 방식을 따르지 않고 탑이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화시키고 있다. 부여 군수리사지의 경우 탑 평면이 금당 앞의 공간을 차지하는 비율은 1:12인 데에 반해 정림사의 경우는 1:100으로 금당 앞뜰이 그만큼 넓어져 공간적으로 여유가 있다. 이는 백제 사찰 가운데 정림사가 유일하다. 목탑가람이 갖는 공간적인 협소함을 석탑가람으로 변모시켜 공간을 확보한 점에서 일대 변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인은 미륵사에서 시작된 석탑을 완벽한 단탑(單塔)가람으로 소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간적인 장점으로 변모·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면서도 금당 앞뜰을 대각선으로 연결하였을 때 정(正) 중앙에 탑을 위치시켜 넓은 공간에서도 탑이 공간과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장악하도록 하는 건축 기법을 사용했다.
3. 비문
이 탑이 평제탑, 평제비라 불리는 이유는 탑의 초층 탑신 전체 면(4면)에 소정방이 전승기공문을 새겼기 때문이다. 비문의 정확한 이름은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다. 전체적인 형식은 1면 24행, 2면 29행, 3면 28행, 4면 36행으로 총 117행이며 각 행은 16, 18자로 이루어져 총 2126자나 된다. 제작 연도와 제작자의 이름도 정확하게 기록해두었는데 현경 5년(660년, 무열왕 7년) 8월 15일, 당나라의 권회소가 글을 썼다.
내용은 당나라의 고종이 소정방으로 하여금 사비성을 함락시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왕태자 부여융과 부여효 외 대좌평 사택천복, 국변성 등 7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는 내용과 전투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한 주요 공적을 기록했다. 또한 백제를 접수한 후 행정 구역 정리를 한 내용도 있는데 5도독, 37주, 250현을 두고 호 24만, 인구 620만을 편호로 정리하고 오랑캐(백제)의 풍속을 바꾸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왜 굳이 불탑에다가 이런 글을 새겼냐면 의자왕을 붙잡은 것이 660년 7월 18일이고 이 비석을 새긴 것이 8월 15일, 당군 주력이 본국으로 철수한 것이 9월 3일이었다. 비석을 새로 만들 큰 돌을 캐서 연마하고 글씨를 새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 백제의 수도 사비 시가지 한복판에 이미 크게 서 있고 여러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이 탑에 글씨만 새긴 것이다. 실제로 비문을 보면 처음엔 글씨체가 반듯하다가 뒤로 갈수록 고르지 못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는 비문 글씨에 붉은색 물감칠을 했지만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 물감이 바래서 붉은색은 아주 미세하게만 남아 있다.
4. 바깥고리
5.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1] 건축물은 남아 있는 것이 아예 없으며, 석탑 몇 기 정도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