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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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 당시의 동나성 전경. 파란색 갑바가 씌여진 방향으로 성벽으로 북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능사와 능산리 고분군에 인접해있다.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58호'''
'''부여 나성'''
夫餘 羅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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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 일대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397\,533㎡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백제
'''위치'''



1. 개요
2. 조사 내용
2.1. 서나성과 남나성의 존부
2.2. 동나성과 북나성의 발굴
3. 청산성
4. 관련 유적 /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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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복원중인 '부여 나성'의 모습.
부소산성, 관북리 유적 등의 사비기 백제의 도성을 구성했던 최외곽의 장성. 나성(羅城)의 의미가 바로 이 부여 나성처럼 도성을 방어하고 경계짓는 넓은 범위의 장성을 뜻한다. 1963년에 사적 제 58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로 나성의 표현은 당나라 때에 생긴 것으로 아성-나성-자성의 이라는 명칭이 생겨났으나 요즘에는 중국의 도성제를 논하더라도 당대(唐代)의 정의처럼 나성이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그냥 외성(外城)으로 표현하고 굳이 나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정의라기보다는 함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한데 여하간 나성이라고 부르는 데에 내포된 함의는 도성의 구성요소이면서 지형에 맞게 형성되어 도성의 일부 생활공간을 방어하고 경계짓는 것을 뜻한다. 사실 정의나 함의가 무색하리만치 도성제나 성곽을 논함에 있어 나성이라는 표현은 자주 쓰이지 않고 통상 내·외성으로 이라는 용어가 흔히 사용되며, 특히 한국에서는 '나성'이라고 하면 이 부여 나성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사전적 정의가 있는 일반명사이다보니 이 유적을 부를 때 부여 나성이라고 같이 말하는 편이다.[1]

2. 조사 내용


근대적인 고고학 조사를 처음 실시한 때가 일저시대였으므로, 당연히 이때 조사한 이들도 일본인 학자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 대학박물관을 위시한 각종 문화재 관리 관계기관의 체계가 정립되고 발굴기법 등이 진전되면서 부소산성, 정림사지와 같은 부여군사비기 백제의 유적들을 우리 손으로 조사하였는데, 이때에 나성도 조사했다.

2.1. 서나성과 남나성의 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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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도성과 부여나성.[2]
일제강점기 및 부여 나성이 막 발굴되던 시점에는 나성이 동서남북 모두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했었다. 구간별로 동, 서, 남, 북나성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조사결과 서나성과 남나성은 없었다. 남나성은 우리 학자들도 실제 있을 가능성이 거의 앖다고 예상했지만, 서나성은 실물일지도 모르는 흔적이 있었다. 금강을 따라서 토루가 길게 있었는데 이것이 서나성인지 아니면 제방, 자연제방인지를 몰랐다. 성벽 조사는 재정문제 때문에 성벽의 모든 부분을 까는 것이 아니라 일부 지점만 트렌치 조사를 하는 방식이 현실적인데, 1999년에 서나성의 일부 구간에 트렌치 조사[3]를 하면서 소위 '서나성'이라고 불리던 구간이 나성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인공제방임을 알 수 있었다. 결정적인 증거로는 제방의 가장 아래쪽에 오히려 사비기 생활유적이 확인되어 제방이 사비기 주거지를 깔고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졌다. 그뿐만 아니라 절개된 제방의 토층 자체도 일반적인 백제 특유의 판축 방식이 전혀 아니기도 하였다.
1963년에 서나성이 있다는 전제 하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1999년 조사에서 자연제방임이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사적으로 남았다. 하지만 여전히 서나성이 실재 여부를 두고 논의가 있었으나 2010년대에 다시 군수리 일대 서나성을 조사하어 실체가 없음을 재확인했다. 뜬금없게도 서나성 인근에서 조선시대 빙고가 조사되었는데 정작 뉴스는 서나성 유적에서 조선시대 빙고 발견이라는 보도가 있자 다시금 서나성의 존부 문제가 화두에 올랐다. 그래서 사적을 해제하여 확인사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결국 서나성 및 남나성 구간이 2016년에 들어서 사적에서 해제되었다. 아래 후술하겠지만 이후 새롭게 명확하게 확인된 북나성 구간의 일부가 대신 사적으로 추가되었다.#참고
이 경우 생기는 새로운 의문은 '과연 백마강 방면은 어떻게 방어했는가?'이다. 백마강은 한강이나 장강 같은 거대한 강이 아니라, 과거 기준으로도 도하가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기 때문. 강을 낀 다른 도성(평양 장안성, 난징 남경성)들이 강 방면에도 성벽을 쌓았으니 더욱 대조적이다. 하지만 주변의 관방유적을 보면 어느 정도 도성을 전술적으로 방어할 준비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위성사진에서도 부여읍내 서쪽 백마강 건너편에는 부산성이 있고, 축척을 작게 해보면 부여군을 중심으로 방사상의 백제 성곽들이 위치하므로 수도 방어를 나름대로 구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 성곽 자체로의 방어력도 갖추었으나 무엇보다 백제 나름대로의 도성제도의 구성요소로써의 측면-도성과 그 외부의 공간적 구분, 망자와 생자의 공간 구획 등의 의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백제 특유의 도성제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2.2. 동나성과 북나성의 발굴


동나성은 일찍이 일제강점기에도 지적되었으며 공주의 백제 유적하면 유명한 가루베 지온도 부여 동나성을 지적한 바 있었다. 그러한 인식 아래에 1990년대 들어서 조금씩 트렌치 조사를 시작하여 현재처럼 정비복원을 위한 대규모 사업으로 발돋움하였다.
북나성은 80년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개인적 지표조사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성벽이 라인을 추정하는 정도 였다. 10년대에 들어서 일련의 발굴계획이 수립되면서 북나성 구간에 대해서도 서나성처럼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나 부소산성의 오른쪽 옆의 작은 능선에 존재하는 청산성과 연결되어 북나성이 존재함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동나성, 북나성 조사에서 얻은 백제 토축성벽의 여러 방식 중 하나는 소위 '석심공법'이라는 것으로 성벽을 구축하기 전에 돌을 길게 성벽 라인을 따라 깔고 그 위로 판축해가며 성벽을 구성하는 방식이 확인되었다. 석심(心)이라고 하긴 하지만 그렇게 석재가 많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과연 구조적, 건축적인 함의를 갖는 석심이라고 정의할만한 기능인지는 다소 의문이다. 그래도 백제의 여러 토성에서도 이와 같은 방법이 확인되고 있으며 백제를 제외하고는 고구려호로고루의 유일한 성벽인 동벽에서도 이러한 공법이 확인된 바 있다.
평지 구간과 산지 구간의 축성법에서 거의 같지만 지형적 차이가 있다. 둘다 편축성벽이며 소위 외면석축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바깥쪽만 석축이고 내부는 사실상 토축, 판축으로 구성하는 방식이다.
평지 구간에서는 성벽이 자리할 공간의 바닥면을 정지(整地)하였으며 특히 석축이 쌓이는 바깥쪽 부분은 특별히 더 깊게 파서 정지를 꼼꼼히 하였다. 석축을 쌓아 올리면서 체성을 구성하는 판축 부분을 같이 쌓아 올렸으며 전체적으로 성벽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아 체성을 구성하는 판축부가 석축부분의 하중을 받아내는 구조로 만들어 구조적 안정성을 더했다. 특히 체성을 구성하는 판축도 3개 구간으로 나누어 판축하였으며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점차 기울여 판축함으로써 내탁부가 외면 석축부의 하중을 받아내는 기능을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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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나성 단면도
동나성 단면 모식도
동나성 평지구간의 단면도와 모식도. 위로 쌓아 올려가면서 판축을 뒤로 물려가면서 뒷채움석과 맞물린 판축과 내탁부의 판축이 계단식으로 맞물리게 쌓았아 구조적 안정성을 더했다. 참고로 모식도와 같은 형태를 편축이라고 한다.
산지 구간에서는 성벽이 자리할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깎아내고 바닥면을 마찬가지로 정지하였으며 석축과 판축을 동시에 쌓아 올렸다. 평지구간과 거의 비슷한 과정이지만 산지 경사면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탁부를 완전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였다.[4] 그러다보니 판축부가 그렇게 많을 필요도 없었다. 판축에 의한 내탁이 없기 때문에 석축부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서 석축의 아래쪽에 판축으로 하중을 보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 밖에도 구간에 따라서 부엽공법과 같은 고대 축성 기술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삼국시대 성곽의 공법 상의 특징들은 완전히 해당 국가 고유의 것인 경우는 잘 없고 건축적 요소다 보니 삼국 모두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부엽공법도 처음에는 신라 특유의 방법 정도로 알려졌었지만 삼국시대 다른 국가의 건축물 및 성벽에서도 확인된 바 있었고, 기단보축이라 불리는 석축 성벽 아래의 체성벽 하중 보완 장치도 신라 고유의 것이 아니라 삼국 모두 어느 정도 비슷한 형태의 시설이 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백제의 영정주공 역시 마찬가지. 약간씩 국가마다의 특정 공법 내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특정 공법이 있으므로 ㅇㅇ국이라고 완전히 말하기는 어렵고 전후 맥락을 따져봐야 알 수 있다.

3. 청산성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59호'''
'''부여 청산성'''
夫餘 靑山城
Chaengsansoeng Fort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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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쌍북리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79\,666㎡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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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나성 구간과 청산성. 부여나성의 북나성과 청산성의 북벽은 공유되고 있다.
북나성과 연접해 있는 부소산성의 동쪽의 작은 산성. 2010년대 후반에 조사되었는데 대벽 건물지와 같은 건물지 자체로도 위계가 높은 건물지가 성 내부에 있다는 것이 조사되었다. 특히나 중국제 자기편이 출토되어 주목받은 바 있다. 부소산성과 나성 등 일대 유적과 마찬가지로 1963년에 사적 제 59호로 지정되었다.

4. 관련 유적 / 둘러보기 틀





[1] 공식명칭 또한 '부여 나성'이다.[2] 서나성과 남나성은 조사 결과 실존하지 않았다.[3] 군수리 지점이라고도 한다.[4] 원래 지형이 내탁과 같은 기능을 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