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백제)
[clearfix]
1. 개요
백제의 제26대 국왕이자 건길지.'''짐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금이 남긴 마지막 말.
삼국사기에는 왕자[8] 부여명농이 즉위하자 국인(國人)들이 성왕(聖王)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를 보아 존호가 그대로 시호로 굳어져서 사용된 듯하다. 삼국사기에는 명왕(明王)이라고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양서》(梁書)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明)이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에 더 많은 기록이 나오는 왕이기도 하다. 특히 긴메이 덴노의 일생을 다룬 《일본서기》 흠명기는 성왕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백제의 원서인 백제본기의 기록을 충실히 반영해 놓았다. 일본 천황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제작된 《일본서기》답게 성왕이 긴메이의 신하처럼 기록을 해 놓았다.
《일본서기》에는 과거에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의 왕으로서 가야를 백제의 영향력에 넣고 고구려에게 복수하려는 집념의 소유자로 나타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지식이 영매(英邁)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고 성왕을 긍정적으로 평하는 기록이 남아있고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고 찬양하고 있어서 성왕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능력도 있었고 꿈도 높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비운의 임금이다.
2. 생애
2.1. 즉위 초기
정확한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다. 무령왕의 아들이라지만 즉위 기사의 삼국사기 백제본기 다른 부분에서 장남이라면 으레 들어가는 원자(元子), 장자(長子) 같은 표현이 없고 그냥 아들(子)이라고만 되어 있어 장남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성왕의 장남이 확실해보이는 위덕왕이 일본서기의 백합야 전투 당시 자기소개 기록상 554년에 29세였으므로 525년생인데 전근대에 장남을 보통 10대 후반~20대 초반에 얻으므로 역산하면 아버지인 성왕의 출생 연도는 500년대 초반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즉, 성왕은 461년생인 아버지 무령왕이 40세를 전후해 늦게 얻은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9]
523년 음력 5월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523년 음력 8월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을 보내 물리쳤다. 524년 양나라(梁)와 국교를 더 긴밀히하여 양무제로부터 지절 도독 백제 제군사 수동 장군 백제 왕을 책봉받았다.
525년 음력 2월 신라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526년 음력 10월 웅진성을 수리하고 수성하였다.
그런데 529년 음력 10월 고구려 안장왕이 친정을 감행,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여 기어이 북쪽 변경에 있던 혈성을 함락시켜 버린다. 이에 성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군에 맞서 싸우게 하였고 이에 오곡원(五谷原) 전투를 치루게 되는데 2천여명의 전사자를 내는 등 패하고 말았다. 그 뒤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기까지 한 것은 덤.[10][11] 결국 무령왕 이후 한동안 소원해져 있던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해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이후 고구려는 안원왕 말년 추군과 세군의 내전부터해서 내부 혼란이 가속화되었고 이 덕택에 성왕은 마음놓고 내정 개혁, 가야 방면 진출, 한강 유역의 수복을 시도할 수 있었다.
2.2. 사비 천도
[image]
동성왕과 무령왕이 웅진 백제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온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하여 재위 16년(538년)에 사비(泗沘)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기존 수도였던 웅진성(熊津城)[12] 은 계획된 수도 선정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침으로 위례성을 빼앗기고 외부 세력에 내쫓기는 형태로 문주왕이 천도한 것으로 전시수도ㆍ임시수도의 성격이 다분했다.
위성 지도로 공주 공산성 주변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주변 산세와 강줄기가 침략을 방비하기에는 도움이 되지만[13] 터가 좁은 편이라서 오래 쓸 나라의 중심지로는 아쉬움이 있었다.
반면 사비성(泗沘城)[14] 은 부지가 넓고 기존 수도였던 웅진성과 멀지 않기에 성왕의 철저한 계획 하에 천도한 것이다. 따라서 사비 천도는 왕권과 국력 강화 정책의 마무리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비 천도에는 사비 지역의 토착 신진 세력이었던 사씨(沙氏, 沙宅氏) 가문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사비 천도 후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하여 부여의 정통 후손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15]
2.3. 타국과의 교류와 불교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가지면서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사(畵師) 등을 초빙하고 열반등경의(涅槃等經義)를 수입하여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미륵 신앙을 이용해 자신을 미륵이라 칭하면서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또한 성왕은 인도로부터 범어(梵語)로 된 5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하여 고승들을 모아 5부율을 번역시키고 아울러 담욱(曇旭)·혜인(惠仁) 등이 지은 율소(律疏) 30권에 친히 비담신율서(毗曇新律序)를 써서 백제신율을 성립시켰다. 성왕의 이러한 계율의 장려는 불교 교단의 정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송하여 석가 불금 동상 1구, 번개(幡蓋)[16]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보내어 줌으로써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성왕은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선진 문물의 전수자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2.4. 관제 및 지방통치 조직 정비
이와 더불어 사비 천도를 전후하여 웅진 시대 이래 행해졌던 내외관제를 정비하여 지배 체제의 정비와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중앙 관제로는 1품 좌평(佐平)에서 16품 극우(克虞)에 이르는 16관등제와 전내부(前內部) 등 내관 12부와 사군부(司軍部) 등 외관 10부로 된 22부제가 정비되었다.
또 왕도의 통치 조직으로서는 수도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의 '''5부(五部)'''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五巷)을 둔 5부 5항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지방 통치 조직으로는 종래의 담로제(檐魯制)를 개편하여 전국을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의 '''5방(五方)'''으로 나누고 그 밑에 7개 ∼ 10개의 군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정비하였다.
이와같이 중앙 관제와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 운영에 있어서 귀족 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2.5. 외교와 국방
성왕은 국제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온 신라와의 동맹 관계를 꾸준히 이어나감으로써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양(梁) 및 왜(倭)와의 외교 관계를 지속하는 한편 무역과 이에 따르는 문화 교류 역시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551년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공격해오자, 백제는 패퇴하여 금현성을 빼앗겼고 이어 도살성마저 함락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신라 원군이 도착하여 고구려군을 격퇴시킨다. 신라는 패퇴하는 고구려를 뒤를 쫒아 강원도 일대의 고구려 영토를 전격 침공했고, 이에 백제도 경기도 지역 고구려 영토를 침공했다. 백제는 북진하여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남평양(南平壤 : 고구려에서 지금의 서울, 남양주를 이르던 말로 고구려 역시 한강일대를 수도 평양성만큼이나 중요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를 빼앗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손아귀에 넣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자기 강역에 편입시켰다.
11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서기 551년,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
또한 반로국[17] 등을 위시한 가야 연맹을 사비회의를 통해 자신들의 영향권 안에 넣기 시작했으며, 왜왕 말도 안 듣는 왜인 오미노 케누(近江毛野)가 탁순국(지금의 경남 창원시)에서 횡포를 부리자 그를 격퇴해주는 대신 가야 남부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쌓아 탁순국은 물론 가야 연맹 No.2인 안라국(지금의 경남 함안군)을 무력화시켰다. 일본서기 543년조에는 임나의 하한(下韓)에 있는 백제의 군령(郡令, 군장이라는 뜻)과 성주(城主)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심지어 가야의 일부 지역까지는 백제가 직할 통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태식 교수는 하한을 지금의 경남 남해군으로 비정했는데, 남해군에는 실제로 2014년 백제계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성왕은 가야 소국의 사신들을 초청해 사비회의를 열어 가야 소국을 신라에게서 백제가 보호해 줄 것이라고 선언하고 선물을 뿌리며, 안라국이 신라에도 접촉을 시도하는 정황이 포착되자 신라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회유와 협박을 하는 등 가야 소국들을 철저히 통제하기 시작한다. 신라는 가야의 일부인 탁기탄, 탁순국, 구야국을 먹는데 성공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가야 지역은 성왕의 영향력 하에 놓인 것이다.이 해(551년)에 백제 성명왕이 친히 백제의 군사[衆]와 두 나라【두 나라는 신라와 임나를 말한다.】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한 진군하여 평양(平壤)을 쳤다. 모두 6군(郡)의 땅은 고지를 회복한 것이다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12년 백제의 성명왕이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차지하고 평양을 침'''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백제의 간섭을 받게 된 안라국은 왜인을 매수해서 백제에게서 벗어나려 아등바등 몸부림도 쳐보고[18] 나중엔 고구려와 은밀히 손을 잡기까지 하였으나 당시 고구려는 전성기 다 끝나고 귀족들 간의 내전으로 약회된 상태라, 동예인까지 박박 긁어모아온 고구려군을 독성산성 전투에서 나제 연합군이 크게 깨트리기도 했다. 이 때까지는 진흥왕도 쾌히 수천의 원군을 보내주는 등 나제 동맹이 아직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한편 이 사건 이후 가야는 백제의 속국으로 전락해 한강 유역 공격과 관산성 전투에서도 백제의 우군으로 동원되는 등 철저히 백제를 돕게 되었다.
자세한건 사비회의 문서 참조.
2.6. 신라와의 미묘한 관계
548년 독성산성 전투에서 동맹국인 신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피한 백제는 이후 신라와 좋은 것 같으면서도 은근 미묘한 관계를 이어갔다.
자세히 말하면 일단 독성산성 전투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성왕은 550년 2월,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해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3월, 보복에 나선 고구려가 금현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될 위기에 처했으나,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이 도착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다시 말해서 백제는 대고구려 전선에서 연이어 승리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동맹국 신라에게 의존한 결과였던 것이다.
고구려군이 물러나자, 이사부는 고구려의 재침에 대비해 1천 명의 군대를 금현성과 도살성에 주둔시키고, 성을 증축하였다. 다시 말해서, 도살성과 금현성이 자연스레 신라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성왕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전혀 클레임을 넣지 않았는데, 독성산성 전투 및 도살성과 금현성 전투 관련 기록이 보여주듯 당시 백제가 단독으로 고구려를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음으로 신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19] 오히려 신라가 연속으로 고구려군을 격퇴할 정도로 강성해져 있었다.
이듬해인 551년, 돌궐의 침입을 받은 고구려의 남쪽 방비가 허술해진 기회를 노려 백제와 신라는 함께 한강 유역을 공격했고, 그 결과 신라는 한강 상류를, 백제는 하류를 차지하여 백제는 잠시나마 위례성이 있었던 고토를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상류를 차지한 신라가 서진해서 하류까지 모두 먹게되면서 백제의 고토 회복도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대해 과거에는 신라가 백제의 한강 하류 지역을 기습공격해 빼앗았다는 설이 주류였고, 교과서에서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서 하류 유역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백제가 자체적인 사정으로 불가피하게 스스로 한강 하류를 포기하였고 신라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군대를 몰아 한강 유역 전부를 차지했다는 설이 일부에서 대두되고 있다.[20]
일본의 사서 일본서기는 백제신찬 등 백제 사서를 직접 인용했기에 이 시기 역사를 알아보는 데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대놓고 백제가 한강 유역을 포기했고 신라는 그냥 그걸 낼름 먹었을 뿐이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이 해(552년)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삼국사기에서도 한자의 미묘한 의미 차이지만, 백제 동북을 취(取)했다 쓰고 있다. 참고로 성왕, 진흥왕 본기의 다른 부분에서 백제나 신라가 뭔가 공격해서 빼앗을 때는 공취(攻取), 침(侵) 자를 썼다. '가지다'와 '치다', '침범하다'는 같은 상황에 쓰일 여지는 있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백제의 한강 유역 포기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임용한[21] 인데, 그 이유로 3가지를 든다.
- ① 북쪽의 고구려와 동남쪽의 신라로부터 양면에서 압박을 받게 되는 점
- ② 신라는 고지대인 남한강의 상류를 차지하여 백제에 비해 군사적으로 유리한데, 백제가 이러한 지리적 불리함을 상쇄하고 전술한 양면 압박에 대비해 많은 군사력을 한강 유역에 집중하면 수도 사비성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점
- ③ 옛 수도였던 한강 유역을 회복하면 왕권이 강화될 것을 우려해 충남 지역에 연고를 둔 백제 귀족들의 한강 유역 사수에 부정적 입장이었으리라 짐작되는 점[22]
물론 이는 아직 확정된 설이 아닌데, 두 가지 측면에서 이의가 제기된다.
- 1) 삼국 시대 당시 한강 유역의 중요성
- 2) 한강 하류 방어에 대한 신라의 입장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아 최대한 연안항해를 했던 당대에 한강 유역은 대중국 교류의 교두보였으며,[23] 지금은 그렇게 안 보이지만 식량 생산량이 어마어마한 곡창 지대였다. 흔히 백제가 차지한 전라도에 한반도 최고의 곡창 지대 중 하나인 호남 평야가 있으니 백제에게 한강 유역의 곡창 지대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당시에 김제 만경 평야는 대부분이 뻘밭이라 본격적인 곡창 지대로 자리매김하기 전이었다. 한 마디로 한강 유역은 지리적인 불리함을 감안하더라도 절대 백제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또한 백제의 한강 유역 포기설의 가장 큰 근거로 양면 압박을 받게 되어 방어하기 어려운 지역을 방어하려고 많은 군사력을 집중시키면 수도를 포함한 국가의 중심부가 위험해진다는 군사 지리적 문제점을 드는데, 이는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한강 상류를 차지하여 고구려와의 전선이 백제보다 더 길게 형성되어 있고, 중심지인 경상도 지역이 백제의 중심지보다 훨씬 한강 유역과 거리가 먼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생기는 군사 지리적 어려움이 더욱 컸다고 볼 수 있다.[24]
그러나 백제의 한강 하류 지역 포기의 당위성은 충분하다. 전술했듯이 한강 유역은 농업 생산력이나 외교 등 모든 측면에서 가치가 높아서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영토였던 것은 사실이나, 유지할 국가적 역량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대중국 교류 측면에서 보면 물론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 이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나, 백제는 한강이 없으면 서해 진출이 아예 불가능한 신라와 달리 대체 경로로 당진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당시 항해 수준이 연안항해 위주였으므로 백제로서도 한강 유역을 이용하는 것이 대중국 교류에 수월했겠으나, 황해를 직접 횡단하는 것도 고구려나 발해가 동해를 횡단해 일본 호쿠리쿠에 사신을 보내는 점이나 혹은 백제 멸망 당시의 13만 당군 상륙전을 보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반면 한강 유역을 이용한 대중국 연안항해 경로가 아주 안전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초창기 연안항해를 통해 중국으로 가는 경로는 한반도 서북해안과 랴오둥(요동)반도를 거쳐 산둥반도로 가는 것이었는데 당시 랴오둥과 서북해안은 고구려의 영토였고, 이후 경기/충남해안에서 출발하여 장산곶을 거쳐 산둥반도에 도착할 수 있게 될 만큼 항해기술이 발달했을 때도 역시 중국으로 가는 최단거리에 위치하는 장산곶은 고구려의 영토였다. 평양으로 가기 위해 산둥에서 오는 군대와 남쪽에서 바다로 올라오는 군대가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이며, 이 곳이 뚫리면 대동강 하구까지 쉽게 진출할 수 있어서 현재 북한도 이 곳의 방어태세를 단단히 하고 있을 정도의 요충지므로 당시 고구려도 이 곳의 경계를 엄중히 했을 것이 분명하다. 종합하자면 대중국 외교를 위해 고구려의 방해 위험이 존재하더라도[25]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한강유역을 이용해야 하는 신라에 비해 대체 경로가 있는 백제에게는 상대적으로 대중국 외교를 위한 한강 유역의 필요성이 떨어졌을 수 있다.
대 고구려 외교 측면으로 보더라도 신라가 유리한 것이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의 양면전선 문제가 백제보다 덜했던 것이 고구려와 신라는 장수왕 중기까지만 해도 동맹국이었던 양국이었고, 광개토대왕 시절 신라는 고구려에게 나라의 존속을 빚진 적도 있다. 비록 적대국으로 돌아선 양국이었으나, 서로 큰 원한을 진 원수 관계는 아니었다. 반면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가 서로의 국왕을 죽인 전적이 있는 원수였으므로[26] 고구려가 내부 사정과 북방의 문제로 영토를 넓게 맞댄 신라의 손을 잡고, 이에 양면 압박의 위협에서 벗어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한다면[27] 백제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므로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유지할 수 없어서 철수했다는 주장의 당위성이 실린다.
군사적 측면에서 분석해도 신라의 우위이다. 소백 산맥 부근에 위치한 신라의 성들은 백제의 중심부를 겨냥하고 있고, 한강 유역만 놓고 봐도 이 곳에서 양국 간의 전투가 벌어지면 한강 상류를 차지하여 물론 수로를 이용할 수 있는 신라가 보급 면에서도 육로를 이용해야 하는 백제보다 우위에 있으며, 신라로서는 불리해지더라도 상류로 철수하여 고지대의 이점과 동남쪽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28] 방어하다가 증원군이 도착하면 반격할 수 있었으니 신라의 한강 하류 유역 방어가 백제보다 여의치 않았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
게다가 '신라 역시 한강 하류 지역 방어가 여의치 않았다.'는 사실은 '백제가 신라와 비교해 한강 하류를 방어하는데 불리하지 않으니 백제가 자발적으로 한강 하류 지역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주장의 논거인데, 그 말대로라면 신라의 선제 공격에 대한 당위성도 약해진다. 쉽게 말해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고 방어하는데 겪는 어려움이 백제보다 컸다면 신라는 이 지역을 공격해서 차지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럼에도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했다는 것은 백제가 포기해서 전투 없이 접수했다는 결론밖에 안 나온다. 다시 말해서 백제가 한강 유역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신라보다 불리했거나 백제에게 다른 사정들이 추가적으로 있어서 물러났다는 주장의 신빙성만 높여주는 셈이다.
성왕의 복수 다짐을 신라의 선제 공격 근거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무혈 입성이라도 피는 똑같이 흘렸는데 동맹국이 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이익을 전부 차지했다는 사실에 백제 측에서 당연히 반감을 가질 수 있다. 오히려 성왕이 즉각 반격에 나서지 않고 국혼까지 맺었다는 것은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를 탈취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더 힘을 실어주는 근거가 된다. 패전으로 영토를 빼앗겼는데 공주를 시집보내며 화친을 청하는 것은 자존심 문제를 넘어서 왕과 왕실의 권위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29]
당시의 나제동맹 지속 여부와 영토 분할 합의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문헌적인 확증이 없는 상황이라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한강 유역 영토를 백제가 하류, 신라가 상류로 나누기로 합의한 것도 초반 점령지를 가지고 추측에 의존해야 한다. 생산력이 높은 한강 하류의 가치가 상류보다 뚜렷이 높으므로 그런 일방적으로 손해인 합의를 신라가 사전에 했다는 것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국가 간의 영토 문제는 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민감하여 가급적 확실히 해야 할 문제이므로 사전 합의도 없이 동맹을 맺고 전쟁에 임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양국이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계산 없이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따라서 한강 상류는 신라가, 하류는 백제가 차지하는 영토 분할 합의를 하긴 했는데, 신라는 전술한 백제에 대한 군사 지리적 이점과 대 고구려 외교 여지를 앞세워 선제 공격을 하거나 백제가 스스로 포기할 경우 한강 하류를 접수할 계획을 미리 세우고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의 전쟁에 돌입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어쨌든 이유가 전투에서의 패배이든지 자발적 포기든지 도살성과 금현성을 비롯해 한강 유역 전부를 신라가 차지하는 상황에 대해 성왕은 겉으로는 공주를 신라로 시집보내는 등 드러내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적잖이 들끓었을 것이 자명하다.
2.7. 관산성 전투 패배와 최후
신라가 한강 하류를 그대로 집어 삼킨 이후 성왕은 553년 딸 소비 부여씨를 신라 진흥왕에 시집보내며 나제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제스처를 취했다.[30] 그러나 이는 관산성 전투를 위해 신라의 경계심을 흐뜨려놓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같은 시기 일본서기에서는 정월에 백제가 상부(上部) 덕솔(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일본에 보내 군대 파견을 요청하고, 이에 이 요청을 받아들인 일본이 6월에 전쟁물자를 백제에 보냈으며, 554년 초에도 구원군, 말, 배를 백제에 보내주고 백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 선진문물을 답례로 보내주는 등 뒤에서 비밀리에 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에 원군 요청하고 일본이 원군과 무기를 보내주는 것 위주로 기록되어 있지만, 백제 내부에서도 이 시기 전쟁준비를 했을 것으로 점쳐볼 수 있다.
한편 당시 신라는 551년 진흥왕이 섭정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친정하게 되었고, 직후 진흥왕이 신라 조정의 세대교체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간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이사부 등 원로들을 2선으로 물러나게 하고 김무력 등 신진 세력을 기용하는 등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성왕은 딸을 신라로 시집보내 당시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던 신라 왕실과 조정의 내부 동향을 파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성왕과 태자 창은 신라의 이러한 정권교체기를 절호의 기회로 여겼던 듯 하다. 불패의 명장 이사부가 어이없이 퇴진한 가운데, 당시 신라군을 이끄는 장수들 역시 젊고 경험이 부족한 장수들인데다가 진흥왕이 무리하게 정권 교체를 단행하면서 군 내무 지휘 서열까지 꼬여버린 상황이었다. 당시 신라를 이끄는 진흥왕은 21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진흥왕은 후세에 명군으로 고평가를 받게 되었지만, 이 당시 백제에게 진흥왕은 아직 아무런 업적이 없는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이에 554년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31] 태자 창(昌)의 강경한 주장을 받아들여 신라를 침공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 정벌군에는 가야와 일본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 같은 군사 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전투의 절정은 관산성 전투였다.
그런데 관산성 전투의 경과 및 성왕이 죽음을 맞는 과정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본서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32]
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33]
《삼국사기》 백제 본기 성왕조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 >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 <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高干都刀}> ,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 왕 명농이 가랑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 6백 명을 참하고,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일설로, 사로잡힌 성왕은 참수되었으며 몸은 백제로 돌아갔지만 그 목은 신라 왕궁 북청 계단 밑에 묻었다 전해진다. 《일본서기》에는 유독 신라를 미워하는데, 사실은 《일본서기》가 백제의 관점을 그대로 자신들의 관점으로 바꿨다는 의혹을 가지게 만드는 점 중의 하나다. 성왕을 사로잡은 부대 지휘관이 금관 가야계이며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金武力)이다. 가문이 그야말로 백제의 원수였다. 문무왕도 김무력의 손녀 문명왕후의 아들로 외증손이고.신라는 명왕(明王, 성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다른 이름은 谷智이다】에게 "고도는 천한 노(奴)이고 명왕은 훌륭한 임금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훌륭한 임금을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 의자)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머리뼈는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12월 (554)
그러나 이 사건은 당대 백제의 유민들 사이에 돌던 소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위에 옮긴 일본서기 기록부터가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본문은 구덩이를 파 묻었다는 것이고 신라 궁전 계단 밑에 머리를 묻었다는 것은 '그랬다는 설이 어떤 책에 있다' 정도로 처리하고 있다. 군주제 시대에는 보통 적국 군주라도 대우를 주는게 동서고금의 보편적 현상이었으며, 무엇보다 왕궁을 매번 다녀야 할 지배층이 소름 끼쳤을 테니 말이다. 또한 적국의 왕이라도 그렇게 대우를 하는 건 신라 스스로도 본인을 깎아내리는 격이기 때문이다. 당장 일본서기 기록만 봐도 성왕의 목을 베기 전에 일단 신라 장군이 절부터 올렸다. 적이라도 고대 사회의 국왕은 고귀한 혈통이며, 그러한 사람의 목을 계단 밑에 묻어서 아무나 밟도록 만들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신라가 귀족의 혈통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은 골품제로 이미 유명한 사실인데, 당장 성왕의 딸 소비 부여씨가 진흥왕에게 시집갔던 것과 같이 백제 왕가와 신라 왕가는 서로 대등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 관산성 전투 기준으로 바로 얼마 전 일이었다. 다른 나라도 다 그렇겠지만 신라는 특히 골품제로 잘 알려져있듯 왕이 아무 가문하고나 혼인을 하지 않았다. 즉 성왕 일가를 신라의 성골이나 진골에 준하는 격으로 간주한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기록을 통해 백제가 신라를 원수로 여기게 되었고, 신라인들의 행위를 잔인하게 묘사하며 복수심을 불태웠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고타소의 시체를 옥중에 파묻은 게 성왕에 대한 복수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고, 문무왕이 백제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운 원인도 '여동생을 옥중에 파묻어서'라고 전해지므로, 이러한 사건들이 쌓여감에 따라서 두 나라 간의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2.8. 사후의 영향
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치 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 대까지 어렵게나마 확립되어 가던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다시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로 전환되었다. 귀족들이 다 뜯어말린 전쟁임에도 성왕 본인과 태자가 강행했다가 왕은 전사하고 무려 3만에 이르는 전사자가 발생하였으며, 어마어마한 피해가 누적되었으니 어찌보자면 왕권의 추락은 불가피한 결말이었다.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동맹 관계는 이 싸움 이후부터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두 나라는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로 빠져버리게 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에 있어서 삼국의 역학 관계의 성격을 결정짓게 되었다. 오히려 백제는 신라 타도를 기치로 내걸며, 예전부터 고국원왕과 개로왕 살해를 비롯해 서로 원한이 많았던 고구려와는 점차 화친, 나아가 동맹을 맺게 되었고,[34] 더 나아가 고구려는 그동안 관심을 갖지 않았던 백제의 동맹국인 왜와도 손을 잡기 시작했으며[35] 신라는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수나라, 당나라에 친하려 하는 등 그 반대가 된다. 원래 외교라는게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되는 것이 현실.
3. 그 외
[image]
[36]
威德戀慕父王像 所造顯之尊像卽 救世觀音像是也。
위덕왕이 부왕 상을 연모하여 만들어서 나타낸 존상이 구세관음상이다.
《성예초(聖譽鈔》[37]
- 호류사 몽전에 보관되어 있는 목제 구세관음상. 성예초에 따르면,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 성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모습을 본따 제작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는데[38] 녹나무로 만들어서 그 위에 금박을 입힌 이 목제 관음상은 실제로 가보면[39] 성인 남성 키와 비슷할 정도로 큰데 높이 179.9cm에 달한다.
-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고 전투에서 패해 일본으로 건너가 흠명천황이 되었다는 카더라가 존재한다.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의 한 로터리에는 성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수도를 부여로 옮긴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성왕 본기'''
一年夏五月 성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좌장 지충이 고구려를 패수에서 격파하다
二年 양 고조가 왕을 책봉하다
三年春二月 신라와 서로 예방하다
四年冬十月 웅진성을 수축하고 사정책을 세우다
七年冬十月 좌평 연모가 고구려와 전투하여 패배하다
十年秋七月 별이 비 오듯 떨어지다
十二年春三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하다
十二年夏四月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다
十六年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다
十八年秋九月 장군 연회가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다
十九年 양에서 모시박사 등을 보내주다
二十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六年春一月 고구려가 예와 공모하여 독성산성을 공격하다
二十七年春一月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 지르다
二十七年冬十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다
二十八年春一月 장군 달기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다
二十八年春三月 고구려군이 금현성을 포위하다
三十一年秋七月 신라가 동북 변경을 획득하여 신주를 설치하다
三十一年冬十月 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가다
三十二年秋七月 성왕이 죽다
'''신라보다 고구려와 더 많이 싸웠다.'''
이는 위의 내용을 봐도 유추할 수 있는게,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싸웠던 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강 유역 수복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
5. 일본서기 기록
※ 일본서기의 내용들은 모두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애초에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이 "역사를 기록한다"보다는 "우리 나라가 세계 최고의 나라다!" 정도의 프로파간다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
- 524년 정월 : 백제 태자 명이 즉위하다.
- 529년 3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항구를 내려달라 요청하다. 안라회의에 사람을 보내다.
- 530년 9월 : 안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모야신을 사로잡다. 5성을 취하다[40]
- 531년 12월 : 백제군이 안라에 진출해 걸탁성을 쌓았다.
- 531년 5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다.
- 541년 4월 : 성명왕이 임라의 한기들에게 덴노의 뜻을 전하다.
- 541년 7월 : 성명왕이 임라에 신하들을 보내다. 그리고 덴노에 부한과 일마의 정사를 아뢰다.
- 543년 9월 : 덴노에게 공물을 바치다.
- 543년 12월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다.
- 544년 정월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다.
- 544년 정월 이달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낮은 이들을 보내왔다.
- 544년 2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받아오다.
- 544년 3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다.
- 544년 11월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러 임라 재건을 도모하다.
- 545년 5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다.
- 545년 9월 : 덴노에게 장육불을 만들어 바치다.
- 546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6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를 바치다.
- 547년 4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다.
- 548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4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윤7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10월 : 득이신에 성을 쌓았다.
- 549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낻.
- 550년 2월 :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 550년 4월 : 일본 사신이 돌아가다. 고구려 노비 7명을 바치다.
- 551년 12월 : 덴노가 보리 씨앗 1,000곡을 하사하다. 성명왕이 백제, 신라와 임라의 병사들을 이끌고 고려를 정벌해 평양을 토벌했다.
- 552년 5월 :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다.
- 552년 10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이해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다.
- 553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 553년 6월 :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 553년 8월 : 일본이 사신을 보내다.
- 553년 10월 : 백제 왕자 여창이 고려군과 싸워 이기다.
- 554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 554년 2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 554년 3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54년 5월 : 일본 수군이 도착하다.
- 554년 12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전투에서 패해 목이 베어지다.
6. 가족관계
7. 대중매체에서
- 2005년 SBS 드라마 서동요의 프롤로그에서 관산성으로 향하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목이 잘리는 장면만 나왔으나 성왕이 죽는 장면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따라서 도도가 말 먹이는 종으로 등장하고 도도가 성왕에게 절을 올리는 모습이나 건네는 말 모두 일본서기에서 그대로 따 왔다. 성왕의 최후는 작중에서 떡밥을 남겼는데 드라마 내 주요 사건 2개와 연관이 되어 있다. 성왕의 목은 신라의 북청 계단 밑에 묻혔고 26년 후 부여선이 다시 신라에 잠입하여 찾아와 제를 올리기로 한다. 그러나 제의 전날 위덕왕은 무선공녀 연가모와 동숙을 하게 되고 이 때 연가모는 훗날 무왕이 되는 부여장을 임신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귀족들에게 소문으로 퍼지면서 위덕왕은 귀족들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고 위덕왕은 연가모를 내칠 수 밖에 없었다.[42] 다시 20여 년 후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있고 백제는 신라의 성을 획득한다. 그러자 신라 측은 20여 년 전 부여선이 찾아간 수급은 가짜라고 주장하며 성과 바꾸자고 했고 서동은 수급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 정변으로 백제에서 쫓겨나 신라에 가 있던 태학사의 기술자들을 다시 백제로 돌아오게 한다. 이 때 선화공주와 아좌태자가 각 국의 대표로 나가 회담을 했는데 선화공주가 아좌태자에게 있던 왕자들의 표식을 보며 훗날 서동이 백제의 왕자임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배우는 안석환.
- 2013년 MBC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 태자 시절의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했는데 배우 조현재가 맡아 앳돼 보이고 많이 어설프던 과거에 비해 남성미와 연기력이 늘어난 걸 볼 수 있다. 캐릭터는 공적인 면에서 냉철하고 유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입이 짧고 깔끔을 떤다. 마음이 있는 여주를 자꾸 골탕먹이며 사지로 내모는 츤데레 속성도 보이고 있다. 성왕(제왕의 딸 수백향) 문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