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빈 홍씨

 



'''조선 선조의 후궁
정빈 홍씨 | 貞嬪 洪氏
'''
'''빈호'''
정빈(貞嬪)
'''출생'''
1563년(명종 18년)
'''사망'''
1638년(인조 16년)
(향년 76세)
'''본관'''
남양(南陽)
'''부모'''
부친 홍여겸[1]
모친 창녕 조씨[2]
'''부군'''
조선 선조
'''자녀'''
1남 1녀
(1녀) 정정옹주
(1남) 경창군
'''묘소'''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애기봉입구 서쪽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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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선조의 간택 후궁. 정정옹주경창군의 어머니다.

2. 생애


전교하였다.

"고례(古禮)에 제후가 아홉 여자를 취한 것은 후사를 넓히려는 것이었으니 그 뜻이 은미함이 있다. 지금 후궁 자리가 많이 비어 내직(內職)이 폐지되어 있으니, 옛 법에 의하여 숙의(淑儀)을 간택해 들이도록 예조에서 승전을 받들라."

《조선왕조실록》 선조 13년 4월 28일

1580년(선조 13) '''후사를 넓힌다'''는 뜻으로 후궁 간택을 하게 되었다. 당시 선조의 왕비였던 의인왕후가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므로 나온 말이다. 이때 전 주부 정순희의 딸, 승훈랑 홍여겸의 딸, 훈련 습독 민사준의 딸이 간택에서 뽑혔는데, 홍씨는 봉상시동[3]에 있는 궁으로 가서 입궁하기 전까지 교육 받았다.[4][5]
처음에 숙의로 입궁한 그녀가 언제 정1품 빈까지 품계가 올랐는지 알 수 없다.[6] 다만, 1592년(선조 25)에 그녀를 정빈이라고 부르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에 적어도 전쟁 발발 이전에 책봉되었을 것이다.[7]
그녀의 삶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임진왜란에 이어 정묘호란까지 겪는다. 정묘호란 시절에는 제천 지역까지 피난 갔는데,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1638년(인조 16)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나라가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재정 상태도 좋지 않아서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를 수가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인빈 김씨의 딸 정혜옹주도 사망했는데, 인조는 이번에는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8] 이때 인조는 "이 상사는 정빈의 상사와 같지 않으니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고 반발을 일축하였다.[9]
[1] 홍여겸은 살아생전에 인동 현감을 지냈고, 사후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2] 내자시 부정 조명원의 딸이다. [3]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당주동 일대. [4] 선조실록 14권, 선조 13년 5월 26일 갑오 1번째기사 # [5] 선조실록 14권, 선조 13년 5월 26일 갑오 2번째기사. # [6] 사대부 집안의 간택 후궁이라 궁인 출신인 경우보다 기록이 보다 풍부했을텐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승정원일기와 당대의 사초를 많이 잃어버려서 알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다. [7]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8일 정묘 8번째기사. # [8] 선왕의 간택 후궁도 예장을 못하는데, 선왕의 서출 옹주는 예장하도록 한 것이다. 신하들이 반발했지만, 인조의 할머니가 누구인지 생각한다면(...) [9] 인조실록 37권, 인조 16년 11월 18일 병자 3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