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빈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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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선조의 간택 후궁. 정정옹주와 경창군의 어머니다.
2. 생애
1580년(선조 13) '''후사를 넓힌다'''는 뜻으로 후궁 간택을 하게 되었다. 당시 선조의 왕비였던 의인왕후가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므로 나온 말이다. 이때 전 주부 정순희의 딸, 승훈랑 홍여겸의 딸, 훈련 습독 민사준의 딸이 간택에서 뽑혔는데, 홍씨는 봉상시동[3] 에 있는 궁으로 가서 입궁하기 전까지 교육 받았다.[4][5]전교하였다.
"고례(古禮)에 제후가 아홉 여자를 취한 것은 후사를 넓히려는 것이었으니 그 뜻이 은미함이 있다. 지금 후궁 자리가 많이 비어 내직(內職)이 폐지되어 있으니, 옛 법에 의하여 숙의(淑儀)을 간택해 들이도록 예조에서 승전을 받들라."
《조선왕조실록》 선조 13년 4월 28일
처음에 숙의로 입궁한 그녀가 언제 정1품 빈까지 품계가 올랐는지 알 수 없다.[6] 다만, 1592년(선조 25)에 그녀를 정빈이라고 부르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에 적어도 전쟁 발발 이전에 책봉되었을 것이다.[7]
그녀의 삶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임진왜란에 이어 정묘호란까지 겪는다. 정묘호란 시절에는 제천 지역까지 피난 갔는데,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1638년(인조 16)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나라가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재정 상태도 좋지 않아서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를 수가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인빈 김씨의 딸 정혜옹주도 사망했는데, 인조는 이번에는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8] 이때 인조는 "이 상사는 정빈의 상사와 같지 않으니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고 반발을 일축하였다.[9]
[1] 홍여겸은 살아생전에 인동 현감을 지냈고, 사후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2] 내자시 부정 조명원의 딸이다. [3]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당주동 일대. [4] 선조실록 14권, 선조 13년 5월 26일 갑오 1번째기사 # [5] 선조실록 14권, 선조 13년 5월 26일 갑오 2번째기사. # [6] 사대부 집안의 간택 후궁이라 궁인 출신인 경우보다 기록이 보다 풍부했을텐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승정원일기와 당대의 사초를 많이 잃어버려서 알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다. [7]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8일 정묘 8번째기사. # [8] 선왕의 간택 후궁도 예장을 못하는데, 선왕의 서출 옹주는 예장하도록 한 것이다. 신하들이 반발했지만, 인조의 할머니가 누구인지 생각한다면(...) [9] 인조실록 37권, 인조 16년 11월 18일 병자 3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