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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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제 14대 국왕 선조의 정비. 성은 박(朴)이고 본관은 반남이다.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외할아버지 문천수 이수갑은 세종대왕과 신빈 김씨의 아들인 계양군의 증손자이다.
2. 생애
2.1. 왕비 생활
1569년 15세에 왕비가 되어 선조와 결혼하였으나 소생은 없었다. 하지만 공빈 김씨 소생으로 일찍 생모를 잃은 임해군 이진과 광해군 이혼을 자기 친자식처럼 여겼으며, 광해군을 직접 양자로 들이기도 하였다.
결혼 초기부터 궁녀였던 공빈 김씨와 인빈 김씨에게 밀려 평생 남편인 선조의 사랑을 받지못했다.
거기다 인빈 김씨는 선조의 가장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고 자신의 장남이자 선조의 4남인 신성군을 왕세자로 만들려 했기 때문에, 광해군의 후견인인 의인왕후와 여러 의미로 정적이기도 했다. 한편 의인왕후가 중전의 자리에서 쫓겨나 새 왕비가 적통왕자를 낳으면 인빈 김씨가 밀려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지켜주고 있던 셈이었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2.2.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와 피난길에 올랐으나 군민들에게 길이 가로막혀 1595년에나 선조와 만났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남편 선조와 떨어져 왕세자 광해군과 함께 피난을 갔다. 그리고 왜군이 철수할 때까지 환도하지 못하다가 2년뒤인 1599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전쟁 중 열악한 피난 생활로 결핵을 앓게 되었고 병세에 차도가 있다가 결국 1600년 병세가 깊어져 6월 27일에 끝내 사망하였다. 향년 46세(만 45세). 죽은 뒤 유릉(裕陵)에 매장되었으며 후에 선조의 무덤인 목릉(穆陵)의 곁으로 이장되었다.
2.3. 죽음과 논란
의인왕후가 죽은 후, 왕비(중전)의 자리가 비게 되어 훗날의 논란의 여지를 남게 되었다. 이후 51세의 선조는 19세의 인목왕후 김씨를 새 왕비로 맞이하여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의 존재는 선조의 유일한 적통으로 세자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어 광해군 즉위 후에 서궁 유폐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3. 인물됨
성격이 좋고 현명하며 됨됨이가 착한 사람이였고 특히 어린 나이에 친어머니를 잃은 광해군을 직접 키웠기에 더욱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의인왕후는 15세에 선조의 왕비가 되었는데 선조의 법적 어머니였던 인순왕후 심씨[1] 와 큰어머니였던 인성왕후 박씨[2] 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모셔 두 대비들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총애를 넘어서 아예 인성왕후와 인순왕후가 의인왕후의 입지를 위해 그녀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575년 며느리인 의인왕후를 예뻐하였던 의성왕대비인 인순왕후가 승하하고, 1577년 공의왕대비였던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의인왕후는 너무 슬퍼했다고. 심지어 외모도 정말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런 의인왕후의 성격은 바로 친정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의인왕후의 아버지인 박응순은 성격이 검소하고 바른 사람이여서, 선조의 국구인 줄 몰랐다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겸손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를 닮은 의인왕후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유가 있다.
외모도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성격도 유순했던 의인왕후에게도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바로 불임. 의인왕후 스스로도 불임 문제로 인해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남편 선조는 역대 조선 국왕들 중 최초로 후궁 소생의 방계 출신 임금이었기에[3] 정실 왕비 소생의 적자를 세자로 책봉하길 원했지만, 의인왕후가 불임이였기 때문에 후궁을 맞이해서 자식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선조는 후궁들 중에서 공빈 김씨과 인빈 김씨를 총애해서 공빈에게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인빈에게는 정원군[4] 을 포함한 4남 5녀를 얻었다. 이처럼 선조가 후궁들에게 많은 자식을 낳은 것을 보면 불임의 문제는 선조가 아니라 의인왕후에게 있었던 것 같다.
자식을 낳지못한 의인왕후가 그녀만의 외로움을 떨쳐내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후궁들과 후궁의 자식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의인왕후는 비록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선조의 자식을 낳은 후궁들에게 잘 대해주었고, 그들의 자식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었다. 사실 의인왕후는 인빈을 포함한 후궁들 사이에서 미묘한 입지를 보여왔지만, 공빈의 아들인 광해군을 양자로 삼아 세자의 어머니를 자처해 입지가 굳건해졌다. 이런 계기를 통해 '''의인왕후와 광해군의 관계가 모자관계를 넘어서 정치적 동반자로 바뀌었다.'''
사실 의인왕후가 광해군을 예뻐하고 키우게 된 이유는 광해군의 친어머니 공빈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만에 산후 후유증(産病)으로 사망하였는데, 그녀가 죽은 이후 선조는 공빈 소생의 왕자들을(임해군과 광해군) 홀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인왕후가 전적으로 공빈의 자식들인 임해군과 광해군의 양육을 맡게 되었다. 특히 생후 2년 만에 친모를 잃은 광해군이 상당히 불쌍한 아이였기에 그에게 더욱 신경을 썼다고. 광해군도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기에 그 자리를 대신 채우게 된 의인왕후를 유난히 따르게 되었고, 심지어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선조는 인빈 김씨와 함께 피난을 갔지만 의인왕후는 양자인 광해군과 전란 내내 같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흘러 선조의 후계자 건의가 가속화되자 정철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할 만큼 광해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렇다고 광해군 외에 다른 후궁의 자식들도 홀대하진 않았다. 만약 의인왕후가 선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신성군을 양자를 삼았다면 그의 친모인 인빈 김씨의 권한이 커질 가능성이 커서 광해군을 직접 밀어줬을 가능성이 높다. 광해군의 경우에도 생모인 공빈 김씨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고인이라 공빈 김씨의 힘이 커져 트러블이 일어날 우려도 없었다. 의인왕후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광해군을 끝까지 지원했고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이렇게 훌륭하게 내명부를 다스린 의인왕후가 승하하면서 남편 선조 역시 매우 슬퍼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4. 평가
남편 선조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아이를 낳지도 못해 왕비로서의 권위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도 못한 의인왕후는 후궁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잘해 줌으로서 자신의 자리와 입지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한 마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왕실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큰 약점이며, 다른 후궁의 자식이 임금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수긍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떠나 의인왕후는 본래의 성품이 온화하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올바른 마음과 바른 행동을 보였던 왕비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자녀는 없었지만, 왕비라는 직함으로 후궁들에게 군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를 않았다는 점은 권력에 대한 욕망은 크지 않았고, 광해군의 사람됨을 보고 세자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의인왕후가 광해군의 후견인이 되어주면서 광해군은 훗날 임금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5. 여담
의인왕후의 사촌동생 박동량(朴東亮)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를 며느리로 맞았다.
의인왕후의 어머니 쪽을 보면 어머니가 완산(전주) 이씨인 것을 알수가 있다. 실제로 윗대를 올라가면 고조부가 이증,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의 아들 계양군에게 닿는다.[5]
따라서 선조는 세종의 6대손, 의인왕후는 세종의 외6대손에 해당하니 이들은 12촌이다.
본인과 남편 선조, 그리고 실제 시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 정씨는 모두 세종의 후손들로 엮인다.[6]
6. 대중매체에서
선조가 집권할 때 임진왜란이 겹쳐 있기 때문에 반드시 등장을 한다. 선조가 무능력한 남편으로 늘 등장한다면 의인왕후는 그런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후궁들에게 밀리지만 조용히 선조와 선조의 후궁들과 그 소생들을 조용히 내조하는 역할이다.
[1] 13대 명종의 왕비, 남편 선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1년간 수렴청정했다.[2] 12대 임금 인종의 정비. 의인왕후와는 같은 반남 박씨이다.[3] 선조 이전까지의 임금들은 모두 왕비 혹은 세자빈 소생의 적자들이였다. 하지만 선조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손자였다.[4] 인조의 아버지. 훗날 정원대원군으로 추존됐으나 아들인 인조가 원종(元宗)으로 묘호를 내렸다.[5] 더군다나 계양군의 부인은 조카인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부인인 인수대비의 친언니이다.[6] 선조는 세종의 적2남 세조의 5대손, 하동부대부인 정씨는 세종의 적2녀 정의공주의 외증손, 본인은 세종의 서2남 계양군의 외5대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