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빈 김씨

 



'''조선 선조의 후궁
경혜인빈 김씨 | 敬惠仁嬪 金氏
'''
'''시호'''
경혜(敬惠)
'''빈호'''
인빈(仁嬪)
'''출생'''
1555년(명종 10년) 2월 29일[1]
'''사망'''
1613년(광해군 5년) 10월 29일
(향년 59세)
'''사당'''
저경궁(儲慶宮)
'''원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150 순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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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수원(水原)
'''부모'''
부친 김한우
모친 전주이씨
'''부군'''
조선 선조
'''자녀'''
4남 5녀
(장남) 의안군
(차남) 신성군
(3남) 정원군
(장녀) 정신옹주
(차녀) 정혜옹주
(3녀) 정숙옹주
(4남) 의창군
(4녀) 정안옹주
(5녀) 정휘옹주

1. 개요
2. 생애
2.1. 친정 가문
2.2. 후궁 책봉
2.3. 세자 책봉
2.4. 사후
3. 자녀
4. 매체에서
4.1. 드라마
4.2.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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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선조의 후궁. 가장 총애받은 후궁답게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다. 추존왕 원종의 어머니이자 인조의 친할머니다.

2. 생애



2.1. 친정 가문


사헌부 감찰을 지낸 아버지 김한우와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특히 어머니가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의 증손자인 이효성의 딸이며, 외사촌 언니는 명종후궁이었던 경빈 이씨[2]다. 일찍부터 왕실과 인연이 있었던 셈.
언니는 신경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은 광해군의 후궁 소원 신씨가 된다.

2.2. 후궁 책봉


경빈 이씨는 자식이 없었기에 김씨를 데려다가 궁중에서 양육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행동이 유순하고 침착해서 남다른 바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이 당시 왕대비로 있었던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눈에 들어 선조의 후궁이 될 수 있었으니 이때가 김씨의 나이 14세 때의 일이다.[3]
이는 마치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가 왕대비였던 정현왕후의 추천으로 후궁이 된 것과 비슷한 케이스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왕비가 아닌 후궁이면서 후손이 왕이 되는 영광을 누린다.
1573년(선조 6) 숙원(淑媛)으로 책봉된다. 이후 정3품 소용, 종2품 숙의, 종1품 귀인을 거치고 1604년(선조 37) 11월 12일에 정1품 인빈(仁嬪)에 책봉된다.
그러나 원래 선조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은 공빈 김씨였다. 더군다나 의인왕후가 임신하지 못하는 동안, 선조에게 첫 아들 임해군과 둘째 아들 광해군을 낳아주었으니 후궁이지만 위세도 당당했다. 하지만 공빈 김씨가 광해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1577년 사망하면서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그녀가 선조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된다. 여기에는 김씨의 처신이 한몫했다. 공빈은 살아생전에 "내가 아픈 이유는 다른 후궁들이 나의 신발을 가져다가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그걸 믿은 선조는 다른 후궁들에게 더욱 모질게 대했다. 그러나 당시 소용이었던 그녀는 왕을 더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앞에서 공빈의 허물을 자주 들춰냈다. 그러자 공빈 김씨를 잊게 된 선조는 그녀의 말에 맞춰 "공빈이 나를 저버린 적이 많았다"고 하고, 인빈 김씨를 전에 없이 총애하게 되었다.[4]
때마침 공빈이 사망한 해에 김씨는 첫 아들 의안군을 낳고, 이듬해 신성군을 연년생으로 낳으면서 완전히 자리를 굳힌다.
그 결과로 선조의 많은 후궁들 중 유일하게 4남 5녀로 다산했으며, 선조가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피란을 갈 때도 의인왕후가 아닌 그녀를 곁에 데리고 갈 만큼 총애가 대단했다. 어느 정도였나면, 전쟁이 한창인 1593년에는 황해도 해주(海州) 행궁에서 정휘옹주를 낳을 정도였다.

2.3. 세자 책봉


김씨의 장남 의안군은 요절했고, 둘째로 태어났지만 사실상 장남으로 자라난 신성군은 무반 명가 평산 신씨의 일원이자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이름 높았던 신립의 딸과 혼인했고, 정원군 역시 서인 명문가이자 평산 신씨와 쌍벽을 이루는 능산 구씨 집안과 혼인하여 배경이 든든했다. 이러한 혼인은 모두 선조의 결정이었다. 김씨가 아무리 총애를 받더라도 왕실의 간택 절차에 이래라 저래라 하기는 힘들었을 터이다.
당시 선조는 적자(嫡子)가 없었으므로 세자 책봉을 두고 물밑에서 암투가 많았다. 그녀가 낳은 자식들의 혼맥을 보면 임해군이나 광해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자로 유력했던 왕자는 신성군이었다.
그런데 1591년(선조 24) 이른바 건저 사건이 터진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렇다. 서인이었던 정철동인이산해, 우의정 류성룡 등과 상의하여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을 세자 책봉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하기로 한다. 그런데 기축옥사로 원한이 있었던 이산해는 마음을 바꿔 김씨의 오빠 김공량과 결탁한다. 이들은 김씨에게 "정철이 신성군 모자를 죽이고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려 한다"고 무고한다. 그녀는 이 말을 선조에게 전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정철이 선조 앞에서 세자 책봉을 이야기하는 바람에 유배형에 처해진다. 이로 인해 선조는 광해군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게 되었고, 인빈 김씨 쪽과 광해군 쪽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광해군이 세자가 되고, 신성군은 1592년(선조 25) 11월 5일 의주로 피난가는 길에 요절한다.
이렇게 의안군과 신성군은 불행히 세상을 떠났고, 정원군은 어려서부터 문제가 많은 인물인데다 전쟁 중에 분조(分朝)[5]를 성공적으로 이끈 광해군의 자리는 흔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김씨는 노선을 변경하고 광해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중에 광해군조차 "내가 지금 자리에 있게 된 데는 서모의 공이 컸다"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자기 관리에 더욱 신경썼다. 인목왕후가 새 왕비로 들어오는 날에 다른 후궁들은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었는데, 오로지 인빈 김씨만이 얼굴빛이 태연했고 특별히 기쁜 일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6] 뿐만 아니라 여러 자식이 있었지만, '어머니'라고 부르면 몸가짐을 조심하면서 "왕비에게 자식이 없고 내게 자식이 있는 것은 내 배를 빌려서 낳았을 뿐이니 어찌 어머니가 되겠는가" 하고 자식에게조차 '너'라고 부르지 않았다.

2.4. 사후


인빈 김씨의 뛰어난 자기관리 덕택에 광해군의 보복은 없었다. 오히려 정원군과 의창군은 공신까지 될 수 있었고, 정원군 또한 광해군의 존호를 올리자고 계청을 올리는 등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훗날 소현세자가 되는 증손주의 탄생까지 지켜보았는데, 1613년(광해 5) 10월 29일 인빈 김씨는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 실린 졸기는 다음과 같다.

선조(宣祖)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金氏)가 졸(卒)하였다. 빈은 의안군(義安君)·신성군(信城君)·원종 대왕(元宗大王)·의창군(義昌君) 등 네 군(君)과 다섯 옹주(翁主)를 낳았는데, 술수가 있어 미봉(美奉)을 잘하였다. 그 아우인 김공량(金公諒)이 천한 관리로서 이산해(李山海) 부자와 서로 결탁하였는데, 이산해가 드디어 유언비어로서 궁궐과 내통하여 대신을 참소해 떠나게 하였다. 이때부터 빈이 정사에 간여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산해도 역시 사론(士論)에 버림을 받았다. 왕의 어머니인 공빈(恭嬪)이 본래 인빈과 틈이 있었는데, 공빈이 산병(産病)으로 죽자 인빈이 그 대신이 되었다. 왕의 형제에 대한 총애는 드디어 줄어들었고 산해가 대신을 참소한 것은 이 기회를 틈탄 것이었다. 왕의 형제가 이 때문에 인빈을 매우 원망했으며, 인빈의 집안 사람들도 역시 인빈을 위해 그를 위태롭게 여겼다. 왕이 동궁에 있을 때 자주 선조의 뜻을 잃자, 대비 이하 여러 후궁들이 동궁을 대할 때 불경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빈만은 유독 동궁을 후하게 섬겨서 바라는 바를 모두 은밀히 상에게 아뢰어 이루어 주었다. 유영경정인홍을 공격할 때 선조가 한창 동궁에게 노여움을 가졌으나, 빈이 변명을 하여 풀어졌다. 왕이 즉위한 뒤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빈이 궁중에서 힘을 썼기 때문에, 원종 대왕과 의창군이 모두 정사 공신(定社功臣)에 참여할 수 있었다. 왕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 하였다. 이 때문에 빈(인빈)이 죽을 때까지 원종 대왕 형제들이 모두 탈이 없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71권, 광해 5년 10월 29일 계축 2번째기사

광해군은 "매우 놀랍고 애통스럽다"면서 "조시(朝侍)를 3일간 중지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사헌부가 "법과 예에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자 이를 물렸다.
그녀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었다. 정원군을 비롯한 그녀의 자손들에게 광해군의 편집증적인 성격과 왕위에 대한 불안감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1615년(광해 7) 정원군의 3남 능창군[7]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있었다는 고변이 있었다. 능창군은 16세의 나이에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고 자살을 선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원군은 술로 세월을 보내다 홧병으로 죽었다. 이후 광해군 때문에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인조반정을 일으킨다. 그래서 인조부터 순종까지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고, 후대 왕들은 인빈에 대한 예우와 제사를 잊지 않았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해 있다. 그녀의 묘역을 순강원(順康園)이라고 한다. 내부에는 선조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의창군 부부의 묘역도 함께 있다. 다만 문화재 보호 차원 및 내부 묘역 정비 중이라 관람이 제한되어 있어서 순강원을 답사하려면 인근에 있는 세조광릉을 관리하는 광릉관리소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답사할 수 있다.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저경궁(儲慶宮)에 모셔져 있다.

3. 자녀


선조의 총애를 많이 받아, 자녀도 많이 낳았다(총 4남 5녀).
  • 장남 의안군(義安君, 1577년 - 1588년) : 이름은 성(珹). 11세에 요절.
  • 차남 신성군 (1578년 - 1592년) : 신립의 딸과 결혼.
  • 3남 정원대원군 (1580년 - 1619년) : 인조의 아버지. 훗날 원종으로 추존됨. 아내 구씨도 인헌왕후로 추존됨.
  • 장녀 정신옹주(貞愼翁主, 1582년 - 1653년) : 대구 서씨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에게 하가(下嫁)하여 3남 5녀를 낳음.
  • 차녀 정혜옹주(貞惠翁主, 1584년 - 1638년) : 해평 윤씨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8]에게 하가하여 2남을 낳음. 장남 윤지(尹墀)의 딸은 김만기와 김만중을 낳았으며, 김만기의 딸은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이다.
  • 3녀 정숙옹주(貞淑翁主, 1587년 - 1627년) : 평산 신씨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에게 하가하여 5남 4녀를 낳음.
  • 4남 의창군(義昌君, 1589년 - 1645년) : 이름은 광(珖). 양천 허씨 허성(許筬)의 딸과 결혼. 자녀는 없음.
  • 4녀 정안옹주(貞安翁主, 1590년 - 1660년) : 반남 박씨 금양위(錦陽君) 박미(朴瀰)에게 하가하여 1남을 낳음. 시아버지 박동량(朴東亮)은 선조의 첫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사촌동생이다.
  • 5녀 정휘옹주(貞徽翁主, 1593년 - 1653년) : 전주 류씨 전창군(全昌君) 류정량(柳廷亮)에게 하가하여 2남 2녀를 낳음.

4. 매체에서



4.1. 드라마


선조 시대가 사극에서 많이 다뤄진 만큼, 인빈 김씨 역시 덩달아 사극에서 자주 등장했다. 특히 선조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후궁이라서,[9] 선조가 등장하는 사극에서는 정비 의인왕후 박씨 이상으로 선조의 부인처럼 등장하기도 했다.

4.2. 소설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에서 병에 걸린 의안군을 허준이 진료할 때 잠시 등장하는데, 공빈 김씨와는 달리 거의 비중은 없다. 공빈의 빈 자리를 메웠던 만큼 아름답고 품위있는 인물로 묘사되며 아픈 의안군의 병세를 허준이 감추자 '주상께는 아룄을 것도 같건만...'이라며 답답해한다.
김덕호의 양판소 <조선제국 일본정벌기>[10]에서는 임빈으로 잘못 표기되었으며 조정의 반동 세력과 결탁했다가 주인공 측에게 즉결 총살당한다.
임영대의 대체역사소설인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후반에 관군의 요청으로 파견된 여진족의 배신으로 정원군 부자를 제외한 왕실 직계가 몰살당한 후 이름만 언급되며 정원군이 모셔가지 않았을까 추정만 할 뿐 생사여부가 밝혀지지 않았다.
광해의 연인에서는 초반에 여주인공 경민을 괴롭히고, 남주인공 광해군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빌런으로 나온다. 신판에서는 대비의 명으로 선조의 후궁이 되었으며, 공빈과 달리 후궁 생활에 적응하고 암투를 즐겼다고. 경민이 광해군의 아이를 임신하자 이를 빌미로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정원군을 세자 자리에 올리려 하지만, 오히려 정원군은 죄를 뒤집어쓰고 제주도로 귀양가게 된다. 그리고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공기화.
[1] 인조 때 제작한 신도비를 보면, "가정(嘉靖) 을묘년 2월 갑오에 인빈을 낳았다."고 나와있다. [2] 원래 숙의였으나 영조 때, 경빈(慶嬪)으로 추증되어 품계가 올랐다.[3] 상촌집 28권, 인빈김씨신도비명(仁嬪金氏神道碑銘). [4] 선조수정실록 11권, 선조 10년 5월 1일 무자 3번째기사. # [5] 임진왜란 때, 조정을 갈라 의주의 행궁을 '원조정'이라 하고 세자가 있는 곳을 '분조'라고 불렀다. [6] 연려실기술 제22권, 원종고사본말. # [7] 훗날 왕이 되는 인조의 친동생이다.[8] 윤두수의 손자[9] 덤으로 공빈이 있을 땐 공빈과도 경쟁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10] 훈련 중에 고대 유물의 힘으로 임진왜란 시대로 건너온 대한민국 해병대조선의 실권을 잡고 임진왜란을 막은 뒤 일본을 정복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