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공

 

1. 개요
2. 프런트 시절
2.1. 사이클,농구
2.2. 기아 타이거즈 단장 시절
3.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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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IA 타이거즈의 前 단장, 기아자동차 사이클 팀의 운영과 농구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부단장으로도 재직했다. 하지만 야구팬에겐 기아 타이거즈 단장 시절 성적을 떨어뜨린 암흑기의 장본인으로 많이 회자되고 있다.

2. 프런트 시절



2.1. 사이클,농구


1985년 성균관대를 졸업한 후 기아자동차에 입사한 후 총무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거기서 사이클 팀의 운영을 맡게 되었다. 남들에 비해 체격이 건장해서 사이클 팀을 잘 운영할 거라 여겨 지명을 받은 것이었다. 사이클 팀을 잘 운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조호성과 같은 훌륭한 선수들을 데리고 1988년부터 외환위기로 팀이 해체된 1997년까지 전국체전을 모조리 제패했고,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에서 여러 개의 금메달을 땄다.
1986년 기아자동차는 기아농구단(현 모비스)을 창단했고, 정재공은 농구단의 업무도 맡아보게 되었다. 허재, 김유택, 등이 속했던 농구단 역시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1990년대 말 프로 출범 초기까지 강팀으로 군림했다. 농구단 부단장까지 오른 그는 2001년 기아자동차가 해태 타이거즈 야구단을 인수하면서 야구단 단장으로 부임했다.[1]

2.2. 기아 타이거즈 단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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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정재공 단장에게 일침을 놓는 기아 팬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기아 타이거즈의 단장을 맡았는데 정 단장에 대한 평은 대단히 좋지 못하다. 성적부진도 부진이었지만 어이없는 선수 영입과 감독 인선으로 자팀 전력을 박살내 버렸다. 대표적인 사례만 들자면
  • 정성훈 + 10억 <=> 박재홍
  • 마해영 4년간 28억원에 FA 계약 체결.
  • 조규제와 2년 FA 계약
  • 김성한 前 감독 경질[2]
  • 다니엘 리오스 <=>전병두 + 세스 그레이싱어[3]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판하는 기아 팬들의 목소리에 광주 무등야구장 입장 관중 '소지품 검사'와 '호랑이 사랑방' 폐쇄 및 약관 개정으로 응답했고 결국 기아팬들이 법정공방과 무등야구장에 정재공을 비난하는 현수막을 달기까지 이르렀다. 결국 2007년 10월 9일자로 해임되었고 후임으로 김조호 현대기아차 기획실 이사가 부임했다.

3. 근황


기아를 떠난 후 자전거 체조업체인 JK6의 대표가 되었고 신개념 자전거 '''까롱(CARON)'''을 출시했다. #

[1] 기아 농구단이 모비스로 바뀐 후 유재학 감독이 오기 전까지 모비스는 혼란기를 겪었는데, 새로 부임한 프런트가 기아 색깔을 지우겠답시고 전성기 멤버들을 모조리 내쫓은 게 컸다.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비판을 참고할 것[2] 물론 김성한 감독은 선수 폭행도 있고 한계가 보였지만, 그 뒤를 이은 유남호-서정환은 그야말로 기아 팀을 박살내버렸다.[3] 당시 리오스가 상당히 부진했기 때문에 교체해도 명분은 섰다. 대신 기아에 온 그레이싱어가 맹활약했기 때문에 재평가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