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홍(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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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프로야구에 '야생 본능'이 사라져가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한다. 투수뿐 아니라 야수들도 분업화되고 있다. 홈런 치는 선수와 도루 하는 선수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다. 재능에 따라 유형을 정할 수는 있지만, 장점을 극대화하고자 다른 장점을 잃는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야생 본능이 살아 있는 야구도 무척 재밌다'''."
前 현대 유니콘스, KIA 타이거즈, SK 와이번스 소속의 외야수. 現 MBC 스포츠플러스 소속의 야구 해설위원. '''KBO 리그 역사상 최초로 30-30 클럽'''에 가입했으며, 세계 유일의 데뷔 시즌 30-30 클럽 가입, 한국 프로야구 최초 200-200 등을 달성한 호타준족의 대명사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외야수로, 주로 우익수와 중견수를 나눠 봤다.[10][11]'''10년만 늦게 태어났으면 FA로 100억은 받았을 선수''' [9]
MBC SPORTS+ 이석재 PD
등번호는 현대 시절부터 62번을 사용했는데 나중에 해설할 때 밝히길 신인 시절 남아있는 번호 중에 그냥 골랐다고 한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광주일고 시절부터 맹활약을 펼친후 1992년 프로야구 신인 1차지명에서 연고팀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연세대학교로 진학한다. 90년대만 해도 프로야구에서 고졸신인은 매우 드물었고, 대부분 대학교로 진학하던 시대.[12] 연세대 야구부 시절 김충남 감독의 가르침을 받으며 뛰다가 졸업 후 '''아마''' 야구단 현대 피닉스와 입단 계약을 맺는다.[13]
이후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면서 현대 유니콘스가 출범한 후 최상덕이 해태로 트레이드 되는 조건으로 박재홍의 지명권을 현대로 넘겼고, 당시 신인 야수 최대 계약금이었던 4억 3000만원을 받고 입단한다. 놀라운 점은 박진만과 키스톤을 이룰 뻔했다는 것. 지금 보면 이상해 보이지만 원래 연세대시절까지는 내야수였고 프로에 와서 외야수로 전환하였다.[14]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대에 입단하게 되면서 박재홍은 호남 야구팬에게 배신자, 공적으로 찍히게 되어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박재홍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현대로 가게된 것은 당시에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프로 진출보다는 대학을 먼저 가는 것이 추세였고, 해태에서도 대학을 다녀 올 것을 권장했다고 한다(당시 지명권은 대학 졸업시까지도 유효).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아시안게임을 출전을 위해 아마팀으로 먼저 입단했는데, 마침 현대 피닉스 구단에서 1년 뒤 바로 프로팀을 창단했고 해태가 트레이드를 제안을 했으니, 그게 바로 당시 10승투수 최상덕과 박재홍의 트레이드였다는 것. 하지만 박재홍의 당시 성적이 좋자 해태 프런트는 본인들 비난을 피하기위해 박재홍이 거부했다는 루머를 퍼트렸고, 억울했지만 해명할 기회가 없었다고. 참조 영상
사실 현대에서 고액의 계약금으로 유망주를 묶어둔 것이고 재정이 열약한 해태타이거즈의 사정상 위약금을 대납할 능력도없고 그렇다고 후술할 롯데의 방식처럼 4억 3000만원 상당의 다른 선수를 내줄수도 없으므로[15] 울며 겨자먹기로 94년 13승을 거둔 최상덕을 데려온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박재홍과 똑같은 처지였던 문동환도 롯데가 전준호를 5억과 트레이드, 유니콘스로부터 받아온 5억을 문동환 계약금으로 쓰고 문동환이 현대 피닉스에 위약금 5억을 내는 복잡한 방식을 통해서야 롯데로 갔다. 이후 최상덕은 95년에 무승으로 부진했고 장종훈의 타구를 얼굴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2.2. 현대 유니콘스 시절
1996년 정말이지 충격의 데뷔로, '''데뷔 시즌에 홈런왕[17] , 타점왕[18] ''',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 30-30 클럽''' 가입으로 만장일치 신인왕에 올랐다.[19] 1996년 당시 각 언론 매체에서 박재홍을 언급할 때마다 '괴물 신인'이라는 말을 수식어로 썼을 정도로 엄청난 신인이었다. 그가 30-30 클럽에 가입하는 30번째 홈런을 친 날, KBS 9시 스포츠 뉴스에서는 스포츠 뉴스가 시작됨을 알리는 시그널이 나간 후, 아나운서가 인사를 하기 전에 박재홍의 30번째 홈런 장면부터 틀었다. 그리고 아나운서가 인사를 하며 박재홍이 30-30 클럽에 가입했음을 알렸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대기록이었던 것이다. 1993년에 양준혁이 거기에 필적할만한 신인최초 타격왕을 비롯한 3관왕을 차지했지만 그 해에는 이종범, 김경원 등의 신인들이 동시에 등장하여 임팩트가 적었던 것이 사실이며, 2006년에 류현진이 데뷔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었다.
이 때 박재홍이 신인상과 리그 MVP를 동시에 수상할지의 여부에 이목이 집중되었다.[20] 당시 박재홍은 사상 첫 30-30 클럽에 신인으로 홈런왕, 타점왕까지 차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 '''18승 3패 24세이브 ERA 1.88 WHIP 0.76 139이닝 183탈삼진으로 탈삼진(3위)을 제외한 투수부문 4관왕(다승, 평균자책, 승률, 구원)을 독식한 한화 구대성'''의 임팩트가 더 부각된 듯, 사상 첫 신인 MVP는 무산되었다.[21] 참고로 이건 '''마무리 투수가 세운 기록이다'''. 또 박재홍이 MVP 수상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박재홍이 신인답지 않게 건방지다."는 소문이 기자들[22] 로부터 흘러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평가는 선수 생활 내내 박재홍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 성과가 바다 건너에도 전해졌는지 1년차가 끝난 뒤 스프링캠프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 스카우트가 김재박 감독에게 영입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임대라도 안되냐고 부탁하기도 했다.
쾌조의 순항을 벌어던 중 부정타격 시비에 휘말려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데 문제의 제기는 바로 쌍방울 감독인 '''김성근''' 감독에 의해서였다. 박재홍이 타격 시 워낙 홈플레이트 가까이에 붙어서 규정 위반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랐다. 박재홍의 발이 거의 라인을 밟으면서 타격이 이루어지는데, 경기 중 라인이 지워지므로 바싹 달라붙어서 치기는 했다. 김성근 감독은 현대와의 경기 도중 선수들을 덕아웃으로 철수시키면서까지 항의를 했을 정도였다. KBO에서 큰 문제가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리기는 했지만 논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공교롭게도 10년 후인 2006년에 또 다른 괴물 류현진이 등장했다. 그리고, 10년 전인 1986년에는 한국프로야구를 지배한 대표괴물인 선동열이 활약했다. 선동열의 경우 데뷔는 1985년이지만 실질적인 활약은 1986년부터다. 2016년에는 아쉽게도 순수 괴물신인은 나오지 않았다.[23]
여담으로 현대 피닉스 입단 파문으로 인해 겨울에 운동을 개인훈련만 하고, 전지훈련도 가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이런 성적이 나왔다고. 신인 시즌 30-30은 '''세계 프로야구 사상 최초'''이며 2012년 MLB에서 마이크 트라웃이 30-30을 기록하기 전까지 유일한 기록이었다. 이 트라웃도 2012년 신인왕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메이저리그 데뷔는 이미 2011년에 치른 상태였기 때문에 데뷔 시즌만 놓고 보았을 때는 박재홍이 현재로선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원래 현대 코칭스텝들은 상술했듯이 박재홍을 내야수로 쓰려다가 주력도 나쁘지 않고 투수 출신이라 어깨도 좋아서 외야로 돌렸다. [24] 그리고 1번타자, 즉 리드오프로 쓰려고 했다. 실제로 그의 프로 데뷔전이었던 1996년 4월 13일 인천 LG전 당시 그의 타순은 1번타자였다. 그러나 리드오프치고는 홈런을 잘치고 장타력이 좋아 전통적인 테이블 세터와는 거리가 있는 맹활약을 펼치자 자연스레 클린업으로 고정이 되었다. 참고로 박재홍이 중심타선으로 가면서 현대는 또 리드오프 부재에 시달렸고, 김인호나 윤덕규로 돌려막다가 전준호를 영입하면서 겨우 해결된다.[25]
1997년에는 부상으로 한 달을 넘게 결장, 시즌 전경기보다 무려 30경기나 적은 96경기에 출장했음에도 .326에 27홈런 69타점을 기록[26] , 부상 없이 출전했으면 32홈런을 날린 이승엽, 30홈런의 이종범과 함께 재미있는 홈런 레이스를 벌일 뻔했다. 1998년에는 '''두 번째 30-30''' 달성과 함께 '''인천 연고팀 첫 우승'''을 팬들에게 안기며 도원야구장의 아이돌로 등극했다. 더욱이 당해 한국시리즈에서 타선에서 가장 활약한 선수는 박재홍이었다. 한국시리즈 경기 전에 부상으로 못 나올 줄 알았는데, 테이핑까지 하면서 지명타자로 출전, 4차전 잠실 야구장 좌측 풀대 대형 홈런을 친 것이 화제가 되어 펄펄 날았다.
2000년에는 구단에 의해 인천을 떠나 연고지를 임시로 수원야구장으로 옮겼는데 이 때 '''세 번째 30-30'''은 물론 '''3할 타율-30개 이상 홈런-30개 이상 도루-100개 이상 타점-100점 이상 득점'''이라는[27]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세 번째 30-30은 박재홍 본인에게도 마지막 커리어이자 현재까지도 많은 선수들이 넘지 못한 유일한 기록이다.[28]
이후로도 현대의 중심 타선의 한 축을 계속 맡았지만, 2001년부터 갖가지 잔부상으로 인해 홈런 생산이 줄어버렸고, 이후 은퇴할 때까지 30-30 클럽은커녕 20홈런을 치는 시즌도 만들지 못했다. 물론 이 시절 이후 무조건 홈런보다는 눈야구에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출루율을 조금 올렸고 특유의 장타도 쳐주기도 하는 등 OPS 히터로 타격 스타일을 바꾸는데 성공했고, 3할 타율에 두 자릿수 홈런이나 도루를 쏠쏠히 기록하며 꾸준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의 전성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박재홍이라는 이름값에는 뭔가 조금 부족했던 것 또한 사실. 어찌되었든 2002년도 올스타전에 참가하여 현대 유니콘스 소속으로 올스타전 MVP를 얻고 준플레이오프까지 현대에서 활약했고, 2003년 시즌을 앞둔 스토브리그 때 '''정성훈+현금 10억 원'''으로 중심 타선을 강화하려는 김성한 감독의 요청에 의해 고향 팀인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다.
2002년 KIA 타선의 약점 중 하나가 확실한 4번 타자의 부재였다. 2002년을 보면 용병인 뉴선이나 펨버튼은 제몫을 하지 못했고, 포스트시즌에 4번을 친 홍세완은 무게감이 떨어졌다. 김성한 감독은 제2의 이종범으로 평가받던 3루수 이현곤을 믿고 1군 레귤러가 되기 시작했던 정성훈을 내주는 강수를 두었지만, 결과는...[29]
2.3. KIA 타이거즈 시절
트레이드 첫 해였던 2003년엔 3할 타율에 19홈런 14도루로 괜찮은 활약을 펼쳤으며, 이것도 햄스트링 부상으로 25경기를 날려먹으면서 기록했던 성적이었으니 풀시즌을 나왔으면 25홈런 정도에 준하는 기록이었다.
덕분에 2004년에도 어느 정도 기대를 받았으나, 2004년에는 무리하게 주루하다 햄스트링 부상이 재발하며[30] 시즌을 날려먹었고, FA 취득시기와 관련해서 프런트와 갈등을 빚었다. 부상으로 정상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FA 취득년차에 맞춰 출장을 고집하여 성적은 성적대로 깎아먹으면서 팀 분위기도 상당히 망쳤기에 시즌 중에 이미 눈 밖에 났다.
하지만 당시 김성한 감독이 FA 일수를 채워주기로 약속하고, 부상도 심한 부상이 아닌 손바닥 부상 정도라서 타격은 좀 힘들지만 대주자라도 채워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유남호 대행체제로 바뀌면서 그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 박재홍이 유남호 대행을 만나려 해도 만나주지 않았고 9월 확대엔트리 때도 넣어주지 않았다. 이때 상황과 관련해서는 이야기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는데, 박재홍이 자신을 트레이드시켜주지 않는다고 정재공 단장에게 술잔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는 반면, 박재홍이 울면서 읍소했는데도 유남호 감독대행이 문전박대했다는 기사도 확인되며 결국 정재공 단장도 이를 거들어 팀케미에 해가 되는 선수로 낙인찍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어쨌거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시 타이거즈팬에게 박재홍의 이미지는 더욱더 안 좋은 쪽으로 굳어졌다.[31][32] 하지만 해태에서 넘어온 지 얼마 안 된 KIA의 선수 대응 방식도 문제가 있었던 셈. 또 박재홍을 위한 쉴드를 쳐주자면 고교-대학 라이벌 김종국과의 대립이 많아서 한 때 광주내에 야구 팬들은 누굴 응원해야할지 고민했다고 허나, 박재홍이 드래프트 이 후 거절하자 다들 김종국으로 선회했다. 이 후에 박재홍이 기아에 왔을때도 그냥 서로 말도 잘 나누지 않았다. 그나마 현대에서 함께 뛰던 친구이자 자신의 백업이던 '''장정석'''과 함께한 면은 있다.[33]
그리고 먹지도 않은 빵 때문에 평생 붙어다닐 별명도 얻었다. 이게 KIA 시절 선수단에 비협조적이었다는 이미지 탓이다. 본인에게나 KIA에게나 양쪽 모두 흑역사만 되고 말았다.
2.4. SK 와이번스 시절
결국 2004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당시 SK 와이번스의 불펜투수 김희걸[35] 과 1:1 트레이드되어 선수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인천으로 되돌아왔다. SK로 온 이유는 아무래도 김경기의 선례처럼 '''SK가 인천 야구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SK 프런트의 마케팅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란 해석이 다수. SK로 온 뒤에는 정근우가 리드오프로 자리잡기 전까지[36] 주로 1번 타자 겸 중견수를 맡았고, 그해 3할 타율과 18홈런 22도루, 4할대 출루율을 기록하고 타율 7위, 출루율 6위, OPS 6위, 도루 7위, 볼넷 4위로 타격 기록 순위권에 들었고 WAR 5.51을 찍어주며 타자 WAR 토종선수 1위(전체 타자 3위, 투-타 리그 합 6위)를 기록하는 등 나름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거기에 2005년 8월 27일 인천 삼성전에서는 대망의 '''홈스틸'''도 선보였다.영상 보러가기
2005년 시즌이 끝나고 대망의 FA신분을 얻어 자신만만하게 4년 35억을 요구하였으나, SK는 26억 5천만원을 제시, 양자간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아 결국 협상결렬로 FA시장에 나왔고, 장성호와 함께 대형 FA 투톱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나 현실은 참혹했다.
FA시장 개막전 머니게임을 예고했던 롯데 자이언츠는 처음부터 타겟이 1루수 장성호 하나 뿐이었고,[37] 장성호가 KIA 타이거즈에 잔류하자마자 FA 시장에서 곧바로 철수하였으며, 전년도에 트레이드 시도를 하였던 LG 트윈스는 기존 FA 영입 사례 중 홍현우, 진필중 등이 모두 실패한 사례가 있는데다가 FA시장이 열리기 바로 직전 장문석과 마해영을 바꾸는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며 지상과제였던 팀 장타력 부족을 해결했다는 판단하에[38] 박재홍 영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친정팀인 현대 유니콘스에서 박재홍을 재영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자금 사정이 녹록치 않았던 데다가 어디까지나 송지만이 다른 팀으로 이적했을 경우 그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박재홍은 FA미아가 되어 원 소속팀 SK와 협상을 시작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4년 30억의 조건으로 계약을 완료하였다.
2006년에는 2할 5푼대의 타율에 그쳤으나 WAR 4.80을[39] 찍어주면서 2년 연속 팀 내 WAR 1위에 올랐고 18개의 홈런을 치기도 하는 등 팀의 중심타선으로 활약했지만 팀은 투수진의 연이은 부상과 용병 농사 실패 등으로 인해 6위에 그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
2007년 김성근이 SK 감독으로 부임한 후 기존 수비위치였던 중견수 대신 우익수로 나오는 비중이 늘기 시작했고, 플래툰 시스템으로 돌려지다가 2군으로 내려가기도 했으나, 그해 7월 8일 롯데전에서 대타로 나와 개인 통산 250호 홈런을 치기도 했다.영상 보러가기
2008년에는 타율 0.318로 전성기 이후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했고 19홈런(5위), 출루율 0.420(2위), 장타율 0.538(3위)로 타격 관련 분야에서 순위권에 들기도 했다. 이 시즌 외야수 골든글러브가 유력하며 8년 만에 골든글러브 수상을 노려봤으나, 아쉽게도 골든글러브는 올림픽 버프+중견수 버프를 받은 이종욱이 차지하며 아깝게도 수상에 실패했다.
2007년-2008년 2년 연속 SK의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일조하기도 했다.
2009년 4월 23일 문학 롯데전에서 8회초 SK 구원투수 채병용이 던진 공에 롯데 조성환이 광대뼈를 맞아 실려나가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8회말 롯데 구원투수 김일엽의 초구가 박재홍의 무릎쪽으로 날아왔다. 야구팬들은 당시 김일엽이 박재홍에게 던진 공을 '''변화구'''로 보고 있으며, 구종은 다소 의견이 갈린다. 박재홍 본인이 직접 지상파 OBS 다큐멘터리 불타는 그라운드에서 야구팬들의 의견을 반박하며 김일엽의 구종을 '''직구'''라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사건 직후에 기사들을 보면 김일엽의 공은 '변화구'라는 기사들이 나왔었고 실제로 경기 당시 측정된 구속도 120킬로대에 원바운드로 날아갔다. 타팀 관계자들이 왜 저러냐는 식으로 인터뷰한 기사도 나온다.
여간 저 상황 이후 박재홍이 곧바로 마운드로 걸어가면서 양팀 선수들이 벤치 클리어링을 벌였으며, 이 때 공필성 롯데 코치와 말싸움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롯데팬들에게 가루가 될 정도로 까였으며 다음 맞대결이었던 사직구장 주중 3연전 중 5월 6일 경기에선 그가 타석에 들어서자 장난감 칼을 든 꼴리 건이 그라운드에 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사태는 엑스꼴리버 혹은 꼴리검 사건으로 이후에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이후 2016년 6월 8일 베이스볼 투나잇의 마리텔 버전인 '엠스플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이 사건을 다룬 적이 있었는데, 난입한 꼴리건보다 오히려 사직구장 관중들의 야유가 더 신경썼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심하게 달려오면서 휘두르는 칼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애초에 진짜 칼이 아님을 눈치챘었고, 멀찍이서 던지고 달아난 꼴리건과는 다르게 정작 본인은 더 가까이 와주길 바라고 있었다고.
이후에도 롯데 자이언츠 구단과는 상관없는 악플러들까지 몰려들어 같은 SK 소속의 윤길현, 채병용, 김성근 감독 등과 세트로 묶여 엄청나게 까이면서 죽고 싶었다는 말을 하는 등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8월 20일 롯데와의 사직 원정경기 연장 10회초 1사 만루 상황에서 대타로 들어서 롯데 팬들의 엄청난 야유를 뚫고 3루 강습 안타를 날려 결승타점을 기록하며 사직구장 전체를 침묵시켰다.
2009 시즌 내내 롯데 팬들은 사직구장에서 박재홍이 타석에 섰다 하면 야유를 퍼부었고 사직경기에서 SK가 이긴 후 구단 버스에 소주병을 던져 유리를 깨는 등 그야말로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다지만, 그 해 9월 SK가 삼성과의 문학 2연전을 싹쓸이하며 삼성의 13년만의 포스트시즌 탈락과 더불어 롯데의 2년 연속 가을야구를 도와주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벌어지리라 누가 알았을까?
이처럼 다사다난한 2009년이었으나 마지막까지 그에겐 순탄치 못했는데, SK는 시즌 막판 연승행진으로 1위 기아를 턱밑까지 추격했으나 너무나 아쉬운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직행에 그쳤고, 두산과 5차전(우취 포함 6차전)의 격전을 치른 끝에 코리안시리즈에 올랐다. 김광현, 송은범, 박경완이 없는, 차 포 마를 뗀 상황에서 벌떼불펜의 힘으로 버티며 코리안시리즈에서도 2승3패로 몰린 끝에 3승3패 동률, 더 나아가 7차전 6회까지 5대1로 리드를 잡은 상황이었다. 시프트, 작전, 한박자 빠른 투수교체 등 김성근의 온갖 쥐어짜내기가 시전되는 와중에 수비 실수 하나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승호와 카도쿠라가 연달아 흔들리며 5대4로 쫓기는 상황이 됐고, 최경환의 우중간 타구를 컷트하지 못해 3루타를 만들어준다. 이후 2루에 동점주자를 둔 상황에 다름아닌 우익수 박재홍이 김원섭의 애매한 타구를 잡으려다가 '''뒤로 흘려버리는''' 참사를 저지른다. 결국 3루에 묶어둘 수 있던 주자를 허망하게 들여보내며 5대5 동점을 허용하고 말았는데, 후속 정우람이 3루에 주자를 두고 추가점을 허용하지 않은걸 고려하면 두고두고 아쉬운 수비 하나였다. 이 일 때문인지 이후로 박재홍이 지명타자로 기용는 되는 경우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2009 시즌이 끝나고 또 다시 FA 자격을 얻었고, 원 소속팀과의 협상 마지막 날인 11월 12일 밤에 극적으로 계약금 4억 원, 연봉 4억 원에 SK에 잔류, 2010시즌에도 문학 야구장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하락세를 피하진 못했다. 300-300을 바라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선수였지만, 나이 탓인지 도루가 많이 줄어서 힘들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5타수 2안타 2볼넷 1타점 1득점, 타율&장타율 .400, 출루율 .571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으로 우승했다.
2.4.1. 2011 시즌
선발 출장 경기 중에 팀이 진 경기를 찾아보면,
'''47타수 5안타 타율 0.106'''. 특히 두산과의 4판에서는 아예 무안타.
물론 패전 기록이지만 대타 성공률이나 기타 등등 모든것이 부족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는 8월 까지 홈런도 하나 없는 조동화보다 장타율이 떨어질 정도다.
"자신이 김강민의 땜빵이냐" 하는 소리를 했다가 김성근 감독의 경질 직전에 1군에서 말소되었고 일부 팬들에게 비난을 들었다. 박재홍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구단 내부에 있던 발언으로 내부 징계로 끝날 수 있는 일을 기사들에게 공개시켜 일부 팬들에게 공격당하게 한 김성근 감독의 처분도 적절치 못했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SK에서는 코치 연수를 제의했으나 박재홍이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다른 팀으로 이적하거나 FA 미아가 될 기로에 놓였으나 FA 보상선수, 2차 드래프트 등으로 외야수 자원들이 유출되자 SK에서 코치 연수 제안을 번복하여 현역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실망한 일부 팬들 사이에선 '''운빨 하나는 지대로다'''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2.4.2. 2012 시즌
2012년 시즌 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신임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시즌 초를 2군에서 쭉 보냈고, 특별한 성과도 없었기에 모든 사람이 이제 박재홍은 은퇴하고 선수협 회장에 집중할 때라고 생각한 시즌이었다. 심지어는 팬들까지.
하지만 이만수 감독의 풀스윙 타격 지론과 궁합이 맞는 여러 사례중의 하나가 되어 불꽃을 태웠다. [40]
4월 26일 1군에 복귀하고서 4월 27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에서 선발 우익수이자 7번 타자로 출장하여 4타수 2안타(2루타 1개 포함) 1득점을 기록하면서 팀이 4:7로 승리하는데 나름대로의 몫을 했다.
4월 28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에서 경기에는 선발 우익수이자 5번 타자로 출전, 팀이 스코어 1:3으로 앞서던 3회말 1사 2, 3루에서 상대 선발 브라이언 고든을 상대로 쐐기를 박는 쓰리런 홈런을 포함해 4타수 2안타 3타점 2득점으로 맹활약하며 팀의 8:5 승리를 견인했고, 팬들은 감격했다. 이날 홈런은 '''개인통산 296호'''였다.
4월 29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에서 2회말 안타로 출루한 후 조인성의 안타와 이어서 터진 실책#s-2으로 홈을 밟으면서 '''개인통산 1,000 득점'''(역대 7번째) 고지에 오르면서 '''개인통산 1,000 타점-1,000 득점'''의 대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기록의 보유자는 당시 장종훈, 양준혁, 송지만으로 박재홍을 포함해 한국프로야구에서 단 4명 뿐[41] 이었다. 박재홍은 이날 대기록을 작성했던 한편 4타수 2안타(2루타 1개 포함) 1득점으로 활약했지만 팀은 9:4로 패하고 말았다.
5월 4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에서 스코어 3:3으로 팽팽하게 맞서던 8회 최대성의 빠른 공을 통타, 결승 투런 홈런을 날려 팀의 5:3 승리를 견인하였고, 300홈런에 단 세 개 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5월 18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솔로홈런을 쳤다. 개인통산 298호 였다.
5월 31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개인통산 299호 홈런을 기록했다.
하지만 부상이 도졌는지 6월 들어 2군행. 홈런 한 개가 아쉬운 상황이다.
그리고 10월 3일 잠실 LG전에서 벤자민 주키치 상대로 드디어 300홈런 달성에 성공했다.
10월 6일 문학구장에서의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8회 대타로 나와 안타를 치며 장종훈, 양준혁, 송지만, 장성호에 이어서 프로통산 5번째로 3000루타를 기록하였다. 동시에 만 39세 29일의 나이로 송지만이 가지고 있던 최고령 3000루타 타이틀(만 37세 5개월 18일)도 갈아치웠다.
하지만 시즌 후 지속적으로 프런트로부터 2년 연속으로 은퇴 후 코치연수를 종용당했고, 박재홍은 현역생활 연장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1월 26일 SK는 보류선수 명단에서 박재홍을 제외하며 자유계약선수로 풀어버리면서 선수경력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SK에서 방출당한 후에도 현역을 이어 가겠다고 밝혀 왔으나, 결국 더 이상 이어 나가지 못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2013년 1월 25일 선수협 주관으로 은퇴식을 연다는 기사가 나왔다. '''호타준족의 상징'''이자 '''황금 92 학번의 기수''' 중 한 명,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타자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42]
그래도 나름대로 SK 와이번스 프런트의 배려로 4월 20일 문학 야구장에서 은퇴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나 이 날 경기가 우천취소되면서 은퇴식이 5월로 연기되었다.
3. 선수협 회장
비리문제로 인해 사실상 내쫓긴 손민한의 뒤를 이어서 2011년 12월 9일 11차 정기총회에서 275표 중 89표를 얻어 87표의 서재응에 2표 차로 새 회장으로 선출됐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5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야구팬들 중에는 기존의 비호감이 섞여서 '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에게 무슨 선수협 회장?'이라는 등의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도 있지만 박재홍 자신도 내 코가 석자지만 일단 된 만큼 확실하게 해보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이호준#s-1이 바람을 잡아서 출마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정적인 시선이 꽤 많이 있었으나, 회장 취임 직후인 12월 15일부터 당면문제인 회계 감사에 착수하여 29일날 빠르게 결과를 내놓았다. 이후에도 전방위적으로 현재의 선수협의 비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방위로 노력하는 중. 야구팬들의 시선도 꽤 긍정적으로 바뀐 상황이며, 가장 훌륭했던 선수협 회장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거기에 2012년 1월 16일자 총회에서 그동안 선수협의 자금 유용의 문제가 되었던 판공비를 2군 선수 장비지원금으로 기부하기로 결정하여, 선수협의 이미지 상승과 더불어 박재홍 개인에게도 그 동안의 이기적이라는 소문을 긍정적으로 바꿔주는 계기가 됐다. 이는 과거 도원구장 시절부터 박재홍의 팬이었던 사람들이나 박재홍을 까는 사람 대부분이 박재홍 개인에 대한 시선을 뒤집는 계기가 된 셈.
2012년 6월 10구단 창단 문제와 관련해 선수협의 수장으로 KBO 측과 대척점에 서서 맞섰다. 10구단 창단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리그 중단까지 고려하겠다며 강수를 두었으며, 야구선수들과 팬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선수협과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박재홍을 응원하였다. 일단 7월 13일, KBO 이사회에서 제10구단 관련 안건을 '긍정적'으로 처리하겠다고 하면서 올스타전 보이콧은 철회했다.
여담으로 선수협 관련해서 강병규가 성실하고 주체적으로 일을 딱딱 처리한다 하여 좋아한다. 하지만 박재홍은 선수협은 강병규와 무관하다며 강병규에 대해 선을 그었다.[43]
2013년에는 사과문을 썼다면서 NC로 입단하려는 언플을 한 손민한의 행동에 대하여 트위터를 통해 작정한 듯 격한 반응을 보였으며, 얼마 뒤 현역 은퇴를 결정함에 따라 선수협회장 자리도 자동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은퇴식에서 손민한을 불러 그간 쌓였던 앙금을 풀면서 재조명받기도 했다. 손민한을 비판했던 건 후회하지 않지만, 꼬리표 때문에 선수로 영영 복귀하지 못할까봐 직접 불렀다고. 또한 손민한의 복귀 여부는 팬들과 후배 선수들에게 맡긴다고 했다. 그야말로 대인배. 관련 기사
박재홍이 은퇴하면서 공석이 된 선수협 회장 자리는 서재응이 이어받았다.
4. 은퇴식
경기 개시 전 우익수 시구
경기 종료 후 은퇴식
SK 프런트와 좋지 않은 감정을 남기고 무적 상태에서 은퇴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은퇴 기자회견 후 프런트에서 시즌 개막 후 은퇴식을 치르자고 제의한 데 대해서는 동의해 SK 구단차원에서의 은퇴식이 성사되기에 이른다.
통상적으로 전 시즌에 은퇴를 선언한 선수들의 은퇴식이 개막전 다음날에 열리는 것을 고려하면, 박재홍의 은퇴식은 3월 31일 문학 LG전에서 열릴 것이 유력했다. 하지만 해설위원으로 변신한 박재홍이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경기를 중계할 때 은퇴식을 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프런트에 요청함에 따라 은퇴식은 4월 말로 연기되었다. 결국 확정된 일정은 4월 20일 고향 연고팀이자 애증의 관계였던 KIA 타이거즈와의 문학 홈경기 때 실시하는 것으로 공지되었다.
이 은퇴식 공지 과정에서 SK 프런트는 엄청난 삽질을 했는데, 안 그래도 원정 관중이 꽤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KIA전인 상황에서 이미 '''예매가 시작되고 하루가 지나서 공지를 올린 것'''이다. 공지가 올라온 시점에서 '''응원지정석은 완전히 매진된 상태'''였다. 레전드 은퇴식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팬들의 은퇴식 예매를 순전히 운에 맡겨버린 초특급 병크. 이외에도 영구결번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불만까지 나오는 등 여러모로 은퇴식 기획에 있어 미숙함을 드러낸 해프닝이었다.
다행히도 당일 경기가 우천취소되면서 은퇴식은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프런트의 발표에 따르면 일단은 5월 중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며, 이 경우 5월 18일 롯데전에서 은퇴식이 실시된다.
결국 5월 18일 롯데전에서 은퇴식이 진행되었다. 은퇴식이 예정되어있던 날이라 성적 외적 문제로 발길을 끊었던 SK 팬들까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문학구장을 찾았다. 이날 박재홍은 경기시작 전부터 유니폼을 입고 싸인회를 가졌고, 시구까지 맡았다. 이날 박재홍은 마운드가 아닌, SK 시절 주 포지션이었던 '''우익수 위치에서 홈으로 송구하는''' 시구를 선보였다.
역사에 남을 대선수의 은퇴식이니만큼 승리를 기원했지만 쏟아지는 비 탓에 SK가 스코어 6:5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강우콜드로 경기가 끝나버렸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결국 은퇴식은 진행되었고, 대다수의 관중들은 경기장을 떠나고 남아있던 팬들은 지붕이 있는 4층 포수 뒤 관중석과 응원 지정석에 모여 은퇴식을 함께 했다.[45] 그렇게 은퇴식이 진행되던 도중 이만수 감독이 그라운드에 들어서고, 은퇴식 진행자였던 문학구장 장내 아나운서 김우중 아나운서가 '''SK의 영원한 감독 이만수라고 소개를 하자 그렇잖아도 성적이 부진하고 논란이 많은 이만수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SK 팬들의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현장에 간 사람들 말로는 '''진짜로 자발적으로 야유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전임 김성근 감독이 한화에서 큰 실패를 맛보면서 성적에 감춰졌던 그의 논란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자 이만수 감독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역시 인생은 화무십일홍이라던가...
현대에서의 이미지가 더 강했지만 인천 연고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답게 은퇴 후 현역 시절 입었던 유니폼과 베이스 및 기념구가 SK행복드림구장 안에 위치한 W 갤러리[46] 레전드 플레이어 존에 진열되어 2021년 현재까지 전시되고 있다.
5. 해설자 경력
은퇴한 후 엠스플에서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순철처럼 모두까기인형 스타일의 해설을 한다. 이숭용, 마해영, 양준혁 등에 비하면 해설가로서는 나은 평가를 받는다. 가끔씩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해설도 하며 메이저리그 지식은 부족하지만 선수 경험을 살린 해설과 조금이라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지식을 습득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13년 8월 2일, 3일 있었던 LG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서 편파해설을 하는 바람에 삼성 팬들이 분노, 엠스플 게시판을 초토화시킨 적이 있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례적으로 3연전이 끝나기도 전에 해설자가 교체되었는데 하필 교체된 사람이...
경험이 쌓이면서 해설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여러 측면에서 좋아지고 있는 편. 선수 출신 해설가들 중에서는 말도 잘하고 논리적이다. 게다가 너무 흥분하지만 않으면 타고난 목소리 톤도 좋은 해설자로 꼽힌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해설을 약간이라도 병행한 덕[47] 인지 야구에 대한 통계적 접근에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돌직구를 던지기는 하지만 해설의 정확성과 전문성에 있어서는 확실히 좋은 평가를 받는다.
2015 시즌에는 투수 출신이면서 자신처럼 해설을 잘하는 신입 정민철 해설위원과 시너지를 이루어 해설계의 투타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돌아온 차명석 해설위원과의 투타조화도 훌륭하다.
2017 시즌까지도 MBC에서 유일하게 밥값하는 엠스플 최강해설진의 일원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왠지 정민철 해설도 그렇도 MLB 외도 때문에 KBO 해설의 빈도가 약간 줄어든 것은 KBO 팬들에겐 아쉬운 점. 다만 2인 해설에 비해 1인 해설을 할 때는 강한 주관과 자존심으로 인해 이순철 주니어스런 모습이 있기 때문에, 해설실력은 선수시절 실력처럼 모두가 인정하지만 어느 정도 취향을 타는 측면은 있다. 말투와 태도 특성상 약한 편파해설의 경향만 있어도 강해보이기도 하고...
어린 선수 혹은 젊은 선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여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종종 있다. 고졸 신인도 아닌, 군필에 나이 30살 전후에 팀의 실세이자 주축인 선수한테 어린 선수라는 표현은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 주로 대상이 본인이 선수시절 막판 베테랑 시절일 때 신인급인 선수들이 해당되는데, 본인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어린 선수로 계속 인식되어 있기 때문인 듯 하다.
김성근 밑에 있던 선수 출신 중에 드물게 그 잘못을 거리낌없이 비판하는 해설위원이다. 그 시절 같이 뛰었던 다른 이들과는 대조적인 부분.[48]
2018 한국시리즈 해설 때 모 약쟁이를 겨냥한 '''봉인해제''' 발언으로 누리꾼들의 웃음을 샀다.
6. 논란
- 2020년 10월 10일 정병문 캐스터와 심수창 해설위원과 함께한 키움 대 한화 경기에서 김창현 감독 대행을 겨냥하면서 수많은 망언을 쏟아냈다며 큰 비난을 받았다. 특히 데이터를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으며 시청자들의 어이를 털리게 했다는 것인데 김창현이 데이터 코치 출신인게 맘에 안들어서 그런게 아닌가 하는 확대해석도 덧붙였다. 실상은 김창현 감독 대행이 말한 '전력분석 자료의 50%가 실제 경기에 적용이 된다'는 주장에 반신반의하며 그 근거가 따로 없고, 전력분석으로 명성이 나 있는 김정준 해설위원조차 10프로가 넘기기가 어렵다는 말을 덧붙이며 야구는 오락 게임이 아니며 수능 답안지처럼 정답이 아니라는 말을 나눴을 뿐이다.# 데이터를 무시했다기 보다는 김창현 감독 대행이 명백한 근거 없이 데이터를 과신하고 있지 않는가라는 의문에 가깝다. 아래는 대화 전문이다.
7. 기타
- 2003년~2004년 KIA에서 선수로 뛰던 당시 대인관계가 썩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가장 유명한 건 광주일고 동기인 김종국과의 관계가 생각만큼 원만하지 못했다는 것. 프로 입단 과정에서 박재홍과 김종국의 라이벌 관계도 한 원인이다. 아마 시절 평가는 김종국이 박재홍보다 우세했었다. 한국의 프로야구판이 좁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의 케이스다.[49] 또 자존심이 강하고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상 2000년대 초중반까지 해태 시절의 위계질서 문화가 남아 있던 KIA의 고참들과도 전체적으로 융화하지 못해 팀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소문 때문인지 당시 SK 조범현 감독은 박재홍을 영입하는 것을 망설였지만, 한때 같은 팀이었던 박경완이 조범현을 설득해 영입했다고 한다. 본인은 이런 자신에 대한 편견을 풀고 싶었던 모양. 아이러니하게도 김종국과 박재홍 둘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으로 같이 뛴 적이 있다.
- 야구 황금세대인 92학번의 한 사람이다. 광주일고 시절 김종국(주로 2루수)이 3번을, 자신은 4번 타자로 활약하며 팀을 이끌었고, 종종 투수로도 등판했다. 3학년이었던 1991년에는 팀을 청룡기, 황금사자기 결승전에도 올렸지만, 둘 다 경남상고와 신일고에 패해 준우승으로 그쳤다.[50]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박찬호 등 스타 투수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고교 시절 동기생들 가운데 타자로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51]
- 하지만 고교 졸업 직후 해태의 1차 지명을 뿌리치면서 대학에 진학했고, 이후 앞에서 서술한 일련의 프로 데뷔 과정을 통해 광주의 팬들에게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래서 광주 해태전에서는 술에 만취한 한 해태 팬이 캔맥주를 던진 것이 하필이면 박재홍의 얼굴을 정통으로 강타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지명을 거부하고 대학으로 가는 경우는 박재홍 이외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이게 비난이 컸던 이유는 현대 피닉스의 돈지랄을 통한 우회영입 꼼수 때문에 지명권 트레이드라는 어처구니 없는 과정을 통해 입단했기 때문. 물론 해태가 현대처럼 돈을 팍팍 쓰던 구단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해태는 연고지역 출신인 박재홍에 대한 지명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금+최상덕 트레이드를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여야 했다. 참고로 마일영도 비슷한 사례에 속한다. 다만 쌍방울이 돈이 모자라서 판 것 뿐이다.
- 앞서 나왔듯이 언론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이는 박재홍이 "야구장에선 야구만"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때문에 야구장 안에서 기자의 인터뷰나 취재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고 거부해왔다. 불타는 그라운드 시즌1 박재홍 편에서 이런 모습이 생생히 드러난다.[52]
- 언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것과는 달리 팬들과의 의리는 상당히 신경쓰는 편. 특히 자신이 뛰던 팀인 현대와 SK의 연고지인 인천광역시에 대한 애정이 엄청났는데, 현대에서 눈 밖에 나서 트레이드된 이유가 연고지 이전과 관련해서 프런트에게 대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다시 트레이드를 통해 SK 와이번스로 이적하며 인천 팬들의 환영을 받으며 인천팀으로 되돌아오는데 성공했고, 2009년 말 두번째 FA에서도 "인천에서 300-300을 달성하고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고 팬들 역시 인천 프랜차이즈 사상 첫 우승을 안겨준 박재홍을 꽤나 좋아한다. 타팀팬들에겐 개념없다고 눈에 가시처럼 여겨지지만 여전히 인천의 야구팬들에게는 사랑받는 선수이다. 인품도 훈훈하고, 팬서비스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물론 기자들과 친한 편이 아닌 지라 신인왕+MVP 떡밥이 있던 시절에는 팬들을 귀찮아 했다는 썰이 풀리기도 했다.
- 하지만 고향인 광주광역시로 경기하러 내려가면 얄짤없었다. "지명까지 받았는데 돈 때문에 연고팀을 등졌다"는 것이 주된 반감의 원인으로[53] 해태 시절엔 박재홍을 향해 쫓아다니면서 10원짜리 동전을 투척하는 경우도 있었다.[54] 이후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어 이적 첫 해에 활약을 어느정도 하나 싶더니, 두 번째 해에 태업논란과 구단주와 트러블로 인해 다시 평가가 나빠졌다. 그렇게 SK 와이번스로 이적한 후, 광주로 원정을 가서 KIA 타이거즈와 경기를 할 때면, 경기 시작 전부터 구장에 들어와 있던 무등 아재들이 귀신같이 찾아내서 고향 사투리가 섞인 쌍욕으로 갈궜다고 한다. 어느 정도냐면, 나이 지긋한 광주 기아팬들이 박재홍을 발견한 순간, "아따 재홍아~ 여그가 니 고향이여. 이 XX야!"로 말문을 열고, 박재홍이 쳐다보면 "뭘 구다봐! 이 XXXX야!" 같은 모욕적인 욕설을 시전했다고 한다. 이 정도가 많이 순화된 표현으로, 당시 광주 팬들이 박재홍에게 너무 가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1996년 신인 시절 당시 리그의 최고 에이스였던 조계현이 대놓고 본때를 보이겠다고 박재홍에게 벼르기도 했다. 박재홍 부모님도 박재홍이 연세대를 졸업하고 해태 입단을 거부한 뒤 현대로 가버리자 이 일 때문에 한때 광주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도 못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팬들의 감정도 누그러지고, 2013 시즌 정우영, 손혁과의 3인 중계 도중에 KIA 팬들에게 손혁과 같이 사과하기도 하는 등, 그 이후 크게 모난 행보는 보이지 않아 이젠 그러려니 하는 KIA 팬들도 상당한 편.
-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직후 모기업 기아자동차에서 막 출시했던 오피러스를[55] 직원 할인을 받아 구매한 적이 있다. SK 이적 후에도 이 오피러스를 타고 다녔다고. 여담으로 박재홍의 맞트레이드 상대였던 김건한 역시 KIA로 가자마자 오피러스를 구매했다고 한다.
- 아는 사람은 알지만 의외로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현재까지 미혼이다.[56][57] 크보계 동자공의 대가 양준혁(1969년생)이 2010년에 은퇴한 이래 가장 나이 많은 노총각 야구선수였다. MBC 스포츠플러스 '베이스볼 투나잇 야!'의 쉬어가는 코너 '변두리 야구'에서 조인성, 강동우와 함께 KBO 3대 노총각으로 언급된 적이 있었다.
2012년 류택현이 플레잉 코치로 복귀함에 따라 2번째로 나이 많은 노총각 선수가 되었고, 2013년에 결국 양준혁에 이어 두 번째 노총각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MBC 스포츠플러스 '구구절절'에서 양준혁 해설위원, 정병문 캐스터[58] 와 함께 악성 미분양(노총각을 의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러한 특성 때문인지 2017년부터 싱글들이 출연하는 SBS 예능인 "불타는 청춘" 에 출연 중. 강동우와 류택현은 결혼해서 노총각에서 탈출했고 그 양준혁도 결혼소식[59] 을 알리며 노총각에서 탈출할 예정이라 박재홍만 더욱 안습해졌다(...)
- 현대 유니콘스 입단 동기였던 장정석 전 키움 히어로즈 감독이 1998년 11월에 결혼했을 당시 결혼식 사회를 맡았던 적이 있다. 이 때만 하더라도 일찍 장가를 갈 줄 알았던 그였기에 지금도 미혼이란 것은 상상을 못할 정도다. 이후 박재홍이 KIA로 트레이드된 뒤에도 반년 먼저 KIA에 온 장정석과 다시 재회하며 KIA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박재홍의 팀 적응 등을 장정석이 도와주는 등 나름 친분이 있던 걸로 보인다.
- 같은 연세대 92학번 우지원과 절친이다. 야구부와 농구부가 친했다고 하며, 우지원은 박재홍에게 결혼부터 하라고 말했다.
- 네이버 라디오볼 2013년 5월 13일 편에서 정철우 기자가 언급한 바로는, 박재홍 해설위원에게 "어렸을 때, 우상이었거나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하는 선수는 누구냐"라고 물어보자 대답이 "없어요"라고 하더니 대뜸 "나보다 야구 잘하는 선수를 못 봤다"고. 그리고 이어 "좌측 폴대 옆으로 살짝 빗겨나간 파울을 치고 우측 폴대 옆으로 살짝 비켜난 파울을 치고, 타석에서 살짝 물러선 후 그 다음 공을 센터 전광판을 맞추는 홈런을 때린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랜다. 그 이야기에 놀란 정철우 기자가 "그 선수가 누군가요?"라고 묻자 너무나 태연히 "저요".
- 어렸을 때부터 야구만 열심히 했는지 방송 중계 중에 LG 트윈스의 김용의의 별명이 또치라고 하자 또치가 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캐스터가 만화 아기공룡 둘리의 등장인물이라고 하자 왠지 빼빼 마른 캐릭터일 거 같다[60] 고 하면서 경기 중에 또치를 검색했다. 결국 검색 끝에 또치의 정체를 알게 되고 나서는 별명에 수긍했다.
- 지금 10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1990년대 중반 프로야구 스티커 뽑기 붐이 불었을 때 이종범-마해영 다음의 시그니처 캐릭터가 박재홍이었다. 쉽게 말해서 스티커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앞으로도 그만큼 압도적인 포스를 뿜어내는 신인은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 그 이유다.
- 프로 입단 1년 전인 1995년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작은아버지를 잃었다고 한다.
- 해설위원을 하면서 개그 캐릭터로 이미지를 단단히 굳히는 중이다.노래부르는 빵형
- SBS 불타는 청춘에 출연한다. 시청자 반응은 그럭저럭인 편. 이후 멤버로 출연하고 있다. 여기서는 큰 손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는데 불청에 합류한 첫 여행이었던 전북 남원에서 라면 100인분을 만들더니 부산에서는 어묵 150인분 만들기에 성공하여 같이 간 출연진이랑 제작진들과 모두 나눠먹었다. 이후에도 명절음식을 싸들고 오거나 닭 16마리를 사와서 가마솥 옛날 통닭을 만들기도 했다.
- 인천에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천sell야구장에서 하는 레전드와 함께하는 야구레슨에서 사회인야구인들에게 인천맛집이 어디냐고 물어봤다.
- 송도국제도시에 거주하는 듯 하다. 가끔 동네에서 목격된다. 자가용은 BMW 740d.
7.1. 빵 사건의 영원한 용의자 뚜레재홍
2007년경, 당시 KIA 타이거즈의 투수였던 신용운에게 싸이 쪽지를 통해서 질문을 하였고 빵 사건의 범인이 박재홍이라는 답변 쪽지를 받았다는 캡처를 제시하여 그렇게 진실이 밝혀지나 싶었으나, 싸이 쪽지의 발신자 이름 조작이 가능한것이 밝혀지고 이후 신용운이 그런 답변을 한 적이 없음을 밝힘으로서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이 일을 만든 유저는 이종범을 용의선상에서 제외하기 위한 조작이었다고. 여담으로 사건 직후 신용운을 만난 경기에서 박재홍은 '''홈런을 날렸다.'''
이후 OBS의 불타는 그라운드를 통해서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말했고 시간이 더 지난 후에는 진범이 마해영인 것으로 사실상 확정되었지만, 이미 빵재홍, 뚜레재홍 등의 별명이 붙어버린 안습한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뉘앙스였으나 워낙 입에 착착 달라붙어서 그런지 긍정적인 뉘앙스로 바뀌어서 계속 쓰였다. 박재홍이 진범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져서 더 부담감 없이 빵 드립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면도 있다.
박재홍이 빵재홍이란 말이 듣기 싫은 시절 자신은 빵재홍이 아니라고 해명하던 영상.
박재홍 본인도 한때는 마음고생을 꽤 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별 거부감 없이 개그 소재로 사용한다. 해설위원으로 데뷔한 이후 대전 중계를 하러 내려갔을 때 빵집에서 빵을 사서 기자들에게 돌렸고, 롯데 경기 중계전, 김시진 감독과 만난 자리에서 한 기자가 "빵 사건을 아냐?"라고 물었더니 김시진 감독이 안다고 하자 옆에 있던 박재홍 曰, "이제부터 빵 사건이 뭔지 아는 사람만 빵이라고 부르라고 해야겠어요."
- 팀의 최고참 급이 된 후로는 빵형, 선수협 회장이 된 뒤로는 빵회장님. 사실 빵형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타팀 팬들도 박재홍을 대상으로 빵과 관련된 별명을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SK 팬들은 말할 것도 없고.
- 2013년 정기 연고전 야구 경기에서 연세대측의 편파 해설을 맡은 바 있는데, 원래 해설하기로 했던 6이닝이 지나고 "빵이 없어서 배고파서 해설을 더 못하겠다"는 드립을 친 바 있다.
- 위의 영상에서 박재홍이 언급하듯 본인은 왼쪽의 브래드 피트와의 합성사진을 조동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오른쪽 사진은 2013년 9월 11일 군산 경기 해설 때문에 내려갔다가 유명한 빵집인 이성당의 단팥빵을 한입하는 빵해설의 모습이다. 동족상잔 드립은 정우영 캐스터가 했다고 한다.
- 해설자로 데뷔한 2013년, 베이스볼 투나잇 야!의 예고 영상에 정말로 바게트를 들고 출연해 조용준이 던진 슈라이더를 때려서 폭파시켰다.
- 한국프로야구/2014년 개막전 베이스볼 투나잇에서 4강 진출 팀 선정에서 넥센 히어로즈를 선택했고 만약 4강에 진출 못할 시 빵집을 차리겠다고 공약했는데 넥센의 포스트시즌이 확정되면서 그런 거 없게 되었다.
- 2016년 4월 17일 NC-롯데 중계 중, '2002년에 조사한 '밥을 가장 잘 얻어먹을 것 같은 선수' 순위에서 2등(압도적인 1위는 정수근...이라는 통계가 나오자 "오히려 밥을 많이 사줄 것 같아요", "빵 많이 얻어 먹은 거 아니에요?" 라며 빵 사건 드립이 또 튀어나왔다.
- 2016년 5월 6일 기아-넥센 중계 중, 서건창이 바나나를 먹자 '선수들이 배고프면 빵 먹어야 돼요(26초 부터)' 라는 드립을 쳤다.
- 2016년 9월 15일 넥센-kt의 경기 중 황덕균이 덕아웃에서 간식거리을 먹자 "저는 주로 빵을 먹었는데요, 배고프면 먹어야죠" 라며 캐스터와 시청자들을 빵 터뜨렸다.
- 빵재홍과 꼴리검의 절묘한 조화 상대역은 배지현 아나운서다.
- 2018년 8월 6일 MBC SPORTS+ 야구중심에서 시청자 질문으로 제과점 운영해 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라는 질문에 "제 숙원사업입니다."라고 맞받아치는 센스를 선보였다.
8. 기록
'''30-30'''을 데뷔 시즌에 기록하더니, 선수 시절동안 무려 '''세 번'''을 기록했다. 이것만으로 그의 능력은 설명이 된다. 특히 매년 162경기를 치루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비해 96,98시즌 당시 KBO는 126경기를 치렀다. 때문에 30-30의 가치가 더욱 높다는 점을 상기하자. 경기수를 감안한다면 크보의 30-30은 160경기의 40-40에 가깝다. 심지어 1998년에는 30홈런-40도루의 기록을 수립하였다. 기록 달성 연도는 1996년, 1998년, 2000년. 2000년에는 타점왕까지 했었다. 호타준족의 산 증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역사적인 선수. KBO 역사상 최강의 호타준족 타자라고 해도 무방하다.[61]
참고로 2000년에는 '''3할-30홈런-30도루-100타점-100득점'''을 기록했다. 한국야구 최초로 '''200홈런-200도루''' 기록을 세웠고 2009년에는 '''250홈런-250도루'''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도루에 대해선 여러가지 의견이 많은데 도루 성공률이 매우 낮다는 것은 문제로 지적된다. 통산 도루 성공률이 겨우 '''64%'''에 불과하며 30-30을 기록했을 때도 대부분 60%대에 불과했다. '''도루란 실패하면 주자가 없어지고 아웃카운트만 하나 늘어나는 리스크가 큰 행동'''. 따라서 70% 이하, 엄격하게 보면 75% 이하의 도루 성공율은 팀에 도움은커녕 해가 되는 플레이다. 삼성의 레전드인 양준혁도 같은 이유로[62] 도루 스탯에 대해선 평가가 박한 편이다.
스탯티즈 기록으로는 도루 대비 득점기여인 RAA도루가 -6.29가 나왔다. 오히려 도루한게 해가 되는 꼴. 단순히 마이너스 수준이 아니라 1786위 중에서 1761위라는 처참한 RAA도루를 기록하였다. 도루 200개 이상한 선수 중에 박재홍만이 유일하게 RAA도루 기록에서 마이너스를 기록하였다. 즉, 200홈런-200도루는 기록을 위한 기록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스탯티즈RAA도루기록
다만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 기여도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는 있다.
82~95년까지 삼청태현에서 준족이라 부를만한 선수는 이해창, 김일권 등 은퇴직전의 타 구단 영입노장 뿐이었고 달리는 야구가 가능한 선수가 없었기 때문 당시 인천팬들은 성공율과 무관하게 구 태평양 팬들에게는 김일권 은퇴이후 2루에서 잘 살아남는 선수를 처음 본 셈이다.
원래 데뷔 시즌에 김재박 현대 감독의 시즌 구상은 박재홍을 톱타자로 기용해[63] 김인호나 김성갑 같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기존의 테이블 세터진을 보완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박재홍의 지나치게 좋은 공격력 즉 '''1번 치고 장타력이 너무 좋다'''는 이유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3번으로 타순을 변경하게 되었다. 1번타자는 김인호 낙점. 결국 이 때문에 문동환 카드를 이용해 롯데에서 전준호를 데려와 이 문제를 해결했다. 김대익의 가능성을 믿고 쉽게 트레이드를 결정한 롯데는 그 이후 십수년간 톱타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2006년까지만 해도 홈스틸까지 성공하는 등[64] 적극적으로 도루를 시도했으나,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에는 부상 위험을 감안하다 보니 좀처럼 박재홍에게는 도루 사인을 내지 않는지라 2007년부터는 20도루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없다. 호타준족이지만 도루 실패율이 꽤 높은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을 국내에서 찾는다면 이영우와 양준혁 정도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개인 통산 최고 타율이 1997년에 96경기를 뛰며 기록한 3할2푼6리였을 정도로 기술보다는 힘으로 장타를 만들어 타점을 쓸어담는 스타일이었다. 스윙 자체가 원년 홈런왕 김봉연과 비슷했다.
획득한 우승반지는 1998, 2000(현대) 2007, 2008, 2010(이상 SK)으로 총 5개.
2013년 3월 마구마구에서 레전드 카드 패치 때 SK가 아닌 현대 소속으로 나왔다. 팀으로 뛴 연차는 오히려 SK 시절이 8시즌으로 현대 시절 7시즌을 넘어섰지만, 전성기 때 임팩트가 임팩트다 보니 이렇게 된 듯. 그러나 애초에 연고지 문제 때문에 현대에서 쫓겨나다시피했고 인천 연고로 뛴 시즌으로 한정할 경우 12시즌이나 되니 인천야구 떡밥을 걸고 넘어지는 SK 팬 유저층에서는 불만을 제기했다. 이것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2013년 6월 프로야구 매니저의 추가 레전드 카드에서는 현대랑 SK 양쪽 모두 1장 씩 총 2장의 레전드 카드로 나왔다. 하지만 얼마안있어 마구마구에서도 레전드 기준이 완화되어 SK소속 레전드 카드도 추가되었고 2015년 10월엔 마구최고등급 카드인 블랙카드는 당당히 현대가 아닌 SK로 카드가 출시되었다
2001년 심정수가 현대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팀 내에서 유일하게 번트 면제(?)를 받는 선수였다. 당시 현대는 40홈런에 ops 1.034로 2000년 리그 mvp였던 박경완조차도 번트를 6회나 댔고, 같은 해 타율 1위였던 박종호가 번트 20회로 리그 전체 3위를 기록하는 팀이었던 것을 보면 특별 대우를 받은 셈이다. 현대에서의 7년간은 번트를 단 한 번도 대지 않았지만, 2003년 KIA로 이적한 이후에는 은퇴까지 거의 매 시즌 번트를 댔다.
이하 선수생활 시절 통산 주요 기록. 순위 기준은 은퇴식이 거행된 2013년의 시즌 종료 시점 기준이다.
- 통산 300홈런으로 역대 7위. 바로 위인 6위는 311홈런을 기록하고 있는 송지만, 5위는 314홈런을 기록하고 은퇴한 박경완이다. 이 세 선수의 나이와 홈런 개수 차이를 감안해 보면, 은퇴할 때까지 입단동기인 송지만과 6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될 듯했는데, 2012 시즌을 끝으로 박재홍이 은퇴하면서 당시 현역이던 송지만의 사실상 승리. 덧붙여 2014년까지를 기준으로 한 현역 선수 중 박재홍, 송지만의 홈런 개수에 가장 근접해 있는 선수는 285개의 이호준, 273개의 김동주뿐으로 그 외 선수들과는 넘사벽이 존재한다. 은퇴 후에는 이호준이 2015년, 이범호가 2017년에 301호 홈런을 치며 2018년 기준으로는 9위다.
- 역대 최고의 호타준족 답게 통산 도루 267개로 역대 13위. 2011년에 김주찬에게 9위, 2013년에 이종욱에게 10위 자리를 역전당했지만, 2012년까지 도루와 홈런 모두 역대 10위권 내에 올라가 있던 선수는 박재홍이 유일했다. 이후 박용택과 정근우에게 밀려 순위가 더 내려갔고, 이용규가 평년 수준으로 성적을 기록한다면 2014년 말에는 14위까지 내려간다.
- 통산 1,081타점으로 역대 5위. 그 위로는 1,389타점의 양준혁, 1,145타점의 장종훈, 2013년까지 각각 1,102타점의 이승엽과 1,097타점을 기록한 김동주 밖에 없다.
- 통산 3,000루타로 역대 6위. 그 위에는 2013년을 기준으로 양준혁이 3,879루타, 이번에도 역시 데뷔 동기인 송지만이 3,186루타, 그 뒤에 장종훈(3,172), 장성호(3,069), 이승엽(3,006)이 있다. 데뷔 당시의 임팩트는 박재홍>송지만이었으나 꾸준함이 강점인 송지만이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역전했다. 재미있는 점은 홈런기록과 더불어 보면 에누리 하나 없이 딱 300홈런-3000루타라는 점이다.
- 삼진이 약간 많은 편이다. 1,147삼진으로 역대 4위. 2013년 기준으로 1위 박경완(1,600개)과 이번에도 역시, 현역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송지만(1,451개)이 더 많은 숫자를 기록하였다. 3위는 장종훈의 1,354개다.
- 삼진이 많은 타자였지만 그 것을 상쇄할만큼의 볼넷을 얻었던 타자이기도 하다. 볼넷 875개로 역대 9위를 기록하고 있다.
- 준족이었지만 통산 병살타는 151개로 굉장히 많다. 리그에서도 느리기로 소문난 진갑용과 함께 역대 공동 8위. 통산 도루 20위권 내에서 이 정도로 병살타가 많았던 선수는 은퇴/현역을 불문하고 아예 없다. 물론 리드오프로 주로 출전하는 발빠른 선수와는 달리 누상에 주자를 두고 타석에 들어오는 박재홍을 무작정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 정규시즌 성적과는 별개로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서 3회나 우승하였는데,(1997년, 1999년, 2008년) 이는 양준혁과 함께 최다 우승기록이다. 특히 2008년 홈런레이스에선 월드홈런레이스라는 이름 하에, 국내선수끼리 예선을 한 후에 베이징 올림픽 대비를 위해 국내에서 훈련 중이던 네덜란드와 쿠바 선수 1명씩을 뽑아 대결을 했는데 거기서 우승을 했다.
9. 연도별 주요 성적
[1] 음력 9월 7일. # [2] 02시즌에 8경기 출장한 적이 있다.[3] 지명 거부 후 연세대학교 입학.[4] 졸업 후 1996년 실업야구 팀 현대 피닉스와 계약을 맺으며 결국 해태가 현금+최상덕을 받는 대가로 박재홍의 현대 유니콘스 입단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아래에 후술한 것처럼 고향팀인 해태-기아를 상대로한 원정경기마다 아재들에게 쌍욕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5] S! K! 박재홍! 호타준족 박재홍! X2[6] 오오 오오오오 오오오오 오오~ SK 박재홍 X4[7] 응원 전용 구호가 끝나면 바로 응원가를 이어서 불렀다.[8] 빵형이나, 뚜레재홍과 같은 배리에이션도 있다. 한때 빵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다는 설로 인해 불리웠던 별명이나, 2020년 현 시점은 주범이 밝혀지는 바람에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한명재 캐스터가 사석에서 빵이라고 부르고 본인도 제과점을 차리고 싶다고 하는 등, 여전히 본인과 주변 사람들은 빵과 관련지어 말하고 있다.[9] 최형우가 FA 100억 계약 하였는데 두 사람의 나이차가 10살 이기에 틀린 소리가 아니다.[10] 전성기에는 중견수를 주로 봤고 선수 인생 후반기에는 우익수로 활약했다. 이 때문에 인천 SK 행복드림구장의 외야 우측 관중석을 '빵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특히 SK 와이번스 프런트 퇴진운동 당시 이 운동에 참여했던 팬들의 집결지가 빵존이었다.[11] 아마추어 선수 시절에는 투수 겸 내야수였다. 광주일고 시절에는 투수로도 좋은 활약을 보였고 연세대학교 재학 중에는 2루수와 3루수로 뛰었다. 후술하겠지만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할 때도 내야수 요원으로 거론된 바 있다. 그것도 당시 현대 유니콘스에서 가장 취약했던 포지션이었던 2루수와 3루수 후보로 꼽혔다.[12] 박재홍 위원이 직접 밝힌 바로는 "우리때는 다 대학갔어" 라며 일부러 거부한게 아니라고 했다. 추가로 해태 관계자가 박재홍에게 대학 갔다 오라는 이야기도 했다고.[13] 일명 '''현대피닉스 사태'''로 현대가 프로구단 창단이 어렵게 되자 아마구단인 현대피닉스를 창단하여 아마유망주들을 거액의 계약금으로 휩쓸었다.[14] 외야 전향 과정에 관해서는 사회인야구 클리닉 프로그램인 쉘 힐릭스 클리닉에 코치로 참가한 박재홍 본인이 "외야수 출신인데 왜 내야 코치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원래 내야수였고, 내야수로 입단했는데, 팀 훈련 당시 자연스레 내야로 들어가던 와중에 한 고참선수가 '너 외야로 나가'라고 지시하면서 얼떨결에 외야수로 뛰게 됐다고 증언했다. 해당 고참이 누군지에 대해 증언하지 않았고, 다소 농담 섞인 에피소드로 추정된다.[15] 4억 3천만 받고 내줄 만한 선수가 홍현우, 이종범,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급이 나온다!!(조계현이 97시즌 종료 후 삼성과 4억에 트레이드된다.) 아무리 괴물 신인이더라도 신인 상대로 이 정도 출혈은 생각하기 어렵다.[16] 컴투스 프로야구 시리즈에서 프로필 사진으로 쓰였다.[17] 30개, 2위 양준혁 28개, 3위 이종범 25개[18] 108점, 2위 양준혁 87점, 3위 이종범 이승엽 임수혁 76점[19] 2019년 까지도 유일한 만장일치 신인왕이다. 타격 3관왕의 양준혁도, 리그 MVP-투수 트리플크라운의 류현진도, 각종 신인 타자 기록을 갈아치운 이정후도 만장일치 신인왕은 받지 못했다.[20] 2006년 류현진이 MVP를 수상할 때, MVP를 이대호와 류현진 중 누가 타야 할 지가 문제되었을 뿐, 류현진이 MVP와 신인상을 동시에 수상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논란거리가 아니었음을 떠올려 보자.[21] 그해 탈삼진 1위는 롯데의 주형광의 221개였는데, 다승 부문도 구대성과 공동 수상했다.[22] 기자 본인들에게 건방지다는 얘기다.[23] 대신 2017년과 2018년에 나왔다.[24] 도원야구장에서 시범경기를 직관한 위키러의 목격에 따르면 우익수로 출장한 경기에서 포수 김동기와 캐치볼을 하다가 91m 우익수 폴대 앞에서 던진 공이 포수 훨씬 뒤의 백스톱을 맞춰버렸다. 더불어 관중들은 드디어 양승관 이후에 제대로 된 우익수가 왔다며 환호. 인천 프로야구의 원조 슈퍼스타였던 양승관도 꽤나 강견이었는데 도원야구장 홈플레이트에서 던진 공이 공설운동장 주경기장으로 넘어갔다는 후덜덜한 일화가 전해진다.[25] 당시 윤덕규는 노쇠화했고, 김인호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물빠따 태평양 출신 타자답게 커리어 내내 타율 0.250를 넘겨본적이 거의 없었다.[26] OPS는 1.061, wRC+는 무려 193.7(스탯티즈 기준)을 기록했다.[27] 3할 타율-30홈런-100타점은 프로야구 타자라면 누구나 세우고 싶어하는 대기록이자 중심타자의 기준이 되는 기록이다. 이 분야의 끝판왕이 있다면 발전이 없다는 얘기를 듣던 MLB의 어느 레전드. 그런데 그 레전드는 물론 현세대 톱클래스 리빙 레전드로 불리는 선수마저도 한 시즌에 3할-30홈런-100타점-100득점을 하면서 30도루 이상까지도 한 적은 없다. 박재홍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28] 2015년 NC의 에릭 테임즈가 15년 만에 30-30 클럽에 가입하였지만, 이는 외국인 선수의 기록이다. 토종 30-30은 2000년 박재홍이 마지막인 셈이다.[29] 광주일고 선후배 지간이기도 한 이현곤과 정성훈은 타이거즈의 차세대 핫코너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이었으며, KIA 입장에서는 이미 1루수 장성호, 2루수 김종국, 유격수 홍세완이 정해진 상황에서 이현곤과 정성훈 중 둘 중 하나를 정리해서 내야진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정성훈이 트레이드되었고, 트레이드된 뒤 현대에서 잠재력이 폭발한 뒤 후에 FA 대박까지 두 차례나 이루었으며, 이현곤은 지병인 갑상선 항진증과 유리몸 기질로 인해 2007년 한 해를 제외하곤 매년 부상으로 골골대다가 2013년 NC로 이적한 뒤 거기서 은퇴했다. 게다가 김종국은 수비는 좋았지만 공격에서는 아마시절만 못했고, 04년 직후 노쇠화가 오면서 출장이 줄어든다. 홍세완은 무등구장의 열악한 환경에 무릎이 망가지는 바람에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그 와중에 공수에서 꾸준했던 선수는 장성호 뿐이었으나, 그 장성호마저 2007년을 기점으로 잔부상과 플래툰 출장 등으로 인해 하락세가 찾아오고 말았다.[30] 당시 열악했던 무등 야구장의 시설 뿐 아니라 당시 감독이었던 김성한이 04시즌 전 비시즌에 선수단의 정신을 다잡겠다면서 실시한 국토대장정이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추측된다.[31] 설상가상으로 트레이드 상대인 김희걸이 기아에서 활동하던 5년반동안 불만 지르고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 점도 박재홍에 대한 평가가 떨어지는데 한 몫을 했다.[32] 물론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비교적 평가가 나아진 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시 속사정도 알려지고 함께 먹튀로 평가받던 마해영, 진필중과 같은 선수들의 임팩트에 비해 그래도 박재홍은 한 시즌이라도 밥값은 했다라는 평가. 거기에 이용규와 같이 팀을 떠난 후 팬들과 대놓고 대립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타이거즈와 안맞았던 선수 정도로 기억하는 팬들이 많아졌다.[33] 단 장정석은 2003 시즌 후 은퇴한다.[34] 좌측 사진은 게임 마구마구 블랙 카드 표지가 있는데 SK버전은 이 자세로 된 그림 이미지 컷이 있다.[35] 2014년 김건한으로 개명.[36] 정근우는 당해년도 입단한 신인이어서 아직 성장이 늦었고 2년차인 2006년부터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각성한다.[37] 그때까지만해도 이대호는 몸집이 크면서 정확도는 낮은 걸리는 슬러거에 불과했다. 이대호의 트리플크라운 작성 직전이었다.[38] 하지만 마해영은 LG로 이적했지만 노쇠화가 찾아오고 고액 연봉자인지라 페이롤만 제대로 깎아먹는 등 팀에 제대로 도움을을 주지 못했고 2군에만 있다가 방출되었다.[39] 당해 김태균, 이병규보다도 높은 WAR을 기록했다.[40] 김성근 후임으로 온 이만수 감독은 김성근의 다운스윙과 다르게 레벌스윙, 어퍼스윙 등 메이저리그식 스윙과 함께 '''자신있게 쳐라'''는 로이스터식 노피어 스윙 지론으로 젊은 선수를 독려했는데, 의외로 김성근감독의 수제자같은 이미지인 최정이 이후 거포타자가 된 이후 '''이만수 감독님이 거포로 거듭나게 해줬다'''고 고마워하는 등 한동민 최정 같은 거포 타자들로 팀 체질이 변하면서 이후 미국인 감독과 함께 당대 미국야구 유행이던 '''발사각 이론'''에 맞는 뻥야구 로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이런 거포 스위 위주의 야구도 단점이 있는 상황이라, 공인구를 반발력 낮은 공으로 교체하고 타고투저가 완화된 2019년 다 거며쥐었다고 여겼던 우승을 눈앞에서 다시 두산에게 넘겨주게 된다. 10월 3일 두산이 NC전 박세혁의 끝내기 안타로 SK와 승률이 같아졌는데, 상대 전적에서 7승 9패로 SK가 밀려서 벌어진 일.[41] 이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승엽, 그리고 2012년에 2천안타를 친 장성호 이렇게 2명이 이 기록을 달성하며 1000-1000 대열에 합류하여 2015년 현재, 1000-1000 기록의 보유자는 총 6명이다.[42] 황금세대 92학번 중 2013 시즌에 현역으로 뛰는 선수는 '''송지만 단 한 명 뿐이다''' 송지만도 다음해에 은퇴하면서 이제 황금세대 모두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43] 강병규가 박재홍이 선수협 회장일 당시 전후로 서재응을 디스하고 손민한을 저격하는 등 대외적으로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이긴 했으나 '''그 때만'''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나머지 시기엔 선수협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보일 정도로 별 짓을 다 했다. 특히나 이 시기에 이병헌에 대한 사기, 폭행 혐의 등으로 인한 고소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언론 플레이용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특히 방송 진출 이후 오랜기간 선수협에 대해 일절 관심이 없던 강병규가 본인의 여러가지 힘든 상황에서 갑자기 양준혁 디스, 선수협 관련 발언 등을 의도적인듯 내놓는 상황이어서 선수협의 단호한 선긋기는 이해할만하다.[44] 박재홍의 은퇴식 날이었던 2013년 5월 19일, 문학구장에서 찍힌 사진이다. 영원한 빵형. .[45] 현장 분위기는 꽤나 엄숙했고 일부 팬들은 비와 함께 눈물을 펑펑 흘렸다. 현장 후기에 따르면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마지막으로 박재홍의 응원가를 부른다는 생각에 박재홍의 응원가를 부르던 그 순간 눈물을 참지 못했다고. 은퇴식 막바지에 연안부두를 틀면서부터는 나이가 꽤 드신 도원아재들마저 우는 모습을 보였다.[46] SK 와이번스의 구단 역사관으로 인천야구의 변천사와 SK 와이번스 히스토리, 레전드 플레이어존 및 우승 트러피 등이 전시되어 있다.[47] 최근에도 간간히 메이저리그 해설을 하고 있다. 그리고 2015년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에서 개최되는 MLB 올스타전 해설을 위해 신시내티로 갔다.[48] 위에서도 써있듯이 예전부터 부정 타격 시비와 플래툰 기용 등 박재홍과 김성근의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해서인 듯. 그 외에도 김성근 감독 밑에서 뛰었던 야구인들 중 한대화, 류중일 등 사이가 틀어진 사람들이 꽤 있다.[49] 박재홍도 연세대 시절 나름 유명한 선수였으나 김종국이 고려대 시절 들은 제 2의 이종범이라는 소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물론 막상 프로에 와보니 박재홍은 데뷔 첫 해부터 30-30을 찍으며 날아다닌 반면, 김종국은 프로에서 2루수 골든글러브도 한번 타보고 국가대표 2루수도 한번 해봤으나 타격이 상당히 약한 편이어서 대학 시절의 모습에 비하면 뭔가 아쉬운 모습이었고 결국 수비와 주루로만 먹고 사는 평범한 선수가 되고 말았다.[50] 경남상고에는 훗날 두산에서 활약하는 차명주가 있었고, 신일고는 조성민과 강혁 등의 호화 멤버들이 버티고 있었다.[51] 이 점에서 조성민, 임선동은 물론이고, 정민철 등에도 밀려 고교시절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고 서술되었던 이전 문서의 내용은 정확하지 못하다. 특히 정민철의 경우, 1992년 입단 당시 국가대표 에이스 출신이었던 정민태, 지연규 등에 이름값이 한참 밀려있던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박재홍이 고교시절 평범한 선수에 불과했다면, 당시 전성기를 달리던 연고구단 해태가 고등학교에 졸업하자마자(1990년대까지만 해도 프로야구 신인은 대졸 출신이 대다수였다) 1차 지명을 했을 리가 없다.[52] 이렇게 언론과 친하지 않은 선수가 박주영이다. 박주영은 유독 인터뷰를 잘 안하기로 유명하다. 안정환도 전성기 시절엔 언론이랑 그렇게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안정환 전성기 때는 워낙 이미지가 시크하고 테리우스로 대표되는 귀공자풍 이미지라... 하지만, 안정환은 알고 보면 굉장히 어렵게 축구를 한 선수다. 그 밖에 김동주도 기자들과는 친하진 않다. 사실 김동주도 워낙 무서운 이미지라... 이와 반대인 케이스는 이승엽, 홍성흔, 강민호. 특히 이승엽, 홍성흔은 기자버프로 골글을 탄 적이 많다.[53] 박재홍이 현대로 입단하게 된 과정이 매끄럽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54] 박재홍 데뷔 첫해 광주 원정 내려갔을 때 박재홍한테만 물병을 던져대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경기 내내 헬멧쓰고 중견수 수비를 본 적도 있었다.[55] 오피러스는 2003년 3월에 출시되었다.[56] 이종범의 아들이 맹활약을 할 때마다 굉장히 높은 확률로 양준혁과 함께 언급된다. "제발 빨리 결혼하고 애낳아서 우리팀에 데려와주세요"(...) 하는식.[57] 2018년 어린이날 넥센 히어로즈와 kt wiz와의 경기 우측 하단에는 "어린이날과 관계 없는 박재홍과 양준혁 대기중" 이라는 엠스플의 문구가 있었다.[58] 1976년생인 정병문 캐스터는 2016년 5월 결혼과 동시에 노총각을 탈출했다.[59] 원래는 2020년 12월 초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였으나 코로나가 다시 심각해지면서 결국 2021년 3월로 연기되었다.[60] 정확한 예상이었다. 또치는 실제로 빼빼 마른 캐릭터다.[61] 그리고 그가 이루지 못한 40-40에 도전하는 선수가 등장했다. 그리고 도전에 성공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낸 타자가 됐다.[62] 통산 도루 성공률 61%, 게다가 도루성공률 60%이상이면 나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을 해설 당시 하여 시청자들의 어이를 상실하게 하기도...[63] 실제로 그의 프로 데뷔전이었던 1996년 4월 13일 인천 LG전 당시 그의 타순은 1번타자였다.[64] 성공 동영상이 보고싶다면 여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