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

 


'''허재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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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의 수상 및 감독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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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1997
(선수)
'''
<color=#373a3c> '''2003
(선수)
'''
'''2009
(감독)
'''
'''2011
(감독)
'''

[image]
'''원주 DB 프로미 영구결번'''
No. 9 허재
















'''원주 DB 프로미 No.9'''
'''WONJU DB PROMY'''
'''어쩌다 FC No.90'''
'''허재
許載 | Hur Jae'''
<colbgcolor=#00703c> ''' 출생 '''
1965년 9월 28일 (58세)
[image] 강원도 춘천시
''' 국적 '''
[image] 대한민국
''' 신체 '''
188.3cm[1]체중 87.3kg[2]혈액형 O형
''' 직업 '''
농구선수(슈팅 가드 / 은퇴)
농구감독
방송인
''' 종교 '''
개신교불교[3][4]
''' 본관 '''
양천 허씨
''' 학력 '''
상명초등학교 (졸업)[5]
용산중학교 (졸업)
용산고등학교[6] (졸업)
[image] 중앙대학교 (체육교육학 / 학사)[7]
''' 프로입단 '''
1988년 기아자동차 농구단
''' 현역시절 등번호 '''
9[8]
''' 소속 '''
''' 선수 '''
[image] '''기아자동차 농구단 (1988~1997)
[image]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1997~1998)'''
[image] '''원주 나래-삼보-TG-TG삼보 (1998~2004)'''
''' 감독 '''
[image] '''전주 KCC 이지스 (2005~2015)'''
[image]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2011, 2016~2018)
''' 가족 '''
배우자 이미수
장남 허웅, 차남 허훈
''' 병역 '''
병역특례[9]
''' 소속사 '''
스타잇엔터테인먼트
''' SNS '''

1. 개요
2. 기록
2.1. 농구대잔치 시절 성적[10]
2.2. KBL 기록
5. 성격
7. 기타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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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선수 및 농구감독이자 현재는 방송인.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 - 슈팅 가드였지만, 국가대표에선 스몰 포워드 - 파워 포워드, 대학 시절에는 센터도 소화했다.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플레이어를 논하는데 있어 신동파, 이충희와 함께 가장 먼저 언급되는 선수이며 한국의 마이클 조던 위치에 있었던 선수. '''농구대통령'''이란 별명으로 유명하다. 최근의 어린 세대는 그를 재미있는 농구선수 출신 예능인으로 알고 있겠지만 현역시절 한국 농구, 아시아는 물론(중국 벽에 막혀 아시안게임에서는 2회의 은메달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NBA리거가 다수 포진해 있던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무쌍을 찍었던 전설적인 선수이다.

2. 기록



2.1. 농구대잔치 시절 성적[11]


'''연도'''
'''팀'''
'''경기 수'''
'''총 득점'''
'''평균 득점'''
'''총 리바운드'''
'''평균 리바운드'''
'''총 어시스트'''
'''평균 어시스트'''
'''총 3점슛'''
'''평균 3점슛'''
1984
중앙대학교
18
432
24.00
144
8.00
112
6.22
룰 부재
룰 부재
1985
13
266
20.26
85
6.53
40
3.07
22
1.69
1986
23
555
24.13
171
7.43
85
3.69
91
3.95
1987
중앙대학교 대회 불참
1988
기아자동차
20
505
25.25
161
8.05
58
2.90
59
2.95
1989
19
508
26.73
127
6.68
68
3.57
77
4.05
1990
20
508
25.40
130
6.50
60
3.00
69
3.45
1991
21
469
22.22
112
5.33
71
3.38
56
2.66
1992
23
614
26.69
165
7.17
74
3.21
83
3.60
1993
17
510
30.00
111
6.52
49
2.88
76
4.47
1994
20
471
23.55
94
4.70
62
3.10
52
2.60
1995
21
514
24.47
128
6.09
79
3.76
65
3.09

2.2. KBL 기록


항목 참조

3. 생애




4. 사건사고 및 논란




5. 성격


  • 성격 자체는 비교적 좋은 편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농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허재는 알 정도의 다혈질이며[12], 젊었을 때는 음주파동에 자주 휘말리곤 했다. 그러나 예능 출연도 하고 나이와 여러 역경[13]을 겪은 후 크게 성장한 건지 성격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한다. 강한 자존심은 후술. 거기에다가 꼰대끼도 없는 편이라[14] 선수들 사이에서 평도 괜찮고 다가가기도 쉽다고 한다. 팬 서비스 또한 훌륭한데, 만일 당신이 흡연자라면 가볍게 얘기하며 담배를 물거나 조용히 피워보자. 어느새 옆에서 같이 피우고 있다고 한다(...). 단 아닐 때도 있다. 참고로 불도 빌려줬다는 사람도 있다.[15] 굉장한 애주가이며 일례로 인터뷰 기자가 인터뷰시 계속 허재가 눈치를 보길래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하시라 하니 "술 한 잔 하면서 인터뷰하면 안 되겠냐"라는 대답에 수락하고 술자리를 가졌으나 저녁까지 자리가 이어지고 기자는 필름이 끊겼다는 일화가 있다.
  • 아내 이미수의 말로는 굉장히 낯을 가린다고 한다. 단 친해지면 말도 많이 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낯가리고 친구 많은 사람의 전형이다.[16]
  • 허재 감독은 평소에 다른 감독들과 달리 자존심이 상당히 강하여 불이익을 볼 때 거침없는 발언을 내뱉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2011년 농구국가선수권대회 도중 중국 기자들이 여러 차례 허재 감독에게 아래와 같은 치욕적이고 몰상식한 질문을 던지자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욕을 하며 기자 회견장을 나갔다.[17]

>중국 기자 : "왜 한국 선수들은 중국 국가가 나오는데 국기를 향해 서지 않았습니까?"[18] 공식 인터뷰에서 대놓고 쌍욕을 시전했지만, 자국의 자존심을 살렸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허재 : 뭔 소리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그래 씨팔 진짜 짜증 나게!
>통역사 : He said no comment(대답하지 않겠습니다)
>허재 : "말 같지도 않은(중략)"
> 마지막에 허재 감독이 퇴장하자마자 중국 기자들이 허재 감독에게 야유를 한다.
  • 2010년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 그야말로 미친 듯이 울었다고 한다. 선수 시절의 일화[19]와 후술할 강동희 썰까지 합쳤을 때 의외로 마음이 약한 성격으로, 내유외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 프로선수 시절 상대 팀들이 허재를 막기 위해 폭력을 불사하는 거친 수비를 한 일이 많고 그 때문에 코트 위 폭력사건에 휘말린 일이 많다. 한데 때린 일은 거의 없고 맞기만 많이 맞은 편. 다혈질로 정평이 나있지만 마음은 약한지 정작 남을 때리지 못하는 성격인 듯 하다. 결정적으로 허재는 타팀에게 도발하거나 어그로를 끄는 발언을 하진 않는다.
  • 특유의 솔직한 성격으로 할 말을 다 해야지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20]
  • 위에서도 적혀 있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고 불같은 성격이지만 의외로 꼰대끼가 없다. 어느 정도냐면, 서장훈한때 본인의 팀 감독이었던 허재를 감독님 또는 선배가 아닌 그냥 '형'이라고 부른다. 선후배 간 경직도가 심한 예체능에서, 그것도 자신의 소속팀 감독이었던 선배에게 그냥 형이라고 부르는 건 정말 특이한 케이스다. 하승진은 사회에서 만났지만 인생의 은사라고 표현할 정도로 멋있다고.[21]
  • 선출이라지만 기본적으로 농구에 대한 애착이 강하며 지속적으로 농구 관련 TV 프로그램에 나온다.[22]

6. 활동 내역




7. 기타


  • 대표적인 별명은 '농구 대통령'. 한 분야에서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이는 사람에게 붙이는 '~~대통령' 수식어의 원조다. 현재 들어서는 줄여서 '농통령'으로 부르기도 한다. 여러부분에서 뛰어나긴 했지만 자로 잰듯한 슛폼을 가졌는데 점프 후 슛릴리즈가 굉장히 빨랐다. 그리고 강동희와 더불어 공이 몸에 붙어다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드리블러였다.
  • 가 유독 커 별명이 코재다. 코 큰 걸로는 지석진과 비교해도 안 밀릴 정도.
  • 선수 시절 종아리를 다쳐 일본에 재활을 하러 간 적이 있는데, 재활담당의가 허재의 피지컬을 보고 진짜 한국사람이 맞냐고 부모님이 외국인이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 KBL 출범 이후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우승을 맛본 최초의 인물이다.[23] [24]
  • 소위 '허동택 트리오'를 이루었던 , 김유택과는 은퇴 후로도 자주 교류하였다. 특히 와 농구를 넘어선 인간관계 교류가 짙었다. 10-11시즌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서로 의가 상하지 않게 판정에 대한 항의를 하지 말자고 다짐을 했을 정도. 당시 허재는 큰 충격으로 하루에 담배 4갑을 피웠고 눈물을 흘리며 폭주를 했다고 한다. 이후 한동안 제정신을 못 찾은듯.
  • 1988 서울 올림픽 때 남자 선수 대표로 페어플레이 선서를 했던 사람이 바로 사진 오른쪽에 있는 허재였고 왼쪽은 당시 여자 핸드볼 선수였던 손미나였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개회식 방송을 못 본 90년대 이후에 출생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른다.
  • 서울 올림픽 국가대표 시절 당시에 올린 기록은 상당했으며, 특히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가 인상적이었다. 블라디 디박, 디노 라자, 토니 쿠코치, 드라젠 페트로비치 같은 불세출의 NBA 리거들을 앞에 두고 1, 2번을 넘나드는 활약을 펼쳤다. 한국농구에서 두 번 다시 나오기 힘든 재능이었고, 당시에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신동파와 이충희 계보를 잇는 한 마디로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였다. 당시 훗날 시카고 불스 왕조의 키식스맨이 되는 토니 쿠코치가 유고의 벤치멤버였으니 말 다했다. 당시 경기는 유튜브에 존재하며 중계가 없는 방송으로 선수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허재의 "기범이형~!" "유택이형~!", "아오 씨X~!" 등 재미있는 요소가 많은 경기. 당시 유럽산 외국인 선수로 막 NBA를 평정하다시피 하던 드라젠 페트로비치는 의외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경기다. 현재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나라로 쪼개져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으로 나누어져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농구 강호인 지역이며, 현재도 세르비아 국적의 니콜라 요키치, 보그단 보그다노비치, 보반 마르야노비치나 슬로베니아 국적의 루카 돈치치, 고란 드라기치, 몬테네그로 국적의 니콜라 부세비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적의 유서프 너키치까지 쟁쟁한 NBA 리거들이 가득하다.
  • 코트 위 폭력 사건으로는 맞은 일이 많지만 허재의 성격이 좋은 말로 화끈하고 나쁜 말로 욱하는 성격이란 말은 나름 유명한 편. 선배라 해서 가리지 않고 성질을 내며 들이댄 일도 많고,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한 일도 많다. 요즘 시대로 치면 딱 축구 기성용이 저런 스타일. 그래도 결혼 후 아내까지 부끄러워지니 성질을 죽이기 시작했다고 방송에서 말한 일이 있고, 감독이 된 이후로는 성질을 정말 많이 죽였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다.[25]
  • 실력뿐만 아니라 술에 있어서도 농구계의 전설인데, 야구계에도 실력과 술의 전설인 선동열과 친분이 있었다. 당연히 둘이 대작을 했는데, 허재의 패배. 그 술이라면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았던 허재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도망친 것이다.[26] 허재는 이때 일을 회상하며 난생 처음 '술먹고 죽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두 사람이 술을 진탕 마시고 선동열 집에서 잠들었는데 숙취 때문에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나서 TV를 켰더니 선동열이 마운드에서 던지고 있었다고... 또 박한 전 고대 감독과도 일본에서 술내기를 했다가 진짜로 죽을 뻔했다고. 주신은 따로 있었다나. 오랫동안 허재와 선동열이 광주에 허재가 오면 둘이 밤새도록 술을 퍼마신 후 다음 날 허재가 30득점을 해서 스스로 흡족하게 여기는데 선동열이 완봉을 하자 허재가 혀를 내둘렀다는 이야기가 사실처럼 돌았는데 허재 본인이 직접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서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27] 또한, 영화배우 박중훈과는 동갑내기에 용산고 - 중앙대 동문인지라[28] 주당으로 유명한 두 사람과의 일화도 있다. 그리고 그 허재조차도 주량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북한의 농구선수 리명훈이다. 아시아 대회 후에 허재와 대작을 펼친일이 있었는데, 다음날 출국 전에 남북한 선수들이 가볍게 인사하고 떠나려 하는 상황에서 허재는 숙취에 제대로 인사도 못한데 반해 리명훈은 취기 전혀 없는 모습으로 "안녕히 가시라요"라며 한국 선수들을 배웅해줬다고 한다.
  • 술 말고도 허재가 좋아하는 음식이 바로 생사탕이다. 허재의 아버지인 허준 옹은 허재를 최고의 농구선수로 키우기 위해 아들 뒷바라지를 열심히 했는데, 스태미너를 키우기 위한 보양식으로 1년에 한 번은 뱀을 고아서 먹였다고 한다.(...) 뭉쳐야 찬다에서 최고의 보양식으로 칠점사라고 했다.[29]
  • 아내 이미수 씨와의 인연도 재미있는데, 부산의 상류층 규수였던 이미수 씨는 다른 남자와 맞선을 보려고(...) 어머니와 호텔에 갔다가 우연히 허재와 처음 만났다고 한다. 허재는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반해서 먼저 대시해서 매일같이 연락을 하곤 했는데, 정작 그녀는 스포츠에 관심이 없어서 허재가 그렇게 유명인인줄도 몰랐다고 한다(...). 게다가 둘이 결혼하기로 했을 때는 이미수 씨의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녀의 형부들은 허재의 다혈질에 대한 악명(?)을 잘 알고 있었던데다가 오빠는 하필이면 허재의 농구 경쟁팀이었던 고려대학교 출신이었던 것도 한몫했던 듯 하다.[30] 하지만 이미수 씨의 어머니는 정작 허재를 직접 만나보고는 "남자다워서 마음에 든다!"라고 결혼을 허락했다. 누가 허재의 아내 아니랄까봐 내공이 보통이 아닌 듯한데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슛 타이밍 때, 못 올라가고 하면 화가 많이 난다. 남편은 워낙 잘했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었지만 애들 경기를 보면 화가 날 때가 많았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
  • 부전자전으로 두 아들들 역시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그의 뒤를 이어 둘다 프로농구에 입단하여 KBL 선수가 되었다. 축구계에 차범근, 차두리가 있다면 농구계엔 이들이 있다. 왼쪽이 장남 허웅, 오른쪽이 차남 허훈. 허웅은 슈팅가드로 아버지가 나온 용산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에 진학했고, 두 살 아래인 허훈 또한 형과 똑같이 용산고를 거쳐서 연세대에 진학하게 됐다. 둘 다 가드인데 아마시절 커리어는 형인 허웅보다 동생인 허훈이 더 커리어가 뛰어나며, 객관적인 평가에서 허훈이 앞선다는 평을 받았었다.[31][32] 그리고 허웅이 2014년 신인드래프트 대상자가 되면서 과연 KCC에 갈 수 있을지 주목을 모았는데, 이에 대해 허재는 "마침 우리 팀에 웅이 자리가 딱 비어있긴 하다. 한 4순위 정도로 뽑히지 않을까 보고 있다."는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허재는 4픽을 뽑았다(...). 그러나 허웅이 아닌 고려대 김지후를 지명했다. 대신 허웅은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팀에 지명 되며 내년 시즌 부자대결을 기대하게 했다. 한국 농구 역사상 명선수 출신에 감독의 두 자식들이 모두 아버지에 뒤를 이어 프로선수가 된 몇 안되는 케이스다. 2019년 11월 21일에는 부산에서 열린 허훈의 kt와 허웅의 DB 경기에서 시투를 하였다. 그렇지만 허웅의 허리 부상으로 엔트리에 들지 않아 부산 원정에 나서지 않았다. kt의 승리를 위해 시투한 셈이 되었다.
[image]
  • 만화 슬램덩크풍전고교는 허재와 가 있던 시절 1980년 후반~1990년대의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을 롤모델로 설정했다고 한다.
  •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군인 출신이시라고 한다.이 아버지와 관련해서 이야기는 # 여기 참조.[33]
  • 아시안 게임 은메달 2개가 많이 아쉬운 듯 보인다. 그럴만도 한 것이 충분히 금메달을 딸 수 있었음에도 안타깝게 못 딴 경우들인지라....[34][35]
  • 야구선수 이종범과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아들들이 훌륭한 선수로 자랐다는 점과 더불어 친구 같은 아버지라는 점이다. 보통 허재 선수의 다혈질적인 모습과 이종범 선수의 카리스마를 생각하면 엄한 아버지였을 것 같지만, 실제로 허재는 매는커녕 따끔한 훈육도 못 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실제로 무서운 사람은 어머니였다고... 이는 이종범 역시 마찬가지로, 큰맘 먹고 매를 들려고 했을 때, 아들 왈 "아버지한테는 도저히 못맞겠다."라는 배짱을 시전, 결국엔 때리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 이종범, 허재 둘 다 왼손잡이이고, 필기만 오른손으로 한다. 젓가락을 왼손으로 집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
  • 2020년 4월 28일, 한국소비자포럼이 주최한 2020 브랜드 고객충성도 대상에서 스포테이너 부문을 수상했다.
  • 차남 허훈이 2019-20 시즌 한국프로농구 MVP를 수상하였다. 이는 자신과 장남도 못해본 정규시즌 MVP인데, 허재는 KBL 플레이오프 MVP는 타본 적이 있지만 정규시즌 MVP는 타본적이 없고 허웅은 둘 다 아직 수상해본 적이 없다.[36]
  • 농구계 은퇴 이후 예능프로그램에 간간이 출연했는데, 농구 만큼이나 좋아하는 것이 낚시라고 한다. 도시어부 게스트로써 볼락을 잡으며 '이게 볼락이야!' 개그를 한다. 이후에 무서운 집중력으로 낚시에 대한 승부욕이 대단하다. 이경규가 예능식으로 고기 안 잡힌다고 분노하는 것과 달리 이 쪽은 정말 안잡혀서 분노를 퍼붓는 스타일. 이전부터 허재가 낚시를 즐긴다는 뉴스는 많이 나왔는데, 99년 신문 기사를 보면 허재 본인을 포함해 유재학, 신선우, 이훈재 등이 낚시터를 자주 찾는 농구인들로 유명하다고 한다.
  • 가수가 될 뻔한 사연도 있었는데 대학교 4학년 때 11월 말에 개최된 방콕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 대회가 끝난 직후 곡 작업에 들어가 늦어도 연말까지는 앨범을 발표할 계획이었지만 아쉽게도 입단이 확정된 기아자동차 구단의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
  • 차남 허훈하고 예능 방송에 동반 출연하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현역 KBL 출신 선수들 게스트 출연이 거의 없다 보니 KBL 휴식기 동안 일부러라도 아버지 찬스로 홍보차 같이 출연하는 듯 하다. 다행히도 허훈이 워낙 19-20 정규 시즌 최우수선수로 뽑히는 등 개인 성적이 좋다 보니 동반 출연에 대해서는 민감한 여론은 없지만, 부자가 같이 출연하다 보니 아무래도 허재나 허훈이 단독으로 출연을 했을 때보다 텐션이 서로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8. 관련 문서



[1] 이 키면 하승진의 어머니와 키가 같다.[2] 뭉쳐야 찬다 건강검진에서 밝혔다.[3] 선수생활을 은퇴한 뒤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있던 중에는 교회를 다녔으며, 이후에는 불교로 개종해 2019년 중앙신도회 부설 법인 사단법인 날마다좋은날 행복바라미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불자 대상을 수상하였다. 2020년 9월 3일, 같은 불자#s-1인 아내 이미수 씨와 함께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을 찾아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을 예방하고 2020년 5월에 봉행된 불기 2564년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에서 받은 불자대상 상금의 일부를 종단에 회향하고 싶다는 뜻에서 500만원을 기탁했다. #[4] 한데, 허재 농구 아카데미 홈페이지에는 개신교로 표기되었다. # 아마도 업데이트가 안 된 듯 하다.[5] 동북초등학교 3학년 때 농구부에 들어왔지만 불과 1년만에 해체되는 바람에 상명초로 전학을 갔다. #[6] 35회 졸업[7] 원래 연극영화과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체육교육과에 들어갔다고 한다. #[8] 9번을 선택한 이유는 챔피언 결정전이 끝난 직후 10을 채우도록 노력할 수 있는 숫자라고 밝혔다. 과거에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줄리어스 어빙을 존경한다는 이유로 6번을 착용했었다.[9] 상무에 기록이 없고 현역이든 어디든 입대했다는 말이 없어 뭘로 병역을 해결했는지 확실하지 않았으나, 1984년에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 우승으로 병역특례를 받았다고 뭉찬에서 밝혔다. 여담으로 훈련소는 6주 갔다왔다고 한다.[10]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11]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12] 농구 모르는 사람들은 욱허재라고 많이 불렀다고. 사실 농구에 있어서 굉장히 불같고 승부욕이 세서 그렇지 꽤 시원시원한 성격이고, 뒤끝이 없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툴툴거리면서도 은근 챙겨주는 면도 있다. 딱, 이경규나 박명수의 거친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13] 부친상, 강동희 감독의 제명 등등[14] 뭉찬에서 꼰대 이미지는 컨셉상 이만기가 다 가져가고 있다곤 하지만 거기에서도 허재의 역할은 생떼 혹은 휘둘리기다.[15] 야구나 농구는 흡연자들이 많아 팬 서비스로 맞담을 하는 선수나 감독들도 많다. 물론 선수 생명에 있어서 좋은 영향을 주진 않으니 근래에는 선수들의 금연을 적극 권장하는 추세이긴 하다. 단 축구는 아무래도 맞담 팬서비스를 기대하긴 힘들다.[16] 사실 운동선수라서 자기 분야 선수들과는 친하지만 타 분야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문외한이다 보니 그런 측면이 많다. 서장훈은 이와 반대로 인맥이 넓다. 석주일도 그렇고.[17] 이후에도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K리그 팀 감독들을 향한 중국 기자들의 모욕성 질문 공세가 심해지자 이 발언이 다시 재조명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 외적으로도 개소리를 뱉어내는 사람들이 생기면 "허재 감독 데리고 와라!"며 유행어처럼 자리잡게 되었다.[18] 실제 중국 기자의 질문은 "스포츠 경기 전 모든 선수들은 상대방 국가가 나올 때에도 엄숙함을 유지하고 있어주는 게 예의고 국제 관례라고 알고 있는데 중국 국가가 나올 때 대한민국 선수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나요"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물론 굳이 공식 인터뷰에서 저런 질문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한국 선수들은 중국 국가가 나올 때 무례하게 굴었는데 너희들은 예의도 없느냐?"를 돌려 말한 것이고, 당시 통역은 그 말뜻을 직접 말해줬을 것이기에 허재 감독이 화를 낸 거다.[19] 챔피언 결정전 도중 갈비뼈 골절상을 당하고도 끝까지 뛰어 결국 끝나고 나서 통증과 기쁨을 못 이겨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눈물을 흘렸다는 에피소드가 은근히 존재한다.[20] 허재, 전창진은 유독 작전타임에서의 불같은 성격이 나온다. 그 유명한 불낙이 대표적.[21] 후에 아이콘택트에 둘이 같이 출연했을 때는 허재가 앞으로는 자신을 형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지만 하승진은 거절했는데 존경심 때문에 차마 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했다.[22] 뭉쳐야 찬다 합류 조건도 다음 시즌은 농구로 해달라고 해서 한 거였다.[23] 97 원년 기아, 02~03 TG, 08~09/10~11 KCC[24] 선술되어있듯 허재는 코치를 거치지 않았다(...). TG 전창진 감독 시절에는 명목상 플레잉코치였지만, 이는 샐러리캡 제도를 우회하려는 꼼수였고, 코치보다 선수로 활동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25] 다만 아는형님에 출연해서 밝히는 바로는 감독시절에 팀이 잘하면 자신도 웃고 박수도 치고 작전타임에도 잘 달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건 카메라에 한번도 안나오고 매번 화나는 장면만 나와서 화만 내는 사람으로 각인되는게 억울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26] 광주광역시 바닥에서 선동열이 술로 제대로 한가닥 했는지라, 어느 정도냐면 허재랑 술을 4차째 마시고 문을 연 술집이 없자, 한 술집 셔터를 두들기며 "나 선동열이오."하니 주인이 환영을 하며 셔터를 다시 올렸다고 한다.[27] 당연히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것이 농구대잔치는 겨울에 한다(...) 프로농구 출범 이후엔 야구시즌과 농구시즌이 겹칠 수도 있지만 선동열은 KBL 출범 이전인 1996년에 일본으로 진출했다. 선동열과 선동열의 고려대학교 동기인 정삼흠이 선발맞대결 전날 술을 퍼마시다가 정삼흠은 7이닝 5실점했는데 선동열은 완봉승을 거둔 일화가 와전되어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28] 단, 박중훈은 재수하여 입학하였으므로 대학교 기준으로는 허재가 박중훈의 1년 선배이다.[29] 물리면 일곱 걸음안에 죽는다는 독사라 칠점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물론 요즘은 못 먹는다고. 닭 또한 1일 보약이라며 당시 백숙이 나왔을 때 정말 좋아했다.[30] 아이러니하게도 허재의 두 아들들은 후에 연세대학교에 진학한다.[31] 그러나 최근 들어서 특히 국가대표에서 허훈이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허웅은 그래도 동생보다는 조금 더 많은걸 보여줘서 평가가 뒤집히고 있다.[32] 허훈은 이미 소년체전 때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을정도로 많은 주목을 받았었고. 물론 허웅도 허훈만큼은 아니더라도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어서 연세대에서 팀의 득점원으로 활약, 빠른 성장세를 보이면서 기대를 모으고 있었지만 허웅은 본격적인 농구를 조금 늦게 시작한 탓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허훈에 비해선 조금 늦은 나이였던 편이다. [33] 임종도 못 지켰다고 한다.자식이 부모 임종을 못 지키는건 최악의 불효 중 하나라 죄스러운 마음까지 섞여 미친듯이 울었다고.[34] 특히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중국과의 결승전이 가장 아쉬웠을 것이다. 이 경기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면 대한민국이 금메달 수 기준 종합순위에서 1위에 올랐을 것이다.[35] 연금점수는 아시안 게임 은 2개로 4점, 동 1개 1점으로 총 5점인데 연금 수령조건인 20점에 미달한다.[36] 물론 허재는 농구대잔치 시절 전성기를 보냈고 KBL이 열린 건 우리 나이로 서른둘이 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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