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1863)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재호'''
'''鄭在鎬'''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63년
경상남도 함양군 또는 충청남도 청양군
<color=#fff> '''사망'''
1944년 3월 18일
경상남도 함양군
<color=#fff> '''본관'''
하동 정씨
<color=#fff>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재호는 1863년생으로 알려졌으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이라는 설과 충청남도 청양군 출신이라는 설이 병립한다. 그는 몽천(夢泉) 정광한(鄭光漢, 1588~1648)의 후손이며, 도곡서원에 제향된 만강재(晩康齋) 정덕하(鄭德河, 1782~1854)의 증손이다. 18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사과(司果) 벼슬을 하던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분노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전 참판 민종식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고 결의했다.
1906년 음력 정월, 그는 민종식·이용규(李容珪)·박윤식#s-1·박창로·안병찬·최상집·최선재(崔璇在)[1]·이상구(李相龜)·이세영(李世永)·채광묵·이만식(李晩植)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킨 뒤 이튿날 바로 홍로 향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하자 할 수 없이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때 안병찬·박창로·윤자홍(尹滋洪)·최선재 등 수백 명이 적에게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다가 윤 4월에야 풀려났다.
5월 11일(음력 4월 18일), 민종식은 홍산 지치(支峙)에서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정재호는 황영수(黃英秀)·이세영과 함께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군사를 일으켜 바로 서천(舒川)으로 진격하여 적과 접전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적의 양총(洋銃) 20자루를 노획하였다. 이때 군사의 수효는 1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후 남포(藍浦)에서 유준근을 종군시키고 4일간 유진하면서 의병을 보강하였다. 의진은 남포를 떠나 보령(保寧)·결성(結城)을 지나 5월 19일(음 4월 26일) 홍주(洪州)의 ,일본군을 물리치고 입성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많은 의진이 이에 호응하였으므로 부서를 재편성하고 수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5월 31일 새벽 3시 성문이 깨어지면서 홍주성은 함락되었다.
이후 일제의 추격을 피해 피신하던 정재호는 1907년 2월에 체포되어 박윤식·곽한일 등과 함께 수감되었고, 득병하여 위독한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2월에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1907년 7월 2일 1등을 감하여 지도(智島)로 종신 유배되었다. 이때 곽한일·박윤식·황영수·김덕진·박두표와 함께 6인이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다 1년만에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후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천을 구경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다 1944년 3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재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0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그의 유해를 안장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최선재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