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핑루
1. 개요
중화민국의 간첩. 왕징웨이 정권의 첩보 전문가 딩모춘을 암살하려 한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체포 후 처형되었다. 이후 그녀의 일대기가 영화 색, 계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졌다.
2. 생애
1918년 중화민국 절강성 난계시에서 정웨의 둘째딸로 출생했다. 그녀의 아버지 정웨(鄭鉞)는 일본 법정대학을 졸업한 유학파로 일본 유학 시절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여 쑨원과 같이 혁명활동을 했던 중국 국민당의 원로였다. 정위에는 일본 명문가의 자제인 기무라 하나코(木村花子)와 결혼하여 귀국했으며 중화민국 건국 후 상하이 푸단대학 교수, 강소성 고등법원 검사관, 상하이 고등법원 수석검찰관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어머니가 일본인인 것 때문에 정핑루는 일본어가 유창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인 기무라는 중국 문화에 매료된 인물이었고 이름도 중국식인 정화쥔(鄭華君)으로 고치는 등 정핑루의 집안 자체는 민족주의적이었다. 이 때문에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자 정핑루는 어린 나이에 항일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상하이의 사립중학교인 민광중학교를 다녔다. 정핑루는 어려서부터 미모가 뛰어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이 때문에 19세가 되던 해에 상하이 최고 인기잡지인 양우의 표지 모델로 선정된 적도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여 상하이가 일본군에게 점령되자 정핑루는 일본군 치하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해, 정핑루는 상하이 법정학원에 입학하였다가 다이리의 조사통계국에 포섭되었다. 조사통계국은 일본어가 유창하고 사회적 관계가 좋은 정핑루에게 일본인을 상대로 고급 정보를 수집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던 중 조사통계국은 정핑루에게 중화민국 유신정부의[1] 악명높은 공안기술자인 '도살자' 딩모춘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딩모춘은 원래 국민당의 첩보기술자로 국민당 내부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여 상하이에서의 국민당의 첩보활동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는데 그가 미녀만 보면 환장하는 점을 알고 있었던 국민당은 미녀인 정핑루를 접근시켜 딩모춘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 정핑루는 과거 딩모춘이 교장으로 재직했던 중학교를 졸업하여 접근할 명분도 좋았다. 정핑루는 성공적으로 딩모춘에게 접근했고 딩모춘은 그녀를 왕징웨이 정권의 첩보기관인 76호실의 비서로 채용했다.
1939년 봄, 정핑루는 색계에 나오는 연극부 선배 광위민의 모델이 된 중화민국 공군 장교 왕한쉰과 약혼식을 치르고 승전 후 결혼식을 가지기로 약속했다. 1939년 12월, 정핑루는 딩모춘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여 살해하려 했으나 딩모춘의 예리함 때문에 실패했다. 12월 21일, 정핑루는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을 일으켜 딩모춘을 다시 한번 암살하려 했으나 딩모춘이 다시 눈치를 챘고 총격전 끝에 도주하면서 또 실패했다. 12월 24일, 정핑루는 체포되었다. 딩모춘은 정핑루를 옛정을 생각하여 석방시켰으나 왕징웨이 정권 내부에서 딩모춘이 국민당 간첩에게 휘말렸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딩모춘의 아내 자오후이민이 남편이 새파랗게 어린 여간첩과 놀아났다는 사실에 격노하면서 정핑루는 다시 체포되었다.
1940년 2월, 정핑루는 상하이 쉬자후이역에서 3발의 총알을 맞고 처형되었다. 정핑루의 아버지 정웨는 일본으로부터 전향하라는 압력을 받다가 1944년에 사망했으며 왕한쉰도 일본군과의 교전 중 1944년 8월, 후난성 헝산에서 전사했다. 어머니 정화군은 대만으로 이주, 딸의 복권을 위해 노력하다가 1966년 사망했다.
3. 평가
전후 정핑루의 어머니와 남동생이 정핑루의 명예회복을 위한 사법절차를 요청함에 따라 정핑루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핑루에 대한 부족한 정보 때문에 정핑루가 사실 딩모춘을 일부러 놓아준 한간이라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또한 정핑루를 애국자로 인정하는 쪽에서도 정핑루가 딩모춘을 육체적으로 유혹했던 문제를 굉장히 껄끄럽게 여겼으며 일부 논자는 여자의 몸도 필요하면 국가를 위해 써야 한다고 옹호했다가 다른 의미로 또 논란이 되었다.
1979년, 장아이링이 색계를 발표했을 때도 중국시보는 색계를 한간을 찬양하는 문학으로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장아이링의 친일논란 등과 겹쳐져서 결국 정핑루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외면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안 감독의 색계 발표 이후 중국에서 정핑루의 생애를 주목한 논저가 대륙과 대만에서 모두 쏟아져나왔고 현재는 정핑루는 애국적 영웅으로 재평가, 재조명되었다. 2009년에는 상하이에서 정핑루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건립되었다.
4. 매체에서
왕징웨이 정권의 각료인 후란청의 아내 장아이링이 그녀를 소재로 소설 색계를 발표했다. 이후 이 소설은 대만의 영화감독 이안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여기서 탕웨이가 정핑루를 모델로 한 왕자즈를 맡았다.
장아이링은 1988년 내놓은 속집 자서에서 색계의 모델이 정핑루라는 것을 부정하면서 자신같은 평범한 백성은 그런 복잡한 투쟁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일축했지만 이는 장아이링이 후란청에게 배신당한 것 등이 작용된 변명으로 분석된다.
5. 참고문헌
- 영화 색계의 트랜스 아이덴티티 캐릭터 연구, 신명주, 한국외국어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상하이의 모던걸 장아이링의 초상, 박진영, 근대서지 14집, 근대서지학회.
- 내셔널리스틱한 공간으로서의 '연극무대' - <색/계>론, 김양수, 중국현대문학 54집,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