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숙
1. 개요
한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오광선의 부인이다.
2. 생애
정현숙은 1900년 3월 13일 경기도 용인군 하동촌면 모산동(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화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4살 때 오광선과 결혼한 뒤 용인 죽릉리에서 신혼 살림을 차렸다. 정현숙은 후에 당시의 신혼살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후 남편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갔고, 그녀는 용인에서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러던 중 그녀는 남편의 소식을 듣고 만주로 가기로 결심했다. 훗날 그녀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남의 땅에다 농사를 지어먹고 살았으니 언제나 쪼들릴 수 밖에 없었어요. 시아버님께서 포수 일을 하시면서 간간이 살림을 보태주셨지요. 나는 그때부터 일복을 타고 났다고나 할까? 농한기에도 다른 집일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 갔었지요. 워낙 힘이 꿋꿋해서 여자지만 남자 이상의 일을 했거든요.
'광복군 따라 대륙유량 30년' <주간여성>(1974년)
정현숙은 험난한 여정을 감수한 끝에 합니하에서 남편과 상봉했다. 이후 그녀는 만주에서 여러 차례 이사를 거듭해야 했고, 마적단의 습격과 추위, 배고픔,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첫딸인 오희영(姬英, 1924~1969년)에 이어 2년 후에 둘째딸 오희옥(姬玉, 1926년생)을 낳았다. 둘째딸 오희옥은 후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제가 20살이 되던 해 봄 그이로부터 소식이 왔어요. 압록강 대안(對岸)에서 2백리 떨어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 와 있으니 그리로 오라는 것이었지요. 간단한 살림도구를 챙겨 용인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지나 명죽리에서 내렸어요. 거기서부터 육로를 한 달 동안이나 걸어 만주로 들어갔지요.
'광복군 따라 대륙유량 30년' <주간여성>(1974년)
오광선과 정현숙 일가는 이 곳에서 화전을 일구고 옥수수와 조를 심어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쌀을 구할 수 있을 때는 1년에 한번, 설날 뿐이었다. 교관인 오광선이 밤이건 새벽이건 갑자기 부하들을 데려와 밥을 먹였기에 집안의 식량은 매일 비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독립군을 위해 헌신했고, 이 때문에 '만주의 어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어머니는 만주 가서 산의 나무를 다 자르고 밀어 논밭을 만들었대요. 농사짓고 거기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대. 우리 어머니는 정말 여장군 같아요. 일꾼 일곱명 두고 농사짓는데, 거기서 하루에 12가마씩 밥을 지어서 독립군들에게 먹였대요. 무관학교 교관이고 체육교사였던 아버지가 밤늦게 여러 학생들을 데려오면 밥 다 해먹이구. 어렸을 때 생각하믄 마당이 무척 넓고 그 안에 학교가 또 하나 있고, 대문 쪽에 총 쏘는 건물을 만들었어. 건물 밖으로 지나가면서 일본 놈하구 싸우려고, 대문이 있구 무척 넓어요. 학교 마당 같아요. 옆에는 학교라해서 가서 애들 공부하구.......
김명섭, '용인지역 3대 독립운동가 연구 서설-오희옥 여사 인터뷰, <용인향토문화연구> 5집, 2003
1935년 이후에는 중국 난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뒷바라지와 함께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결성하여 맹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44년경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1967년 남편 오광선이 사망한 후 고향으로 돌아갔고, 1992년 8월 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정현숙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