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 벤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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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철학자. '''Jeremy Bentham'''[4] , 1748년 2월 15일 ~ 1832년 6월 6일누군가가 공리의 원칙에 맞서 싸우려 든다면,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그 싸움도 바로 이 원칙 자체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논증이 무언가를 증명한다면, 그것이 증명하는 바는 공리의 원칙이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 원칙을 적용했다고 상상하는 사례들에서 이 원칙이 잘못 적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이 지구를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 그러나 그는 먼저 자신이 딛고 설 또 하나의 지구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1]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2]
[3]
벤담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슬로건에 의거해 공리주의 사상을 정초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정말 두드러진 천재성을 보였는데, 최고 명문인 옥스퍼드 대학교를 무려 15세에 졸업했다. 그는 법에 관심이 많았고 이후 실제로 변호사가 되었으나 변호 활동은 하지 않았다. 대신 법에 대한 고찰에 주력하며 공리주의 논리를 펼치기 위해 노력하였다. 공리주의 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로 이후에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많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다.
일상생활에 대한 평이 좋지 않다. 주로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으며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벤담이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지 않았나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비판이란 게 사실 뜯어 보면 공리주의를 극혐했던 보수 기독교 측에서 날조한 것이 적잖이 있다. 예컨대 목사가 연설하면서 '벤담이 할머니들을 잡아다가 삶아 먹자고 주장했습니다. 이게 공리주의의 실체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라고 하는 식.
일상생활에 대한 평이 좋지 않다면 않은 구석이 있긴 했는데, 사람이 냉혈한 게 아니라 너무 수줍음이 많아서 인간관계에 능숙하지 못했다고 한다. 태생이 부잣집 도련님이었으나 아싸의 기질이 농후해 아버지가 제발 도박이라도 하면서(...) 친구 좀 사귀라고 돈을 대주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벤담은 얌전히 책이나 봤고, 그러다 무슨 소설 전개마냥, 그닥 부유하지 않은 어느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 그렇지만 아버지는(본인도 그렇게 자유연애로 결혼했음에도)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고, 충격받은 벤담의 대인기피증은 더욱 심해졌다. 벤담은 몰래 형제에게 인간불신 냉소주의로 가득찬 편지를 보내 넋두리하면서 이 언저리 시기를 보내게 된다. 이게 아마도 공리주의 사상 정립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그렇게 차가운 공리주의자가 되었지만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는 따뜻했다고 한다.
로버트 오언이 증언하는 벤담과의 첫 만남은 이렇다: "... 계단 중간쯤에서 그를 만나기로 결론이 났다. 나는 이 지시사항을 그대로 따랐고, 무척 긴장한 모습으로 나를 만난 벤담은 흥분에 휩싸여 온몸을 떨면서 내 손을 잡더니 허둥지둥 말을 꺼냈다. '자, 자, 다 끝났어요. 우린 서로 소개를 받았죠? 그럼 이제 제 서재로 드십시다!'" 15년 후에 벤담은 오언의 아들도 만났고, "자네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그런 존재가 있다면 말일세. 그리고 젊은이, 어떤 경우에도 몸조심하게."라고 배웅했다.
벤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위키러는 버트런드 러셀, <<자유와 조직>>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가볍게 읽고 싶다면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괜찮다.
제자로 법실증주의자 존 오스틴(1790-1859)이 있다.
파놉티콘을 제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사후
공리주의의 주창자답게 사람의 시신도 그냥 땅에 묻어 썩힐 것이 아니라, 동상을 세우는 대신 시신을 보존해서 전시한다던지 해부 실습에 쓴다던지 해서 공공의 이익에 최대한 부합하게 하자는 오토 아이콘(auto-icon) 개념을 주장했는데, 다만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본인 스스로 실천했다(!). 자신과 같은 철학자는 대중 앞에 전시됨으로써 다른 철학자들에게 학문적 원동력과 같은 긍정적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벤담은 유언으로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오토 아이콘으로 만들어달라고 유언했고,[5] 이 유언이 실제로 집행되어 유골을 이용한 일종의 박제가 만들어져 1850년부터 본인이 설립 발기인 중 하나였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전시되었다. 흔히들 벤담이 이 대학의 설립자 중 하나라고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공동 설립자 중 하나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대학 설립 프로젝트를 후원함과 동시에 지지한 것이 상기 설립 발기인이라는 점과 맞물려 와전된 것이다.
원래 이 오토아이콘의 머리 부분은 실제 벤담의 머리를 엠버밍하여 부착하려고 했으나 제작에 실패, 아주 흉측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머리는 밀랍 인형으로 만들었고, 1975년까지는 흉측한 실제 머리를 오토아이콘의 발 아래 놓아둔 채로 전시했으나 그 해 도난을 당했다가 다시 찾은 후로는 별도의 장소에 보관하고 있다.
벤담의 실제 머리
대학의 명물로 자리잡은 지 수십년째, UCL 신입생들이 입학 후 꼭 찍어야하는 두 장의 사진 중 하나에 들어가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학교 정문에서 본관 건물을 배경으로 찍는 사진.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벤담의 일화에 대해 방송했다. 해당 방송분
[1] When a man attempts to combat the principle of utility, it is with reasons drawn, without his being aware of it, from that very principle itself.9 His arguments, if they prove any thing, prove not that the principle is wrong, but that, according to the applications he supposes to be made of it, it is misapplied. Is it possible for a man to move the earth? Yes; but he must first find out another earth to stand upon.[2] 강준호 옮김, 아카넷 2013[3] 실제로 공리주의에 대한 반론들의 대부분이 공리주의의 원리를 이용하여 재반박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벤담은 생전 자신의 사상에 대한 반박들을 논리적으로 논파해 왔다.[4] 원음으로는 th를 번데기 발음으로 읽어서 제러미 '벤섬'에 가깝게 읽는다.[5] 이 유언 또한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한 것이다. 죽은 사람은 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못하지만, 엠버밍 처리로 육체를 보존하면 위대한 철학자가 될 후손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출처 :《정의란 무엇인가》p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