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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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역사가, 사회 개혁 운동가,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일생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다.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긴 대학자일 뿐 아니라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걸출한 제자를 배출한 교육자였으며 말년에까지 지치지 않고 사회운동(반핵, 반전 운동 등)을 계속했던 당대 최고의 명사이기도 했다. 195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또한 현대의 주류 철학적 흐름인 분석철학을 창시하였다. 시드니 훅은 러셀을 가리켜 50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 하였다.
2. 생애
2.1. 가문
러셀의 증조부는 베트퍼드 공작 존 러셀이며 러셀의 조부는 러셀 공작의 둘째 아들이자 빅토리아 여왕 치세에 영국 총리를 2차례 역임했던 존 러셀 백작이다.
러셀 가문은 튜더 왕조가 부상함에 따라 작위와 권력을 얻기 수세기 전부터도 영국에서도 상당히 잘 알려진 명문이었다. 휘그당을 결성했던 가문 중 하나이며 1536-40년의 수도원 해산부터 1688-89년의 명예 혁명, 1832년의 선거법 개정에 이르기까지 영국에서 일어났던 모든 정치적 대사건에 참여해왔다.
러셀의 어머니 캐서린 루이사는 앨더리 가문의 에드워드 스탠리 남작의 딸이며 칼라일 백작부인 로잘린드 하워드의 자매이다.
러셀의 부모는 당대의 기준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인물들이었다. 러셀의 아버지 앰벌리 자작은 무신론자였으며 아내가 아이들의 가정교사 더글러스 스폴딩과 저지른 불륜을 승낙했다. 이 두 사람은 당시에는 얼토당토 않은 일로 여겨졌던 가족 계획(산아 제한)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러셀의 대부는 존 스튜어트 밀이다. 밀은 러셀이 태어난 이듬해에 사망했지만 그의 저작들은 러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형제로는 7세 연상의 형 프랭크 러셀과 4세 연상의 누이 레이철 러셀이 있다.
2.2. 성장기
1874년 6월 러셀의 어머니와 누나 레이철이 디프테리아로 사망했으며, 1876년 1월에 아버지 또한 기관지염으로 사망했다. 당초 러셀의 부모는 자녀들이 무신론자인 친구들에게서 양육되길 바랐으나 조부모들은 유언을 엎고 자신들이 법적 후견인이 되었다.
러셀에게는 휠체어에 앉은 자상한 노인으로 기억되는 존 러셀 백작도 1878년에 사망함에 따라 러셀의 할머니인 러셀 백작 부인은 가문 중에서는 러셀의 유년 시절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백작 부인은 독실한 청교도이면서도 다윈주의를 받아들이고 아일랜드 자치 운동을 지지할 정도로 열린 사람이었으며 사회적 정의에 대한 러셀의 견해와 러셀이 평생 견지한 원칙들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성경 구절,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출애굽기 23:2)는 러셀의 주문이 되었다.
러셀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가정교사들에게 교육받은 탓에 러셀의 청소년기는 매우 고독했다. 그는 자신의 가정교육에 대해서도 회의했고 정치를 제외한 모든 문제에서 가족들과 견해가 달랐다.
그의 형 프랭크는 그에게 유클리드의 저작을 소개해주었는데, 이것이 러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러셀은 훗날 자서전에서 당시 그의 취미는 성, 종교, 수학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오로지 '''수학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소망만이 그를 자살하지 못하게 했다'''고 술회했다.
189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자마자 뛰어난 지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대학에서 그는 연하의 G. E. 무어와 교류하였으며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소개로 외부인들이 '사도회'(The Apostles)라고 부르던 배타적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3] 1893년 수학 졸업시험(우등시험)에서 7등으로 졸업한 뒤 전공을 철학으로 바꾸었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 형이상학자 맥태거트의 영향으로 몇 년 동안 관념론자가 되었다. 1894년 윤리학 학위를 우등으로 취득했다.
2.3. 첫 결혼
러셀은 17세 때 처음으로 미국 퀘이커교도 앨리스 피어솔 스미스와 만났다. 그는 곧 피어솔 스미스 가문과 친해졌으며 — 그들은 러셀이 '존 백작의 손자'임을 처음부터 알았고, 그에게 과시하길 즐겼다. 그들과 함께 유럽 대륙을 여행하기도 했다. 이들은 1889년의 파리 박람회에 방문하였으며 막 완공된 에펠탑을 오를 수 있었다.
그는 곧 앨리스와 사랑에 빠졌으며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94년 12월 13일 앨리스와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1901년 러셀이 아내에게 관심을 잃으면서부터 순탄치 않게 흘러갔다. 앨리스가 러셀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자 러셀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또한 러셀은 장모를 독선적이며 지독하다고 여겨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앨리스와 별거하는 동안 러셀은 열정적으로 - 때로는 동시에 - 여러 명의 여인과 불륜을 맺었는데, 그럼에도 앨리스는 러셀을 애타게 그리워했으며 평생 그를 사랑했다. 1921년 이혼.
2.4. 초기 경력
러셀은 앨리스와의 결혼 직후 2년 동안 미국에서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독일로 건너가 경제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배웠으며 그결과 런던 정치경제 대학의 수석강사로 임명되었다. 1896년에는 런던정경대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강의했으며 (1937년 가을학기에는 science of power에 대해 강의)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출간했다.
1898년 당시 트리니티 칼리지의 대표적 철학자였던 G. E. 무어와 함께 관념론에 반기를 들었으며, 넓은 의미의 경험주의자·실증주의자가 되었다. 철학자로서의 나머지 생애 동안은 철학자들이 보통 물리적 실재론자라고 부르는 태도(일상적인 문제에서는 보통 유물론자라고 부르는 태도)를 견지했다.
1905년, 러셀은 철학 저널 《Mind》에 발표된 에세이 《On Denoting》을 썼다.
1907년에는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4] 러셀은 1907년 선거에서 자유무역, 여권신장을 외치며 출마했는데 (영국 여성에게는 1928년까지 투표권이 없었다.) 반대파의 난동이 얼마나 거셌는지 1차대전 시기 반전운동을 했을 때 부딪힌 반발보다도 훨씬 심했다고 술회했다. 특히 이때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들 중 '''여성'''이 있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남자들이 자기들의 지위를 잃을까봐 위협을 하는 야만적 행동은 이해할 수 있으나, 여자들이 자신들의 모욕을 그대로 지속해 나가려고 하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았다."
1908년에는 왕립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에는 화이트 헤드와 공저한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전3권)[5] 의 첫 권이 출간되었다. 난해한 수학공식으로 넘쳐나는 원고를 읽어본 케임브리지 출판부에서는 러셀과 화이트 헤드가 출판비를 대는 조건으로 출간했다. 즉, 작가로서는 최대의 굴욕을 당한 셈이다(...). 정확히는 출판부에서 600파운드 정도 손실이 날 것 같은데 자기네들은 300파운드까지만 감당할 것이고 나머지는 왕립학회에다가 문의하라고 했다. 그래서 러셀과 화이트 헤드가 왕립학회에 300파운드를 지원해달라고 하자 왕립학회에서는 200파운드까지만 손실을 떠안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머지 100파운드는 러셀과 화이트 헤드가 반반씩 냈다. 러셀은 이 상황에 대해 유머를 던졌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10년 동안 '''마이너스''' 50파운드를 벌었다."[6] 이 저작은 그보다 먼저 출간된 『수학의 원리(Principles of Mathematics)』와 함께 러셀을 그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만들었다. 또한 같은 연도에 저명한 작가 오털라인 모렐과 만났으며 그녀와 오랜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수학원리 1권의 경우엔 현대에도 철학자들이 여전히 관심을 가지는 책이라고 한다. 2권과 3권의 경우엔 형식적인 증명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러셀 왈, "2권과 3권을 읽은 사람을 딱 여섯 명 알고 있었는데 그중 세 명은 폴란드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히틀러에게 제거된 것 같다.''' 나머지 셋은 텍사스 사람인데 나중에 사회생활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1911년에 그는 오스트리아의 공학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난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다양한 공포증과 여러 차례 일어나던 절망 따위와 씨름하며 시간을 보냈다. 후자는 종종 러셀의 기력을 앗아가곤 했지만 러셀은 계속해서 비트겐슈타인에게 매료되었으며 그의 학문적 발전을 격려했다. 러셀은 무명시기 비트겐슈타인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자서전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일종의 사회 부적응자로 희화화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면에서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보인 태도에는 일종의 이중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수학 원리』를 출간한 뒤 러셀의 철학연구는 주로 논리적 분석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분석철학 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러셀은 뒷날 이 운동에 공감하지 않았다. 논리적 원자론 철학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제자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기본학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학설에 따르면, 하나의 명제는 그 명제가 주장하는 사실을 그리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명제는 사실과 동일한 구조를 가져야만 한다. 러셀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줄곧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실제로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에서는 '구조의 유사성' 개념을 기준으로 하여 인과관계를 추론했다. 그러나 러셀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요저서 『철학적 탐구』와는 의견을 달리했다.
2.5. 1차 세계 대전 후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 활동한 혐의로 1916년 100파운드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이로 인해 트리니티 칼리지 칼리지 강사직에서 해고되었다. 1918년에는 6개월 금고형을 받아 브릭스턴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 8월, 러셀은 영국 정부가 러시아 혁명의 파급 효과를 조사하기 위해 보낸 공식 파견단의 일원으로서 러시아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나 1시간가량의 대화를 나누었다. 훗날 자서전에서 러셀은 당시 레닌과의 만남이 예상보다 실망스러웠으며 레닌에게서 "개구쟁이의 잔혹함"을 느꼈었다고 술회했다. 러셀의 레닌에 대한 평가는 이곳을 참조. 러셀의 애인 도라 블랙 또한 같은 시기에 개인적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도라는 혁명에 열광했지만 러셀의 경험은 그 이전에 혁명을 지지하려던 생각을 완전히 접게 했다. 이 해에 러셀은 『볼셰비즘의 이론과 실천』을 출간했다. 이 책은 소련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강조하고 후에 스탈린주의라 불린 많은 측면을 예언·비난한 소련정권에 대한 뚜렷한 비판서였다. 이후 러셀은 자신을 친소주의자로 몰아가는 메카시주의자들의 공격을 근거 없다고 반박하게 된다. 도리어 러셀은 독재국가인 소련이 핵무기를 가지게 해서는 안된다면서 서방이 소련을 선제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러셀은 도라와 동행하여 베이징에서 1년간 철학을 강의했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러셀이 폐렴으로 인해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일본에서는 그가 사망했다는 오보가 났다. 귀국 여행 중 일본에 방문한 이 커플은 세계에 이렇게 발표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버트런드 러셀 씨는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일본 언론인들과 인터뷰를 할 수 없다." 일본 언론은 이 세련된 야유를 전혀 재미있어 하지 않았다. 러셀은 이와 같은 야유섞인 농담을 매우 즐겨 사용했다. 같은 사건에서 일본 언론을 인용하여 러셀의 죽음을 보도한 선교사 신문이 "세계 각지의 선교사 여러분들께서 러셀 경의 죽음에 대하여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하더라도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논평한 데 대하여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 쉬게 된 선교사들에게 사과한다고 논평하거나, 당시 중국인들이 러셀이 사망할 경우 파양호변에 러셀을 추모하는 사당을 세울 계획이었던 데 대하여 "무신론자 러셀이 신격 러셀이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대답하였으며, 자신의 부고 기사를 읽는 즐거움에 대하여 이야기 한 바 있다. 영국식 농담의 아주 좋은 예.
이 커플이 1921년 8월 26일 영국으로 귀국했을 때, 도라는 임신 6개월이었다. 러셀은 앨리스와 급하게 이혼하고는 이혼 절차가 완료되고 난 6일 후인 1921년 9월 27일에 도라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이들은 존 콘래드 러셀 백작[7] (1921년 11월 16일 출생), 캐서린 제인 러셀(1923년 12월 29일 출생)이 있다. 러셀은 이 시기에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물리, 윤리, 교육에 대해 설명하는 대중서를 주로 썼다. 어떤 학자들은 이때 러셀이 엘리엇의 아내 비비언 엘리엇과 불륜을 가졌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도라와 공동으로 러셀은 1927년에 실험적으로 비콘힐 학교를 설립했다. 1932년 러셀이 학교 운영에서 손을 뗀 뒤로도 도라는 1943년까지 이 학교를 운영했다.
1931년, 형 프랭크 러셀이 죽자 러셀은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러셀은 그의 작위가 호텔 방을 잡는데 쓸모가 많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러셀은 자신의 작위에 대하여 냉소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작위 같은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있느냐" 친구의 힐문에 대하여 작위를 내놓는 방법은 대반역죄를 짓는 것뿐인데 그 경우 작위를 버리는 것은 좋으나 런던 탑에서 목이 달아날 염려가 있다고 대답한 바 있다. 그러나, 러셀이 집회 참여 중 봉변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가 세계적인 철학자라는 말에는 반응하지 않았던 경찰이 백작의 동생이라는 말을 듣자 구하기 위해 달려든 적이 있었다 한다!
러셀과 도라의 결혼 생활은 점점 위기에 치달았으며 도라가 미국의 저널리스트 그리핀 베리와의 사이에 아이를 둘 가지면서 한계점에 치달았다. 그들은 1932년에 별거하였으며 결국 이혼했다. 1934년 1월 18일 러셀은 퍼트리샤 스펜스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 그녀는 1910년생으로 38살 연하이며, 당시 옥스퍼드 대학교 학부생이었고, 1930년부터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다. 러셀과 스펜스 사이에는 저명한 역사가이자 자유민주당의 지도층 인사가 된 콘래드 서배스천 로버트 러셀 백작이 태어났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러셀은 시카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UCLA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그는 1940년 뉴욕 시립대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성적 부도덕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법원에 의해 취소되었다. 존 듀이를 위시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러셀에게 내려진 처우에 반발했다. 러셀은 곧 반스 재단에 가입하여 다양한 청중에게 철학사를 강연했다. 이 강연은 『서양철학사』의 기초가 되었다. 기인 앨버트 C. 반스와의 관계는 곧 소원해졌으며 러셀은 1944년 영국으로 돌아와 다시 트리니티 칼리지의 교수가 되었다.
1940년대부터 러셀은 학계 외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BBC 방송의 〈브레인스 트러스트〉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949년에는 BBC 〈리스 강좌〉의 첫 번째 강연자가 되었다. 1948년 10월 트론헤임으로 강의하러 가는 도중에 비행기 사고[8] 를 당했지만 살아남았다(43명의 승객 중 24명이 생존)[9] . 『서양철학사』 (1945)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러셀의 여생에 고정적인 수입을 제공했다.
2.6. 2차 세계 대전 후
1949년 6월 9일의 국왕 탄생 기념일에 러셀은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이듬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러셀이 메리트 훈장을 받을 때, 조지 6세는 정중했지만 왕년의 죄수에게 훈장을 수여한다는 데 약간 당혹해하며 "귀하는 때때로 보통 사람이라면 그리 하지 않을 방식으로 처신하셨지요."라고 말했다. 러셀은 그저 웃고는 "맞습니다. 폐하의 형님처럼 말이지요."라고 응수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러셀이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렇게 응수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자제했다고 한다.[10]
1952년 러셀은 퍼트리샤 스펜스와 이혼했다. 스펜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콘래드는 이혼 후 1968년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콘래드는 어머니와 불화가 생기자 아버지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러셀은 이혼하자마자 1952년, 네 번째 아내 이디스 핀치와 결혼했다. 이들은 1925년에 서로를 알았으며 이디스는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인근의 브린마워 칼리지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러셀의 오랜 친구 루시 도널리와 20년간 동거했었다. 이디스는 러셀이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에 있었으며 어느 면으로 보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고 친밀하며 사랑스러웠다. 러셀의 장자 존은 심각한 정신병을 앓았는데, 이 병의 원인은 러셀과 도라 사이에서 진행된 분쟁이 주요 원인이었다. 존의 아내 수잔 또한 정신병을 앓았는데, 결국 러셀과 이디스는 세 손녀의 법정 후견인이 되었다.[11]
러셀은 1950, 60년대를 다양한 정치적 사건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냈다. 러셀의 주된 활동 영역은 핵 군축과 반 베트남 전쟁 운동이었다. 1955년의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은 핵 군축을 촉구하는 문서로, 저명한 핵물리학자이자 당대의 지성이었던 11명의 학자들이 서명했다. 러셀은 이 기간에 세계 지도자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편지들을 썼다. 러셀은 나중에 반전(反戰) 영화 《Good Times, Wonderful Times》를 찍게 되는 라이어널 로고신 감독과 접촉하기도 했다. 러셀은 신 좌파 청년들의 영웅이 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 러셀은 미국 정부의 준-집단 학살 정책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1963년에는 예루살렘상의 초대 수상자가 되었다. 1965년 10월 그는 노동당이 베트남 전쟁에 미국 측의 지원군을 파병하기로 한 것에 울분을 토하며 노동당 당원증을 찢어버렸다.
2.7. 말년
러셀은 1967년부터 1969년까지 세 권 분량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러셀은 허약해지긴 했지만 사망하던 날까지 명료하고 분명한 사고를 유지했다. 88세의 러셀이 대중집회로 인하여 구류형을 선고받았을 때 고령의 노인에게 실형을 선고한 재판부가 비판받자, 그 비판에 대하여 러셀은 "고령은 면죄부가 아니며 오히려 그만큼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철저히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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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중국의 언어학자 겸 수학자 자오위안런(趙元任 1892.11.03~1982.02.25) 선생과. (안경 쓴 사람이 자오)
1969년 11월 러셀은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고문과 학살들을 조사하기 위한 국제 전쟁 범죄 위원회를 세울 것을 UN 사무총장 우 탄트에게 촉구했다. 다음 달에는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소련 작가 연맹에서 제명한 것에 항의했다.
1970년 2월 2일, 러셀은 웨일스 메리오네이셔 주 펜린드래스에 있는 자택에서 독감으로 사망했다. 러셀의 유해는 1970년 2월 5일 콜윌 만에서 화장되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어떠한 종교 의식도 행해지지 않았다. 화장하고 남은 유골는 웰시 산에 뿌려졌다.
3. 학문에서의 업적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 중 한 사람. 철학에서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제자인 비트겐슈타인, 유럽대륙 쪽의 논리실증주의자[12] 들에게 영향을 주어 분석철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만들어지게 된다.[13] 하지만 러셀 자신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14] 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사실 러셀은 철학사적으로 그리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으나 그것은 러셀의 저술이 너무 많아 딱 잘라 얘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그가 현대철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지금도 그가 남긴 연구에 대한 분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단지 러셀은 '''본인의 주장이 자주 바뀌어서 분석이나 논의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 편이다.'''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는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달리 러셀은 휙휙 바뀌는 편이라 러셀의 어떤 주장이 어떻고 이런 식으로 간단히 논의하기는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리고 주된 관심사인 수리철학이 19세기말에 비해 인기가 식은 분야이기도 하고.
이외에도 주로 사회학, '''교육'''에 대해서도 여러 저술을 남겼다.
3.1. 논리학 및 수리철학
화이트헤드와 공저한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필두로 한 러셀의 저작은 비록 후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 스스로도 완전한 논리 위에 수학을 올려놓으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고백했으나 논리적 분석을 통해 수학을 재건설함으로써 현대수학과 논리학의 기초를 한층 더 엄밀하게 만드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수학원리』가 집합론을 기초로 해서 수학의 나머지 분야를 차근차근 쌓아올리는 논리적 작업이기 때문에 오늘날 고등 수학교육의 가장 첫 페이지에 집합론이 등장하는 것도 러셀의 영향 때문이다.[15] 이런 이유로 피터 왓슨은 <생각의 역사> 2권[16] 에서 러셀과 화이트 헤드를 "소프트웨어의 할아버지쯤 된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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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원리』의 1+1=2임을 증명한 페이지의 사진. 『수학 원리』에서는 수학을 공부하다 보면 한번쯤 생각하게 되는 수식에 대해 증명하기도 했다. 그 유명한(?) '1+1=2'를 증명한 것. 이 증명 정리는 수학 소설인 '수학 귀신'에도 나온다. 문제는 아래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이 수학 원리란 책이 이해하기 어렵기로 악명높은 책이라서, 엉뚱하게 '1+1=2'를 증명하는 것 또한 대단히 어렵다는 소문이 돌게 되었다. 집합론, 자연수, 논리기호 등에 대한 정리를, 그것도 최소한도로 끝내고 나서야 '그러므로 1+1=2다'라는 증명을 하는데 이게 무려 300페이지 넘어가서야 나온다(...) 이 증명에는 페아노 공리계가 사용되었으며 증명 자체는 아주 쉽다. 페아노 공리계를 소개하고, 덧셈이라는 연산을 정의한 뒤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이 부분은 수학 소설인 '수학 귀신'에도 나온다. 물론 쉽다고 해도 전문 수학의 관점에서 쉽다는 뜻이지, 앞서 말한 수학 귀신의 독자인 어린이와 같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준은 아니다.
이처럼 전문지식을 습득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기호의 나열들이 빈틈없이 들어찬 페이지가 성서의 3배 두께에 가까운 분량으로 1권부터 3권까지 가득 들어 있다. 그래서 『수학 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몽땅 읽은 인물은 저자인 러셀과 화이트 헤드 그리고 후배 논리학자 겸 수학자인 쿠르트 괴델 달랑 세 명뿐이라는 농담도 있었다.[17] 철학자들 중에서도 집합론이나 논리기호에 까막눈인 경우는 이 저서에 접근할 수 없었다.
한편 러셀은 독일의 고틀로프 프레게가 평생에 걸쳐서 쌓아올린 수리철학을 20대 후반에 밟아버렸다 . 정확히 표현하자면 게오르그 칸토어에 의해서 정립된 집합론을 러셀의 역설로서 그 모순을 증명했다. 프레게뿐만 아니라 주세페 페아노, 다피트 힐베르트 등 집합론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생각해왔던 친집합론자들에게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 그것만 해도 거대한 업적. 러셀의 저서 '서양철학사'와 '수리철학의 기초(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등에서 "내가 프레게의 업적을 발견하고 비판하기 전까지만 해도 프레게의 이론은 매우 중요한 이론임에도 약 20년간 철저하게 사람들의 관심 바깥에 있었다."며 여러번 자찬하는 것을 보면 프레게 발굴과 비판은 러셀 본인에게도 꽤 큰 프라이드였던 것 같다. 프레게는 <산술의 기초> 2권을 끝낸 직후에 러셀의 역설을 편지로 받아듣고 충격을 받아 책의 부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자마자 그 체계의 토대가 흔들리는 것을 보는 것 만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산술의 기초 2권을 완성하기 바로 직전에 버트런드 러셀 씨의 편지로 인해 바로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버트런트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쌓아올린 수학의 궁극적인 이상에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큰 타격을 주었고, 중요한 수학적 문제였던 연속체 가설이 이에 해당되었다는 사실로 마격을 맞아 큰 훼손을 입었다.
3.2. 언어철학
프레게와 마찬가지로 현대 언어철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특히 영어의 "the ~"에 해당하는 명사구인 한정기술어구(definite description)에 대한 러셀의 분석은 21세기 초 현재까지도 표준적인 이론 중 하나에 해당한다.
다만 러셀의 언어철학적 입장은 지속적으로 바뀐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명제' 개념에 관한 러셀의 견해이다. 다만 현재 언어철학계에서 "러셀주의 명제(Russellian Proposition)"라고 부르는 것은 러셀이 1903년에 출판한 『수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Mathematics)』에서 제시한 초기 입장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4. 어록
출처까지 포함된 어록은 이 페이지를 참고할 것.
"머리가 가장 좋았을 때는 수학자를 하였고, 머리가 나빠지자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철학도 할 수 없을 만큼 머리가 나빠졌을 때는 평화 운동을 했지요."
"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선조는 이 문제를 힘으로 해결했다. 일단 말 상대를 해치우면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다. 때때로 그 대안은 토의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과 철학의 길이다. '''독자는 우리가 이 점에서 유사 이전부터 어느 정도의 진보를 해 왔는가를 스스로 판단해 보면 좋을 것이다.'''"[18]
"It has been said that man is a rational animal. All my life I have been searching for evidence which could support this."
"보통 인간을 가리켜 '이성적인 동물'이라 말한다. '''난 내 평생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찾아 헤매왔다.'''"
"The good life is one inspired by love and guided by knowledge."
"좋은 삶이란, 사랑으로부터 영감을, 지식으로부터 인도를 받는 삶이다."
"War does not determine who is '''right''' - only who is '''left'''."
"전쟁은 누가 '''옳은지''' 결정하는 것이 아닌 누가 '''남을지'''만을 결정한다." [19]
"I would never die for my beliefs because I might be wrong."
"난 절대로 내 믿음을 위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Do not fear to be eccentric in opinion, for every opinion now accepted was once eccentric."
"보편적이지 않은 견해를 갖길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보편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들도 처음 나왔을 때에는 별난 것이었다."
"Civilized life has grown altogether too tame, and, if it is to be stable, it must provide harmless outlets for the impulses which our remote ancestors satisfied in hunting."
"문명화된 삶은 전체적으로 너무 무기력해져버렸다. 안정을 위해선, 우리의 조상들이 '사냥'을 통해 충당한 여러가지 충동들을 해롭지 않은 선에서 해결할 어떤 수단이 구비되어야 한다."
"In all affairs it's a healthy thing now and then to hang a question mark on the things you have long taken for granted."
"그 어떤 것에 대해서라도, 오래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생각들에 가끔씩 물음표를 달아보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Fear is the main source of superstition, and one of the main sources of cruelty. To conquer fear is the beginning of wisdom."
"두려움은 미신의 주 근원이자, 잔혹성의 여러 근원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혜로워지는 첫걸음은 두려움을 정복하는 것이다."
"The fact that an opinion has been widely held is no evidence whatever that it is not utterly absurd."
"어떤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졌음이 그 주장의 타당성을 조금도 뒷받침하지 못한다."
"Three passions, simple but overwhelmingly strong, have governed my life: the longing for love, the search for knowledge, and 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kind."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20]
,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We all have a tendency to think that the world must conform to our prejudices. The opposite view involves some effort of thought, and most people would die sooner than think – in fact they do so."
"우리들은 모두 세상을 자신의 선입관에 맞춰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와 상반된 관점은 필연적으로 생각하는 수고로움을 동반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죠.''' "[21]
"The fundamental cause of the trouble is that in the modern world the stupid are cocksure while the intelligent are full of doubt."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현대사회에서 '''똑똑한 사람들은 매사를 의심하는데 바보들은 지나치게 자신만만하다'''는 것이다."[22]
"종교는 지적으로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해롭습니다."
5. 여담
- 이 사람의 인생에 관해 자세히 다룬 그리스산 만화책이 나왔다. 제목은 로지코믹스. 로직+코믹스다. 이 사람의 인생과 같이 수리논리학의 목적에 관해 개괄적으로 다루면서, 비트겐슈타인이나 괴델, 힐베르트, 푸앵카레[23] 등 유명한 수학자들도 매우 많이 나온다. 20세기 초반의 수학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다만 이 책은 실증적인 러셀의 일대기는 아님에 유의하자. 서두에서 지은이들 스스로 밝히듯이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며, " 만화 형식의 소설"이다. 어디까지나 20세기 수리논리학의 발전 과정을 살피고 그 의의를 곱씹어 보기 위해서 그에 있어 핵심적 인물인 러셀이 전면에 내세워지므로 이 책에서 묘사되는 그의 족적은 편의상 재구성된 측면이 많다. 예컨대 러셀과 몇 유럽 수학자들이 실제로는 편지 왕래 선에서의 교류에 그쳤으나 책에서는 그들 간 실제 만남이 있었던 것으로 각색하는 등이다.
- 칼 포퍼는 러셀을 '칸트 이후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추켜세웠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논리학의 가장 큰 공헌자'라고도 찬양했는데 이는 존 폰 노이만의 표절로 보인다. 노이만은 쿠르트 괴델을 가리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 러셀도 칼 포퍼를 언급한 것이 있는데 <<인기 없는 수필>> 등에 나오고 특히 <<인기 없는 수필>>에서는 포퍼가 일전에 러셀 자신이 <<서양철학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플라톤을 멋지게 아주 잘 깠다며(...) 어와둥둥 에구에구 이쁜 녀석(...) 하고 칭찬한다.
-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적이 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처럼 러셀 역시 사회주의자였다. 다만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소련식 현실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고, 국가의 기능을 축소하고 민중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자치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길드 사회주의'를 지지하였다. 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당시의 좌파사상(마르크스주의, 아나키즘, 노동조합주의)와 러셀 자신의 정치사상을 정리한 책인 '자유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추천한다.
- 흑역사(?)로 그는 위험한 발언을 했는데 1929년 저서 결혼과 성에서 "정신적 결함이 있는 자는 단종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나치의 우생학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반박할 수 있는 게 로지 코믹스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위에 소개된 것처럼 러셀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만큼 문체가 매우 수려하다. 그래서 러셀이 쓴 책을 원서로 읽어보는 것도 영어를 공부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비록 그의 어휘력이나 문장구조를 보면 요즘 책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단어나 구조도 자주 튀어나오긴 하지만 수준높은 영어교재로 러셀의 저서를 쓸 수도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희한한 악몽을 꾼 적 있는데, 어떤 거대한 도서관의 한 사서가 책을 하나하나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쓰레기통에 버릴건지 그대로 둘 건지 결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지막에 집어든 책이 자신과 화이트헤드의 역작인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였는데, 이 책의 온통 알아볼 수 없는 내용들의 기호에 깜짝 놀란 사서가 이 책을 버려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어릴 적 러셀은 지구가 평평했다고 믿었다. 부모님과 선생님, 친구들 모두 지구가 둥글다고 이해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24] 그러나 러셀은 신부님의 말씀은 잘 믿는 성격이였다. 그래서 특별히 신부님께 부탁해 겨우 러셀을 설득시켰다고 한다. [25]
- 동양철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 듯하나 그리 좋은 인상으로 보이진 않은 모양이다. 저작물 <나는 이렇게 믿는다.>에 보면 노자의 자연사상을 그저 그가 구시대적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평한다. 정확히 말하면 노자나 루소의 자연회귀 사상에서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그 작자가 익숙해 있는 것에 불과하고, 그들이 사악한 인위라 부르는 것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평했다. 즉, 노자는 길이나 다리, 나룻배로 통행을 편하게 하는 것이 인위로써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옷을 입거나 불로 음식을 익혀먹는 것과 같은 인위는 자신에게 익숙한 것이므로 인위로 보지 않았다는 논리이다[26] . 사실 러셀의 스타일을 생각해보면 노자 비판은 매우 온건한 편이다. 러셀은 논리가 없거나 논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온갖 비아냥[27] 을 담아서 까던 사람인데 노자의 철학에 대해서는 "공감은 가지만 종국에는 동의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노자의 철학은 단지 일상적인 인위 무위라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 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정치철학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28] .
- 반면에 <러셀, 북경에 가다>라는 책에서는 동양철학에 대해 매우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후 자신의 책에 서양 철학사라는 제목을 붙인 것만 봐도 동양철학에 대해 존중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얼핏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기존 유럽-영미 철학자들이 저술한 책의 제목은 예외 없이 '철학사'였다.[29] 즉 고대 그리스 철학-스콜라 철학-합리론과 경험론 등으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의 연쇄적인 역사를 철학의 역사 자체로 받아들였다는 것. 유럽의 역사를 기술한 다음 '세계사'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러셀은 중국을 방문하면서 동양에 독자적이고 심원한 철학 체계가 이미 성립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서양철학사를 기술하면서 굳이 '서양'철학사라고 강조한 것이다.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는 예수의 말이 이미 노자, 석가모니에 의해 벌써 나왔던 사상임을 강조했다. 성현들의 가르침이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학자들 역시 주목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러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복음서에 드러난 예수의 인간적인 약점을 지적하면서, 인격적 측면에서 볼 때 차라리 다른 성현들이 보다 성인에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번역은 나와 있고 분량도 적절하게 적지만 무화과 나무에 저주를 내리다 의 예시는 현대 기독교파에서 반대의견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종교학자가 아니다 보니 근거 없는 소리도 꽤 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서양철학사에서 칼뱅이 천동설을 옹호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최초 원문 출처가 불명확한 카더라일 뿐이었다[30] . 러셀이 신학자가 아닌 만큼 종교적 지식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엉뚱한 주장을 한 건 비판받아 마땅하다.
6. 저서
러셀은 <<수학의 원리>>, <<수학 원리>>, <<라이프니츠의 철학>> 등 전문적 학술 서적도 많이 냈지만, 유명한 <<서양철학사>>를 위시하여 대중 교양 서적이나 수필집도 많이 냈다. 아래 목록에 꼽히지 않은 수필집으로는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 <<인기 없는 수필>> 등이 있다.[31]
-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 1935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 1927
-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My Philosophical Development, 1959
- 러셀 자서전The Autobiography of Bertrand Russell, 1951-1969
- 상대성 이론의 참뜻The ABC of Relativity, 1925
-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
- 서양의 지혜Wisdom of the West, 1959
서양철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다면 <<서양철학사>>보다는 이쪽을 먼저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사실 먼저 나온 <<서양철학사>>는 전체적으로 축약적인 논조[37] 라서, 어느 정도 논리적 사고 능력이 형성되어 있고 이미 서양사/서양 문화/영어[38] /과학/수학에 관해 어디서 개무시 당하지는 않을 정도로 교양지식이 깔려 있는 가운데[39] 그것들을 더욱 견고히 해 보려는 독자에게 적합하다.[40] 특히, 분석철학의 시조답게 수학적/과학적 지식을 들먹이는 일이 많아서 천생 문돌이가 보기엔 고통스러울 수 있다(...)[41] 다만 우리말 번역본 <<서양의 지혜>>의 경우 서광사, 동서문화사의 두 판이 있는데 둘 다 번역의 질이 썩 좋지 않고[42][43] 역자의 해설이 전무하다시피 하며 중요 용어에 대한 원어병기, 영어병기, 한자병기도 별로 충실하지 않다. 우리말 번역본으로 보려거든 위 <<서양철학사>> 번역본도 구해 두고 비교대조해 가면서 읽는 게 혼란이 적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말 <<서양철학사>> 들이 번역 질이 좋다는 건 아니다(...) 비교적 최근 2017년에 집문당에서 <<서양철학사>>의 새 번역본이 나오긴 했는데 이것은 어떤지 모르겠다. 이전 집문당 판의 표지만 갈아치워진 판일 수도 있고... 그냥 영어가 되면 원판으로 보는 게 여러 모로 이롭다.
- 철학의 문제들The Problems of Philosophy by Bertrand Russell,[44] 1912
- 행복의 정복Conquest of Happiness, 1930
-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Why Men Fight, 1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