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연(전국시대)

 


龐涓
? ~ 기원전 342년
1. 소개
2. 생애
3. 평가
3.1. 방연 옹호론
3.2. 방연 비판론
4. 대중매체에서


1. 소개


중국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장수이자, 병법가.

2. 생애


귀곡선생의 밑에서 장의, 소진, 손빈과 함께 수학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중 장의, 소진은 처세술을 배웠으며, 손빈과 방연은 병법을 위주로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1]
그중 손무의 손자(일 가능성이 있는) 손빈과 친해 나이가 많은 방연이 형이 되었다. 그러나 방연은 손자의 후예인 데다가 천재였던 손빈을 질투했다.
귀곡선생이 통칭 꽃점을 통해 손빈과 방연의 미래를 점쳐준 것으로 유명한데, 방연이 주변을 전부 뒤지고 다니면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가져온 반면, 손빈은 방안에 놓여진 꽃을 가져왔다. 방연이 가져온 꽃은 꽃잎이 12개였기에 귀곡선생은 방연에게 12란 숫자가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려줬다.[2]
본래 서자 출신으로 출세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있던 방연은 노력 끝에 10년 만에 위의 대장군이 되었는데, 이 즈음에 귀곡선생의 권유로 하산한 손빈이 어떻게 낙하산 좀 안 될까 하고 찾아온다. 동문수학한 친구를 어찌어찌 추천해서 요직에 앉혀놓자 주변 사람들이 그 꼴을 보다못해 그와 손빈의 사이를 이간질하기에 이르고, 결국 거기에 넘어가 손빈을 제나라스파이로 몰아 빈[3][4]에 처한 뒤 손빈에겐 "내가 말려서 사형은 못 시키고 이걸로 끝난 거임"이라고 얼버무리고, 손빈은 이를 고맙게 여겨 가문에 전해지던 손자병법을 방연에게 저술해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때 정말로 제에서 온 세작들이 그를 제로 빼낼 생각을 해 손빈에게 진상을 알려주고, 손빈은 광인 흉내를 내며 방연에게 버림받고 제로 탈출, 대장군이 된다.[5]
이후 방연은 배운 걸 최대한 활용하여 이름값을 하여 위를 당대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손빈에게 발린 것만 부각되어 그렇지(줄어드는 아궁이를 비롯해서) 제를 이긴 적도 많았으며[6] 무엇보다도 방연은 조나라 수도 한단을 함락시킨 인물이다. 그러다가 대장군이 된 지 10년이 지나 귀곡선생을 떠난지 20년째, 손빈과 방연은 마릉의 전투에서 조우하게 된다. 방연은 앉은뱅이 손빈을 무시하고 방심했지만, 협곡으로 유인된 끝에 야밤에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는다"라는 글을 보기 위해 불을 켠 순간 매복한 군사들에게 사살되었다.

3. 평가



3.1. 방연 옹호론


많은 독자와 후세사람이 손빈을 배신한 방연의 최후에 대하여 통쾌하게 여기고 손빈을 배신한 방연의 행동을 비판하지만 막상 전국시대를 연구한 학자들은 방연의 행동을 옹호하면서 오히려 방연이 손빈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을 비판한다.
당시 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먹고 먹히는 시대였고, 한 나라안에서도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방연은 자신의 능력이 손빈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손빈이 모국인 제나라로 돌아가면 방연의 조국인 위나라가 위험해진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손빈이 위(魏)나라에 등용되면 자신의 설 곳이 없어진다. 거기다 자신 혼자 설 곳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혈족 그리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의 설자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은 불보듯 뻔하니 손빈을 제거하여 위나라와 자신의 위험을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냉혹하였던 전국시대에서 살아남고자 한 방연의 행동은 일방적으로 욕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될 존재를 사전에 죽이는 것은 전국시대의 생존전략으로 위나라 재상 공숙좌상앙을 등용하지 않을 바에는 죽일 것을 왕에게 청하였고 이를 무시한 위혜왕은 훗날 상앙의 변법으로 강해진 진나라에게 영토를 상실하게 되면서 상앙을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운 이사도 한나라의 한비자가 진나라의 통일전쟁을 막고자 진나라에 온 것을 알고 한비자를 제거하여 한나라의 마지막 희망을 무제거한 사례도 있다. 현재도 타국의 뛰어난 학자가 자국의 안보에 위험이 된다고 파탄하면 제거해 버리듯이 방연은 자신의 라이벌을 제거하는 동시에 자국의 안위를 챙긴 것으로 현재 중국역사학자들은 판단한다.

3.2. 방연 비판론


당시 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이며 강대국이 약소국을 먹고 먹히고 심지어 자국 내에서도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여졌으나 방연의 행적들은 치열했던 전국시대의 인물임을 감안해봐도 상당히 그릇된 판단을 하였으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속한 위나라도 망친 자충수의 연속이였다.
우선 손빈에 대해서는 방연이 전적으로 잘못 대한 것이 맞다. 뛰어난 인재가 적대 국가로 들어간다면 당연히 제거를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이것은 그 다음의 수이고 대부분 뛰어난 인재를 자신의 편으로 회유해 자신이 속한 세력을 위해 싸우게 하는 것을 우선시 하였다.
상앙만 해도 위나라의 재상 공숙좌 본인도 우선 자신의 왕에게 상앙을 크게 써줄 것을 줄곧 요청하였다. 하지만 위나라 왕이 이를 거부한 것이다. 결국 공숙좌도 어쩔 수 없다 생각되어 포기하고 왕에게 상앙을 기용하지 않으실 거면 차라리 후환이라도 없게 상앙을 제거하라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7]
손빈은 위나라로 간 것은 전적으로 방연의 초대에 응해 위나라로 간 것이다. 즉 손빈은 방연과 위나라가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위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후 방연은 손빈에게 억지로 제나라의 첩자라고 혐의를 뒤집어 씌워 처벌을 받게 하면서 선을 넘어버렸다. 그리고 이후 손빈을 모욕하기 위해 손빈을 살려두고 자신이 거둬들였다. 즉 손빈과 방연 사이에 흐르던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시작은 가만히 있던 손빈을 먼저 자극하고 건드린 방연이었던 것. 관중과 포숙아처럼 평화롭게 공존한 사례도 분명 있고, 군주의 입장에서는 인재가 다다익선인 만큼, 무조건 너 죽고 나 살자는 정글법칙만을 주장하는 건 문제가 있다.
뛰어난 인재가 들어오는 것에 자신이 속한 세력에서 자신이 소외될 것을 우려하여 인재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보통 인(人)의 장막이라고 불리는데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군주나 지도자가 결코 처해서도 안되며 이러한 상황이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철저하게 금기시 되는 사항이다.[8] 한 집단이나 세력이 계속해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뛰어난 인재들이 유입이 되어야만 하며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것은 마치 물이 새로운 물이 유입되지 못하고 계속 고여있는 상태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고인 물은 썩게되기 마련인데, 이런 관점에서 방연은 오로지 자기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기가 몸 담고 있던 위나라도 저버리고, 동문수학한 자신의 친구마저 저버린 인간이다. 약육강식의 법칙을 들면서 이런 방연이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똑같은 논리로 약육강식의 법칙대로 행동한 이완용도 틀리지 않은 게 된다.

4. 대중매체에서


[image]
삼국지 12,13
삼국지 12에서는 전국칠웅에서 위나라 소속으로 등장. 능력치는 79/72/82/78로 균형잡힌 능력치이지만,(손빈의 경우 무력은 방연보다 훨씬 낮지만 나머지 능력치는 방연보다 높다.) 전법이 전공속공이라서 백도어 용으로 쓸 만하다. 물론 참군신세가 된 손빈에 비하면 더 나은 편이지만. 일러스트는 손빈이 매복시킨 복병들에게 당해 죽어가면서 "결국 그 꼬맹이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라고 탄식하는 장면이다. 몇몇 다른 무장들도 마찬가지지만 최후의 모습을 묘사한 일러스트다보니 싸움에 이겼을 때나 즐거운 일이 있을 때나 항상 화살에 맞고 절규하는 모습만 보이는 게 안습...(...)
삼국지 13에서도 능력치는 전작과 같게 나온다. 중신특성은 없고 전법은 돌진지휘. 병과는 B/A/B 특기는 상업3 / 훈련3 / 언변5 / 신속5으로 내정, 전투 모든 면에서 쓸 만하다.
권교정 단편 만화 붕우에서는 새롭게 각색되었다. 방연이 손빈을 아끼던 선배였으나, 방연이 사랑하여 맺어진 아내가 손빈이 워낙 능력좋아 남편 출세길을 가로막을 존재라고 하여 음해하여 모함해 손빈을 그렇게 만든다. 손빈은 이걸 방연 탓으로 오해하여 증오해 결국 역사대로 방연을 그렇게 죽게한다. 정작 방연은 화살에 벌집이 되어 죽어갈 때, 미소지으며 손빈이 이름을 날릴 걸 반가워하며 편히 죽는다. 이 단편에서 미망인이 된 방연의 아내가 당신을 그렇게 모함한 것은 죽은 남편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했다라고 모든 사정을 쓴 편지를 보내지만, 이 편지를 가지고 가던 하인이 도적에게 죽는 통에 끝내 손빈은 영원히 방연이 자신을 모함해 이렇게 장애인으로 만들었다고 여겼다.
고우영의 십팔사략에선 방연은 손빈이 귀곡학당에 들어왔을 때부턴 손빈을 미워했지만, 보다 더 크게 굴욕을 주기 위해 일부러 좋은 선배 행세를 한다. 이후 귀곡선생이 가지고 있던 손자병법을 몰래 훔쳐보다 스승에게 들켜 파문을 당하고,[9]귀곡학당을 떠나면서 손빈에게 하산하면 위나라로 자신을 찾아오라 하며 떠난다. 이후 손빈도 귀곡학당을 떠나 방연이 있는 위나라로 가서 방연을 만나지만 방연은 그런 손빈에게 누명을 씌워 앉은뱅이로 만들어 버린 뒤 노골적으로 손빈에게 굴욕을 주는 등 본색을 드러냈다고 서술하고 있다. 손빈이 손자병법을 재구성한 손빈병법을 쓴 것도 방연이 죽은 이후라 적고 있다.
여기서는 방연이 죽을때, 이런 말을 하고 죽었다고 나온다.

드디어 그 꼬마 녀석이 천하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구나....

[1] 그러나 시기 상 맞지 않는 게 밝혀진 바로는 장의는 소진보다 한 시대 위의 인물이고 손빈과 방연은 장의보다 한 시대 위의 인물이다. 손빈과 방연은 진 효공 때의 인물이며 장의는 효공의 아들인 진 혜문왕 때의 인물이고 소진은 혜문왕의 아들인 진 소양왕 때의 인물이다. 즉 이들을 가르친 귀곡자가 동일인일 가능성이 희박하며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2] 어떤 책에서는 세부적인 부분만 다르다. 방연이 처음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 막 발견한 것이 수수한 들풀인 마두령이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원대한 꿈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다른 꽃을 찾다 못 찾아 마두령을 가져갔다고도 한다. 마두령은 한 번에 열 두송이의 꽃을 피우므로 12년간 부귀를 누릴 것이라 해석되었다.[3] 극형 중 하나로 무릎 연골을 파내 앉은뱅이로 만드는 형벌.[4] 여기에 추가로 월형(발꿈치를 자르는 형벌. 제대로 걷는 것 힘들어진다.) + 자자형(刺字刑: 이마에 죄목을 문신해 넣는 형벌. 명예형벌인데 본인이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것을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것과 다름 없다. 이를 당하고 수치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을 당했다고 한다.[5] 손빈의 고향인 데다 무엇보다도 제는 손빈이 위왕의 노여움에 의해 처벌을 당했기에 이후 분쟁의 소지가 되더라도 위나라로부터 손빈을 보호해주고 지켜줄 수 있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매우 중요한 것인데 당시 위는 전국 칠웅 중에서도 국력이 최강인 패권국이었다. 당시 제나라도 초나라와 같이 위나라에 위협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로선 제나라를 무시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제나라는 예전부터 위를 탐탁치 않아 했다'''[6] 당장 기원전 353년 위위구조 계책에 당해 계릉에서 손빈이 이끈 제나라 군대에게 패배한 방연은 그 직후 기세를 타고 자국 영토인 양릉(襄陵)을 포위한 제, 송, 위 연합군을 상대하게 되는데, 한(韓)나라 군대와 연합해 이를 다시 격파하고 제나라 측의 강화를 이끌어냈다.[7] 이 공숙좌라는 사람은 언급되는 경우가 보통 두 경우인데 이 사람이 바로 위나라 전성기가 끝나기 전의 재상이라는 것과 중국 역사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낸 두 걸물 오기와 상앙과 연관된 인물로서이다.[8] 아예 이러한 것에 대해 망국의 징조라고 하며 학을 떼며 증오하는 사람들도 많다.[9] 방연의 출신 가지고 모욕하는건 덤 모든 제자를 사랑하는 열국지의 귀곡선생과 비교해 전혀 다른 인물이라 봐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