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태공

 


'''{{{#ece5b6 제(齊)나라 33대 국군
전씨 왕조 초대 국군
태공
太公}}}'''
''''''
규(嬀)[1]
''''''
전(田)[2]
''''''
화(和)
'''아버지'''
전장자(田莊子) 혹은 전도자(田悼子)[3]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384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91년 ~ 기원전 384년[4]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4년[5]
1. 개요
2. 즉위 전
3. 즉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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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씨 제나라(田齊)의 초대 군주. 전장자(田莊子) 혹은 전도자(田悼子)의 아들. 그는 고조부 전상, 증조부 전반, 조부 전백, 아버지 전도자의 기반을 바탕으로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다.[6] 그것을 바탕으로 제강공을 몰아내고 제나라를 차지해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2. 즉위 전


제 선공 51년(기원전 405년), 전화는 아버지 혹은 형 전도자의 자리를 물려 받았다.
제 강공 원년(기원전 404년), 삼진이 제나라의 장성을 쳤다. 제나라의 장성은 서쪽에는 방문(현재의 산동성 비성),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 장성은 산맥을 따라 지어졌다. 장성을 쌓는 일은 전화가 주도하였으므로 제선공은 허수아비였다. 제 선공이 죽고 제 강공이 즉위했는데, 전씨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제강공은 주색을 즐기고 품행이 좋지 않았다고 되어있다.[7]
아무튼 그것을 이유로 전화는 제 강공 19년(기원전 391년)에 제강공을 바닷가로 몰아내고, 식읍으로 성 1개를 딸려 주었다. 그리고 강성 제나라(姜齊)의 제사를 잇게하고 자신이 전씨 제나라의 군주가 되어 제 태공이라고 불린다.[8]

3. 즉위 후


제 태공 2년(기원전 390년)[9], 제나라는 위나라를 쳐서 양양을 취했다.[10] 그러나 오래지 않아 위문후, 초도왕과 충택 땅에서 회맹해 군주로 인정받았고, 위 문후가 주안왕의 허락을 구했다.
제 태공 6년(기원전 386년), 주나라의 주안왕은 제 태공을 정식으로 제나라 군주로 인정했다.
제 태공 8년(기원전 384년), 전화가 죽고 아들인 전섬(田剡)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제후섬(齊侯剡)이다.
[1] 그 조상 진완(陳完)이 진(陳)나라의 공족이어서 성이 규성이다.[2] 원래는 전씨가 아니라 진(陳)씨다. 조상 진완(선술한 인물과 동일 인물)의 이름이 발음이 변하여 전완(田完)이 되었다고 한다.[3] 전도자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4] 제 강공을 몰아낸 때를 기준으로 했을 시[5] 주나라로 인정받은 때를 기준으로 할 시.[6] 당시 전씨의 세력이 커서 상국 자리를 사실상 전씨가 물려받았다.[7] 즉 전씨가 강제를 멸하고 전제를 세운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이므로 필터링 해서 봐야 한다는 말이다.[8] 다만 강제가 형식적으로는 남아있었기 때문에 형식상으로는 전제는 강제의 신하국이다.[9] 이 문서에서는 제 강공을 몰아낸 때를 기준으로 표기한다.[10] 형주의 양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