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도왕

 


'''초(楚)나라 34대 국군
18대 왕
도왕
悼王
'''
''''''
미(羋)
''''''
웅(熊)
''''''
의(疑)
'''아버지'''
초성왕(楚聲王) 웅당(熊當)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381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401년 ~ 기원전 381년
1. 개요
2. 생애 초기
3. 오기의 부국 강병책
4. 최후
5. 평가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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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제34대 군주. 제18대 . 초나라에서 출토된 문헌에서는 시호를 도절왕(悼折王)으로 기록하였다. 이름은 의(疑). 아버지 초성왕(楚聲王)이 도적들에게 죽은 뒤에 왕위를 이었고, 초기 치세에 삼진(三晉)에게 털렸지만, 절치부심하여 부국 강병을 꿈꿨는데, 마침 위(魏)나라에서 오기(吳起)가 망명해오자, 그를 영윤으로 임명해 꿈을 이룬 왕이다.[1]

2. 생애 초기


초 성왕 6년(기원전 402년), 초나라 내부에 혼란이 일어나고, 강도들이 초성왕을 습격하여서 초 성왕이 살해를 당하자, 웅의가 뒤를 이어 초나라 왕으로 즉위했다.
초 도왕 원년(기원전 401년), 당시에 중국 정세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흘러가 삼진이 강성해졌으며, 제나라는 전씨(田氏)가 장악하였다. 그리고 초나라는 여러 국가들에게 압박을 받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초 도왕 2년(기원전 400년), 초나라가 불리한 정세였다. 삼진 연합군이 초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는 삼진 연합군에게 승구 땅에서 패했다. 이 때 삼진의 의도는 초나라를 압박하는 것으로서 위 문후의 치세때 삼진이 굉장히 우호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위 문후와 우호적인 관계였던 한(韓)나라도 같이 움직여서, 그 효과로 초나라를 압박할 수 있었다.
초 도왕 9년(기원전 393년), 초나라가 한나라를 쳐서 부서 땅을 차지했다.
초 도왕 11년(기원전 391년), 삼진 연합군이 그에 대한 복수로 대량(大梁)[2]과 유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예물을 주고 받으면서 동맹을 맺었으며, 삼진을 견제하려 한 초 도왕은 위기 상황에서 그것을 타개할 계책이 필요했다.

3. 오기의 부국 강병책


초 도왕 15년(기원전 387년), 오기가 위(魏)나라에서 초나라로 망명하자, 평소에 오기가 현명하고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오기를 영윤으로 삼았다. 그리고 초 도왕은 오기와 함께 부국 강병책에 대해 논하였고, 이에 초 도왕은 매우 기뻐했다.
초 도왕을 기뻐하게 한 오기의 부국 강병책은 이러하였다.
1. 왕족 출신의 대귀족에게 공로가 없으면 벼슬과 녹봉을 주지 않는 것으로 견제한다. 그럼으로써 공금이 함부로 세나가지 않게 한다.
2. 관제의 정비를 시도해 쓸데없는 관직을 없앰으로써 거기서 생긴 돈을 공금으로 사용한다.
3. 농지를 개간한다. 황무지를 개간해 거기서 수확한 농산물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부유하게 한다.[3]
4. 군제를 개혁한다. 군제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일단 뒷받침 되는 경제력이 중요한데, 위의 3가지가 이뤄지면 경제력은 자연스럽게 상승하여 군제를 개혁하기 쉬워진다.[4] 오기는 자신이 중원에서 갈고 닦아온 군재를 바탕으로 병사들을 키워 강병을 만들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귀족들이 공로가 없으면, 벼슬에서 내쫓고, 그 빈 자리 중 쓸모없는 자리(한직)는 정리하며, 농지를 개간해 그것을 바탕으로 생산력을 키워 국부를 늘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군사를 키우는데, 오기는 제자백가 중에 하나인 병가(兵家)였고[5], 그래서 병법에 능해 병사들을 키우니 병사들이 강해지고, 나라가 부유해져 정복 전쟁에 나서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초나라는 전국 시대의 살벌한 무대에서 잘 적응하기 시작한다.
초 도왕은 오기가 시행하기로 한 부국 강병책을 받아들여 초나라의 법령을 정비하고,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면서, 초나라 왕실의 촌수가 먼 일족들의 봉록을 폐지하고, 군사들을 양성했는데, 이는 병력을 강화해 합종, 연횡을 말하는 유세객들의 주장을 물리치는 것으로 이러한 정책이 시행되자, 남쪽으로는 백월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陳), (蔡)를 병합하면서 삼진을 격퇴할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진(秦)나라를 토벌해 제후들이 초나라의 강성함을 우려했다고 한다.[6]

4. 최후


초 도왕 21년(기원전 381년), 초 도왕이 죽자, 예전에 특권을 누렸던 초나라의 왕족이었던 자들이 오기를 죽이려고 했다가, 그 와중에 오기가 초 도왕 시신에 엎드리자, 초 도왕의 시신에 화살이 꽂히는 일이 일어났고, 이 일에 연루된 초나라 왕족이 처형된 자가 70여 집에 이르렀다.

5. 평가


초 도왕은 아버지 초 성왕이 국정이 혼란해서 죽은 것을 지켜봤으므로 국력을 키우기 위해 아등바등했으나, 삼진 연합군의 힘을 당해내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고심하던 차에 위나라에서 망명해 온 오기가 유능한 것을 알아서 그 계책을 받아들여 전국 시대의 적응에 성공해 당대를 주름잡았다.
하지만 오기의 계책은 귀족들의 특권을 깎는 일이었으므로 귀족들이 반발하여 오기를 죽였다.[7] 그리고 초나라는 초 위왕 때는 월나라를 멸하고, 고열왕 때는 노나라를 멸했지만, 그 뒤로는 진나라에게 밀려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6. 미디어 믹스


[image]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 '웅의'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1] 후술했듯이 부국 강병을 이뤄 손자인 초위왕 때는 월나라를 멸하고, 고열왕 때는 노나라를 멸하는 등으로 나타났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결국 초나라는 진(秦)나라에게 밀려 망하고 만다.[2] 현재 중국의 허난성 카이펑.[3] 참고로 공원국 교수의 저서 춘추전국이야기에서 관중이 그것을 시도해 제나라가 강성해졌다고 나왔으니 초나라는 그것을 늦게 실시한 셈이다. 그것이 초나라에서는 오기에 의해 시행된 것이다. 참고로 제나라는 그것을 춘추 시대 때부터 시행했다는 것이다.[4] 경제력과 군사는 상관 관계가 있는데, 손자 병법의 첫머리인 시계 편에서 정치는 어느편이 더 나은가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5] 비록 병가이나 상앙법가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법가 사상가로도 분류되기도 한다.[6] 그럴만도 한게 여기서 말하는 진(秦)이란 바로 진시황제의 진나라를 의미한다. 이 당시 진나라는 강대국이라서 이 진나라랑 1:1 떠서 이긴거 자체가 다른 제후국들에게 두려움을 줄만하다. 안그래도 초나라는 전국시대 국력 랭킹 3위 내의 강대국이었다.[7] 이게 바로 결국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와의 차이점이다. 진나라도 상앙의 법가를 전적으로 지지해주면서 상앙의 훌륭한 국정파트너였던 진 효공이 죽고 상앙에 원한이 많은 효공의 아들 혜문왕과 상앙의 법가에 반발한 구세력 귀족들에 의해 결국 거열형에 처해져 죽임을 당했지만 혜문왕은 구세력 귀족들이 다시 옛법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물리치고 상앙의 신법이야말로 백성들의 생활과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그대로 다시 채택했고, 이에 반발한 구세력 귀족들을 숙청하면서 상앙의 법치를 준수한 반면 초나라는 오기를 죽였고 다시 오기 이전으로 돌려버렸다. 결국 이 차이로 인해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