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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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나라(魏)의 초대 군주. 아버지인 위환자(魏桓子)가 죽은 뒤 위씨 가문의 당주가 되었고, 진나라의 경을 지내다가 기원전 424년, 주나라의 왕이 그를 후작으로 봉하여 공식 제후로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이 사람이 위문후로 불리는 것이다.
2. 즉위와 삼진의 분립
진애공 6년(기원전 446년), 위환자가 죽자 그 아들인 위사(魏斯)가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위문후다.
진유공 10년(기원전 424년), 위문후가 제후를 자칭하여 이 때가 위문후 원년이 되었다.
진열공 11년(기원전 405년), 제나라의 전회가 늠구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삼진(三晉)에게 구원을 청했다. 위문후는 적각을 주장으로 삼아 한나라, 조나라와 함께 제나라의 장성을 쳤다. 제강공은 그 일로 인해 쫓겨나게 되었고, 주나라 천자는 제나라의 전씨 가문과 삼진을 제후로 인정해 그 권위가 결국 끝간데 없이 실추되었다.
진열공 13년(기원전 403년), 주나라 천자가 이들이 정식으로 제후가 되었음을 승인하자 전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 예를 가까이 하고 악을 멀리하다
위문후는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현인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공자의 제자인 자하(본명은 복상(卜商))가 현명하다고 알려져 있는지라 친히 그를 초빙해 스승으로 모셨다. 자하는 위문후의 성의에 감동하여, 위나라로 갔다. 그는 위나라에서 학문을 가르쳐,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리하여 위나라에 인재가 많아졌다. 위문후는 자하에게 공손하게 청해 예악과 경전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고, 자하는 위문후에게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정치를 하는 참다운 군주의 도를 펼치게 하며, 요임금과 순임금의 치세와 같이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 하고, 간신배를 멀리하게 했다.
4. 위문후의 변법, 전성기
위문후는 이회(李悝)를 상국으로 봉하여 변법을 실시했다. 이회는 도법, 적법, 수법, 포법, 잡법, 구법 등의 6편의 법률을 만들어 위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전자방과 단간목 등의 학자를 중용하였다.
3진으로 나뉘어 진 뒤 한나라, 조나라가 서로 싸웠다. 이때 한나라가 위나라에게 구원을 청했다.
한나라 사신이 말했다.
"군후께서 우리를 위해 병사를 보내 조나라를 쳐서 저희를 구해주십시오."
위문후가 말했다.
"과인은 조후와는 수족과 같은 사이이니 경의 나라를 위해 원군을 보낼 수 없소."
조나라 사신 또한 원병을 요청하는 말을 전하자 위문후가 대답했다.
"과인과 한후의 정리는 형제와 같으니 경의 나라를 위해 파병할 수 없소."
위문후가 양국에게 원병을 보내지 않았으므로 양국의 특사는 귀국하였다. 오래지 않아 양국은 위문후의 조정으로 인해 화해하였고 그들은 위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사마광은 이 일을 이렇게 평했다.
"위가 삼진 중에서 빨리 전성기를 맞은 이유는 제후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는 법이 없게 했기 때문이다."
위문후는 오기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이극에게 물었다.
"경이 보기에 오기는 어떤 자요?"
이극이 대답했다.
"오기는 공명과 여색을 탐하는 자입니다. 다만 용병술만은 전양저도 오기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위문후가 오기를 대장으로 봉해 진나라를 쳐서 하서의 5개 성을 취했다. 그리고 거기에(하서의 5개 성) 하서군을 설치하고 오기를 태수로 봉했다.[3]
5. 업현을 안정시키다.
위문후는 업현의 현령으로 서문표를 보냈다. 서문표가 업현으로 가기 전, 그곳의 무당이 하백에게 제사를 지낸답시고 삥을 뜯고, 죄없는 처녀를 수장시키는 인신공양의 막장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서문표는 먼저 무당과 삼로들을 차례로 수장시킨 뒤 그 행위가 악습임을 분명히 알리고, 인력을 동원해 보를 트자 사람들은 초기에는 원망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업이 삼국시대 때까지 대도시가 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6. 중산국을 멸하다.
조나라는 중산국(中山國)을 골칫거리로 여겼다. 위문후가 길을 빌려 중산국을 치고자 했으나 조헌자가 거절하려고 했다. 대신 조각이 권했다.
"위나라로 하여금 중산국을 치게 하십시오. 이겨봐야 이긴 것 같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국력만 쇠약해질 것입니다. 오히려 중산의 힘을 빌어 위나라의 힘을 빼고 저희가 중간에서 그들의 땅을 얻는 이익을 취하면 됩니다."[4]
그리하여 조헌자가 그 말에 따랐다.
이때 책황(翟璜)은[5] 자신의 식객인 악양이 장군으로서의 재질이 뛰어남을 알고 중산을 치는 주장으로 삼게 했다. 악양의 아들인 악서는 중산국에 있었는데, 악양이 그것에 개의치 않고 중산국을 치자 중산국왕은 악서를 죽여 그 고기를 악양에게 보내니 악양은 고기를 먹으면서 속으로 한을 품고 중산국을 멸하였다. 이때가 위문후 19년(기원전 406년)이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악양을 탄핵하는 여론이 높아져 결국 위문후는 악양을 더 쓰지 않게 되었다.[6]
참고로 이 양반의 후손이 연나라의 연소왕 때 대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멸망시킬 뻔한 악의다.
7. 최후
위문후 29년(기원전 396년), 위문후는 병이 깊어져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오기, 서문표 등을 불러 태자인 위격을 부탁하고 죽었다. 태자가 그 뒤를 이어 군주가 되니 그가 바로 위무후다.
[1] 제후를 칭하지 않고 위씨 가문의 주인으로서 군림한 기간 포함[2] 제후를 칭한 것 기준으로의 재위기간.[3] 여담이지만 이 때부터 양혜왕 때까지 진(秦)나라는 감히 하서 땅을 넘보지 못했다. [4] 단 위나라도 조나라에게 그 땅을 넘길 생각이었다.[5] 翟자는 평소에는 적으로 읽지만 성으로 쓸 때는 적이 아닌 책으로 발음한다.[6] 이때 그 근거로 쓴 사례가 제환공 대의 간신 역아, 수초, 개방의 사례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