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원인론
1. 개요
The first cause theory.
중세 서양 철학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제안한 논변이며, 다른 말로는 우주론적 논변이라고도 불린다. 그 내용은 제1원인이라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데, 이 제1원인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 제1원인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그것이 존재하게 된 원인을 가진다.
ㄴ. ㄱ에서 말한 제1원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귀류법을 위한 가정)
ㄷ. 만약 ㄴ이 참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진다.
ㄹ. 편의상 임의의 존재를 생각하자. 예를 들어서 나무위키.
ㅁ. ㄷ에 따라, 나무위키의 원인은 존재한다.
ㅂ. ㅁ에서 말한 나무위키의 원인을 편의상 a라 하자.
ㅅ. ㄷ에 따라, a의 원인은 존재한다.
ㅇ. ㅅ에서 말한 a의 원인을 편의상 b라 하자.
ㅈ. ㄷ에 따라, b의 원인은 존재한다.
ㅊ. ㅈ에서 말한 b의 원인을 편의상 c라 하자.
ㅋ. …
ㅌ. (무한반복)
ㅍ. ?!
그 특성상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초월자의 존재를 논증하기 위하여 자주 다루었는데, 다음은 이 떡밥을 다룬 것 중 가장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중 일부이다.
제1부 제2문제
신론 -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앞에서 명백하게 말한 바와 같이 이 거룩한 가르침의 주된 의도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전하는 것이며, 또 그것은 다만 하느님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서뿐만이 아니라 사물들의 특히 이성적 피조물의 근원이며 종극인 것으로서의 인식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의 해설이 의도하는 바도 다음과 같은 것을 다루게 될 것이다. 첫째로는 하느님에 대해 논하고, 둘째로는 이성적 피조물의 하느님께로의 운동에 대해서, 그리고 셋째로는 우리에게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인 그리스도-그가 사람인 한-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고찰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겠다. 즉 첫째로 우리는 하느님의 본질에 속하는 것들을 고찰할 것이고, 둘째로 페르소나의 구별에 속하는 것들을, 셋째로는 피조물들의 하느님에게서의 발출에 속하는 것들을 고찰할 것이다.
하느님의 본질에 대해서는 첫째로 하느님이 존재하는지를 고찰할 것이고, 둘째로는 하느님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오히려 하느님은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지를, 그리고 셋째로는 하느님의 작용에 대하여, 즉 하느님의 지식과 의지와 능력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첫째 것에 관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물어진다.
1.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가.
2. 그것은 논증 가능한 것인가.
3.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중략)[2]
제3절: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병행문헌: 명제론집 제1권 제3구분 첫 부분. 이교논박대전 제1권 제13장, 제15장, 제16장, 제44장 ; 제2권 제15장; 제3권 제44장. 진리론 제5문제 제2절. 능력론 제3문제 제5절. 신학개요 제3장. 자연학 제7권, 제2강; 제8권, 제9강 이하. 형이상학 제12권, 제5강 이하 참조.
셋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서로 모순되게 대립하는 것 중 하나가 무한한 것이라면 그 반대편의 다른 것은 전적으로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이란 명칭에서는 어떤 무한한 선(善)이 이해된다. 따라서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어떠한 악(惡)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악이 세상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2. 그 밖에도 적은 수의 (몇몇) 근원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은 많은 근원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이외의 다른 근원들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들은 자연이라는 근원에서 환원되고, 의도로 말미암아 있는 것은 인간 이성과 의지라는 근원에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는 절대로 없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탈출기 제3장 제14절에서 하느님 자신은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섯 가지 길로 논증될 수 있다. 첫째이며 더 명백한 길은 운동변화에서 취해지는 길이다. 이 세계 안에는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또 그것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그런데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진다. 사실 어떤 것도 그것을 향해 움직이는 것에 대해 가능태에 있지 않은 한 움직일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움직여 주는 것은 그것이 현실태에 있는 한 움직여 준다. 즉 움직여 준다는 것은 어떤 것을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행시켜 가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끌어지는 것은 현실태에 있는 어떤 유(有, ens)에 의하지 않으면 될 수 없다. 예컨데 더워질 가능성 안에 있는 나무를 현실적으로 더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불이라는 현실적으로 더운 것이다. 불은 이런 현실적 더움을 통해 나무를 움직이며 변화시킨다. 그러나 같은 것이 같은 관점에서 동시에 현실태에 있으며 가능태에 있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은 다른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예컨대 현실적으로 더운 것은 동시에 가능적으로 더운 것일 수는 없고 다만 그것은 동시에 가능적으로 찬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관점에서 같은 양태로 어떤 것이 움직여 주는 것이며 움직여주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그것이 또한 움직인다면 그것 또한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하며 그렇게 움직여 주는 것 또한 다른 것 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소급해 갈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런 경우(무한한 소급이 인정되는 경우) 어떤 첫 움직여 주는 자, 즉 제1동자(弟一動者)가 없게 될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다른 움직여 주는 자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2동자들은 제1동자한테서 움직여지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면 다른 것을 움직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지팡이는 손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면 다른 것을 움직여 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한테서도 움직여지지 않는 어떤 제1동자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런 존재를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둘째 길은 능동인의 이유에서다. 사실 우리는 이 감각계에 능동인들의 질서(계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런 세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의 능동인으로 발견되지 않으며 또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며 이런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능동인들에 있어서 무한히 소급해 갈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모든 질서지어진 능동인의 계열에 있어서 첫째 것은 중간 것의 원인이고 중간 것은 최종적인 것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 때 중간 것이 많건 혹은 하나만 있건 그것은 관계없다. 그런데 원인이 제거되면 결과도 제거된다. 그러므로 만일 능동인들의 계열에 있어서 첫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최종의 것도, 중간의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능동인들의 계열에 있어서 무한히 소급되어간다면 제1능동인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최후의 결과도, 중간능동인들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허위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제1능동인을 인정해야 하며 이런 존재를 모든 사람은 하느님이라 부른다.
셋째 길은 가능과[3]
필연에서 취해진 것이다. 즉 우리는 사물세계에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발견한다. 그런 것들은 생성, 소멸하며, 따라서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존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때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떤 때에는 사물계에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眞)이라면 지금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이유는 없는 것은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면 존재하는 것을 시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떠한 유(有, ens)도 없었다면 어떤 것도 존재하기를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며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허위다. 그러므로 모든 유가 가능한 것뿐일 수는 없고 사물계에 어떤 필연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필연적인 것은 자기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 갖거나 혹은 갖지 않을 것이다. 그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 갖는 필연적인 것들의 계열에 있어서 소급이 무한히 진행되어 갈 수는 없다. 이것은 벌써 능동인의 경우에서 증명된 바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 갖지 않고 다른 것들에게 필연성의 원인이 되는 어떤 것, 즉 그 자체로 필연적인 어떤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존재를 모든 사람은 하느님이라 부른다.(중략)
2. 둘째에[4]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자연본성은 어떤 더 상위의 작용자의 지휘에 의해 일정한 목적을 위해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에서 이루어진 것들을 제1원인으로서의 하느님께로 환원시킬 필요가 있다. 이와 비슷한 의도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어떤 더 높은 원인으로 환원될 필요가 있다. 이런 원인은 물론 인간적 이성이나 의지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변할 수 있는 것들이고 불완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일 수 있는 것과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부동적이고 그 자체로 필연적인 제1원리(根源)에까지 소급되어야 한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제시한 바다.
2. 반박
철학적으로 제1원인론이 주장되어 온 역사는 엄청나게 오래되었고, 그에 대한 반론들도 몇 가지 제시되어 왔다.[5]
- 버트런드 러셀의 반박: "원인의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이 무한한 게 뭐 어때서? 그건 원래 그런 거라고!" 라고 주장하여 제1원인론이 쓰려 하는 귀류법이 잘못된 논조임을 지적한다.
- 이마누엘 칸트: "제1원인이 존재한다"는 명제와 "원인-결과 계열은 무한하다"는 명제는 둘 다 인간 이성이 입증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명제라고 본다. 즉, "제1원인은 존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제1원인론도 잘못됐고, 그에 맞서서 "원인-결과 계열은 원래 무한하다"라는 명제를 주장하는 러셀도 틀렸다는 것이다.
- 데이비드 흄: 러셀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제1원인론을 반박한다. 러셀의 입장에서는 a의 원인은 b고, b의 원인은 c고, c의 원인은 d고, d의 원인은 ...... 으로 무한히 이어지는 사태가 신기하긴 하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 된다. 반면 흄은 여기서는 신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v의 원인은? w다! 라는 식으로, 개별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항상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 있다. 그러면 각 부분들에 관한 문제를 모두 풀면 전체에 관한 문제도 풀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것이 흄의 주장이다.
- 순환적 입장: 예를 들어 A가 B를 이끌어내고, B가 C를 이끌어내고, C가 A를 이끌어내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즉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어 끝없이 순환하므로, '제1 원인'을 가정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불교의 12연기론이 가장 대표적이고, 힌두교의 윤회론도 일정 부분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신 혹은 현실에 대한 논증으로 가장 자주 쓰이는 제1 원인론의 반박인 이상, '그렇다면 순환하는 A, B, C 등의 존재들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해서는 모호한 답을 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불교의 경우 만물에는 실체가 없고 12연기가 4성제에 의거해 순환한다는 진리만이 존재한다고 주장, 만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여기에서 빠져나간다.
- 인과론 자체에 대한 비판: 네 입장은 모두 "어떤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다" 는 인과원리를 전제하고 있다.[6] 그러나 이 비판은 과감하게도 "어떤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다" 라는 명제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현대 물리학적 관점: 현대 일부 물리학자들은 인과율을 부정하며, 인과율을 고전 물리학의 결정률과 동일시한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장한 후 인과율의 가치는 사라지고 물리적 법칙은 통계적이라는 것이다.[7]
3. 현실적 결론
사실 방금 위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제1원인론을 둘러싼 수많은 논쟁 중의 극히 일부분만을 제시한 것일 뿐이다. 제1원인론을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않으면서도 이성적으로 논의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제1원인론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 규정, 제1원인론의 엄밀한 정식화, 제1원인론과 그에 대한 비판들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예를 들어 '원인', '결과', '인과', '시간', '존재', '산출' 등등...)의 정확한 규명 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이걸 다 다루는 건 불가능하고...
사실 옛날 옛적 종교인들의 뻘소리라는 편견과는 달리 제1원인론이 참인지 거짓인지의 여부는 위에서 보듯 아직까지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특히 제1원인이라는 것이 과연 논의가능한 성질의 것인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다만 주의할 점이 있는데, (제1원인이 존재하는가 아닌가를 다루는 의미로서의)제1원인론은 이론 그 자체만으로는 특정 종교의 초월자가 존재한다는 논리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의 경우 그 문화적 배경으로 인하여 제1원인을 하느님이라고 명명하고, 별도의 논리를 통하여 제1원인의 선함이나 인격성 등을 보충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물론 제1원인을 특정 종교의 초월자라고 먼저 규정하는게 견강부회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결국 '제1원인을 특정 종교의 초월자라고 칭하고, 제1원인의 선성을 드러내는 것'과[8] '제1원인의 선성을 드러내고, 제1원인을 특정 종교의 초월자라고 칭하는 것'은 같은 이야기이다.[9] 즉 스콜라 신학자들 역시도 '제1원인은 존재한다'와 '제1원인은 선하다'를 따로 다루었으며, 앞의 명제에서 무턱대고 '그러므로 선하신 하느님은 존재한다'는 결론을 도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앞의 명제는 분명히 유효한 철학적 떡밥이며, 종교인 vs 비종교인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해석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다른 철학 명제에 비유하자면, '옳음은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이다'는 명제가 종교인의 취향에 맞을지언정 철학적으로 의미있는 떡밥인 것과 비슷하다.
흔히 대중적으로는 제1원인론에 대해서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로 받아들이고 "그럼 거기서 제1원인의 원인은 무엇인가?", "왜 그 '모든 것' 에서 제1원인은 예외가 되는가?" 같은 식으로 반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해가 퍼져 있다. 그러나 종교철학자 에드워드 페서(E.Feser)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러한 대중적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제1원인론은 "존재하는 것에는 원인이 있다" 를 말할 뿐,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링크를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