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

 




'''본명'''
'''데이비드 흄 (David Hume)'''
'''출생'''
1711년 4월 26일, 대영제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사망'''
1776년 8월 25일 (65세)
'''학력'''
에든버러 대학교 (철학, 문학, 역사학, 라틴어학, 그리스어학) (1721-1727년)
'''직업'''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1. 개요
2. 생애
3. 저작
4. 흄의 철학
4.1.1. 경험주의와 복사 원리
4.1.2. '귀납의 문제'
4.1.3. 인과 회의주의
4.1.4. 흄의 공리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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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e a philosopher, but amid all your philosphy be still a man.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그대의 모든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어라.'''

Generally speaking, the errors of religion are dangerous; those in philosophy only ridiculous.

'''일반적으로 종교의 오류는 위험하지만, 철학의 오류는 웃음거리일 뿐이다.'''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1] 역사학자.

2. 생애


서양 철학사에서 보기 드문 조숙한 천재인데 아래에 소개할 그의 주요 주장들을 처음 생각해냈을 때 그의 나이가 18세였고 첫 작품인 『인성론』을 출판했을 때가 28세였다.[2] 역작 중의 역작인 이 책을 써내고 흄은 커다란 부와 명성을 얻을 줄 알았으나 그런 것 없었다. 결국 흄은 철학자로 명성을 얻지 못하고 대중들을 위한 역사책을 써내며 부와 명예를 손에 얻게 되었다.[3]

3. 저작


수많은 저작을 남기는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흄은 친절하게도 철학에 관련된 저작들은 한 손으로 집을 수 있을 정도밖에는 남기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이 언급되는 철학서는 다음 세 책이다:
  • 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 1738년 출판. 「지성에 대하여」, 「정념에 대하여」, 「도덕에 대하여」 세 권으로 이루어져있다. 흄 철학의 거의 전모를 담고 있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심각하게 인기가 없어서 흄이 스스로의 문체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 인간 지성에 대한 탐구(Enquiry concerning the Human Understanding)』: 『인간오성탐구』라고도 불린다. 『인성론』의 참패를 맛본 뒤 인식론을 다루는 『인성론』 1권의 내용을 좀 더 정리해서 읽기 쉽게 쓴 책으로, 『인성론』의 대중용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성론』보다는 나았지만 그럼에도 『탐구』 또한 당대에 썩 잘 나가진 않았다(...) 칸트가 이 책을 두고 자신을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한 책'이라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 도덕 원리에 대한 탐구(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 윤리학을 다루는 『인성론』 3권의 내용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전집을 편찬하면 20권이 넘어가는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철학과 학부생도 주요 저작을 다 읽을 수 있는 친절한 철학자이다. 이는 그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글쓰기를 선호하였고, 주로 역사서 저술[4]에 힘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흄은 이 세 권의 책만으로 이후 서양 철학사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는 대철학자가 되었다.

4. 흄의 철학



이러한 원리들에 만약 설득되었다면, 우린 도서관에 갔을 때 무슨 난장판을 쳐야만 할까? 예를 들어 신학이든 강단 형이상학이든 책을 아무거나 한 권 쥐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묻자: "그 책에 양이나 수를 따지는 추상적 추론이 담겼는가?" 아니오. "그 책에 사실이나 존재 문제를 따지는 실험적 추론이 담겼는가?" 아니오. 그렇다면 불구덩이에 던져버려라. 그 책엔 궤변과 환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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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지성에 대한 탐구』 의 마지막 문장

칸트와 더불어 수많은 근대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21세기 현대까지 끊임없이 인용되는 철학자다. 철학사적으로는 로크버클리를 이어 소위 '영국 경험론' 전통의 정점에 해당한다고 여겨지고는 한다. 이러한 특징은 , 실체 같은 형이상학을 배격한 점에서도 잘 드러나며, 이러한 정신은 바로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에 직접적으로 이어진다.
20세기 철학에서는 논리 실증주의가 흄의 후신을 자처한 대표적인 사조 중 하나였으며, 윤리학에서도 메타 윤리와 규범 윤리를 막론하고 큰 사상적 전기를 마련했다. 따라서 철학과 수업에서 대부분 항상 어느 정도는 공부하며, 설령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없이 철학을 진행할 수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셈.

4.1. 인식론



4.1.1. 경험주의와 복사 원리


흄은 로크버클리로부터 물려받은 경험주의 원리를 충실히 따른다: 모든 '사실 문제(matter of fact)'에 대한 지식은 오로지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 즉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면 그건 참된 앎이 아니다[5]. 이를 잘 보이기 위해 흄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지각을 다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 인상(impression):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원초적 지각. 밖으로부터('감각') 혹은 안으로부터('반성') 생겨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컴퓨터 혹은 모바일 기기의 화면의 모습은 인상이다.
  • 관념(idea[6]): 인상이 사라지고 난 후에 회상 또는 상상을 통해 생성한 지각. 예를 들어 당신이 눈을 감고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스크린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게 관념이다.
흄의 설명에 따르면 인상과 관념의 구분은 생생함의 차이에서 비롯될 뿐이다. 즉 관념은 인상으로부터 유래한 복사물(copy)이라는 것이 이른바 흄의 "복사 원리(copy thesis)"다. 따라서 우리의 지식을 이루는 관념들은 모두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인상들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흄은 묻는다: 합리론 옹호자들 혹은 형이상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늘상 "실체"니 "힘"이니 "자아"니 하는 것들을 말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런 말에 상응하는 어떤 관념이 있는 것인마냥 이야기한다. 그런데 복사 원리에 따르면 그런 관념 또한 우리가 경험한 어떤 인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어야만 한다. 근데 그 인상이 대체 무엇인가? 예를 들어 "사과"라는 말에 해당하는 관념의 뿌리를 곰곰히 따지다보면 사과를 먹다 본 빨강색, 과육의 질감, 맛 같은 것 등에 관한 인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실체"는? "자아"는?
곰곰히 따져보면 "실체"니, "자아"니 하는 형이상학적 말에 대응하는 인상은 도저히 찾을 수 없다. 즉 그에 해당하는 관념도 없다. 그렇다면 그런 형이상학적 어휘들은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관념들로 구성되었다고 여겨지는 형이상학적 지식 같은 것 또한 없다.

4.1.2. '귀납의 문제'


수학이나 논리학이 아닌 '사실 문제'를 따지기 위해선 연역논증이 아닌 귀납논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흄은 귀납논증이 결국 순환논법에 의존한다는 강력한 논변을 제시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흄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흔히 현대에 "귀납의 문제"라고 불린다. 이는 흄의 철학을 넘어 인식론과학철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변 중 하나로 기록된다. 대표적으로 칼 포퍼의 반증주의 과학철학은 바로 이 흄의 귀납 문제에 의존한다.

4.1.3. 인과 회의주의


귀납논증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사실 문제'를 밝혀내는 데 인과적 지식이 필요하며, 연역논증으로는 인과적 지식을 얻을 수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문제'를 따지는 대표적인 학문은 자연과학이며, 이는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의 설명을 제시한다.

사례: "큐대로 당구공을 쳐서 다른 당구공을 맞힐 수 있었던 것은 적절한 각도와 힘으로 타격했기 때문이다"

* 원인: 큐대로 당구공을 적절한 각도와 힘으로 타격했다.

* 결과: 당구공이 굴러가서 다른 당구공을 맞혔다.

상식적으로 원인과 결과는 '''자연법칙'''에 의해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여겨진다. 즉 큐대로 당구공을 적절한 각도와 힘으로 타격했다면, (다른 외부 조건이 고정되는 한) '''반드시''' 당구공이 굴러가서 다른 당구공을 맞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흄은 경험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이런 전통적 혹은 상식적인 생각이 틀렸다는 논변을 제시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이렇듯 흄은 인과가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건으로부터 인과적 법칙을 추론해 내는 현상 자체는 우리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효용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과학 자체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토대가 된다.

4.1.4. 흄의 공리


인식론과 관련하여 흄이 과학적 회의주의에 기여한 부분. 아래는 원문을 인용한다.

증언 자체가 기적에 해당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리고 증언이 거짓일 가능성이 그 증언이 입증하고자 하는 사실보다 더 기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어떤 증언도 기적을 입증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누가 와서 자기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보았다고 내게 말한다면, 나는 즉시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있을지 곰곰히 생각할 것이다. 곧, 이 사람이 나를 속이려거나 다른 사람에게 속은 것은 아닌지, 또는 그 사람이 말한 사실이 정말로 일어났던 것인지를 따져 볼 것이다. 나는 하나의 기적을 다른 기적과 견주어 보다가 기적의 성격이 더 큰 것을 거부할 것이다. 만일 그 사람의 증언이 거짓일 가능성이 그 사람이 말한 사건보다 더 기적적이라면 그럴 경우에만 그 사람은 나의 믿음이나 의견이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4.2. 윤리학


신기하게도 흄은 윤리학에서는 이러한 회의주의를 견지하지 않는다. 그는 우선 책임의 문제에서 언어의 의미를 통한 양립 가능론을 견지한다. 그가 보기에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 혹은 책임의 문제는 언어에 속아넘어간 문제인데,(여기에서 우리는 칸트와는 달리 그가 현대 언어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할 때,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곤 하는 의미와는 달리 '결정'의 반대는 '우연'이며,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된다. 그러므로 이 두 개념은 충돌하지 않는다.(인성론 2권)
그리고 흄이 분석하기에, 우리의 동기는 오직 감정이다.(인성론 3권) 이는 마음에 대한 흄의 입장에 기인한다. 그는 이성이라는 것을 순수한 계산 능력으로 보며, 감정이야말로 모든 행위의 근거라고 보았다. 이를테면, 내가 눈 앞에 있는 나무에 달려 있는 사과를 보고 있다고 치자. 감정은 나에게 저 사과가 먹고 싶다는 목표를 준다. 그리고 이성은, 그 사과를 내가 먹어도 괜찮은지(남의 사유재산이 아닌지), 혹은 그 사과를 먹기 위해서 내가 어떠한 방법을 취해야 하는지를 계산해 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분되는 이성 - 감정의 이분법을 받아들인다면, 감정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이를테면 이성) 도덕적 행위의 동기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며, 이 이분법은 우리의 직관에 의해서 타당해 보인다는 것이 흄의 입장이다.[7] 그러므로 도덕적 행위 역시 오직 우리의 도덕적 감정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도덕적인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감정을 승인하고, 비도덕적이고 급박하며 이기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훈련을 쌓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는 수 많은 감정 중에서 무엇이 도덕 감정인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흄은 여기에 대해서 직관에 호소한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포도주를 마시면서 듣기 좋다고 하는 사람이 없고, 음악을 들으면서 참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 없듯', 우리는 우리가 가지는 감정에 대해서 무엇이 도덕적이인지 아닌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 흄의 입장이다. 물론 이는 때로 왜곡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는 다시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 충분히 교정 가능하다는 것이 흄의 입장이다. 이는 기본적인 도덕감의 기반은 우리 마음 속에 놓여 있고, 그것이 어떻게 구체화될지는 경험을 통해서 확정된다는 입장으로서, 경험론이 일관되게 견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은 교육과 세뇌(언어적 교화라고 표현된다...)를 통해서 적절하게 교정하면 되는 것이다. 써놓고 나니 철학자가 했던 말 치고는 너무 유치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처럼 어떠한 형이상학적, 종교적인 입장도 전제하지 않고 오로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만을 가지고 철학을 전개한 인물은 적어도 그 시대에까진 흔하지 않았다. 다만 본인도 일반인의 상식과 직관을 중시했기에 자기 책이 잘 팔리지 않을 때 절망했다고 한다.
흄과 칸트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이 이 윤리학에서의 마음의 투명성에 대한 논의이다(형이상학에서는 둘 모두 회의주의자로 분류되고, 비교적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절대로 완벽하게 알 수 없고, 당연히 자신의 동기가 감정인지 이성인지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확실하게 추론 가능한 이성적인 이상향에 대해서만 논의해야 한다는 게 칸트의 입장. 보다 자세한 논의는 칸트 참조.
또한 흄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 첨언하자면, 그는 인과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회의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윤리에 있어서는 나의 의도가 나의 행위의 원인이라는 점을 오히려 긍정한다. 이러한 양면적인 태도가 어떻게 일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는 전공자에게 물어 보시라.

5. 기타


  • 흄은 극단적인 인종 차별주의자이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저서에서도 언급하듯 '백인들 외엔 문명화된 인종이 없다'라는 표현으로 대표된다. 소위 말하는 유럽이 동양의 저변을 뛰어넘은 게 18세기라고 가정해 봤을 때, 그의 시야나 배경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그러나 모든 것을 자신의 경험과 감각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는 본인의 주의 주장을 생각해 보면 이조차도 그럴듯한 구석은 있다.
  • 흄의 고향인 에든버러에 가면 흄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다. 1995년 공개. 발가락이 이상하리만치 튀어나와 있는 게 특징인데, 관광객들 이 하도 만져대서 닳아버렸다.
  • 아이러니하게 영국 최초의 여성 조각가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앤 시모어 데이머'가 그 주인공. 흄이 어느 날 데이머와 길을 가다가 조각상을 옮기는 이탈리아 소년을 만났는데 소년이 옮기던 조각상에 감탄해 시간을 지체했다. 데이머가 이걸 귀찮게 여기자 흄은 무심코 "넌 죽었다 깨도 저런 걸 못 만들걸?"이란 뉘앙스로 말해버렸고 자존심이 강했던 데이머는 노발대발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명문가이자 지체 높은 인물이었던 부모님을 졸라 조각가와 해부학자, 외과의 등에게 수업을 받아 영국 최초의 여성 조각가가 되었다. 데이머는 남성 위주의 시대 속에서도 명조각가로 명성을 날렸는데 이에 대한 흄의 반응은 알려져 있지 않다.
  • 아담 스미스와의 우정을 다룬 "무신론자와 교수(The Infidel and the Professor)"가 출판되었다. 관심 있는 사람은 구해볼 것.
  • 장 자크 루소와의 치정(?)을 다룬 "루소의 개(Rousseau's Dog: Two Great Thinkers at War in the Age of Enlightenment)"가 출판되었다가 절판되었다. 관심 있는 사람은 구해볼 것.
[1]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화폐수량설의 원조.[2] 이 부분이 칸트와 대비되는 부분인데 칸트가 그의 역작 『순수이성비판』을 출판했을 때는 이미 환갑에 가까운 나이였다. 하지만 칸트도 대단한 것이 그는 흄의 형이상학 비판을 접하고 충격을 받아, 자기 나름대로 흄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10여 년이 걸린 끝에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았다.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믿음들을 모조리 백지화하고 아예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낸 것이다. 흔히 서양철학사에서 천재의 전형으로 흄을 들고 대기만성의 전형으로 칸트를 드는 것도 이 때문.[3] 와타나베 쇼이치(일본의 평론가)의 《지적생활의 발견》(원제: 知的生活の方法)을 보면, 흄이 어떻게 해서 작가로서 부를 얻게 되었는지가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4] 흄이 처음으로 이름을 날린 건 그가 쓴 철학저서들이 아닌 역사저술이나 화폐론 덕분이었다. 흄의 담백하면서도 깔끔하고 품위 있는 문장력은 대중에게 사랑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참고로 영국의 역사를 썼지만 그의 저서에는 잔 다르크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온다.[5]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관념 간의 관계'를 다루는 수학논리학은 여기서 제외된다.[6] '이데아'가 아니고 '아이디어'이다.[7] 이는 마음에 대해서 우리가 최소한의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전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