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자모산성 전투
- 여몽전쟁 1차침입 때 평안남도 순천시 자산에서 벌어진 전투를 찾는다면 제1차 자모산성 전투 항목으로
- 병자호란 당시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에서 벌어진 전투를 찾는다면 자모산성 전투 항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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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록
○병신일. (몽골군이)'''자주(慈州)''', 삭주(朔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등지에 진을 둘러쳤다.
○계유일. 몽고 기병 20여기가 '''자주(慈州) 동쪽 들판에 침입'''해 벼를 베던 농민 20여명을 사로잡아 전부 죽였다.
○정유일. '''몽골군이 자주(慈州)를 함락시켰다. 부사(副使) 최경후(崔景侯), 판관(判官) 김지저(金之佇), 은주 부사(殷州副使) 김경희(金景禧) 등이 모두 살해당했다.'''
○가을 7월, '''몽골병이 자주(慈州)를 함락하였고, 부사(副使) 최경후(崔景侯), 판관(判官) 김지저(金之佇)와 은주 부사(殷州副使) 김경희(金景禧) 등이 모두 피살'''되었다.
-《동국통감》 권32 고려기
○8월, '''몽골이 자주(慈州)를 함락시키고,''' 진군하여 남경(南京)에 이르렀다.
2. 설명
몽골은 1235년, 남송을 공격하던 차에 고려침공을 개시한다. 탕우타이(唐兀台)가 이끄는 몽골군은 6월 경인일에 압록강을 건너 영삭진(寧朔鎭) → 가주(嘉州)[2] → 운암역(雲岩驛)[3] → 박주(博州)[4] → 자주[5] 순으로 움직였다.
이에 자주부사 최경후, 판관 김지저, 은주부사 김경희 등이 병력을 자주산성으로 집결시켜 몽고군을 상대로 1달 동안 분전하였으나, 모두 살해당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패배한 것으로 추측된다.
3. 기타
6년 전 벌인 전투와 판이한 결과를 낳았는데 당시에는 몽골의 주력군을 상대한 게 아니거니와, 전투 말미에 고려가 회안공(淮安公) 왕정을 보내 강화조약을 맺었기에 몽골군이 전투를 중단한 상황이였다. 반면, 제2차 자모산성 전투는 몽골의 주력군과 맞서 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