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자모산성 전투
1231년 11월 ~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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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선역 전투에서 승리를 차지한 후, 기세 좋게 안북성까지 몽골군을 몰아냈으나, 안북성 전투에서 병력 꼴아박기를 시전, 결국 고려 주력군이 궤멸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몽고군은 병력을 재정비해 개경을 향해 남진을 재개했고, 살리타이는 본대의 병력 중 3,500명을 차출해 자주(慈州)로 향하게 했다. 자주는 귀주 - 태주 - 개주 - 순주 - 개성을 잇는 주요 요충지였기에 이곳을 점령할 필요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2. 자모성을 사수하라
자주에서 서쪽 25리 근방에 위치한 자모산성[1] 에 자주부사(慈州副使) 최춘명(崔椿命)[2] 이 인근 군민들을 모두 모아서 몽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1231년 11월, 몽고의 사신이 항복을 권유하자 최춘명은 이를 거부했고 몽고군은 이에 1개월간 파상 공세를 펼치게 되었다.
최춘명을 중심으로 고려 백성들이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몽고군이 쉽게 점령하지 못하고 있을무렵, 몽고의 살리타이는 고려 정부와의 강화 교섭이 진행되자 자모산성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키고 고려 조정에 자모성이 알아서 문을 열고 나오도록 압박을 가했다.
고려는 12월 중순에에 내시낭중(內侍郞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했지만, 최춘명은 성문을 닫고 응하지 않았다. 이에 송국첨은 욕을 한바가지 붓고 돌아갔다.
3. 항복 X까
살리타이와 회안공(淮安公) 왕정(王侹)이 강화 협상을 진행하던 중에 살리타이가 왕정에게 "자주가 항복 안 하고 뻐기고 있으니 사람을 보내서 항복시키시죠."라고 하자, 왕정은 대집성과 몽골 관리를 자모성으로 보낸다. 이때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고려사》 열전 - 최춘명 전에 실려 있다.
: "조정과 삼군이 항복했으니 얼른 항복하게. (國朝及三軍已降 宜速出降)"최춘명 : "조정의 명령이 없는데 뭘 믿고 항복하오? (朝旨未到 何信而降)"
대집성 : "회안공이 이미 항복했고 삼군도 항복했는데 왜 못 믿는가? (淮安公已來請降 故三軍亦降 此非信耶)"[4]
최춘명 : "성 안의 사람들은 회안공에 대해 모르오. (城中人不知有淮安公)"
보다 못한 몽골 관리가 "차라리 들어가서 얘기하지?"라며 진입을 시도하자 최춘명과 그 부하들이 화살을 쏘아 진입을 저지한다. 이를 4번 ~ 5번을 시도해도 끝내 항복하지 않자 대집성은 화가 잔뜩 난 채 돌아갔고, 살리타이는 대집성에게 반드시 최춘명을 죽여버리라고 명했다.
고종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신하들과 논의하는데, 모든 신하들이 "사형은 너무 과하니 형벌을 깎으시죠."라고 건의한다. 그러나 대집성이 당시 고려를 휘잡고 있던 최이에게
대집성은 최이(崔怡)에게 가서, "최춘명이 항복에 불복해 몽골이 화를 내고 가 버렸으니 그 재앙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죽여 몽골에 보여야 하는데도 지금 임금과 재상들이 모두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 혼자서라도 그를 죽이기를 바랍니다."라 하니, 최이가 허락하였다. (集成詣 崔怡第曰 "椿命拒命不降 蒙古怒去 禍將不小。 宜殺之 以示蒙古 今上及宰相 皆猶豫未決。請公獨斷殺之。" 怡諾。)
이렇게 모함을 했고 최이는 이를 허락했다. 신하들은 할 수 없이 최이의 말에 수긍했지만, 유승단(兪升旦)은 결코 최춘명을 죽여선 안 된다며 반대를 했다. 하지만 최이는 이를 무시하고 내시(內侍) 이백전(李白全)을 서경으로 보내 최춘명을 처형하게 한다. 최춘명은 성문을 열고 나와 어명을 받고 항복했으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얼굴빛과 행실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를 본 몽골 관리[5] 가 "이름이 뭐요?"이라고 묻자 이백전이 "자주부사입니다."라고 했다.
몽골 관리는 "이 자가 우리 명령을 어겼으나 너희를 보아 충신이니 죽이지 않겠다. 그대들이 우리와 화친을 약속했으니 성의 충신들을 죽이는 게 옳겠는가?[6] "라며 오히려 최춘명을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 이후 전공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추밀원 부사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1250년에 사망했고 관직은 위위경(衛尉卿)까지 올랐다.
[1] 둘레는 12,733척(약 4.5km), 높이는 13척(약 4.6m)였으며 성안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서 우물이 99개나 되었다는 설화도 존재할 정도로 수량이 매우 풍부한 산성이었다고 한다. 훗날 임꺽정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활동하기도 했다.[2] 해동국사 최충의 8세손이다. ? ~ 1250년.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부친은 신종 때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등을 역임한 최혁(崔奕)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의 성격은 성품이 관대하고 온화하며 절조가 있었다고 한다.[3] 안북성 전투에서 가장 크게 삽질한 놈 맞다.[4] 사실 안북성 전투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고려 조정에서 회안공을 보내 강화를 시도한 것인데, 대집성이 자신의 실수를 숨기려고 앞뒤를 바꿔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게《고려사》에 그대로 실려있다. 대집성의 거짓말을 통해 "이놈은 답이 없는 놈"임을 사관들이 전하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5] 다루기치[6] 此人於我雖逆命 在爾爲忠臣 我且不殺。爾旣與我約和矣 殺全城忠臣 可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