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통감
東國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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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조 9년(1463)에 서거정(徐居正)[1] 등이 왕의 명을 받아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16년(1485)에 완성한 관찬 역사서. 단군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했으며 총 56권 28책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목인 동국통감의 의미는 '조선(東國) 통치에 배움이 되고 도움이 되는 역사(通鑑)'[2] 라는 뜻이다.
1484년에 편찬된 동국통감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1485년에 편찬된 동국통감은 네이버에서 국역된 버전으로 볼수 있다.링크
2. 편찬 역사
조선 세조는 삼국사기와 동국사략을 공부하던 중,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서들이 몇 권 남지 않은 데다가 남은 책들도 서술이 탈락된 부분이 많고 난잡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아직 우리나라엔 편년체 고대 통사가 없음을 절감하고는 세조 4년(1458) 신하들에게 우리나라도 상고 이래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중국의 자치통감에 준하는 사서를 편찬함이 어떻겠느냐고 말을 냈다.
이후 세조 9년(1463) 9월 5일 서현정(序賢亭)에서 다시 신하들에게 빈약한 고대 역사기록을 한탄하며 편년체 역사서가 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결국 양성지를 중심으로 동국통감청(東國通鑑廳)을 만들어 집필을 시작했지만 세조 생전에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예종 대에도 완성되지 못하다가 성종 대에야 서거정이 완성했다.
3. 내용의 특징
내용은 크게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外紀), 삼국시대에서부터 신라 문무왕 때까지를 삼국기(三國紀), 문무왕부터 고려의 건국 까지를 신라기(新羅紀), 이후 고려말까지를 고려기(高麗紀)로 나누었다.
외기는 단군이 단군조선을 건국했다고 전하는 기원전 2333년, 즉 단군기원이 최초로 제시된 역사서이다.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외기로 처리해버린 것은 15세기 당대에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이전 왕조들이 남긴 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삼국시대 이전의 내용은 체계적인 왕조사 서술이 불가능하다는 객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다.
삼국기의 경우 기존 역사서들과 얼마전 만들어진 권근의 동국사략 등과는 달리, 신라 중심 서술을 뒤집고 처음으로 삼국이 대등하다는 균적론(均敵論)을 내세웠다. 연대 표기 또한 동국사략과는 달리 당대에 쓰이던 대로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3] 을 사용하여 그 당시 썼던 것들을 사실 그대로 온전히 보전했다. 대신 신라기를 따로 독립시켜 신라 통일의 중요성과 그 의미는 확실히 부각시켰고 발해는 한국사로 포함하지 않았다.[4]
참고로 한반도 국가들이 가진 전쟁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와 논평을 하지 않았다. 기성 역사서대로 정치/외교사가 주를 이루고 전쟁 이야기도 상벌의 기준이나 내부의 문제와 같은 정세판단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로 하지 전쟁사의 기록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시성 전투, 황산벌 전투, 기벌포 전투의 승리나 김경손의 결사대의 활약등이 등장하지 않는다. 본시 역사서의 편찬도 유학자들이 말하듯 문무의 도는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듯 전쟁사가 구체적으로 적히지 않은 것은 아쉽다.[5] 대체적으로 동국통감 이전에 동국병감이 나왔으나 전쟁사를 다룬 동국병감 또한 서문이나 구체적인 기록이 동국통감은 아니더라도 미비한 실정이다. 결과적으로 동국통감 편찬 당시 문관 출신들과 혹은 전쟁에서 공을 세운 문관 출신들과 무관들의 참여를 제한해, 정치사 못지 않게 전쟁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꽤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대체로 동사강목에선 전쟁사에 대한 기록이 추가가 되었지만 자료 미비로 인해 보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후 현종 13년(1672)에 홍여하(洪汝河)가 동국통감제강을 편찬했다. 동국통감제강은 기존 동국통감을 주자의 존화양이(尊華壤夷)적 역사서술 방법으로 새로 구성한 것으로 1644년 새롭게 중원의 지배자가 된 청나라를 오랑캐로 격하하고 몰락한 중국 대신 조선의 문화적 우월성과 국가 권위를 드높이려 한 것이다. 명나라에서 끝난 중국 제왕(帝王)의 정통을 신라 → 조선으로 연결하고 기타 다른 국가들을 신하나 찬탈자 형식으로 서술했다.
3.1. 1484년본과 1485년본의 차이
1484년 서거정과 훈구파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최초의 동국통감은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을 깔지 않았고 사실을 온전히 보전하자는 목적으로 찬자 자신들의 사론을 적어넣지 않았다. 이후 1485년에 신진사림이 중심이 되어 개찬한 신찬동국통감은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서술이 주를 이루며 사론 약 400여 편을 추가했다. 초창기 동국통감과 신찬동국통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 초창기 동국통감은 단군기원을 제시하고 단군조선을 띄웠으며 삼국의 경우 자치통감의 예를 따라 무통(無統) 즉 정통이라 쳐줄 왕조가 없다고 주장하며 균적론(均敵論)을 폈다. 신찬동국통감에서는 이전의 내용들을 크게 부정하진 않되 좀 더 기자조선 → 마한 → 신라를 주류로 정립하였다.
- 초창기 동국통감은 고려 태조 왕건의 숭불정책에 대해 크게 비난하는 내용이 없었으나 신찬동국통감에서는 고려 태조의 팔관회 실시, 신라의 삼보(三寶), 훈요십조 등을 모두 비난한다.
- 초창기 동국통감은 사론이 아예 없었지만, 신찬동국통감에서는 중국에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찬자들이 사론으로 칭송하는 반면, 중국에 대항하거나 사대를 소홀히 한 행적은 사론으로 철저히 비판한다. 다만 한 가지 중국 사대와 관련해 반론을 하자면 당태종의 한계를 당현종, 송태조와 비교를 하며 중국 역사에 대해 날선 비판을 했으며 또한 오대십국의 혼란상황과 또한 정관정요만 내세운 근시안적인 것도 비판을 한다. 또한 수양제를 비롯해 많은 암군이나, 여불위를 비롯해 시황제도 비판을 가했다. 한 마디로 중국이 몰락하거나 한계를 만들어준 왕과 혼란기는 다 비판한 것으로, 가사도를 간신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태종은 칭송과 비판이 공존하며 균전의 회복과 무과를 도입시킨 측천무후를 무조라고 낮추어 칭하며 중국에 대한 사대의 관점도 어느 정도 없앴기에 동북공정의 반박 사료로도 쓰일 수가 있다. 특히 당태종에 대해 공과 사를 따짐은 자칫 명나라에게 빌미를 주기 때문에 쉬운 비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선 동국통감을 두고 명나라 사람들이 웃을 거라며 평가절하하였다. 사실 단순히 웃는 것을 넘어서 정관정요 문제로 명과 역사논쟁이 붙어 자칫하면 외교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었다. 동국통감에 논평을 주로 쓴 최부[6] 는 고구려빠였으며, 당태종을 거품이라고 평하고 명나라의 환관도 비판하였다.
- 논평에서 앞뒤의 말이 서로 안 맞는 부분이 많은데, 이는 훈구와 사림이 동시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고려 현종이 토지를 불교 사찰에 주는 것을 문무왕과 비교해 비판하면서도 성군으로 평가한다. 원래 역사기록이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성향이 있다. 충분히 알아보고 평가하기에는 역사기록이 별로 없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3.2. 삼국, 고려시대의 재평가
- 권근이 계백을 두고 아무리 나라 위한 일이라지만 가족을 모두 죽여 대를 끊음은 옳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을 두고, 동국통감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에 대한 비판으로 옳지 않다.'고 깠다.
- 신찬동국통감은 신라적통론을 내세우며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재평가하며 후기 신라를 띄워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신라의 몰락을 진성여왕을 시작으로 한 900년대를 몰락의 기점으로 잡았다.
- 경순왕의 항복을 유선과 손호와 동급으로 보며 격하하고 마의태자를 띄운 첫 사례이다. 이는 너무 논란만 가중시킨 비판으로 가뜩이나 조선왕조에서도 경순왕의 후손들이 과거를 통과해 관료생활을 하고, 그들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후손들은 대체로 삼국사기를 선호해서 문무왕, 신문왕기의 신라를 극찬했다. 800년대 사찰이 널부러지고 신라의 귀족 세습과 녹읍 체제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에, 신라보다 고려, 더 나아가 조선이 낫다고 보기에 경순왕의 항복은 고려는 물론 더 나아가 조선을 위한 거라고 생각하기에 괜한 논란을 일으켰다. 더욱이 우왕, 창왕, 공양왕은 경순왕과 태도가 매우 달랐기 때문에 이후에는 경순왕을 그들보다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어찌보면 고려 태조의 정당성을 내리기 위한 시도라는 설이 있다.
- 신무왕을 띄우고 장보고를 띄우며, 염장을 간신배로 묘사한다. 장보고의 죽음에 문성왕은 실책을 범하게 되고 반역의 의심을 받아 죽었다고 장보고를 더 높이 평가했다. 삼국사절요와 더불어 장보고가 신라의 충신으로 기록된 사서이다. 삼국사기에선 장보고의 반역에 대한 논평은 없고, 대신 그의 동반자 신무왕이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당연하지만 동국사략과 마찬가지로 신라적통론을 밀며 신라의 후반부를 띄워주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 고려에 대해서도 꽤나 깐깐한 평가를 내린다.
- 윤언이의 평가가 안좋게 나오는데 유학자 주제에 불교와 도교 등을 믿었다는 이유이다. 윤관의 평가도 생각만큼 크게 높지 않다. 당시 윤필상도 건주여진을 토벌하고 경상도 지역 백성들에게 재산을 주는 등 같은 파평 윤씨인 윤언이와 비슷한 길을 가고 있었다. 사실 이는 윤필상의 견제를 노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이러니하게도 윤언이의 후손이 문정왕후, 윤원형이다.
- 고려 성종을 고려조 최고 성군으로 치켜세우나, 정작 장원제도로 공음을 강화하고 공신후손 우대로 음서의 빌미가 되어 이걸 뜯어고친 게 개국공신들이다. 반면 고려 광종을 평가절하한다. 이는 조선왕조의 공신우대와 신분제 유지와 같은 현상유지론과 밀접하지만, 어차피 고려 성종 시절 나온 여러 제도들은 조선왕조에 혁파되었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의 영향으로 향소부곡민 폐지, 장원제 폐지와 과전, 그리고 무과의 도입과 정착까지 그로 인한 음서의 축소까지도 있다. 그래도 고려성종도 자기 집안 단속이나 잘할 것이지 남한테 뭐라하냐며 깐다. 그리고 고려 성종의 치세는 성종으로 끝났다고 한다.
- 만부교 사건을 처음으로 비판한 사서다.[7] 서희의 담판외교를 근거로 만부교 사건은 방도를 잃었다곤 하는 시각으로 썼다. 몽골과 달리 거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으로, 송을 옹호해도 오대십국체제를 부정한 셈이다.
- 공양왕이 아니라 공민왕 때 고려가 사실상 끝났다고 평가한다.[8] 그런데 조선초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이유는 진짜로 공민왕 대에 고려가 망해서라기 보다는, 신우 신창의 '우창 비왕설' 문제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초기 사서에서 우왕과 창왕은 모두 신돈의 자식으로 취급되었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둘을 반역자 취급을 하고 있다. 이는 조선건국의 정당성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공양왕은 명목상으로 이성계에서 선위를 한 인물이기 때문에 비판하기가 뭐하고, 우왕과 창왕은 고려왕이 아니라 반역자이니 고려의 실질적 마지막 왕은 공민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공민왕이 워낙 까인 덕택에 충정왕을 재평가했다. 이유는 공민왕이 조카 충정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반역자로 만들어 위화도 회군과 관련해 조선 태조의 문제를 덮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 계사의 난을 일으킨 김보당을 고려사 열전에 넣지 않았다고 비판했다.[9]
4. 기타
- 1476년에 동국통감의 단군조선부터 삼국 멸망까지의 내용을 따로 증보, 개수하여 삼국사절요가 10년 먼저 편찬되었다.
- 일본에서는 하야시 가호(1618∼1680)가 1667년에 신간동국통감(新刊東國通鑑)을 판목으로 만들어 일본 전역에 배포하였고 이후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사 교과서로 여겨졌다.세계일보, 연합뉴스
[1] 동인시화, 동문선, 태평한화골계전, 오행총괄, 사가집, 경국대전, 필원잡기 등을 저술한 조선 전기의 문인[2] '통감'이라는 단어는 자치통감에서 따왔다. 자치통감 편찬 당시 신종 당시 통지(通志)라 불리던 책을 보고 '통치에 도움이 되는 역사'라는 뜻으로 책의 제목을 '자치통감'이라고 바꾼 것이 유래이다.[3] 새 왕이 즉위한 바로 그 해부터 왕의 즉위기간으로 치는 방법. 유교적 예법에서는 유년칭원법이라 하여 선왕이 죽고 새 왕이 즉위한 해는 선왕의 재위기간으로 잡고, 그 다음해부터 새 왕의 즉위기간으로 계산한다.[4] 발해를 한국사로 보는 시각이 비로소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기고, 그나마 후기에도 발해가 한국사라고 보는 유득공 등과 아니라고 보는 안정복 등이 양립했다.[5] 사실 전쟁만 치르고 다닌 요나라의 역사서 요사나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의 경우엔 상대적으로 전쟁 기록이 많은 편이다. 국방부에서 역사 교육을 가르칠때 귀주 대첩의 경우 고려사와 더불어 요사의 내용을 많이 참고로 한다. 조선 후기에는 동사강목이 이 문제에 대해서 보완을 하려했으나 자료 미비로 한계가 있었다.[6] 표해록을 쓴 사람이다.[7] 고려조 이제현은 어차피 고려 태조의 일은 모를 일이고 어차피 서희 대감처럼 하지 않아도 만부교 사건 안 해도 쳐들어온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고려 말 권문세가들이 명나라 사신 채빈을 살해한 것을 언급하며 '이들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제현은 이에 대해 논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전에 죽었기 때문에(...).[8] 정도전(드라마)은 이를 통해 공민왕을 다뤘다. 단 막판 공민왕과 정도전의 만남으로 공민왕이 사람된다는 이야기는 각색이다.[9] 김보당이 고려사 열전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김보당이 무신정권에 붙었다가 이후 의종 복위에 가담해서이다. 김보당이 말과 행동을 바꾸었고 죽기 전에 실토해버린 바람에 기회주의적인 면모 때문에 열전에 넣지 않았다. 그리고 단종과 달리 의종은 폐위를 먹어도 할 말 없는 암군이었다.